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복음주의 목사. 고아들의 아버지.
1805. 9. 27 | 프로이센에서 출생 |
1827 | 영국의 틴머스(Teignmouth)에서 비국교파의 목사가 됨. |
1836 | 브리스틀 근처에 고아원 창설. |
만년에 인도와 중국에 전도 여행. | |
1898 | 사망. |
뮐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우상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가 어렸을 적에 장차 축복받은 전도자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10살도 채 안 되어서부터 그는 불신앙과 방탕의 생활을 했다. 그 때를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녀를 세속적인 방법으로 교육한 아버지는 우리들이 돈을 바로 쓰는 방법을 알기도 전에 우리들에게 돈을 주셨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돈을 쓰도록 주신 것이 아니고, 돈을 가지고 있는 일에 익숙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와 형은 많은 죄 가운데로 끌려 들어 갔다. 나는 아무 철없이 쓸데없는 것에 돈을 허비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고를 하라고 하시면 거짓말을 하여 아버지를 속이려고 .노력했다. 속인 것이 들통이 나서 처벌을 받고서도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프러시아 세리(稅吏)였으므로 금고에는 항상 공금이 있었다. 내가 그 공금을 훔쳐내기 시작한 것은 10살도 채 되기 전의 일이었다.”
하루는 죠지가 아버지와 마주 서게 되었다.
“돈을 훔쳐 갔지? 죠지.”
그는 아버지의 눈초리에 움츠러들었다.
“아니어요, 아빠.”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전 돈을 훔치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내가 함정을 만들어 놓았었다. 나는 네가 세금 거두어 놓은 돈을 몰래 가져간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금액을 세어본 후에 이 방에 놓아 두었었다. 그런데 돈이 없어졌으니, 설마 고양이가 가져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아빠가 잘못 세었겠지요 뭐.”
“잘못 세지 않았어. 네가 인정하지 않으면 너를 조사해 보겠다.”
어버지는 죠지의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죠지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구두를 벗어봐.” 아버지는 명령을 내렸다.
“발을 다쳤어요. 구두를 벗으면 발이 아파요”
“잔소리 말고 벗어.”
그는 억지로 구두를 벗었다.
“자 이리 내놔.”
그는 순순히 응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고 바짝 굳어 버렸다.
“바로 이거야. 자, 저기로 가자.”
“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훔치지 않겠어요.”
죠지는 큰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도둑질을 했고 그것도 여러 번 계속했다.
죠지가 14세 되던 해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임종을 맞이하던 날 밤 그는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자정이 넘도록 친구들과 도박을 즐기고 있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는데도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 맥주홀에 가서 술을 마시고 반쯤 취해서 술집을 나와 무작정 길을 걷다가 집에 돌아왔다.
월요일에 그는 견신례를 받기 위하여 루터 교회(Lutheran Church)에 다니면서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무엇이든지 좀더 잘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나의 마음에 아무런 영속적(永續的)인 감명을 주지 못했다. 나는 더욱더 깊이 죄에 빠져 들어 갔다. 나는 견신례를 받기 며칠 전에 중대한 죄를 범했다. 견신례를 받기 직전에 목사를 속인 것이다. 나는 전에 하던 대로 목사님 앞에 내 죄를 고백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 뿐이었고 또 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아버지가 헌금하라고 주신 돈의 12분의 1만을 교회에 바쳤을 뿐이었다. 나는 기도도 하지 않고 진정한 회개도 없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모르면서 견신례를 받았으며 주일에 성만찬에도 참석했다.”
장엄한 의식은 그에게 처음으로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좋은 결심은 곧 무너져 버렸고 금방 잊혀져 또 다시 죄 속에 깊이 빠져갔다.
“나는 이런 죄의 늪 속에서도 때때로 일어나는 종교적인 엄숙한 의식으로 생활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역시 한번 잘못 내디딘 길은 돌이키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깊은 샘에 가서, 도둑질, 도박, 욕설, 방종, 교만 등 모든 죄악은 무엇이든지 씻어 버리려고 했으나 그것도 허사였다.”
죠지는 아버지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금을 몰래 훔쳐내 친구들과 허랑방탕하면서 다 허비했다. 그러다가 돈이 다 떨어져 먹을 것도 없게 되자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떡을 훔쳐 먹기도 했다. 어떤 때는 여관 주인을 속이려다가 발각이 되어 입던 옷까지 전부 빼앗기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밥 먹듯이 하다가 16세 때에 사기죄로 고발 당해 결국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몇 개월의 형무소 생활은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심어 주었다. 감옥을 나온 뮐러는 분노해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집으로 갔다. 뜻밖에도 그의 아버지는 죠지를 사회의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로서 받아들였다. 그 이후 죠지는 아버지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였다. 특히 학교 공부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어 라틴어, 불어, 독어 과목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나는 학교 동급생들의 존경을 받은 동안에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생각지 않았으나 2〜3개월 동안 병 때문에 앓아 누우면서부터는 마음의 슬픈 맛을 참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전과 같이 소설만 읽고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육체의 병에 사로 잡혀 점점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내 영혼은 새로운 삶의 새벽을 재촉하면서도 얼마 동안은 구름에 덮여 빛나는 새벽의 길로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였다.
때때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행위를 고치려고 하였다. 특히 성만찬 때는 그러한 결심을 강하게 했지만 방탕에 젖어 있는 친구들과 만나 지내다 보면 항상 실패하고 말았다. 즉 성찬식 전 날에는 마음과 몸을 삼가서 엄숙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으나 하루만 지나면 다 잊어 버리고 전과 다름없이 나쁜 짓을 하였다.”
드디어 뮐러는 할레 신학교(University of Halle)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도 그는 변함없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돈을 낭비하면서 나날을 보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꿈 같은 생활을 매일 계속하였다. 할레에 있는 9백 명의 신학생 중 십중팔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고 뮐러는 고백하였다. 쓸 돈이 떨어졌을 때 그는 자기의 시계, 의복,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 물건까지 저당잡히고 되는 대로 살아 버렸다. 뮐러는 햇빛을 피하는 박쥐처럼 모든 빛나는 생활에서 눈을 감고, 고통을 느끼면서도 타락의 항구에서 배회하였다.
1825년 6월, 그는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의 결과로 또 다시 병에 걸려 눕게 되었다. 건강 상태가 지독히 악화되어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욕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7월 말쯤 되어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곧 할레 대학의 친구인 베타와 또 다른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나흘간 시골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은 한결 그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여행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흥미를 느끼게 된 그는 스위스로 다시 한번 여행을 가보자고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돈이 다 떨어졌고 또 여권을 준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는 부모님의 편지를 위조해서 여권 수속을 했다. 또 책을 비롯 해서 있는 것은 모조리 전당포에 잡혀서 상당히 많은 돈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다른 때보다도 오히려 넉넉했다. 그의 친구 베타가 큰 역할을 했다.
“8월 18일 우리는 할레를 출발했다. 라기산까지 프랑크푸르트와 루리히를 거쳐 맘껏 다녔다. 43 일간의 여행이었는데 거의 다 걸어다니다시피 했다.
스위스까지 가 보았다는 자랑이 생겼는데도 이상하게 내 맘은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게 있었다. 사실 주님께서 그 동안 위험한 고비와 아슬아슬한 때에도 큰 은혜로 도우시고 인도하셨건만 나는 전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마치 유다처럼 여행에 쓰는 경비를 다 책임지고 다니며 정당하지 않게 돈을 쓰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 난 도둑놈이었다. 친구의 돈의 약 3분의 2정도를 내가 쓰도록 여행 경비를 처리해 나갔던 것이다. 오랜 여행 끝에 결국 우리는 아무리 멋진 경치라도 지겨울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 믿음이라곤 조금도 갖지 못한 채 나는 늘 ‘인생은 이렇게 산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았다.”
그 후 죠지는 할레로 돌아왔고 남은 방학 기간을 집에 서 보내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가 여행 경비를 어떻게 썼느냐고 물었을 때 갖가지 거짓말로 그를 속여야 했다. 아버지는 거기에 관해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약 3 주간 집에서 쉬면서 앞으로는 좀 다르게 살아보고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 결심 때문인지 나는 며칠 동안 근실하게 살았다.”
그러나 또 다른 유혹들이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자 뮐러는 새로운 친구들과 새 환경에 접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멋진 것들이 그를 유혹했다. 그는 자기가 결심했던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즐기는 데 그의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예배당에는 그냥 습관적으로 나갔고 성만찬도 몇 번 참석하였다.
그 당시 그에게 성경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정도의 차이는 약간 있더라도,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이나 안 다니는 사람이나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활을 지속하고 있던 어느 날 그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 놓은 순간이 찾아왔다. 어느 날 오후 죠지는 베타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베타는 죠지 에게 “나는 이제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집회에 참여해 왔어. 그래서 난 거기 가야 해.”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모임인데?” 죠지가 물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하며 기도도 해. 또 인쇄된 설교 내용을 서로 돌아 가면서 읽기도 해.”
그 때 죠지는 베타가 참석하는 모임이라면 꼭 한번 가 고 싶어졌다.
“나도 거기 참석해도 될까?”
“글쎄. 기회가 있을 때 너를 한번 초청하지.”하고 베타가 대답했다. 베타는 죠지의 경솔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은 동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죠지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꼭 따라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 집회는 무역업자 바그너의 집에서 있었는데, 베타가 잘 아는 리치터 박사가 소개해 주어서 매주 토요일 그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베타와 죠지는 함께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같이 앉아서 찬송도 불렀다. 교인 중의 한 사람인 카이저씨가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그리고 성경 한 장을 읽고 인쇄된 설교문을 읽었다.(프러시아에서는 목사가 없는 경우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음) 집회가 끝날 즈음에 찬송가를 부르고 바그너가 기도했다. 그 다음 카이저씨가 다시 기도를 했다.
이 집회에서 죠지 뮐러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모르고 막무가내로 살아왔던 것을 진심으로 회개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나같이 사악한 놈도 사랑하셨다. 그래서 내 죄를 용서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내가 수없이 깨뜨린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뮐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집회에 참석하여 결국 복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집회가 끝난 후 그는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죠지는 베타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밤의 경험은 스위스를 여행할 때 구경했거나 느꼈던, 아니 지금까지 즐기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즐겁고 형언할 수가 없어.” 그 때 베타는 죠지에게 이런 간증을 했다. “나는 열 다섯 살 때 예수님을 만났어. 그러나 그 이후 또 다른 죄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어. 우리들이 여행했을 때 다들 즐거워했지만 난 마음 속 깊이 뭔가 바라고 있던 것이 있었지.”
후에 뮐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날 밤이야말로 내 생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그 날 밤 처음으로 평안하고 행복한 맘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나는 다음 토요일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형제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 다음 날도 또 월요일에도 그 집에 가서 여러 형제들을 만나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일 주일에 두 세 번씩 계속 참여했다. 나의 나쁜 습관들을 한꺼번에 버릴 수는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내 생활은 새롭게 변해 갔다. 못된 친구들을 만나 술집에 가거나 친구들을 속이는 버릇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동료 학생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조소를 당했다. 그들은 그의 생활의 변화는 시인하였으나 그의 말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들이 그를 우롱하거나 슬프게 만들어도 그는 거기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죄 가운데' 살지 않을 것이다. 가끔 죄 가운데 빠진 적도 있지만 그 때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늘 자백한다. 이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살게 되었다. 친구들의 조롱은 내게 상관이 없다.”
이 변화는 그의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의 맨 마지막이 아니라 최초의 작은 발단에 불과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해가 감에 따라 더욱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갔고 많은 사람들, 특히 청년과 아동들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특징은 진실한 신앙과 기도였다. 그는 거듭거듭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헤르만 프랑케의 생애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 30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고아원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 고아원을 시작할 때 준비한 것이라곤 선물받은 접시 세 개, 쟁반 스물 여덟 개, 대야 세 개, 물병 하나, 컵 한 개, 소금병 받침 세 개, 칼 네 개와 포크 네 개, 그리고 채소를 깎는 강판 한 개뿐이었다. 그 후로 62년 동안 750만 달러(한화로 약 30억원) 이상이 그 고아원과 선교인을 위해 보내져 왔지만 뮐러는 한 번도, 또 한 푼이라도 남에게 호소하거나 부탁해서 얻어 오지 않았다. 수만 명의 고아들이 사랑스런 그리스도인들의 보호 아래 지냈으며 그 일은 믿음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믿음을 배워 고아원을 세운 사람도 여러 명이나 된다.(그는 런던을 중심으로 9,975개의 고아원을 돌보았다.)
나이 70세 되던 해 그는 세계 각 곳을 다니며 17년간이나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했다. 가는 곳곳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축복을 나누어 주었다. 뮐러는 하나님이 쓰신 가장 귀한 종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정말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 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