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렌 키에르케고르

(Sören Kierkegaard)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1813. 5. 5
코펜하겐에서 출생.
1831
코펜하겐의 대학에서 신학, 철학 공부.
1838
거듭남을 경험함.
1855. 11. 11
코펜하겐에서 사망.


주요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등 다수.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였던 키에르케고르(‘공동 묘지 라는 뜻)는 1813년 5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루터파에 속한 경건한 가정의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키에르케고르는 태어날 때부터 빈혈이 있었다고 스스로 단정할 만큼 허약한 체질이었고, 어린 시절에 나무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뒤로는 신체적인 열등감마저 있어 그의 우울증은 어렸을 때부터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능은 남달라서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영특하다고 자타가 인정했고 친구들에게도 비뚤어진 오만을 부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미 두뇌가 우수하다는 것을 인식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보다 훨씬 완력이 있는 아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장점이었다. 또 어릴 때부터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지만, 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가 하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특히 아버지의 강렬하고 깊은 종교적인 인격, 특징 있는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리하여 15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고로 견신례를 받았지만 대주교의 경건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을 뿐 그 마음에 믿음의 확신은 없었다.


1831년 18세 때에는 대학에 입학하여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신학과 문학을 공부하였는데, 특히 괴테, 호프만, 세익스피어, 헤겔 등에 심취되었다. 그러나 학생 시절과 청년 시절은 그의 인생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준다고 생각했다.


나이 많은 아버지의 엄격한 지적 교육은 그를 점점 고독하게 했다. 그의 아버지에게는 결코 밝아질 수 없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그것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젊은 시절의 괴로운 과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의 범죄로 인하여 자기 가정에 저주가 임했다고 믿고 있었다. 즉, 소년 시절에 유트란드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것과, 합리화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문제가 바로 자신의 결혼 문제였다. 첫번째 부인이 결혼 2년 후에 자식도 없이 죽은 뒤, 자기 집 하녀로 있던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와 결혼을 한 것이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소년 시절과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된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죄의 대가가 반드시 자기와 온 가족에게 내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미, 그러한 불안은 현실로 나타났다. 형 미카엘이 열 두살에 머리로 다른 아이의 머리를 받고, 그로 인해 죽었다. 3년 후엔 마렌키아스텐 누나가 경련으로 죽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832년부터는 마치 하나님의 형벌이 마구 쏟아지는 것 같았다. 누나 니골리네 그리스티니가 죽은 아이를 낳고 34세에 죽었고, 1년 후인 1833년 9월 21일 25세의 닐스 아드레아스 형이, 10개월 후에는 어머니가 그리고 다섯 달 후에는 33세의 세베리네 누나가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


이렇게 해서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딸 셋과 아들 둘, 아내를 잃었다. 이 일곱 자식을 줌으로써 하나님이 이 가정을 축복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그 중 단지 둘만이 남았던 것이다. 즉 맏아들 페터와 맨 끝의 키에르케고르만이 남았다. 죽은 자식들은 모두 서른 네살을 넘지 못하고 청춘에 죽었던 것이다.


이런 시련으로 아버지의 시름은 엄청나게 짙어 갔고, 키에르케고르는 우울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정말 이 가족은 소멸되어야만 하며 하나님의 손에 말살되어 가야만 하는 것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육체적으로 허약하다는 의식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심한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 즈음의 기록을 보면 이런 심리적 상태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정신적인 천품에 있어서나 내적인 경우에 있어서나 모든 점에서 신의 혜택을 받고 인생을 출발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만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오만한 태도로써 인생을 출발한 것이다. 인간은 그 원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을 내 평생에 잠시도 포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일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를 사로잡고 있는 우울증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보다 우월한 인간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과 또 장차 나보다 나은 인간이 태어나리라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오직 나 혼자만을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인간이었다.”


그가 청년 시대에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경험에 부가하여 아름다운 소녀 레기네와의 만남에 의해서 생긴 고통도 있었다. 그는 이 소녀를 너무나 사랑하여 약혼까지 하였으나 약혼한 다음 날부터 후회하고 있음이 그의 일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나의 참회와 고행적인 삶, 우울, 그것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우울의 정체를 그 여인에게 알도록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저주의 비극에 그녀를 끼어들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후에 그는 그녀를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와 헤어져,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 당시 일기를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나타난다.


“눈물 없이 보낸 날은 하루도 없었다.”

“만일 나의 무덤 위에 묘비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고독한 자’일 것이다.”

“나의 일생은 영원한 밤과 같다.”

“내가 농담을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그러나 나는 울고 있다.”

“목표는 저 높은 산꼭대기에 있다. 나는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돌아볼 것이 없으리라!”


마침내 키에르케고르에게 내적인 성장을 위한 전쟁이 닥쳐왔다. 그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시기를 맞은 것이다. 당시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제일 큰 문제는 ‘영과 육’, ‘시간과 영원’의 이원화 문제였다. 그는 ‘하나의 죄가 전가족 머리 위에 뒤덮여졌음이 확실하다. 삶에서 실패한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으로 사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죄의식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이런 것이 자신의 우울증과 혼합되어 폭음까지 하게 되었다. 마침내 허랑방탕한 생활로 빚쟁이가 되었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떠나 갔고, 나아가 그리스도교에서도 떠났다.


이리하여 그는 종교적 실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신에게 귀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신 앞에 ‘단독자’로서 선 그는, 언제라도 죽고 살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처절하게 고뇌했다.


“비록 세계 전체가 무너질망정 내가 고집하는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뿌리와 연결된 그 무엇에다, 나는 내 실존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야만 한다. 이것이 내게 결핍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찾기 위해 나는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 기적이 일어났다. 자신의 한계와 심한 우울증의 깊은 계곡 속에서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리스도의 음성이 그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았을 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태복음 2: 10)고 했던 것처럼, 그의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무한한 기쁨을 일기 속에 기록하고 있다.


1838년 5월 19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내 마음에 일어나는 무한한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한 환호성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그것은 내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완벽한 환호성이다.


•••나는 내 기쁨에 대해 기뻐하고, 내 기쁨과 더불어 기쁨을 통하여, 기쁨에서, 기쁨 안에서, 기쁨으로 말미암아, 기쁨에, 기쁨을 기뻐한다......


사람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든지 그 노래를 당장에 그치게 하는 하늘의 노래 소리다. 나는 참된 기쁨을 얻어 이제 기뻐한다.”


1838년 7월 6일, 키에르케고르는 혼자서 루터 교회의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몇 개월 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아버지의 죽음이 이 기쁨의 궤도에서 그를 탈선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붙잡힌 것이다. 나면서부터 우울했던 키에르케고르의 생활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이 들어 온 뒤로"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그의 저작 활동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즉, 크리스챤이 될 것인지 지금 그대로 있을 것인지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권위에 관계 없이 말한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선교의 사명을 띤 인물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하여 자기에게 굴러온 목사직까지 거절했다. 그리고 자기의 저서 익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 존재의 다양성을 하나의 체계로 세워 써 나간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기본적 견해에 입각, 헤겔의 논리적인 사상 체계 전체를 공격해 나갔다. 그리하여 이론이 아닌 삶의 주체자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그의 다각적인 연구는 현대 철학의 기저가 되었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가장 큰 오류는 자기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만은 이기주의에서 나온다. 그것의 유일한 치료제는 절망이다. 사람은 극도로 비참한 궁지에, 빠졌을 때에야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고 그 때에야 비로소 자기 신뢰라는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위기 속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어서야 인간은 뉘우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자기의 무력함과 자신이 무엇엔가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실존의 순간’이라고 했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의 실존은 신 앞에서의 단독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체, 현실의 자기는 죽고 신앙적으로 다시 사는 것, 곧 신앙적인 실존이었다. 그는 차원 높은 자기 긍정을 위한 자기 부정을 실제로 체험했다. 이런 죽음에 이르는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절망이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실존하는 주체적인 사상가로서 살았던 그는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체험을 한 이후 많은 핍박과 시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정통만을 주장하고 형식만 남은 여러 교파들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웠고, 성직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열어 준다는 미명하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고 그리스도교를 날조한다고 날카롭게 힐책했다. 그러한 공격은 ‘순간’이라는 작은 잡지의 발행으로 절정에 달했다.


특히 1843년에서 1846년까지 이 3년 동안에는 저작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하루 12시간씩 책을 써 3개월에 평균 한 권씩 썼다 한다. 1854년에는 덴마크의 국교회를 공격하는 많은 저서를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