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대화 - 기도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이 기도 문제도 역시 처음에는 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고 했는데 이는 기도를 마칠 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해도, 그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를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하고 나서, 끝에 가서 습관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면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인 줄 착각합니다. 성경에는 그에 대한 매우 깊은 뜻이 들어 있으나, 갓 구원받은 분들은 아직 그런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략 기도 문제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5절을 봅시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여기의 회당은 예배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이러한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외식' 이란 겉 모양을 꾸민다는 뜻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그런 기도를 몇 번씩이나 합니다. 가령 누구네 집을 방문했을 때, 서 있을 때에는 기도를 안 하다가 앉으면 기도합니다. 과일이나 차를 내놓으면 또 기도하고, 다른 음식이 나오면 또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 마음이 얼마나 주님을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꼭 그런 형식을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 음식이 들어오면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을 꾸미지 않아도 속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남의 눈 앞에 보이는 데서 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자연스럽게 될 때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 됩니다.
이 기도라는 것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종교적 본능, 곧 썩은 고목나무를 보고도 무얼 빌고, 이상하게 생긴 돌이나 바위만 보아도 무엇을 빌고 싶은, 그러한 마음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유다서에 보면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과 관계 없이 기도의 형식만을 꾸미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기도
그렇다면 참다운 기도란 어떠한 것일까요?
첫째,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이지 않습니까? 성경 읽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어린애가 부모에게 요구 조건이 있으면 항상 앙앙거리고 웁니다. 그것도 일종의 기도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말을 들어야지요.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생활에 대해 제 경험을 한 가지를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기도부터 하지 말고 먼저 성경부터 읽으십시오. 성경부터 읽다가 내 마음에 감동을 주는 어떤 말씀이 있거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감동도 없이 "기도해야 된다" 라는 강박 관념에서 하니까 필요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도서 5장 1절을 봅시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자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은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라는 찬송대로 내 주 예수 계신 곳이면 내가 성경 읽는 곳, 내가 기도하는 곳 그 어디나 거기가 하나님의 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에서 발을 삼간다는 말씀은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회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5장 2절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치 기도 선수들이 기도 시합을 하는 것처럼 얼마나 기도를 잘하는지 눈 딱 감고 앉았다 하면 대통에 물솟듯이 "상천하지에 홀로 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시여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나옵니다. 대통령 앞에 가서 마음대로 막 지껄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 앞에 앉자마자 그렇게 얘기가 막 나옵니까?
성경에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밤새도록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밤새도록 얘기하자고 하면 매우 귀찮아 할 것입니다. 어떻게 밤새도록 기도합니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갓난아기는 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말을 모르니까 달라고 "앙앙", 무엇이 마려우면 "응응", 다음에는 필요한 요구조건이 있을 때마다 "엄마" 라는 소리를 자주 합니다. 한 마디만 해도 "응 왜 그래?" 하고 뭔가 엄마가 살펴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학교에 간다든지 하면 "엄마 뭐 사줘." 이렇게 간단히 말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 설명이 많습니까?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회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5)
그러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갚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상을 이미 받아 버렸으니까요. 사람들이 "저 사람은 기도를 잘한다." 고 칭찬해 버리면 이미 그 칭찬으로 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기도 잘한다든지 기도 많이 한다든지 하는 말을 들어 버리면 안 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6)
여러분, 어떤 집에는 골방이 없습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반드시 어떤 방에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조용한 때나 혹은 옆에 사람이 다 자고 있을 조용한 시간에 혼자 깨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복잡한 곳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아니면 버스 속은 항상 사람들로 복잡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그것은 나하고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러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읽고 마음에 두십시오. 아무 일 없을 때 아무 생각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 마귀가 접근합니다. 조용한 시간이 있거든 성경 말씀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생각해 보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도입니다.
묵상하는 자세
구약 성경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서에 사람이 먹지 못할 고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돼지 고기는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돼지 고기 자체를 먹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돼지가 소하고 다른 점은 먹이를 먹을 때 그냥 삼켜버린다는 점 입니다. 소는 한 번 먹은 것은 다시 밤새도록 새김질을 합니다. 소는 새김질을 하기 때문에 쇠고기는 깨끗하다 하고, 돼지는 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에 돼지 고기를 부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로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보는 사람은 새김질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조용한 시간이 있으면 딴 생각에 빠지지 말고 들은 말씀, 읽은 말씀을 묵상하면 됩니다.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은 뒤에는 시간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새김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지금은 염불하는 식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부처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을 말을 혼자 지껄이다가 가버리는 것처럼 기도한다고 하면 처음부터 따발총 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지껄인 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가버립니다. 이런 기도는 어른 앞에서 자기 말만 실컷 늘어 놓고 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른이 바라보고선 "참 희한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어른의 눈치도, 생각도 모르고 대답도 아랑곳 없이 무조건 하는 모든 기도, 이것이 바로 미신인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예요.
그렇기 때문에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기도 소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여 듣고 내 맘에 닿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아울러 구 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회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7-8)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저렇다'라고 설명을 합니다. 옛날 저희 고향에는 김 장로라는 장로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님은 기도를 굉장히 오래 했습니다. 그 장로님에게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별명이 뼈다귀 영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별명이 붙게 된 내력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영감님의 아우되시는 김 장로님이 한 번 기도를 시작하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요. 창세기를 계속 설명하고 한 번 훑어 내려가는데 하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형님이 참지 못하고 기도하는 도중에 "아이고 뼈다귀야" 하고 나가 버렸습니다. 기도 도중에 일어나서 가 버렸어요. 그런데 김 장로님이 기도를 마치고 나서 "형님이 어디 가셨느냐?"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아브라함 때 벌써 갔어요" 해서 한 바탕 웃은 일이 있는데, 이런 것이 무슨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만을 솔직 담백하게 한 두 마디만 해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왜 설교를 합니까? 사람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공중 기도는 물론 사람이 듣는 데서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신다고 하나님 앞에 설명을 합니까?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그렇게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말을 적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고 나면 기도할 말이 없어져 버립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저도 기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기도를 2시간씩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저의 개인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내 가족 문제를 기도 하고, 또 온 세계 문제까지 한 바퀴 돕니다. 한 바퀴 돌면 2시간이나 3시간이 걸립니다. 나중에 구원을 받고 보니까 전부 염불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잡히는 것이 있으면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서원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당당하게 하나님께 원하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형식을 꾸며 말을 많이 하고 하나님께 설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정당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의 참 모습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16)
여기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라고 되어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구원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피차에 무엇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교회에 오래 다니시던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는 의논들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까지는 이러한 것을 기도라고 생각해 보지 않으셨겠지요.
우리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이 이웃 아이들하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놉니다. 그 때 저희들끼리 하는 이야기 속에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말이 한 마디 부모의 귀에 들렸다고 합시다. 그 부모는 아이들이 "사 달라" 소리는 안 했어도 "무엇이 있으면 참 좋겠는데" 한 말을 기억하고 상점을 지나다가 그것이 눈에 띄면 반드시 사주실 것입니다. 저희들끼리 나눈 대화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사람도 이러한데 하나님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고 교제하는 것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우리 모임은 기도가 하나도 없는 것 같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면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항상 말씀하시느냐 하면 교제에 관하여 많이 강조해 놓고 있습니다. 빌레몬서 1장 6절에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교제라는 말도 아직은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에는 좀 어려운 말이지만 성경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 또 집회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교제입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도 교제이고 생활간증을 하는 것도 교제이고 이러한 모든 것이 교제입니다만 그보다 더 깊은 교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쉬운 교제라고 하면 지금 말씀드린 이러한 것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교제가 없으면 신앙 생활이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가운데 있는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성령을 받았는데, 그 성령은 역사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구원 받은 사람간에 교제를 할 때에 성령이 활동을 합니다. 가령 내가 구원을 받았는데 성도와의 교제라는 것이 없거나, 혼자만 있고 구원받은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구원받았으면서도 구원 안 받은 사람 세계에 가서 산다면, 그 사람은 성령과 교제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활동이 없습니다. 구원은 받아 성령이 마음 속에 와 계시지만 그 성령이 가만히 계십니다.
성령의 활동
그러니까, 그 사람은 신앙 생활이 없습니다. 성령은 구원받은 사람끼리 서로 얘기를 할 때에 활동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도의 교제, 구원받은 사람이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교제를 하지 않으면 성령은 안에 계시지만 활동 없이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를 할 때에는 성령이 활동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교제를 하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교제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교제는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산 사람은 말을 하고, 활동을 하고, 느끼고 생각하며, 숨을 쉬고, 그리고 먹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성경 말씀이 먹어집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도 먹으면서 교제를 합니다. 그렇잖습니까? 때로는 "우리 한 잔 하자" 하고 같이 먹으면서 교제들을 합니다. 먹는 것이 빠져버리면 교제가 잘 안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받은 사람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누면서 교제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죽어버리면 아무리 얘기해 보았자 소용 없습니다. 절대로 될 수가 없어요.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 안 받은 세계에 가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신앙 생활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됩니다. 산 사람끼리라야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간에는 교제가 있어야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해 나아가는 데는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오가는 대화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의논도 할 수 있고 또 때로는 보통 의논도 있지마는 좀 더 차원 높은 대화도 오갑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 - 예수
여러분, 아담이 무슨 과일을 따 먹었습니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곧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알게 된 선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인간 기준의 형식적이고 도덕적인 선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에요. 혹시 기억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선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곧 하나님의 선이지요.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 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교제를 하지 않으면-교제가 없으면-하나님의 뜻인 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며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과 반대되는 선을 하나님의 선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배당에만 열심히 다니면 하나님의 선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면 거듭나는 사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구원 받는 역사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도를 섬기는 참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교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또 보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1서 1:1)
이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이 되어 친히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1서 1:2)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한1서 1:3-4)
자, 보십시오. 보고 들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그것이 바로 보고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본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설교는 하지 못한다 해도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를 만났을 때 아마 몇 마디 말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바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 예수님이 내 죄를 다 가져 가셨다.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 하는 그 간단한 말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거든요. 지금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습니다. 이것을 많은 말로 설교는 못하더라도 간단히는 할 수가 있습니다.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학식이 많은 학자라야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보십시오. 사람들이 길로 지나가고 있는데, 차 사고가 났습니다. 택시가 버스를 들이받아서 택시가 그만 납작해져 버렸습니다. 그 택시 탔던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 전할 수 있습니까?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면 박사님도 전할 수 있고,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도 전할 수 있습니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오늘 길을 지나오는데 택시가 버스를 들이받아가지고 그 안에 탄 사람이 몽땅 죽었다." 그것을 연구해야 됩니까? 택시나 버스의 크기, 무게, 속도, 공기 저항 등을 자로 재고 연구해서 결과가 나와야만 전할 수 있습니까?
성경 전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고 깨달은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이 성경을 전하는 것은 신학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본 것이 없는 사람은 할 말이 없으므로 이론을 가지고 연구를 하겠지요.
그러나, 보지 않고는 아무리 연구해 보아야 모릅니다. 택시와 버스가 충돌해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보지 않았는데도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까? 현장을 보았다면 연구할 필요 없이 전하면 되잖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아주 무식한 사람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쯤의 사람으로 디엘 무디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국민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삼촌이 하고 있는 구둣방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는 아주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다니고 있는 주일 학교의 선생님이 그 구둣방을 찾아 왔습니다. 그 선생님은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 디엘 무디를 데리고 창고에 들어가서 성경 얘기를 해 주었는데, 디엘 무디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미국을 뒤흔드는 큰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극장 앞을 지나 가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극장 안으로 한 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극장 건너 편에 있는 빈 집에 들어가서 그냥 막 고함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러자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전부 그곳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는 그 빈 집에서 그들을 향하여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는 아주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고, 그로 인하여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신학을 연구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성경을 자기가 읽고 깨달은 것을 전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은 오히려 유식한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식한 사람은 자기 이론이나 지식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은 의지할 지식이나 학문이 없어요. 그러니 무엇을 의지합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식하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기독교 안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혹시 아시겠습니까? 천로역정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분은 국민학교를 중퇴한 정도인데 구원을 받고나자 막 전도하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로 되어 있어서 번연에게 전도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하니까 나중에는 잡아다가 그만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옥중 생활을 몇 년 했느냐 하면 13년 동안 했습니다. 중간에 내놓으면 또 전도하고 설교하고, 그러면 또 잡아들이고,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하다가 나중에는 옥중에 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그 천로역정은 무식한 사람이 썼지만 지금까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렇게 크게 일할 수 있습니다. 자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요한1서 1:3)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보고 들은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여러분들과 저는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길을 갈 때에 여러분 중의 한 분이 혹 인사를 한다 할지라도 저는 잘 모를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앉아서 성경 얘기를 같이 할 때 우리 사이에는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했기 때문에 여러분들 마음 속에도 성령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주님의 말씀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 말씀이 주님과의 사이에 매개체가 되어서 우리는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1서 1:3)
지금 이곳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엔 예수님이 계셔요. 어떻게 계시느냐 하면 성령으로 계십니다. 여러분은 아직 삼위일체의 원리를 잘 모르실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시고 아들 예수님도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하니까 저 구름 위로 올라가셨나 보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신령한 몸으로 변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세계에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주님이 우리하고 같이 계십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6-20)
세상 끝날에는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주님이 재림 하십니다만 지금은 주님이 영으로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본래 영이시니까 실제로 우리 눈에 지금 안 보여서 그렇지 여기 지금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셔요. 성령으로 계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는 거기에는 앞에 읽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라는 요한일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교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18:19)
두 사람이 합심하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합심이라는 것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라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이 어떤 뜻일까요? 그냥 아무렇게나 두세 사람만 따로 모여도 주님이 계신다. 이게 교회다. 그런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라고한 이 말 중 '내 이름으로" 라는 말에는 굉장히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사람들이 육신의 생각으로 모여도 거기에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원리
잠시 교회가 세워지는 원리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18-24)
이 말씀은 아담에게 아내가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남자인 아담만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사니까 혼자 사는 것이 안 좋다고 하여 그를 위로하고 돕는 배필을 필요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배필이 있는가 싶어서 모든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보는 대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자다, 소다, 호랑이다. 그러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아담을 돕는 배필이 될 존재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 하나를 뽑아가지고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가니까 다른 동물을 데려갈 때에는 그냥 그 이름만 지었는데 자기의 참 사랑의 대상인 하와를 보더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창 2:23)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남자란 말은 "이시" 이고, 여자란 말은 "이사" 인데, 그 남자, 여자란 말 자체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 이라는 아내는 남자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사랑의 관계가 되었고 같은 생명체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조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 세상의 교회는 아무렇게나 막 생겨 납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상점 하나 새로 차리는 식으로 늘어갑니다.
주님과의 대화 - 기도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이 기도 문제도 역시 처음에는 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고 했는데 이는 기도를 마칠 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해도, 그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를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하고 나서, 끝에 가서 습관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면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인 줄 착각합니다. 성경에는 그에 대한 매우 깊은 뜻이 들어 있으나, 갓 구원받은 분들은 아직 그런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략 기도 문제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5절을 봅시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여기의 회당은 예배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이러한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외식' 이란 겉 모양을 꾸민다는 뜻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그런 기도를 몇 번씩이나 합니다. 가령 누구네 집을 방문했을 때, 서 있을 때에는 기도를 안 하다가 앉으면 기도합니다. 과일이나 차를 내놓으면 또 기도하고, 다른 음식이 나오면 또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 마음이 얼마나 주님을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꼭 그런 형식을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 음식이 들어오면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을 꾸미지 않아도 속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남의 눈 앞에 보이는 데서 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자연스럽게 될 때 정상적인 신앙 생활이 됩니다.
이 기도라는 것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사람의 마음에 있는 종교적 본능, 곧 썩은 고목나무를 보고도 무얼 빌고, 이상하게 생긴 돌이나 바위만 보아도 무엇을 빌고 싶은, 그러한 마음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를 모릅니다. 유다서에 보면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과 관계 없이 기도의 형식만을 꾸미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기도
그렇다면 참다운 기도란 어떠한 것일까요?
첫째,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이지 않습니까? 성경 읽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까? 어린애가 부모에게 요구 조건이 있으면 항상 앙앙거리고 웁니다. 그것도 일종의 기도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말을 들어야지요. 그러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생활에 대해 제 경험을 한 가지를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기도부터 하지 말고 먼저 성경부터 읽으십시오. 성경부터 읽다가 내 마음에 감동을 주는 어떤 말씀이 있거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아무 감동도 없이 "기도해야 된다" 라는 강박 관념에서 하니까 필요없는 소리를 지껄여 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도서 5장 1절을 봅시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자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의 전은 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라는 찬송대로 내 주 예수 계신 곳이면 내가 성경 읽는 곳, 내가 기도하는 곳 그 어디나 거기가 하나님의 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에서 발을 삼간다는 말씀은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회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5장 2절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치 기도 선수들이 기도 시합을 하는 것처럼 얼마나 기도를 잘하는지 눈 딱 감고 앉았다 하면 대통에 물솟듯이 "상천하지에 홀로 계신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시여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나옵니다. 대통령 앞에 가서 마음대로 막 지껄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 앞에 앉자마자 그렇게 얘기가 막 나옵니까?
성경에는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오래 하는 것을 자랑합니다. 밤새도록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밤새도록 얘기하자고 하면 매우 귀찮아 할 것입니다. 어떻게 밤새도록 기도합니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갓난아기는 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말을 모르니까 달라고 "앙앙", 무엇이 마려우면 "응응", 다음에는 필요한 요구조건이 있을 때마다 "엄마" 라는 소리를 자주 합니다. 한 마디만 해도 "응 왜 그래?" 하고 뭔가 엄마가 살펴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학교에 간다든지 하면 "엄마 뭐 사줘." 이렇게 간단히 말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 설명이 많습니까?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회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6:5)
그러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갚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상을 이미 받아 버렸으니까요. 사람들이 "저 사람은 기도를 잘한다." 고 칭찬해 버리면 이미 그 칭찬으로 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기도 잘한다든지 기도 많이 한다든지 하는 말을 들어 버리면 안 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6)
여러분, 어떤 집에는 골방이 없습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반드시 어떤 방에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조용한 때나 혹은 옆에 사람이 다 자고 있을 조용한 시간에 혼자 깨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복잡한 곳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아니면 버스 속은 항상 사람들로 복잡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그것은 나하고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러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읽고 마음에 두십시오. 아무 일 없을 때 아무 생각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 마귀가 접근합니다. 조용한 시간이 있거든 성경 말씀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생각해 보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기도입니다.
묵상하는 자세
구약 성경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서에 사람이 먹지 못할 고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돼지 고기는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돼지 고기 자체를 먹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돼지가 소하고 다른 점은 먹이를 먹을 때 그냥 삼켜버린다는 점 입니다. 소는 한 번 먹은 것은 다시 밤새도록 새김질을 합니다. 소는 새김질을 하기 때문에 쇠고기는 깨끗하다 하고, 돼지는 새김질을 못하기 때문에 돼지 고기를 부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유로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보는 사람은 새김질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조용한 시간이 있으면 딴 생각에 빠지지 말고 들은 말씀, 읽은 말씀을 묵상하면 됩니다.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은 뒤에는 시간나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새김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지금은 염불하는 식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부처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을 말을 혼자 지껄이다가 가버리는 것처럼 기도한다고 하면 처음부터 따발총 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지껄인 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가버립니다. 이런 기도는 어른 앞에서 자기 말만 실컷 늘어 놓고 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른이 바라보고선 "참 희한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어른의 눈치도, 생각도 모르고 대답도 아랑곳 없이 무조건 하는 모든 기도, 이것이 바로 미신인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예요.
그렇기 때문에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기도 소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여 듣고 내 맘에 닿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아울러 구 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회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7-8)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저렇다'라고 설명을 합니다. 옛날 저희 고향에는 김 장로라는 장로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님은 기도를 굉장히 오래 했습니다. 그 장로님에게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별명이 뼈다귀 영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별명이 붙게 된 내력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영감님의 아우되시는 김 장로님이 한 번 기도를 시작하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요. 창세기를 계속 설명하고 한 번 훑어 내려가는데 하도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형님이 참지 못하고 기도하는 도중에 "아이고 뼈다귀야" 하고 나가 버렸습니다. 기도 도중에 일어나서 가 버렸어요. 그런데 김 장로님이 기도를 마치고 나서 "형님이 어디 가셨느냐?"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아브라함 때 벌써 갔어요" 해서 한 바탕 웃은 일이 있는데, 이런 것이 무슨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필요한 것만을 솔직 담백하게 한 두 마디만 해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왜 설교를 합니까? 사람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공중 기도는 물론 사람이 듣는 데서 하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모르신다고 하나님 앞에 설명을 합니까?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그렇게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말을 적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고 나면 기도할 말이 없어져 버립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저도 기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기도를 2시간씩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저의 개인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서 내 가족 문제를 기도 하고, 또 온 세계 문제까지 한 바퀴 돕니다. 한 바퀴 돌면 2시간이나 3시간이 걸립니다. 나중에 구원을 받고 보니까 전부 염불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잡히는 것이 있으면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서원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당당하게 하나님께 원하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형식을 꾸며 말을 많이 하고 하나님께 설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정당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의 참 모습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16)
여기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라고 되어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구원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피차에 무엇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교회에 오래 다니시던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하는 의논들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까지는 이러한 것을 기도라고 생각해 보지 않으셨겠지요.
우리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이들이 이웃 아이들하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놉니다. 그 때 저희들끼리 하는 이야기 속에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말이 한 마디 부모의 귀에 들렸다고 합시다. 그 부모는 아이들이 "사 달라" 소리는 안 했어도 "무엇이 있으면 참 좋겠는데" 한 말을 기억하고 상점을 지나다가 그것이 눈에 띄면 반드시 사주실 것입니다. 저희들끼리 나눈 대화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사람도 이러한데 하나님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고 교제하는 것 그 자체가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면 우리 모임은 기도가 하나도 없는 것 같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면의 기도가 있습니다. 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항상 말씀하시느냐 하면 교제에 관하여 많이 강조해 놓고 있습니다. 빌레몬서 1장 6절에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교제라는 말도 아직은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에는 좀 어려운 말이지만 성경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 또 집회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교제입니다. 성경 말씀을 배우는 것도 교제이고 생활간증을 하는 것도 교제이고 이러한 모든 것이 교제입니다만 그보다 더 깊은 교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쉬운 교제라고 하면 지금 말씀드린 이러한 것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교제가 없으면 신앙 생활이 전혀 자라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가운데 있는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성령을 받았는데, 그 성령은 역사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구원 받은 사람간에 교제를 할 때에 성령이 활동을 합니다. 가령 내가 구원을 받았는데 성도와의 교제라는 것이 없거나, 혼자만 있고 구원받은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구원받았으면서도 구원 안 받은 사람 세계에 가서 산다면, 그 사람은 성령과 교제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활동이 없습니다. 구원은 받아 성령이 마음 속에 와 계시지만 그 성령이 가만히 계십니다.
성령의 활동
그러니까, 그 사람은 신앙 생활이 없습니다. 성령은 구원받은 사람끼리 서로 얘기를 할 때에 활동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성도의 교제, 구원받은 사람이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교제를 하지 않으면 성령은 안에 계시지만 활동 없이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제를 할 때에는 성령이 활동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교제를 하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교제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교제는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산 사람은 말을 하고, 활동을 하고, 느끼고 생각하며, 숨을 쉬고, 그리고 먹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는 성경 말씀이 먹어집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도 먹으면서 교제를 합니다. 그렇잖습니까? 때로는 "우리 한 잔 하자" 하고 같이 먹으면서 교제들을 합니다. 먹는 것이 빠져버리면 교제가 잘 안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받은 사람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누면서 교제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죽어버리면 아무리 얘기해 보았자 소용 없습니다. 절대로 될 수가 없어요.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 안 받은 세계에 가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신앙 생활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됩니다. 산 사람끼리라야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사람간에는 교제가 있어야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해 나아가는 데는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오가는 대화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의논도 할 수 있고 또 때로는 보통 의논도 있지마는 좀 더 차원 높은 대화도 오갑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 - 예수
여러분, 아담이 무슨 과일을 따 먹었습니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곧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알게 된 선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인간 기준의 형식적이고 도덕적인 선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에요. 혹시 기억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선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곧 하나님의 선이지요.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한다" 는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교제를 하지 않으면-교제가 없으면-하나님의 뜻인 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며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과 반대되는 선을 하나님의 선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배당에만 열심히 다니면 하나님의 선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면 거듭나는 사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구원 받는 역사가 나타나야 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도를 섬기는 참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교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또 보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1서 1:1)
이 말씀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이 되어 친히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1서 1:2)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한1서 1:3-4)
자, 보십시오. 보고 들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은 그것이 바로 보고 들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본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설교는 하지 못한다 해도 여러분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를 만났을 때 아마 몇 마디 말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바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 받았다. 예수님이 내 죄를 다 가져 가셨다. 나는 죄 사함을 받았어." 하는 그 간단한 말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거든요. 지금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습니다. 이것을 많은 말로 설교는 못하더라도 간단히는 할 수가 있습니다.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학식이 많은 학자라야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 보십시오. 사람들이 길로 지나가고 있는데, 차 사고가 났습니다. 택시가 버스를 들이받아서 택시가 그만 납작해져 버렸습니다. 그 택시 탔던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 전할 수 있습니까?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면 박사님도 전할 수 있고,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도 전할 수 있습니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오늘 길을 지나오는데 택시가 버스를 들이받아가지고 그 안에 탄 사람이 몽땅 죽었다." 그것을 연구해야 됩니까? 택시나 버스의 크기, 무게, 속도, 공기 저항 등을 자로 재고 연구해서 결과가 나와야만 전할 수 있습니까?
성경 전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고 깨달은 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이 성경을 전하는 것은 신학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본 것이 없는 사람은 할 말이 없으므로 이론을 가지고 연구를 하겠지요.
그러나, 보지 않고는 아무리 연구해 보아야 모릅니다. 택시와 버스가 충돌해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보지 않았는데도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까? 현장을 보았다면 연구할 필요 없이 전하면 되잖습니까?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아주 무식한 사람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쯤의 사람으로 디엘 무디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국민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삼촌이 하고 있는 구둣방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는 아주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다니고 있는 주일 학교의 선생님이 그 구둣방을 찾아 왔습니다. 그 선생님은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 디엘 무디를 데리고 창고에 들어가서 성경 얘기를 해 주었는데, 디엘 무디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미국을 뒤흔드는 큰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극장 앞을 지나 가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극장 안으로 한 번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극장 건너 편에 있는 빈 집에 들어가서 그냥 막 고함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러자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전부 그곳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는 그 빈 집에서 그들을 향하여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는 아주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했고, 그로 인하여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 사람이 신학을 연구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성경을 자기가 읽고 깨달은 것을 전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은 오히려 유식한 사람보다 무식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식한 사람은 자기 이론이나 지식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무식한 사람은 의지할 지식이나 학문이 없어요. 그러니 무엇을 의지합니까?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식하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기독교 안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있습니다. 혹시 아시겠습니까? 천로역정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분은 국민학교를 중퇴한 정도인데 구원을 받고나자 막 전도하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로 되어 있어서 번연에게 전도를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하니까 나중에는 잡아다가 그만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옥중 생활을 몇 년 했느냐 하면 13년 동안 했습니다. 중간에 내놓으면 또 전도하고 설교하고, 그러면 또 잡아들이고,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 하다가 나중에는 옥중에 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그 천로역정은 무식한 사람이 썼지만 지금까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렇게 크게 일할 수 있습니다. 자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요한1서 1:3)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보고 들은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여러분들과 저는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길을 갈 때에 여러분 중의 한 분이 혹 인사를 한다 할지라도 저는 잘 모를 것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앉아서 성경 얘기를 같이 할 때 우리 사이에는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전했기 때문에 여러분들 마음 속에도 성령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주님의 말씀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 말씀이 주님과의 사이에 매개체가 되어서 우리는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1서 1:3)
지금 이곳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였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엔 예수님이 계셔요. 어떻게 계시느냐 하면 성령으로 계십니다. 여러분은 아직 삼위일체의 원리를 잘 모르실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시고 아들 예수님도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하니까 저 구름 위로 올라가셨나 보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신령한 몸으로 변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세계에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주님이 우리하고 같이 계십니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6-20)
세상 끝날에는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주님이 재림 하십니다만 지금은 주님이 영으로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본래 영이시니까 실제로 우리 눈에 지금 안 보여서 그렇지 여기 지금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셔요. 성령으로 계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는 거기에는 앞에 읽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라는 요한일서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교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18:19)
두 사람이 합심하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합심이라는 것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라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이 어떤 뜻일까요? 그냥 아무렇게나 두세 사람만 따로 모여도 주님이 계신다. 이게 교회다. 그런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라고한 이 말 중 '내 이름으로" 라는 말에는 굉장히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사람들이 육신의 생각으로 모여도 거기에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원리
잠시 교회가 세워지는 원리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18-24)
이 말씀은 아담에게 아내가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남자인 아담만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사니까 혼자 사는 것이 안 좋다고 하여 그를 위로하고 돕는 배필을 필요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배필이 있는가 싶어서 모든 동물을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보는 대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자다, 소다, 호랑이다. 그러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그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아담을 돕는 배필이 될 존재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 하나를 뽑아가지고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여자를 아담에게 데려가니까 다른 동물을 데려갈 때에는 그냥 그 이름만 지었는데 자기의 참 사랑의 대상인 하와를 보더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창 2:23)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남자란 말은 "이시" 이고, 여자란 말은 "이사" 인데, 그 남자, 여자란 말 자체가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 이라는 아내는 남자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사랑의 관계가 되었고 같은 생명체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조상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재 이 세상의 교회는 아무렇게나 막 생겨 납니다. 사람의 생각대로, 상점 하나 새로 차리는 식으로 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