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경건주의의 지도자, 할레(Halle)대학 신학 교수,
프랑케 교단 창설자.
1663. 3. 12 | 독일의 뤼백에서 출생. |
1685 |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 받음. |
1687 | 뤼네베르크에서 거듭남을 경험. |
1692 | 할레대학에서 강의. |
1695 |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목사관에 임시 학교 설치. |
1698 | 정식 신학 교수로 임명됨. |
당시 최대의 고아원 및 유치원 설립. | |
1727. 6. 8 | 할레에서 사망. |
프랑케의 젊은 시절에 대한 많은 기록들은 그의 생애를 아는 데 충분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그는 14살에 상급 학교로 바로 진학할 수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학자금을 충분히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수학하는 데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여러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자기가 듣고 싶은 교수의 강의를 찾아 다니며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에어푸르트 키일, 함부르크, 라이프찌히 등지에서 생활했다. 키일에서는 두세 번 정도 설교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도 했고, 함부르크에서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6번이나 철저히 연구했다. 라이프찌히에서 살 땐 학생들이 모여 성경 공부를 하는 성경 연구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많은 글을 썼고, 대학의 강의를 듣고 부지런히 노트를 만드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바쁜 생활이 마음에 안정과 평안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상태에 전혀 만족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내적인 성장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강한 욕구가 있었다. 열 두살 때 그는 어머니에게 “저 혼자만을 위한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는 소원을 말했다. “왜 그런 방이 필요하단 말이냐?”라고 그의 어머니가 묻자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거기서 조용히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라고 대답 했다고 한다.
프랑케에게는 그의 내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는 누나가 있었다. 누나는 그에게 성경 전체를 설명해 주기도 하고, 죤 아른트(John Arndt)가 지은 ‘진정한 기독교’를 여러 번 읽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적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성했다.
“나는 성경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지독한 위선자에 불과했다. 물론 교회에 다니고, 고해 성사를 하고 성만찬에도 참예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를 하고, 토론을 하고, 좋은 책들을 읽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로부터 나는 어떤 힘도 얻지 못했다. 머리로는 신학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산 지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죽은 학문에 불과했다. 나는 신앙, 거듭남, 의인, 주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었다. 이 단어들의 서로 다른 점을 구별하고, 그것을 성경 말씀으로 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이것들을 지식적으로는 증명도 하고 설명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내 마음에 평안을 주지는 못했다. 그것들은 다만 기억 속에 떠돌고 있는 허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분투했다. “나는 가끔씩 무릎을 끓고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과 개심(改心)을 맹세하는 기도를 열심히 했지만, 그것은 단지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열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 의롭게 사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내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다. 나는 극심한 불안과 비참한 공포 속에 있으면서도 이와 같은 불안의 원인을 고백하고, 하나님 안에서 참 평화를 진정으로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스물 네살이나 되었지만 잎사귀만 무성하고 악한 열매밖에 맺지 못하는 나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대단히 좋아했고, 따라서 나는 그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도 나를 사랑했다. 그러므로 박해를 받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교인들 사이에서는 외형적으로라도 신자 답게 행동했고, 불신자들에게는 사실상 불신자 생활을 하여 세상과 요령 있게 어울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에게 1687년은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루네부르크를 방문한 프랑케에게 그 시의 교구장이 설교를 부탁하자, 거절할 수 없었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이 설교 주제로 택해졌다.
“나는 이 성구를 통해서 진정한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 신앙이 인간의 독선적인 머리로만 이해되는 신앙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나의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높은 탑에 올라가 시가지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나의 생활 전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내 죄들이 낱낱이 드러났고, 한낱 속임수에 불과한 거짓 신앙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들에게 속았고, 모든 것은 혐오스러운 죄임을 분명하게 안 것이다.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했고 두려웠다.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던 나였지만,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울거나 기분이 몹시 나쁠 때는 이리저리 걸어다녔고, 때로는 무릎을 끓고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다. ‘만약에 참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그는 설교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런 상태로는 강단에 올라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의 생활에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그 일요일 밤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그 때까지도 모르고 있던 신을 향해 ‘만일 당신이 참으로 존재한다면 나를 이처럼 처량한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옵소서’라 고 부르짖었다. 그 순간 내가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그 때에 살아 계신 주 하나님께서 그 거룩하신 보좌에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으로, 의혹과 불안으로부터 나를 건져내 주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진실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자가 없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했다.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라고도 불렀다. 마음의 슬픔과 불안이 순식간에 사라짐과 동시에 기쁨이 넘쳐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였던 것이다. 큰 고통과 의혹을 가지고 무릎을 꿇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일어섰다. 몸을 굽혔을 때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 믿고 있지 않았었지만, 일어섰을 때에는 아무런 두려움도 의심도 없이,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피를 쏟는다 해도 그것을 확증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뿐인 자연인으로서의 생활과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 가운데 사는 삶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이 은혜를 경험한 자 외에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으리요. 또한 이전에는 죽어 있었던 내가 이제는 다시 살아났으니, 이와 같은 기분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내가 전생애 동안 깊은 잠에 취하여 있다가 이제 그러한 상태에서 깨어난 것과 같았다. 잠자리에 든 이후에도 나는 너무 기뻐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잠깐 붙였으나 곧 깨어나서, 자신을 내 마음에 나타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또한 혼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는 흡족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이제 프랑케는 굉장한 기쁨을 가지고 설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해진 것은 그의 생활 속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산 신앙이 없는, 즉 거듭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박해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 경험이 지나간 후 나는 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떻게 다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얼마 못가서 나를 미워하고, 대적하고, 내 행위에 혐오와 불쾌함을 느끼고, 나에 대해 많은 불평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순종하며 진지하게 그리스도께 나아가려는 나를 중상모략했다.”
그러나 프랑케는 자기가 밝히 깨달은 길에서 벗어나는 일을 결코 행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할레(Halle)의 유명한 교육 기관의 원장이 되었고, 슈페너(Spener)의 뒤를 이어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또 강의와 설교 및 학생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서 그는 사람들의 영적인 생활을 돌보았다. 1696년쯤에는 고아원을 세워 가난한 학생들로 고아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여 기숙사를 제공하는 등 고아뿐만 아니라 불우한 학생까지도 함께 도왔다.
그의 이름과 함께 연상되는 것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예수를 본받아 살며,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학생들을 축복하는 자가 된 모습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목회자로서, 교사로서,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다른 어떠한 사람도 갖지 못했던 광범위한 전도 활동을 행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