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는 순서

다음으로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갓 구원받으신 분들은 참고 하십시오. 성경은 할 수 있으면 먼저 신약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신약 성경 중에서 요한복음을 많이 읽고 그 다음에는 마태복음부터 복음서를 읽고. 그 다음에 로마서, 그 외에 서신서를 읽고 구약을 읽으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잘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신 성경의 윤곽이 머릿속에 들어올 수 있도록 창세기는 대략 어떤 것이고, 출애굽기는 대략 어떤 것이며, 레위기는 어떤 것이라는 정도로는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많이 읽는다고 해서, 혹은 머리를 기울여 연구를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왜 많이 읽어야 되느냐 하면 '어디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알 정도'로 성경을 많이 읽다보면 어떤 성경 말씀을 모를 때에 전에 읽어 놓았던 성경 구절이 생각나면서 풀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이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경의 윤곽이 마음에 잡히도록 읽고 나중에는 성경을 아주 자세히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성경 성구 사전' 같은 것이 있으면 찾아가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단어 하나하나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었으면 합니다. 하여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많이 읽어서 말씀이 항상 그 마음에 있으면 신앙 생활이 쉽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마음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6-17)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라고 했습니다. 자 여러분, 특히 젊은 분들, 학생들이나 청년들, 아직 나이 젊은 분들에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억력이 좋을 때에 성경을 많이 읽으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기억력이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굉장히 많이 잊어버립니다. 전에 같으면 제가 성경을 아침에 일어나서 5장씩, 짧은 것은 10장씩 이렇게 읽었는데, 지금은 한 장을 읽고 그 한 장을 가지고 한 시 간이나 두 시간씩 그 말씀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노트에 적기도 하면서, 후회스러운 것은 이렇게 나이들기 전에 좀 젊었을 때에 왜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던가 하는 점입니다.

어쨌든 시간이 있는 대로 성경을 좀 많이 읽으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읽기 싫더라도 처음에는 법으로 정해 놓고 하루에 얼마까지는 읽겠다는 생각을 하고 성경을 좀 많이 읽으십시오. 나중에 가서 '성경 읽은 것이 참 다행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원리, 역사

다음으로는 교회의 원리를 먼저 생각해보고, 또 교회의 역사를 조금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무엇이 교회냐? 물론 여러분들은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닌 줄은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원어로는 헬라어의 "에클레시아" 라는 말인데 '이 세상에서 빼어낸 무리' 라는 뜻입니다. 혼자서는 교회가 안 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대로, 두세 사람 이상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런데 주님이 허락하지 않은 이름을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도용해 가지고 모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를 보면 어떤 사람들이 남의 이름을 도용해서 거짓된 도장을 만들어 남의 땅을 팔아 버리는 경우가 가끔 보도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려면 주님이 그 이름을 허락하셔야 됩니다. 주님이 그 이름을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주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모여 가지고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애굽기 3:13-15)


이스라엘 민족이 아직 민족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야곱의 가족 70명이 애굽에 들어가서 살다가 나중에 애굽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후 대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백성의 종노릇을 하면서 400여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400여 년을 살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없이 종노릇만 하고 삽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구원 받기 전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마귀를 섬기면서 살던 그 때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내 민족을 구할 수 있습니까?" 하고 가지 않으려고 하자 하나님이 기어이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러면 내가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그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고 물을 터인데 내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자존자다. 나는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영원한 이름인데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하나의 역사가 마치 이야기처럼 엮어져 가는데, 실상 그 속에 굉장히 깊은 뜻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외부에서 그 껍데기만 보면 그냥 하나의 사건처럼, 이야기같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속에 아주 깊은 뜻이 들어 있어요. 

위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으면 여호와란 이름의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기 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왕을 섬기면서 바로왕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때 까지는 여호와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구출받은 것은 우리가 지금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가리키는 하나의 예표입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면 "자존자다.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해라" 한 그 뜻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음으로써 여호와의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림자 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 와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갖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 그리스도의 백성이다" 하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먼저 주님이 이름을 허락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이름이 허락되는지 찾아 봅시다.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 성령은 보혜사이신데,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곳이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으면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라는 곳에서는 이 점을 전혀 모릅니다.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말은 성령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했으면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으면 성령이 와 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생명의 법칙

성령의 역사는 두 가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실 보혜사 성령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힘은 생명의 성령의 법칙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지구에는 모든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 있습니다. 새가 공중에 나는 것은 하나의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에게 무슨 법칙이 있습니까? 생명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 없는 것은 떨어집니다. 새는 생명의 법칙에 의해서 공중으로 날아다녀요.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공기총으로 쏘아서 새를 죽이면 떨어져 버립니다.

본래 우리 속에는 사망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죄의 법칙과 사망의 법칙 두 가지가 있었는데, 구원받을 때에 생명의 법칙이 하나 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늘 나라를 향해서 영적인 동작으로 날기 시작한 거예요. 그것은 생명의 법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두세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반드시 교회가 되느냐 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성령이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생명의 법칙으로 오시는 성령과 또 성령이 다시 한 번 임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이 무엇으로 태어나셨습니까? 성령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말씀이 동정녀 마리아 속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른 살 되실 때까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셨지만 아무 일도 안 하셨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육신은 아직 죄 가운데 있으면서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어림도 없는소리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후에라야 어떤 일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도 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그때에 성령을 충만히 받으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일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도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진짜 교회가 되질 않아요. 일하는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성경 한 번 찾아 봅시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회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8:14-17)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이 사마리아에 전도를 했습니다. 그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만 받을 뿐이러라" (행 8:15)고 한대로 모두 예수 믿고 침례 받았는데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안수를 하니 성령이 내렸습니다. 그들이 믿고 침례받은 그것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곳은 주님의 일이 맡겨진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받았지만 일이 맡겨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둘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행전 19:1-7)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중에 제일 큰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면,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전도만 받고 있다가 바울이 안수를 하니 그때에 비로소 성령을 받았는데,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이 내리면 반드시 어떤 표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그런 역사가 다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이 성령이 임하시는 일이 있어서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교회는 언제나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 받고 환난을 당합니다. 그 당시 마귀가 예수님을 알았듯이 지금도 마귀는 성령을 압니다. 그래서 계속 교회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억울하게 핍박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은 요한복음 14장 26절에 있는 말씀대로 성령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원 받는 것 말고 일하는 기름 부음이 있는 것은 주님의 이름이 임한 것입니다. 

한 곳 더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세기 2:18-23)


자,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짐승을 아담 앞으로 데려가니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은 지었지만 그를 돕는 배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해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아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것이 하와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아담은 예수님의 그림자이고 하와는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탄생되었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시고, 무덤 속에 계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오순절날, 성령이 오신 날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뼈. 예수님의 살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십자가의 진리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셨을 때 탄생되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와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이에요. 교회는 성령이 임하므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창세 전부터 예정된 교회는 기름 부음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원리를 알면 자기를 희생해 가면서 교회가 이루어지는데 참여하는 지체가 됩니다. 그런데, 자기 육신대로 하려는 사람들은 갈라져서 나가요. 우리 모임에도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장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 본체이십니다. 이 세상이 아직 창조 되기 전에 하나님은 사랑을 나타내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인간적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의 짝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짝이 이 역사적 현실 속에서는 교회이며. 내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짝으로 사랑하시려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반응을 일으키게 하고, 그 사랑에 접해서 기뻐하며 즐겨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이 없는 짐승은 그러한 사랑의 짝으로 선택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사단의 꾀임에 빠져 미처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도 전에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영혼을 구원해 주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예수님 께서 최후의 만찬 후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권면을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새 계명이란 무엇입니까? 새 계명이 있다면 옛 계명도 있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시내산 밑에 왔을 때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계명이 옛 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은 무슨 뜻으로 주신 것이었을까요? 

마태복음 22장 35절에 보면, 한 율법사가 와서 예수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라고 물었을 때 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결국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한 민족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계명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아직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다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계명 곧 옛 계명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시는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을 받아 영혼이 거듭나고 보니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하신 것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고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을 받아 진정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주님이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랑

그러면 어떻게 서로 사랑할 것인가? 참 사랑이 나타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원하셨던 소원 곧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고 나타나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는 참으로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 이하에 "사랑은 목숨을 바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하심으로써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아 새 사랑을 알았으니, 우리도 똑같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까? 자살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서 3:17-18)


그렇다면,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형제의 궁핍을 보았을 때에 물질을 희생시켜 도와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은 곧 이 세상에서 사는 데는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초대교회 오순절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성령이 내림으로써 많은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어떤 것이었는가?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이 모든 물건을 유무상통하고, 있는 것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 4 : 32)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는가?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참으로 사랑하는 상태이므로 물질에 매여 있던 마음이 풀려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는 물질로부터의 마음의 해방입니다. 아담 이후로 사단은 사람의 마음이 물질을 사랑하여 물질에 마음이 잡히도록 유혹했기 때문에 정작 사랑해야 할 하나님도, 이웃인 사람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 성령이 임하시니 마음이 물질에서 풀려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때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단의 지배를 받을 때는 사단이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을 신으로 섬기도록 해서 실제로 하나님 아닌 마귀를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5절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해서 세상 사람은 재물을 사랑하는 것이며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반대가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가진 바 재물로써 형제들을 섬기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곧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삶

모임 역사에도 밝혔듯이 우리 모임에서는 성도를 섬기기 위하여 일자리 없는 형제나 자매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말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에서 주님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같은 신경에 의해 연결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개인적으로 형제들의 어려움을 구제하거나 고아원이나 자선 사업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개인이 개인을 도우면 주인과 종의 관계같이 되어 버려 교제가 막히기 쉬우며, 또 오순절 때와 같이 계속적으로 통용을 하거나 자기 재물을 팔아서 돕는다면 돕는 자도 나중에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의 역사는 성령 충만한 상태이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그것은 교회의 모델로 한 순간 보여준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가 개인적으로 돕고 돕는다는 의식이 없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돕고 싶은 사랑이 있는 자는 교회에 헌금을 하고, 그것으로 교회가 돕게 되면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서로 돕고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헌금은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오늘날과 같이 다른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편지하면서 당시 멀고 먼 곳에 위치한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그 지역이 크게 흉년 들어)을 돕는 것을 연보하게 하는데 매주 첫날(현재의 주일날)에 모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장에도 헌금에 대해서 편지하면서,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헌금할 것을 권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린도후서 8:1-4)


"성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고린도후서 9:1)


오늘에 와서 헌금이 섬기는 행함과 진실함이 되어야 하며, 항상 도울 수 있는 일에 투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생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에 나타나 역사하는 것이며,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창세 전에 뜻하셨던 그 뜻이 성취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서 실천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장로교의 기본 교리는 예정입니다. 그러나 장로교의 예정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정과는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예정 교리에서는 개개인을 구원받을 자와 지옥갈 자로 예정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지옥에 가게 하기 위해서 예정하신 것이니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미래를 내다보시며 모든 것을 미리 아신 분이십니다. 곧 사람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는데 그 자유 의지에 의해서 진리를 받아들일 자가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자가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교회입니다. 왜 교회를 예정하셔야 하셨는가? 그것은 신랑이신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계셨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있으면 반드시 신부가 있어야 하며, 머리가 있으면 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짝으로서 창세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에베소서 3:10-11)


창세 전에 하나님은 교회를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일을 교회를 통해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목적이 교회에 계시면 인류의 역사에서 교회 곧 참된 교회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며,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아 참된 교회 안에 살 수 있게 하신 것은 그만큼 축복된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발견하고 깨닫고 산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귀한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

계시록 21 장 1 절-2절과 9절 이하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1절-2절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난다고 했고 또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는데,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하며 천국인 예루살렘이 곧 신부인 교회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가 보인다고 했는데,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예루살렘을 보이실 때 보통 천국이라고 하는 그 성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했으며, 높은 성곽과 열두 문과 성은 정금이며, 성곽은 열두 각색 보석으로 꾸몄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이는 보통 천국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신부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영원한 천국을 위한 것인데 그 천국은 사실은 교회가 완성된 것입니다. 금이나 보석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인 신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현재의 '교회가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께 어떠한 가치가 있으며,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시고 교회를 성취해 가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교회에 대해서 사단은 거짓된 교회를 이 역사 속에 만들어 가기 위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에서는 주님께서 천국 비유를 겨자씨 비유로써 말씀하시면서, 교회 안에 사단이 들어와 살게 될 것을 시사하셨습니다. 겨자씨를 심었는데 자라서 나무가 되니 새들이 깃들인다고 하신 것입니다. 새는 마귀로서 씨 뿌리는 비유 중에도 길에 뿌린 씨를 새가 와서 먹어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장, 3장에서 일곱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넷째 교회 두아디라는 큰 환난에 던진다고 하셨고, 여섯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에만 들림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참 교회가 무엇이며 어떻게 세워지는지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단의 참소

그러면, 참 교회에는 마귀의 역사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참 교회일수록 사단의 방해가 심합니다. 사단은 외부적으로 박해를 가하는가 하면, 교회 내부에 들어와서 거짓 구원받은 자나 구원을 받았어도 극히 육신적인 자를 통해서 교회를 방해하는 여러가지 일을 꾸밉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나 목적이 바꾸어지고 틀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정하신 교회이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의 예표로써 하나님이 그 민족 속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후손 곧 사단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서로 싸워 여인의 후손이 승리할 것을 예언하셨는데, 여인의 후손도 이스라엘 속에서 탄생하셨고, 뱀의 후손도 소위 선민 이스라엘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도 유대인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책망을 했습니다. 사단이 이스라엘 속에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은 어긋나지 않고 주님이 그 속에 오셨고, 그 민족을 통해서 다시 두 번째로 오실 것입니다. 참교회 안에 더러는 마귀 장난도 있고 불상사가 있어도 그것으로 성령이 떠나거나 하나님의 일이 변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육신적인 자와 주님의 일 곧 교회에 방해될 자를 걸러내어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 모임이 걸어온 발자취 속에도 그러한 방해 거리를 걸러서 밀어내 버리는 일이 여러 번 있어 왔습니다. 그렇게 걸러서 깨끗케 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아 교회가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