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하름스

(Claus Harms)


키일의 루터파 신학자.


1778 5. 25
독일의 파르쉬테트에서 출생.
1799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키일대학교에 입학.
1806
독일의 북부 디트마르쉬의 룬텐교회에서 부제로 활동.
1816
키일의 성 니콜라이의 대부제로 임명됨.
1835
성 니콜라이교회의 주임 설교자와 키일의 사제장으로 승진.
1849
실명으로 공직 사임.
1855. 2. 1
키일에서 사망. 


한 권의 책이, 그것도 어느 누구도 그런 책을 생각지도 않았으며, 또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인도한 적이 없는 한 권의 책이 클라우스 하름스를 중생으로 이끌었다. 그 책이 바로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랐을지도 모르나 사실이다. 클라우스 하름스는 그의 목회학 책의 서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이 일을 증언하고 있다. 만약 하름스가 어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지를 잘 안다면, 이 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름스가 성장한 환경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합리주의적인 세계였다. 양친과 함께 매일 가정 예배를 갖고, 식사 전후에 기도를 드렸던 생활 습관에는 일종의 엄숙한 기쁨과 같은 것이 감돌기도 했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이성적인 신앙이 깔려 있었고, 특히 그롤 지도했던 목사는 합리주의에 완전히 심취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인간을 해방하는 진리’를 전해 주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였다. 후에 하름스가 이 궤변을 논하는 합리주의에 대하여 왜 그토록 과격하게 싸웠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젊은 시절 그의 마음은 합리주의로 꽉 틀어막혀 있었다. 온갖 일을 이성으로써 이해하려는 태도 속에 어떤 위험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그는 청년 시절에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조정하는 힘을 그에게 주었다. 심한 천둥 번개가 치던 어느 날, 그는 할머니께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 때 어린 클라우스는 그저 할머니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인상은 결코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은 어린 나이였던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뜻밖의 재난을 만났던 그가 신기하게 구조되었던 일로서 우물 속으로 곤두박질해 떨어져 들어가는 위험한 지경에서 아슬아슬하게 구조를 받았던 일이다. 나이가 든 후에 하름스는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그 우물 곁에 서서 “나는 여기서 분명히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고백했다. 또 그는 앞을 못보는 노인이 된 후에 병상으로 옮겨져 가면서 “나는 선생에게서도 책에서도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을 여기에서 배웠다.”라고 말했다.


클라우스 하름스는 원래 제분업자가 되려고 했다. 그는 젊었을 때에 온갖 힘든 일들을 배우고, 그것을 기쁨으로 했다. 그러던 중 공부할 열성이 생겼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키일로 갔다. 거기서 그는 한 친구를 만나 신앙적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친구는 책 한 권을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을 읽게 된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신앙은 세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더 차원 높은 도덕을 권장하는 수단도 아니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당시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신앙은 인간의 영적인 생활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체험하고 깨닫는 생활 자체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복음 그 자체는 아니었다. 신앙과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많은 일반적 이론이 있었고, 모두가 큰 감동을 받도록 서술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는 통로였다. 합리주의의 광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되었던 것이다.


하름스의 전기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그가 자기 방에서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느 토요일 오전이었다. 그는 하숙집 주인 아줌마에게 자기 방에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서 그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한밤중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읽어 겨우 두 세 시간 잠을 잤을 뿐이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오전 내내 쉬지 않고 읽었다. 그는 당시의 상태를,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서로 충돌을 일으켜 옴쭉달싹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밖으로 나와 키일의 바닷가를 혼자 산책했다. 그곳은 그 도시에서 가장 조용한 길이었다.


“지금은 ‘철학자의 길’이라고 불리는 그 길에서 나는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온갖 합리주의, 온갖 감상주의, 온갖 지식과 행위가 공허한 것이며 무가치하다는 것을 인정했고, 진정한 구원은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 없는 딴 곳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필연성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러면서 주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통과했다. 이것이 내가 새롭게 태어난 순간이었다.”


후일에 하름스가 쉴라이에르마허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박사님 당신은 나의 선배이셨고, 스승이셨읍니다. 내가 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영적인 책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당신의 제자로 있겠읍니다. 나는 그것을 경험했읍니다. 그리고 그 연 월 일 시를 말할 수 있읍니다. 내가 어떻게 경험했느냐 하는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하여 기록해 놓았읍니다.”


그에게 영적 경험이 지나간 뒤 그는 기도로써 성경을 연구하고, 합리주의와 이성적(理性的) 신앙에 대항하여 싸움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