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스펄젼

(Charles H. Spurgean)


영국의 복음주의 목사.


1834. 6. 19
영국 남부의 에섹스(Essex)주에서 탄생.
1841-1849
콜체스터에서 수학.
1842
메이드스톤(Maidstone)의 농업학교를 몇 달 다님.
1850. 1. 6
거듭남을 경험함.
1852
워터비치(Waterbeach)교회의 목사.
1854
런던 뉴파크 스트리트(New Park Street)교회에 초빙된 이후 대대적인 신앙 부흥을 일으킴.
1892
사망.


찰스 스펄젼은 1834년 6월 영국 남부의 에섹스(Essex) 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1568년부터 찰스 스펄젼이 태어나던 때까지 12대(代)를 걸쳐 전통적인 청교도 신앙을 지켜왔다.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와 아버지 죤은 청교도 목사였다. 이 때문인지 그의 부모들은 어릴 적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자녀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


당시 순회 설교자였던 찰스의 아버지는 어느 주일 아침에 자기 자녀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마음이 울적하였다. 자신을 정죄하는 이러한 생각을 못이긴 채 집으로 돌아온 찰스의 아버지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큰 방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 것을 목격하고 깜짝 놀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내가 자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특히 찰스의 순서가 되자 그녀는 특별한 기도를 했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뛰어난 머리와 용감한 기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감격 어린 마음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저는 당신의 일을 계속하겠읍니다. 내 자녀들을 잘 보살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특히 찰스 스펄젼은 어렸을 때부터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자주 읽었는데 전생애 동안 무려 100여 번이나 탐독했다고 한다. 어느 날 6살 난 스펄젼이 목사관 2층의 어두침침한 방에서 천로역정의 복사판을 발견했는데, 그 책은 표지가 목판화로 되어 있었다. 그는 즉시 그 책을 아래층으로 가지고 내려와 응접실의 밝은 불빛 아래서 자세히 보았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 당시에 보았던 책 표지에 있는 목판 그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7살부터 15살까지 콜체스터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청교도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다. 박스터의 ‘비회심자에 대한 부르심〈Call to the unconverted〉’, 제임스의 ‘갈급한 탐구자<Anxious Enquirer〉’, 엘린의 ‘죄인에 대한 경고〈Alarm to Sinner〉’ 등이다.


찰스는 다른 학생들보다 정신 연령이 높아 조숙했다. 그래서 그는 죤 번연의 ‘풍성한 은총(Grace Abounding)’에 나오는 긴 문장들을 외웠다가 그의 친구들에게 즐겁게 들려 주곤 하였다. 그러나 1850년 1월 6일 확실히 거듭나는 경험을 하기까지 그는 많은 내적인 방황과 고뇌를 겪었는데 스펄젼은 그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젊었을 때, 약 5년간이나 심히 괴로운 시기, 즉 암흑기를 지낸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면, 나는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와 같은 느낌을 가졌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나에게서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떠한 죄를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불성실하고 부정직하며 참담한 말을 하는 다른 소년들과 똑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나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패역무도한 죄인이었다. 결국 나는 내 자신을 율법 가운데로 인도해 주는 모세를 만났다. 하나님의 선한 법 곧 십계명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십계명을 대하고 그것을 내게 비추어 보았을 때, 지극히 거룩하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나는 확실히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내 마음은 빛을 잃은 태양과 같았고, 내가 지은 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존재하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나를 빠뜨리고 말았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열심히 찾아 보았지만 이렇다 할 만한 해답을 받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마음은 더욱 답답해졌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특권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론을 꾸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선민의 특권을 가졌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했지만 그 노력은 헛수고였으며, 그 특권은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내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나는 확실히 복음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너무도 답답하여 콜체스터의 모든 교회들을 찾아 다니면서 뭔가 해답을 찾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어떤 설교자도 그를 도와 주지 못했다. 때로 어떤 설교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유쾌하게 설교를 듣기는 했지만, 어찌하면 구원을 얻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설교가 끝나면 ‘좋은 말씀 잘 들었구나.’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 남을 뿐 마음 속의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또 다른 설교자는 항상 율법에 대해서만 설교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도 다 실천할 수 없는 고통의 멍에를 교인 들한테 씌울 뿐이었고, 인간 행위의 열심만을 강조하는 내용들이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 사람들의 마음의 밭은 갈아지는 것 같았으나(실제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씨가 떨어지지를 않아 아무런 결실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스펄젼은 당시의 설교자들로부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었고 성경에서도 읽었으나, 여전히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다.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던 스펄젼에게 전생애를 바꾸어 놓은 순간이 왔다. 1850년 1월 6일, 그는 우연히 들른 교회에서 어느 평신도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스펄젼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요즈음도 그 때를 가끔 생각하는데, 만일 그 날 아침 그처럼 대단한 눈보라가 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까지도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천만 다행히도 하나님이 주신 눈보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 날 아침 눈이 너무 와서 길이 막혀 버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조그만 감리교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 간판은 포병 마을 수구파 감리 교회〈Artillery Street Primitive Methodist Church〉라고 되어 있었다. 예배당에는 이십 명이 채 못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며 목사도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한 초라한 사람, 아마 양복점 직공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두 수선공처럼 보이는 이가 강단 위로 올라갔다. 그 사람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본문을 외어대는 것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준비된 원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이사야 45장 22절이었는데, 그 사람은 본문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성경을 읽어갈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 속에 무언가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스펄젼은 그 작고 초라한 예배당에서 목사도 아닌 평신도의 설교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수선공 같은 사람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합니다. 여기에 ‘앙망하라’고 하였읍니다. 앙망한다는 것, 즉 바라본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어렵거나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기 위해서 한 다리를 든다거나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가 있읍니까? 아닙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대학 같은 곳에 다니며 고등 교육을 받을 필요도 없읍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기도 볼 수 있지요 바로 이와 똑같이 성경 말씀에도 바라보기만 하라고 되어 있읍니다. ‘나를 바라보라’고 하셨읍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했읍니다. 예수를 보십시오. 지금 당장 그를 바라보십시오. 어떤 이는 성령이 역사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읍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나를 바라보라’하셨읍니다.”


힘을 주어 말씀을 전하던 그 사람은 한 순간 숨을 돌리고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나를 바라 보라! 나는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보라, 나는 죽어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승천했다. 나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았다. 오오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 라고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난 그 평신도는 강당 바로 밑에 앉아있던 스펄젼을 바라보았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처음 참석한 스펄젼이 금방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스펄젼을 향해 “청년이여! 당신은 왜 그렇게 가련한 모양을 하고 있소?”라고 물었다. 이 때 비록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외모에 대해 그러한 지적을 받는 것이 처음이었던 스펄젼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뭏든 그 설교자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 설교자는 말을 계속했다. “청년이 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일생 동안 가련할 것이며 죽어서는 더 비참하게 되어 항상 슬피 울 것이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이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소!”


그리고 힘을 주어 그는 말했다.


“청년이여, 예수를 바라보시오! 지금 바라보시오!”


스펄젼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를 바라보았다. 스펄젼은 당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에 꽉 차 있던 구름은 걷히고, 내 영혼에 구원의 빛이 비취었다. 아! 나는 진실로 그를 바라 보았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격에 넘쳐 구주의 귀하신 보혈과 단순하고도 명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송하고 싶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왔던 죄의 무거운 짐이 바로 나의 어깨 위에서 영원히 굴러 떨어져 버렸을 때, 나는 죤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와 같은 환희에 도취되었다. 번연이 자신의 거듭남에 관하여, 넓은 대지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고 외쳤던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스펄젼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구원받은 순간이었다. 나중에 스펄젼은 거듭남의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뉘우침의 포도주 통에서 짜낸 포도주는 실로 값진 것입니다. 회개의 광산에서 채굴한 금이야말로 정금인 것입니다.


깊은 고통의 동굴 속에서 발견된 그러한 진주들이야 말로 참으로 찬란한 것입니다. 깊고도 비통했던 죄의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던 자에게 체득되어진 그러한 영적 체험은 실로 위대한 가치를 띠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정죄를 받고 자기의 목에 오랏줄이 묶여 있었던 자는 죄사함을 받고서 구세주의 보혈로 깨끗이 씻겨져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릴 사람인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나 승리를 쟁취한 하늘의 천천만만 군대 가운데서도, 예수님 때문에 번민해 본 체험이 없이 새로운 마음을 허락받아 죄악에서 돌이켜 변화된 사람이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1850년 1월 6일, 그는 확실히 구원을 받은 후 온종일 성경을 읽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말씀 속에 몰입 되었고 자신의 거듭남이 확실하다는 것을 거듭 느꼈다. 그는 구원받은 지 3주일도 못 되어 확고부동한 결론을 내렸다. 그가 1850년 1월 30일 아버지께 보낸 편지를 살펴보자.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 분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또한 침례(혹은 세례)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침례를 받지 않는다면 전혀 평강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캔트로우(Cantlow)씨가 베푸는 침례 의식이 이 달로 다가왔읍니다. 아버님께 간곡히 동의를 구합니다… 저는 허락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저는 형식과 의식이 결단코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18&D년 4월 6일자 편지)


부모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펄젼은 1850년 어머니의 생일인 5월 3일에 라크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침례를 받은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켓과 바지를 입은 그대로 물 속에 들어갔다. 물에서 나온 후, 나는 내 안에 있던 여러 가지 공포들이 이라크강 속에 잠긴 채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의 계명을 지킨 자에게는 큰 상급이 있다.’”


그 이듬해 16세가 되던 해에 그는 케임브리지학교에 입학한 후, 그 도시 근처 테버샴(Teversham)의 한 작은 집회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첫 설교를 하였다. 청중의 감화력은 매우 커서 그의 명성은 곧 알려졌고, 1852년에는 18세의 나이로 워터비치의 작은 침례교의 목사가 되었다. 1856년에는 한 뮤직홀에서 만여 명을 헤아리는 교인들에게 설교하였으며, 22세 때엔 이미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목사가 되었다.


이 젊은 목사의 평판은 전국에서 화제 거리가 되었다. 그의 설교는 문서화되어 전세계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그 후 40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여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다.


평상시 그는 몇 권의 좋은 전기(傳記) 서적들을 손 가까이에 놓아 두기를 좋아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주님이 지난 날 당신의 종들에게 역사하신 사역에 대한 기록을 살 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