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진젠도르프

(Ludwig Zinzendorf)


독일의 형제단 창설자. 모라비아파의 리더.


1700. 5. 26
독일 작센 지방의 드레스덴에서 출생.
1700-1716
할레의 페다고기움에서 중등 교육을 받음.
1716
비텐베르크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함.
1719
거듭남을 경험.
1721
드레스덴에서 변호사로 활동.
1737
형제단 창설.
1760
헤른후트에서 사망.


작품으로서 헤른후트의 찬미가가 다수 있음.

대학을 갓 졸업한 19세의 청년이 견문을 넓히고 사회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독일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 청년은 뒤셀도르프의 어느 미술관을 구경하러 갔다가 문득 한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 그림에서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그 그림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여져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하였노라.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All this I did for you. what are you doing for me?)”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과 위와 같은 글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의 마음에 뜨거운 변화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그 청년의 마음을 두드린 것이다. 그 때 청년은 그림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죄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 자기는 값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청년이 바로 18세기 독일 복음주의 운동의 구심체로서 활약을 했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리더 진젠도르프 백작이었다.


진젠도르프는 1700년 5월 26일 독일의 작센주 내각 의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작인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난지 6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4세 되던 해에 모친이 재혼하게 되자 진젠도르프는 외조모인 게르스도르프 남작 부인으로부터 양육을 받았다.


그의 외조모와 숙모가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고 믿음을 지켜왔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하였다. 특히 진젠도르프를 가르친 가정 교사도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크리스챤이었다.


“할머니 집에서 살 때 나를 감명시킨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일곱살이었는데, 3년 동안 나를 가르쳐 온 가정 교사 에데링크씨가 저녁 기도 시간에 작별 인사를 하면서 주님의 미쁘심에 대하여 아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한참 동안 울었고,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이 때 나를 극진히 사랑해 주셨던 숙모 안리엣트가 이러한 나의 생각을 지지해 주었다.” 하고 진젠도르프는 회고했다.


이런 주변의 분위기 탓인지 어린 진젠도르프는 자나 깨나 그리스도를 좇는 생각에 꽉 차 있었고,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은 예수님을 극히 사모한 나머지 예수님께 편지를 써서 창가에서 하늘로 던졌는데, 어린 진젠도르프는 그리스도께서 그 편지를 읽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고 한다.


16세에 비텐베르크대학에 입학한 진젠도르프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열심을 지속시키기 위해 신학 공부에 전념하려 하였다. 그러나 숙부인 오토 진젠도르프 백작을 위시하여 주위의 친척들이 모두 반대하였고, 그에게 신앙을 갖도록 인도해 준 외조모까지도 그가 귀족으로서 일개 설교자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척들 몰래 신학을 연구했다.


드디어 그는 1719년 대학을 졸업하고 전국 여행을 하던 중 뒤셀도르프시 미술관에 들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중생을 경험했던 것이다. 진젠도르프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마음을 가지는 것의 차이를 나중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무도 예수를 찬양하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예수를 따르고 그와 같이 살며 또 죽고자 결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알고 나는 그를 그 무엇보다도 높이 우러렀다. 창조주가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것보다 더 뛰어난 일이다. 이 일이 바로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것은 결코 신학적인 증명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은 다만 그리스도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기만 하면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참되심을 보여 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자기의 약속을 꼭 지키신다. 그것은 믿고 의지할 만한 말씀이다.”


진젠도르프의 마음을 변화시킨 그 그림이 어떻게 완성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화창한 봄날 화가 스텐버그는 뒤셀도르프시 교외의 숲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 때 짚시 소녀가 옆구리에 바구니를 끼고 지나갔다.


스텐버그는 집시들 가운데서도 뛰어나게 용모가 아리따운 소녀에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자기가 창작 중에 있는 ‘스페인의 무녀’란 그림의 모델로 정할 것을 결심하고 교섭한 결과, 일 주일에 세 번씩 자기의 아뜨리에로 불러 들이게 되었다.


아뜨리에에 온 소녀 페피타는 눈을 휘둥거리며 화실에 진열된 많은 그림들을 보고 놀라와 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는 한 폭의 그림에 이르러서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스텐버그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여요?”


“그리스도야.” 스텐버그는 무심히 대답했다.


“그리스도를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거여요?”


“십자가에 못 박는거야.”


“옆에 둘러선 저 악한 같이 뵈는 사람들은 누구여요?”


“페피타. 지금은 바빠서 얘기할 수 없어. 넌 그저 내가 말한 대로 그렇게 서 있기만 해줘.”


소녀는 그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그 그림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아뜨리에에 올 때마다 유독 그 그림만이 소녀의 눈에 뜨이는 것 같았다. 하루는 참다 못한 듯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십자가에 못 박고 있어요? 아주 나쁜 사람인가 보죠?”


“아냐. 아주 착한 사람야.”


소녀가 너무 알고 싶어 했으므로, 스텐버그는 “한 번만 얘기해 줄 테니 잘 들어두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묻지마.”라고 말하면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너무 오래된 얘기여서 이 화가에겐 아무 흥미조차 없는 일이었으나 소녀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또 신기한 사실이었다.


이야기를 끝낸 스텐버그는 그냥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녀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와져 눈에는 어느덧 구슬 같은 눈물이 아롱져 있었다.


마지막 날 페피타는 그 십자가의 그림을 쳐다보며 작별을 못내 아쉬워했다.


“수고해 줘서 고마와. 자, 이건 네게 주는 사례금이야.” 하고 화가는 은전 몇 닢을 꺼내어 소녀에게 쥐어 주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소녀는 납죽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대뜸, “그런데 아저씨, 그리스도라는 분이 아저씨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하셨는데 아저씬 저 분을 퍽 사랑하시겠네요.”했다. 화가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페피타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소녀의 말은 무딘 화가의 마음을 깊숙히 찔러 놓고야 말았다.


‘아저씨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하셨는데…’ 이 말이 그의 귓전에서 맴돌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자신도 슬픔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일찌기 그리스도를 사랑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톨릭 교회는 그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고 괴로움도 덜어 주지 못했다. 사교(司敎)도 신부도 하나님의 평안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화가는 그 뒤에 은밀한 곳에서 성경을 읽었고 그러던 어느 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집회 장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참다운 신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구원의 말씀, 곧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자기의 죄를 지고 가신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심령으로부터의 절규를 그도 부르짖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남들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이것이 문제이다’. 그렇다, 그림으로 하자. 나의 화필로써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제까지는 다해 보지 못한 최선의 정력을 다해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뒤셀도르프시 미술관에 전시하고 그 밑에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하였노라.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 라는 제목을 달았다.

어느 날 화가는 한 초라한 집시 소녀가 그 그림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페피타였다.


“선생님, 예수님이 나까지도 저렇게 사랑해 주신 걸까요…” 소녀는 부르짖었다. 예수님은 돈 많은 사람이나 이름 있는 이를 위해서 뿐 아니라 가난하고 외로운 집시 소녀를 위해서도 죽으신 사실을 화가는 설명했다. 이번에는 화가 자신이 자청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얘기할 수 있음은 그 자신이 직접 구원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즉시 믿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읍(感泣)하면서 돌아갔다. 하나님은 페피타를 통하여 화가를 구원하시고 다시 화가를 통하여 페피타를 구하신 것이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밤 스텐버그에게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좀 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따라 시골길을 더듬어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니 빈한(貧寒)한 천막이 서넛 세워져 있었다. 그 중의 한 천막 속에 누워 이 화가를 부른 주인공은 바로 소녀 페피타였다. 소녀는 아무 근심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사랑하시는 구주께서 자기의 모든 죄를 지시고 영원히 살 길을 주셔서 이제는 영원히 함께 지내시려고 자기를 불러 가시는 데 대한 감사와 기쁨과 평안뿐이었다. 화가는 여기서 이와 같이 소녀의 임종을 지켜 본 것이다.


그 후 이 화가도 주님 곁으로 갔으나 그 그림만은 그 미술관에 언제나 걸려 있었다. 그 그림과 그림 밑에 적힌 글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인도되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진젠도르프 백작이었던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진젠도르프는 친척들의 강한 권고로 작센주의 사법관에 취임하였다. 그 후 그는 프레데릭(Frederick) 남작, 로테 (Rothe) 목사, 쉐퍼 (Schäfer)와 함께 ‘사형제 언약 (Covenant of the Four Brethren)’을 맺고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유럽 각 지에 전도소를 세우고 순회하는 전도자를 파견하였으며 신앙 서적을 출판하여 먼 곳에 흩어져 있는 구도자(求道者)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드디어 1737년 진젠도르프는 관직을 그만두고 안수를 받아 모리비아파의 감독이 되었고 형제단(兄弟ffl)을 창설했다. 그의 생활은 매일 기도와 예배였고 노동에 전심 전력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움직여 일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자기 재산을 다 내어 놓고 핍박받는 전도인들을 도왔으며 폭풍에 피해 갈 수 있도록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다. 각 처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피부의 색깔이나 종파를 초월한 모임이 되어 버렸다.


진젠도르프는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 정부와 영국 국회를 움직여 ‘형제단’을 승인하도록 했으며, 해외 선교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던 그 당시에도 100여 명이나 되는 선교사를 세계 각처에 파송하였다. 특히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 요한 웨슬레가 이 모라비아 교파를 통해 구원을 받은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