교제 - 성도간의 사랑
산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혼자 있을 수 있으나 산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죽은 자이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 생명의 특징은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베드로전서 1:22)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죽은 영이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죽은 것은 모두 다 더러운 것입니다. 조그마한 병아리 한 마리만 보아도 살아 있을 때는 만져 보고 싶고, 예쁘게 보이고, 그 보드러운 털이 깨끗하게 보이나 죽어 버리면 더러워 보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구원받아서 영이 살아났을 때 비로소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영이 살았다는 것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벧전 1:22)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과연 진정한 구원을 받았는지 한 번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함께 구원받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이 교제의 원인이 됩니다. '
교제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사귐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귐이 있습니다. 친구간에는 언제나 사귐이 있는데, 이 사귐이 없으면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도 서로 사랑하면 교제를 합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함께 음식도 먹고, 자주 만남을 가집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사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빌레몬서 1 장 6절에는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
믿음의 교제를 하는 중에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이 믿음의 교제를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도달하는 믿음의 성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갓 구원받은 사람은 갓난 아기이니 장성하기까지 자라야 하는데, 자라는 것은 교제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고 했습니다. 구원받기 이전 사람은 하나님과도 교제가 없었고 사람과의 사이에도 진정한 영혼의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복음 전함을 받아들여 살았으니 교제를 하게 되어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교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9절에도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또 예수님과도 교제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과의 사이에 교제가 없이 혼자서 하나님과만 교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제는 삼각형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위에는 하나님, 아래편 한 쪽은 나, 또 한 쪽은 형제, 이렇게 말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나를 통하여 형제에게로 가고 다시 하나님께로 들어가야 교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사랑의 하나님이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나타나서 사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2절에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서로 사랑치 않으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더욱더 그의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운반해 와서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교제는 곧 성령의 교제인 것입니다.
오순절의 실례
그러므로 교회가 세워지던 날이 바로 성령이 오신 날입니다. 그 날은 오순절날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시니 거듭남과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천 명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의 말씀을 읽으면서 서로 교제를 가지는데,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음식도 나누어 먹고, 찬송도 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고 전도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며 참된 교제의 견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데는 교제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생활이 곧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교제를 가질 뿐 아니라 사랑이 나타나 가난한 자를 서로 돕습니다. 사랑이란 성도간의 교제와 또 형제의 어려움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한1서 3:16-17)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신이 가진 물질로 형제의 궁핍함을 돕는 것입니다. 교회란 바로 이렇게 사랑의 교제를 가지는 곳이며 서로 돕는 곳입니다.
믿음의 성장
믿음의 성장이 무엇입니까? 갓난 아기는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갓난 아기가 성장하면 강해지고, 힘이 세고, 잘 넘어지지 않고 또 어린 아기 때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만 받으면 그것으로 전부인줄 알고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더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혼자 멀리 떠나갑니다. 그것은 크나큰 손실이며, 믿음에 있어서는 어린아이로서 고아가 되어 버린 채 끝이 납니다.
성장에 필요한 것은 첫째, 식물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먹지 않으면 곧 죽게 됩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는 무엇을 먹습니까?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무엇이 젖입니까? 어떤 사람은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 젖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영의 양식이기는 해도 교제에 맡겨진 양식이지 개인적으로 혼자서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자세히 말씀드리려면 뜻이 너무 깊고 어려우므로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그림자는 법궤였습니다. 이 법궤는 성전 지성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이었고, 또 주님의 몸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주님의 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고, 그 말씀이신 분이 머리가 되신 교회가 주님의 몸이며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인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말씀이 열리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에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교회)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고 했습니다. 이 기름 부음에 대해서는 교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야기 할 때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만, 기름 부음이 있음으로써 교회가 세워지고, 그 기름 부음 곧 성령의 은사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에 맡겨진 말씀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자라게 하시는 양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젖은 무엇이며 어떻게 먹는 것인가?
히브리서 6장 1절에서는 젖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 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3장 1절부터 3절에도 젖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2절에도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신령한 젖이란 구원의 기본적인 진리와 아직 믿음이 굳세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부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령한 젖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육신적으로 말한 다면 젖은 어머니 가슴에서 나옵니다. 요즘의 젊은 어머니들 중에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자기 젖 대신 우유를 먹여 키우는 사람이 많은데, 그러한 아이들이 자라서 어머니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순종 할 줄도 모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모유에는 우유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양소가 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모유를 먹는 동안 오가는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품에 안겨서 입으로 한 쪽 젖을 먹으면서 또 한 손으로는 다른 쪽 젖을 만지작거리고 눈으로는 어머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때로는 빵긋 웃기도 하면서 얼굴을 익혀가는 중에 사랑이 오고가는 것이며 그러는 중에 성장을 해 가는 것입니다. 젖을 먹는 것만 아니라 사랑을 느끼면서 자라나는 것이므로 정상적인 인격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아를 생각해 봅시다. 어디에서인가 먹기는 먹어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는 중에 마음이 비뚤어지고, 굳어지고 반항심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 범죄를 일으키는 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가정 생활에서 성장하지 못한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의 어머니는 교회입니다.
신령한 젖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곧 하나님의 아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교회는 곧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에게서 신령한 젖이 나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곳이므로 어린아이에게 가장 초보적인 말씀도 공급이 되어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을 해 갈 수 있는 먹을 것도 공급됩니다. 여자라고 해서 다 젖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아이를 낳았을 때에 그 가슴에서 젖이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라고는 하지만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원받는 역사도 없는 곳에서 젖이 나오겠습니까? 구원의 역사와 참 교제의 역사가 없는 곳에서는 참된 젖이나 양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나서 즉시 구원받은 성도의 교제를 떠나기 때문에 고아가 되어 믿음이 죽어버리고 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는 겨우 가게 될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살지는 못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상도 있고 왕 노릇도 있고 많은 복을 받을 기업도 있는데, 모두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 속에서만 젖이 나옵니다.
설교를 함께 듣는 것만이 아니라, 생활을 서로 나누며 간증하며, 어떤 일에 동참하는 중에서 무엇을 점차 알아가는데 그것이 곧 교제 입니다.
교제 - 성도간의 사랑
산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혼자 있을 수 있으나 산 사람은 혼자 있으면 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죽은 자이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 생명의 특징은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베드로전서 1:22)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죽은 영이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죽은 것은 모두 다 더러운 것입니다. 조그마한 병아리 한 마리만 보아도 살아 있을 때는 만져 보고 싶고, 예쁘게 보이고, 그 보드러운 털이 깨끗하게 보이나 죽어 버리면 더러워 보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구원받아서 영이 살아났을 때 비로소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영이 살았다는 것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벧전 1:22)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구원받은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과연 진정한 구원을 받았는지 한 번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함께 구원받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이 교제의 원인이 됩니다. '
교제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사귐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귐이 있습니다. 친구간에는 언제나 사귐이 있는데, 이 사귐이 없으면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도 서로 사랑하면 교제를 합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함께 음식도 먹고, 자주 만남을 가집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사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빌레몬서 1 장 6절에는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
믿음의 교제를 하는 중에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이 믿음의 교제를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도달하는 믿음의 성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갓 구원받은 사람은 갓난 아기이니 장성하기까지 자라야 하는데, 자라는 것은 교제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고 했습니다. 구원받기 이전 사람은 하나님과도 교제가 없었고 사람과의 사이에도 진정한 영혼의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것이 복음 전함을 받아들여 살았으니 교제를 하게 되어 하나님과도, 사람과도 교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9절에도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또 예수님과도 교제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과의 사이에 교제가 없이 혼자서 하나님과만 교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제는 삼각형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위에는 하나님, 아래편 한 쪽은 나, 또 한 쪽은 형제, 이렇게 말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나를 통하여 형제에게로 가고 다시 하나님께로 들어가야 교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이 생기기 전에 사랑의 하나님이시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나타나서 사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2절에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서로 사랑치 않으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면서 더욱더 그의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운반해 와서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교제는 곧 성령의 교제인 것입니다.
오순절의 실례
그러므로 교회가 세워지던 날이 바로 성령이 오신 날입니다. 그 날은 오순절날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시니 거듭남과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천 명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역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의 말씀을 읽으면서 서로 교제를 가지는데,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음식도 나누어 먹고, 찬송도 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고 전도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는데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며 참된 교제의 견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데는 교제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생활이 곧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교제를 가질 뿐 아니라 사랑이 나타나 가난한 자를 서로 돕습니다. 사랑이란 성도간의 교제와 또 형제의 어려움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한1서 3:16-17)
목숨을 버리는 것은 자신이 가진 물질로 형제의 궁핍함을 돕는 것입니다. 교회란 바로 이렇게 사랑의 교제를 가지는 곳이며 서로 돕는 곳입니다.
믿음의 성장
믿음의 성장이 무엇입니까? 갓난 아기는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갓난 아기가 성장하면 강해지고, 힘이 세고, 잘 넘어지지 않고 또 어린 아기 때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만 받으면 그것으로 전부인줄 알고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더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혼자 멀리 떠나갑니다. 그것은 크나큰 손실이며, 믿음에 있어서는 어린아이로서 고아가 되어 버린 채 끝이 납니다.
성장에 필요한 것은 첫째, 식물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먹지 않으면 곧 죽게 됩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는 무엇을 먹습니까?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무엇이 젖입니까? 어떤 사람은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 젖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영의 양식이기는 해도 교제에 맡겨진 양식이지 개인적으로 혼자서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자세히 말씀드리려면 뜻이 너무 깊고 어려우므로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그림자는 법궤였습니다. 이 법궤는 성전 지성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육신이 성전이었고, 또 주님의 몸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주님의 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고, 그 말씀이신 분이 머리가 되신 교회가 주님의 몸이며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인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말씀이 열리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7절에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교회)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라고 했습니다. 이 기름 부음에 대해서는 교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야기 할 때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만, 기름 부음이 있음으로써 교회가 세워지고, 그 기름 부음 곧 성령의 은사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회에 맡겨진 말씀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자라게 하시는 양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젖은 무엇이며 어떻게 먹는 것인가?
히브리서 6장 1절에서는 젖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 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3장 1절부터 3절에도 젖에 대해서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2절에도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신령한 젖이란 구원의 기본적인 진리와 아직 믿음이 굳세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부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신령한 젖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육신적으로 말한 다면 젖은 어머니 가슴에서 나옵니다. 요즘의 젊은 어머니들 중에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자기 젖 대신 우유를 먹여 키우는 사람이 많은데, 그러한 아이들이 자라서 어머니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순종 할 줄도 모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모유에는 우유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양소가 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 모유를 먹는 동안 오가는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린 아기가 어머니 품에 안겨서 입으로 한 쪽 젖을 먹으면서 또 한 손으로는 다른 쪽 젖을 만지작거리고 눈으로는 어머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때로는 빵긋 웃기도 하면서 얼굴을 익혀가는 중에 사랑이 오고가는 것이며 그러는 중에 성장을 해 가는 것입니다. 젖을 먹는 것만 아니라 사랑을 느끼면서 자라나는 것이므로 정상적인 인격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아를 생각해 봅시다. 어디에서인가 먹기는 먹어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는 중에 마음이 비뚤어지고, 굳어지고 반항심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 범죄를 일으키는 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가정 생활에서 성장하지 못한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의 어머니는 교회입니다.
신령한 젖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곧 하나님의 아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교회는 곧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에게서 신령한 젖이 나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곳이므로 어린아이에게 가장 초보적인 말씀도 공급이 되어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을 해 갈 수 있는 먹을 것도 공급됩니다. 여자라고 해서 다 젖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아이를 낳았을 때에 그 가슴에서 젖이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라고는 하지만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구원받는 역사도 없는 곳에서 젖이 나오겠습니까? 구원의 역사와 참 교제의 역사가 없는 곳에서는 참된 젖이나 양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나서 즉시 구원받은 성도의 교제를 떠나기 때문에 고아가 되어 믿음이 죽어버리고 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는 겨우 가게 될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살지는 못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상도 있고 왕 노릇도 있고 많은 복을 받을 기업도 있는데, 모두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 속에서만 젖이 나옵니다.
설교를 함께 듣는 것만이 아니라, 생활을 서로 나누며 간증하며, 어떤 일에 동참하는 중에서 무엇을 점차 알아가는데 그것이 곧 교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