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함만

(Johann G. Hammann)


독일의 철학자,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 교수.


1730쾨니히스베르크(현재 소련의 카리닝그라드)에서 출생.
1746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어학을 공부.
1755실업가가 되기로 결심.
1758. 3. 31거듭남을 경험.
1788사망.


주요 저서
「문학자의 십자군행」
「장미 십자가의 기사」 등.


요한 게오르크 함만만큼 합리주의를 격렬히 반대한 사람도 없었으니,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 속에서, 그는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피력했다. 뿐만 아니라 고금의 온갖 사상을 섭렵한 넓은 시야로 합리주의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도 했다. 함만이 이러한 일을 하기까지는 그가 그 생애에 전환점이 된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하는 사실이 뒷받침되어 있다.


함만은 일종의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생애에 대한 고찰’에서 자신이 내적으로 얼마나 방황하고, 얼마나 갈구했으며, 또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기록했다. 그가 완전히 새롭게 변화한 것은 1758년 3월 31일, 28세 때의 일이었다.


함만은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명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으로부터 내적인 귀한 유산을 물려 받은 그는 조숙한 편이어서 16살에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신학자가 되려는 뜻을 품었지만, 약간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어서 그 길을 포기하고, 언어 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755년 그는 돌연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리가(Riga)의 상인 베렌(Berens)의 집에 머물면서 실업가로서 자기의 꿈을 펼쳐보기로 결심을 했다. 거기서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1756년에는 사업상 네델란드와 영국에 가게 되었다.


그 때 함만은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는 사업에 대해서는 조금도 경험이 없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또 그는 사기꾼들에게 걸려들기 일쑤였고, 특히 현실에 맞지 않는 상술과 너무나 쉽게 사람을 믿어 버리는 성격 때문에, 거의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결국 아무 일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사업가로서는 완전히 실패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마침내 그를 내적인 위기로 몰고 갔다. 거기에 대해서 그 자신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손이 내 머리 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는 길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미지근한 생각을 가지고, 단지 혀끝으로만 하나님을 인정하며, 궁(窮)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그의 도움을 구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뿐, 내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의 위로를 구해도 헛일이었다. 스스로 행복을 누리려고도 힘써 보았다. 현재 나의 생활이 변천하는 과정에 있어서 확실한 길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생활을 반성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익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나는 나의 길을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의 무분별한 소원, 나의 어리석은 성격과 방자한 착상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 깨달아야 했다.”


자신에게 절망하고, 타인에게 실망하며 그는 온갖 유흥으로 줄달음쳐, 닥치는 대로 모든 일을 해 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최후의 탈선으로부터 보호되었다. 나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로 신중히 나를 지켜 보게 하시고, 마치 기적을 일으키시듯 은혜로써 나를 창녀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지켜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일 또 다른 고백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어디서도 안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은 모두 거짓되고, 비열하고, 이기적이었다. 나는 헛되이 먹고 마셨다. 난폭한 생활과 반성, 궤도를 벗어난 생활과 독서, 나태한 생활과 근면, 어느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무절제한 생활은 계속 반복되었고 모든 것은 헛일이었다.”


여기서 ‘부질없다, 헛일이었다’라는 말이 되풀이해서 나오는 것은 퍽 인상적인 일로서, 그가 얼마나 번민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신 것이다.


1758년 2월, 그는 어떤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 곳에서 비로소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만났다.(그는 당시에 매달 주거를 옮겼다) 그는 여지껏 그를 유혹하고, 날이 갈수록 나쁜 영향을 끼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독서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겨우 주먹만한 교훈과 실오라기 같은 빛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 때 손에 잡은 것이 성경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새로운 생활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엄습해 오는 고민 때문에 이따금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 착잡한 고민 속에서 나는 현명하고 성실한 벗을 내게 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성실한 친구는 커녕 거짓된 우정의 쓴 잔이었고, 비교적 선량한 벗도 그렇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충분히 맛보았을 뿐이다. 내 마음을 여는 열쇠, 내가 '빠져 있는 미궁으로부터 나를 이끌어내 줄 만한 벗이라고는 실로 내가 품은 갈급한 소원, 그것뿐이었다. 나는 그 소원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했고, 더듬어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내가 그 친구를 발견한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었다.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새로운 것이 되었고, 나는 그 내용과 능력이 더 말할 나위 없이 귀한 것임을 점 점 더 깨닫게 되었다. 그 때문에 다른 모든 책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경과 같은 대열에 놓고, 성경보다 다른 책들을 선택했던 지난 날이 부끄러웠다. 나는 하나님의 뜻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통일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노예 상태에서, 맹목과 어리석음과 죄의 멸망에서 건져 내어 최대의 행복, 최상의 축복을 주기 위해, 그리고 이토록 귀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 온갖 얘기, 온갖 기적, 온갖 훈계, 온갖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는 사실, 혹은 그것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될 가능성도 없다는 데에 놀라기보다는, 그 은혜의 풍성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1758년 3월 31일을 그의 생애에 있어서 결정적인 날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그날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만나 주셨고, 하나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 때 그는 신명기 5장을 읽고 있었다.


“그 때에 나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의 지극히 연약함, 내가 이제껏 하나님의 증언과 그 일하심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오랜 반항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과 우리들의 유일한 구주에 대해 점점 더 깊이 나에게 계시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인도하셨던 것이다.”


그 때 그의 마음 속으로 기쁨이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느끼고, 그것을 고백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 기쁨은 온갖 공포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은혜, 값진 진주, 상급(이것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에 살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나의 전생애를 지배하고 계심을 어떻게 더 이상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 목적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나는 내 자신을, 지혜로우시고 홀로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겼다. 의미없는 생활의 부패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부인할 까닭이 없었다. 또 내 생활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나 자신과 부모 형제들을 위해서 기록했다.


나는이 생각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또 나 자신과 얘기했다. 내 자신의 생활을 보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을 고발하고 폭로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홀로 선하신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있다. 하나님은 나를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쏟아 부으셨다. 그것은 내가 너무 부풀어 올라 구제불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만사가 우리에게 역사하여 선을 이루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 님을 찬미하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나는 거듭 말한다)


나의 건강과 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내가 선해지는 것, 내가 하나님의 쓰심에 소용 있는 자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으셨다는 표적이며 징조이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나의 마음을 구하십니다. 나의 마음은 맹목적이고, 돌처럼 단단하고, 이지러져 있고, 완악합니다. 나의 마음을 정결케 해 주십시오. 새롭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성령의 작업장으로 삼아 주십시오. 나의 마음은 수없이 나를 기만했읍니다. 그것을 내 마음이라고 인정할 수 없을 정도였읍니다. 그것 은 당신만이 능히 제어하실 수 있는 *레비아탄이었읍니다. 당신이 그 속에 들어와 계심으로써만이 내 마음은 안식과 위안과 축복을 즐길 수 있읍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읽으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게 된다. 함만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여 자기 고집과 오만 속에 스스로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결과 중대한 내적 위기에 봉착해 버렸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생활과 사상의 절대적인 구심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쓸 수가 있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 버렸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나타나 주셨다. 그 분은 모든 지혜와 능력과 도리와 분변으로 충만한 분이셨다. 심장의 고동이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멈출 수가 없듯이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정지할 수 없는 운동의 원천이시며 온갖 힘의 주인이시다.”


이 거듭남의 경험이 단순히 일시적인 경험만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함만의 그 후의 생활이 입증하고 있다. 다음에 두 세 가지의 예를 든다면 ;


첫째, 함만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성경에 의하여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한 해석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성경에 관한 명상을 썼다.


둘째, 함만은 그의 새로운 주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이 일은 그가 리가에 돌아온 후 곧 베렌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사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실한 마음과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행해진 것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각기 자기의 길을 가야만 했다. 함만은 예수를 좇는 길을 택하여 갔다.


셋째, 함만은 그 후의 생애의 고난을(그가 그리로 이끌려 간 외적 곤란도 포함해서) 침착함과 내적 평안을 가지고 참고 견디었다. 그는 실제로 자주 엄청난 굴욕의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단순한 하급 관리로서, 또 창고 관리인으로서 그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상관으로부터 오는 많은 어려운 명령과 까다로운 트집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조용히 받아서 그것을 자기를 위하여 유익이 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로부터 ‘북쪽 나라의 현자’라고 불리웠다. 그는 칸트를 비롯한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과 나란히 일컬음을 받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다만 그들과 다른 점은 그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깨달은 증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많은 편지와 문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서 찬양했던 것이다.


이상의 일들은 모두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았던들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거듭남으로 해서 외견상으로는 인생의 파선이 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생명의 항구를 발견했고, 거기서 환희와 능력이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출발한 것이다.

* 레비아탄 = 리바이어던 (Leviathan)    

① 구약 성서 욥기 41장에 나오는 지상 최대의 강대한 수서 동물.

② 영국 흡즈가 지은 저서 명. 1651년에 간행된 책으로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인공적 인간에 비유하여 국가 유기체를 설명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