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필마르

(August F. C. Vilmar)


독일 말부르크(Marburg)의 신학 교수.


1800. 11. 21.
독일의 졸츠에서 출생.
1826
거듭남을 경험.
1833-1850
말부르크의 짐나지움의 교장.
1855
말부르크의 신학 교수.
1868. 7. 30
말부르크에서 사망.


“내가 복음을 깨달은 날에 느꼈던 깊은 축복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날 내가 찾은 그것은 루터가 지은 ‘자, 기뻐하라 주의 백성들아’라는 찬송에 이미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다.


‘나는 너의 것, 너는 나의 것.

나의 깨끗함이 너의 죄를 담당했다.

이제 너는 구원되었다.’

내가 받은 그것은 내 영혼의 보배며,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여 영원히 내 곁에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것이 26세 되던 해에 필마르가 경험한 사실이다. 그는 거저 받은 은혜의 풍성함을 한없이 찬송했다.

필마르는 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에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을 겪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막강하기만 하던 나폴레옹의 군대가 무너지는 것도 목격했다. 훗날 그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인가 교훈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폴레옹을 치신 것이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제압하던 당시 예배당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확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 변두리에 사는 몇몇 경건한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참 그리스도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 복음을 깨닫고 참으로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아 가는 그리스도인은 ‘분리주의자’라는 욕을 먹으며 핍박을 받았다.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는 거의 사라지고, 믿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하나님이 가까이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지나간 역사에 나타났던 하나님, 멀리 계신 하나님, 인간의 생각 속에서 만들어 낸 하나님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또 교양 있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도 지극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모든 종교 생활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습관적인 의식과 예배만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통적인 종교 생활은 신뢰할 만한 것이긴 했지만 생명이 없었다. 필마르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미 밤중이 되어서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을 때 별안간 가공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인간의 행위를 의론(議論)하고 위대한 인간 승리를 부르짖은 한 우상을 쳐서 넘어뜨린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신이 한 것이 아니요, 우주와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죽음의 천사와 기근과 지독한 추위를 사용하여 심판을 하신 것이다. 나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사건을 ‘전능한 하나님의 심판’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예배당에는 습관적으로 다니나 하나님의 선한 역사에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시다! 옛날부터 믿어 오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마르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던 두 가지 일을 회상하곤 했다. 한 가지는 목사이신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목사관에 자주 들르던 한 경건한 노파에 관한 일이었다. 그는 할머니의 발 앞에 앉아 그녀와 함께 붕대에 붙어 있는 솜 보무라지를 떼어 내면서 그녀가 들려 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곤 했다. 다른 한 가지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얘기로 필마르의 양친은 그에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 주었다. 필마르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강한 감동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고난을 슬퍼하면서 침대에 파묻혀 흐느껴 울곤 하였다. 필마르는 어렸을 때부터 예배당에도 열심히 다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마도 5살 때라고 기억하는데 매 주일 예배에 두 번씩 출석했다. 아버지를 따라서 지역 교회라도 가게 될 경우에는 세 번 출석했다. 그리고 9살부터는 누가 시키지도 않고, 부탁도 받지 않았는데 성경 구절과 설교 제목, 그리고 간략한 내용까지도 노트에 적었다. 이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는 유년 시절부터 성경 내용에 정통하게 되었다. *견신례(堅信禮)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 성경 강좌에 출석하기 시작했던 12살의 연말에는 성경의 대부분의 장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나는 이 견신례를 위한 준비 교육을 세 번이나 수료했다. 그 일은 지나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도 지루해 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생하면서도 진지했고 아버지는 나에 게 이미 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 옛날부터 알았던 것도 되살려서 참신하게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는 성격이 쾌활한 편이었는데, 특히 노래를 좋아하셔서 우리들을 위해 옛 성가를 자주 불러 주셨다. 가끔 ‘주께 영광 돌려 노래하라, 사람의 말과 천사의 말을 가지고! ’라는 귀절을 노래부를 때면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반짝이는 눈을 내 눈앞에 떠올릴 수 있다.”


어머니의 노래를 들을 때면 어린 필마르는 하늘 위에 사는 사람들의 무리 가운데로 옮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었다. 필마르는 15세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가 어머니의 임종 전 사흘 동안 어머니께 책을 읽어 드린 것은 가슴 속 깊이 남았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머니의 곁에 앉아 융 스틸링(Johann Heinrich Jung Stilling)의 전기를 몇 번이고 거듭 읽었다. 이것은 죽어가는 어머니에게는 진통제가 되었으며, 필마르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된 것이다.


필마르는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 속에 특히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기록이다.


그가 왜 이렇게 일기장에 십자가에 대해 썼는지 자못 궁금한 일이다. 1815년 성령 강림절 세째날 견신례를 받은 필마르는 “나는 오늘 견신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큰 죄에 빠져 다시 십자가를 그리지 않도록 주의깊게 행동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나흘 뒤에 그는 십자가를 다시 일기장에 그려 넣어야 했고, 거기에 “그렇지만…, 그래도…,”라는 말을 써 넣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선(善)으로써 죄를 짓지 않고 착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과 그 속에서 겪는 내적 갈등을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죄를 안 지을 수 없구나)

그래도…(죄를 지을 수밖에 없구나)”


20세가 되자 필마르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말부르크로 갔다. 거기서 그는 확실한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고 확고한 신앙의 기반 위에 서고자 하였다. 또 인내를 가지고 몇 년간 정리한 교의학 노트나 인쇄물들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앞뒤를 세심히 뒤지면서 읽고 또 읽었다. 그 속에서 생명의 양식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생명의 양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실망한 그는 책을 읽는 것을 포기하고 말의 뜻을 따지는 일도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신학의 본질을 연구하는 데만 그 의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신학적인 이론은 그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생명의 양식도 주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필마르의 내적 갈등은 더 심해졌다. 그의 내면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죄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본성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 속 가장 깊은 밑뿌리에 일어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그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듯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저기서 설교를 해야 했고 헷센 지방의 대 가문의 가정 교사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 때의 내적 싸움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크리스마스날 나는 또 다시 설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두세 장의 팔절지에 할 말을 마구 휘갈겨 썼다.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훌륭한 문장으로 꾸며져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또한 평상시에도 몇백 번 몇천 번 읽고 외워서 입버릇이 된 설교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허망한 말들로 가득 차 있어 한 번 더 입에 담으면 구토가 일 정도였다.


또 나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에 맞지 않으며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신성에 관한 교리를 포기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벗어난 차원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어떠한 것도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없었다. 단지 도덕적인 개념만을 설교하고 강조할 뿐이었다. 또한 죄의 교리 및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는 순수한 진리를 증거하는 데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그것도 나의 혐오 대상이 되었다. 죄의 용서는 순수한 의에 대한 나의 생각 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았다.


‘의를 빼버리고도 선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선을 빼버리면 의도 붕괴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과 신약 성경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더욱더 괴로왔던 것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내 사명이 내 자신에게 적합지 않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학대할 때였다.”


그 이후 계속 일어나는 내적 갈등을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외적으로는 성숙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속에서는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었읍니다. 아! 그것은 참으로 승리없는 싸움이었읍니다. 따라서 내 마음 속에는 거의 잠시도 평안이 없었읍니다. 가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그런 때면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나뭇잎처럼 시들어 떨어지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것이 어떠한 상태이건 간에 나는 외적인 자극에 의한 변화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의 영혼이 새롭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결핍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악함과 허물과 죄투성이가 나를 압도하고 마침내 절망에까지 빠뜨려 넣었읍니다. 나에게는 결단과 용기와 힘과 인내가 너무도 결여되어 있읍니다. 나는 거듭거듭 멀리 떨어져 나가는 자신을 봅니다. 그럴 때 나는 가장 음울한 암흑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실히 느낍니다. 자꾸만 음울한 생각을 하며 희망을 포기하고 나를 위하여 죽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있는 영혼이 변화를 받고 죽음을 생각 하는 것과 죽고자 하는 것에서 승리한다면, 그 때에 나는 즐겁고 행복하겠지요. 왜냐하면 신앙은 내 마음의 가장 귀중한 보배이며 나는 분수에 넘치는 행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평안이 없읍니다. 나는 이와 같은 상태에 있읍니다. 나에게 힘과 용기가 주어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나는 언젠가는 나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아, 내가 원하는 내적 소망이 나를 속이지 않기를 원하고 있읍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에베소서 1장을 읽고 있었다. 전에도 이 성경 구절을 많이 읽어 보았지만, 처음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그 능력이 그 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에베소서 1 : 6- 7, 20)


위로부터 빛이 내려와 그를 비추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 날 그는 그 성경 구절들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그 귀한 말씀들을 손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후일에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큰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은 단순히 말이나 아름다운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야, 내가 받은 구원은 영원한 행위이며 능력인 것이지.”


그 후 필마르는 아주 열렬한 그리스도의 증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말부르크의 유명한 신학 교수로서 말과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가 전하는 신학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 견신례 : 신교에서, 세례를 받은 후 신앙 고백을 하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