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콜브뤼케

(Hermann F. Kohlbrügge)


네델란드 개혁 교회 목사.


1803. 8. 15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출생.
1828
거듭남을 경험.
1847
‘네델란드의 개혁파’ 목사가 됨.
‘네델란드 개혁파’가 국왕의 특허에 의해 네델란드 국교회가 됨.
1875. 3. 5
프로이센의 엘버펠트에서 사망.


콜브뤼게도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 역시 설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 별안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온전한 변화를 경험하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렬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겸허한 중인이 되었다.


그는 1803년 비누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적부터 여러 가지 신앙적인 감동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이 잘 되지 않고 자녀가 많아 바람 잘 날이 없는 가정일 때문에 종종 고민하면서도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너희 길과 마음의 번민을 다 주님께 맡기어라……”


“일어나라 날이 밝았다. 파수군이 외치고 있다……”


콜브뤼게의 아버지는 때때로 자식을 친구처럼 대해 주면서 함께 찬송도 부르고, 성경을 함께 읽기도 하였다. 콜브뤼게는, 사업과 가정일 때문에 수심이 가득하면서도 함께 놀아 주고 하나님께 함께 찬양드리는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도 아버지를 내조하면서 콜브뤼게가 신실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콜브뤼게에게는 양친 외에도 할머니가 계셨는데, 할머니는 성경의 진리를 그의 영혼 깊숙히 넣어 주셨다. 그가 쓴 글 중에 거기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한 것이 있다.


“나에게는 로이스라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가끔 아름다운 정원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나는 그 정원의 나무 밑에 아름다운 남녀가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 아름다운 두 사람이 아주 흉해져 흰 옷을 입은 사람에 게 정원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았다. 흰 옷 입은 사람은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칼을 손에 들고 그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쫓겨난 후에 이상하게도 내가 쫓겨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 할머니는 돼지 우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돼지 우리에서 잘 생겼으나 배가 고파서 기진맥진한 한 청년을 보았다. 그 청년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었으나,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후 나는 언제나 내가 그 사람 곁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할머니는 나를 말구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구유 속에 누운 어린아기가 나의 왕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나를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의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 ‘저기서 네 왕이 네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단다.’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나에게 그 왕이 살아나오신 무덤을 보여 주셨을 때에 나는 내가 가진 그 어떤 장난감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가 열 살쯤 되었을 무렵 약 2년 동안 거의 눈이 멀었던 적이 있다. 눈병이 생겨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시력마저 완전히 잃어 버릴 뻔했던 것이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가능한 한 눈을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리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시무시한 형벌을 경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콜브뤼게의 생애에 자신을 명백하게 드러내신 첫번째 역사였다. 그 즈음에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좋아해 누군가 그것을 읽어 주면 몇 번이고 경청했다.


마침내 눈병은 완치되었고, ‘한 손에는 불집게, 한 손에는 플라톤’ 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대가 그의 앞에 다가왔다. 이 말은 “일하면서 동시에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라는 의미이다. 책은 그의 좋은 벗이 되었는데 그는 특히 어학을 좋아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히브리어, 시리아어, 아랍어를 습득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사는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의 두번째 역사가 일어났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살림 형편에 큰 타격을 주어 그의 집안은 대단히 어려워졌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특별한 사건 이었다.


“아버지는 임종 자리에서 나를 보고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신학 공부를 계속할 것을 약속하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아버지, 그렇게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제게는 그런 돈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을 물어보고 있는 게 아니야. 나에게 손을 내밀어라.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맹세해라.’


‘아버지, 자 제 손이어요.’


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고 ‘이제야 안심하고 죽을 수가 있겠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돌아가셨다.”


그의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남긴 유언은 그의 뇌리에 잊혀질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꼭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공부를 위한 공부만을 했다. 그래서 과도한 공부 때문에 절대자를 향한 내적인 동경심이 막혀 버렸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도우며 참을성을 가지고 형제 자매들에게 봉사했다. 나는 혹독한 추위에도 난방이 없는 방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한 3년간은 하루도 따뜻한 점심을 먹어 본 일이 없을 만큼 바쁘게 공장에서 감독하는 일을 했다. 나는 밤낮으로 뜨거운 비누 가마 앞에 서서 무거운 철연장으로 천 파운드나 되는 끓는 탄산 가루를 젓기도 했다.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나는 공부를 그만두지 않았다. 나는 매일 밤 거의 4시간도 자지 않았으며 약 14일 동안은 한밤중에 거의 자지 않고 비누 가마 곁에 서 있었던 일도 두 세 번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되어서 무서운 추위 속에서도 불도 없이 며칠 밤을 지새웠다.”


콜브뤼게는 25세까지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 먼 훗날 그는 이 시기에 관해 스스로도 가혹한 비판을 가했는데, 그것은 당시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기독교 신앙을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심히 불안정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전혀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마침내 세번째로 하나님의 결정적인 역사가 그의 인생에 일어났다. 콜브뤼게는 그 당시 점차 확산되고 있던 네델란드의 신앙 부흥 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다. 이 ‘신앙 부흥 운동’이 그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그는 드. 코스타와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토마스 아켐피스와 텔스테겐의 책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탐독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던 해부터 뚜렷한 확신은 없었지만 신학도의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그에게 계시해 주셨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는 그의 거듭남의 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828년 회개에 대하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것에 관한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어두컴컴한 깊은 길, 곧 공포 속에서 성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어떠한 것이 내 마음 속에 깊이 파고 들어왔다. 그것은 번개보다도 더 빠른 것이었다. 나는 내 속에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괴로움 속에서 이사야서 54장 7절에서 10절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오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깊은 평안의 구름이 내 속에 또 내 주위에 있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는 내게서 떠나고 그 이후 나의 모든 것이 달라졌으므로 동년배의 신자들에게는 내가 훨씬 전부터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나는 참 생명으로 나아갔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말씀에 철저했다. 많은 학자들이 너무도 성스러운 내 생활에 걸렸고 내가 그것을 철저히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마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많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사로잡고 움직이셨다.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곧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 거기에는 새로운 역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생활의 변화가 있었다. 그는 충실히 그 생활을 지키고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복음의 충실한 산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