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낳은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블레즈 파스칼은 31세 때인 1654년 11월 23일 밤 열시 반에서 영시 반 사이에 하나님의 구원의 빛으로 말미암아 거듭남을 경험했다.
그의 아버지 엔치엔느 파스칼은 신실한 카톨릭 교도였으므로, 파스칼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었고 종교 교육도 받은 바 있다. 엔치엔느 파스칼은 고향 클레르몽에서 징세관(徵稅官)을 지내다 가족들과 함께 파리로 이사 온 후에는 르왕 지방의 관세 및 재산세 징수 감독관을 맡았다. 그는 대귀족(大貴族)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지적인 소양(素養)이 깊고, 수학 • 물리학에 대해서도 일가견(一家見)을 가지고 있는 지방 유지의 한 사람이었다.
파스칼이 3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죽었지만, 파스칼의 아버지는 그 이후로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자녀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보람이 있었음인지 파스칼은 11세 때 ‘음향론’이라는 최초의 논문을 썼고, 16세 때에는 원추곡선론(圓錐曲線論, Essai pour les coniques)을 발표하여 당대의 수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그가 파리에서 페르마(Fermat), 로베르발(Roberval), 데자르그(Desargnes), 그리고 데카르트(Descartes) 등 당대의 대수학자나 석학들을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다.
어머니가 계시지는 않았지만 안정되어 있던 가정에 1646년 1월 어느 날 불의의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빙상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이 무렵 파스칼의 집에서 묵고 있던 두 신사가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였으며, 그들이 잘 아는 의사 데상(Deschamps)을 불러 아버지의 치료를 부탁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파스칼마저 그 즈음에 심한 병을 앓아 하반신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러 목발에 의지하지 않으면 보행조차도 어렵게 되었다. 누이 자끌린느는 ‘오빠는 더운 물밖에, 그것도 한 방울씩밖에는 마시지 못했다’고 후술했다. 파스칼 자신도 ‘열 여덟 살 이후부터는 하루도 고통없는 날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손님들은 파스칼 일가에게 *쟝세니우스(Janśenius), 생 시랑(Saint —Cyran), 아르노(Amauld) 등의 저서들을 읽으라고 권유하였고, 인생에 대한 회의가 있었던 파스칼은 신앙 문제에 접하자 크게 관심을 보였다. 특히 ‘내면적 인간의 개혁에 관한 쟝세니우스의 교설’이라는 책을 통해 파스칼은 신에게 귀의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 목표가 학문의 진리가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한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파스칼이 처음으로 영적인 결심을 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참 빛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런 결심도 오래 가진 못했다. 의사의 권유로 파리의 사교계를 자주 출입하게 됨에 따라 23세에 가졌던 종교적 감격은 거의 사라지고 점점 향락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교 생활에도 한계가 있었다. 한때 즐거워 보이던 그 생활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면서 그는 곧 혼돈과 혼미 속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생활에 대한 혐오(嫌惡)와 멸시가 생기고, 과거에 그를 미혹했던 모든 연락(宴樂)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그의 영혼은 깊은 수렁을 헤매었다. 그는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이것을 ‘신을 떠난 인간의 비극’ 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공허를 채워 보고자 수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여기에 진리가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마음을 채워 주진 못 했다. 외적 사물에 관한 학문은 고뇌할 때의 영적인 위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은 길은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파스칼은 그 누이 동생이 수녀로 있는 폴 로와이얄수도원에 빈번히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 속에서는 ‘쾌락이냐 신앙이냐, 세속이냐 신이냐’ 하는 새로운 갈등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고민 끝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1654년 11월 23일 밤의 거듭남의 경험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 안주머니 속에 끼워 넣고 다녔던 양피지(羊皮紙) 조각이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확신(確信), 감격, 환희,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는 너희의 아버지.
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 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 버리다.
그는 복음의 예비된 길로만 나타난다.
사람의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은 전혀 아버지를 모르나 나는
아버지를 아나이다.
환희(歡喜), 환희, 환희의 눈물.
나는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고,
생명의 근원인 주님을 버렸었도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원컨대, 나 영원히 주를 떠나지 않으리.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 그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음이여.
나 그를 피하고, 버리고, 십자가에 매달았도다.
원컨대, 나 영원히 주를 떠나지 않으리.
그는 복음의 예비된 길로만 나타난다.
이 땅에서 한 날의 괴로움이 영원한 기쁨으로 변하다.
나는 주의 말씀을 잊지 않으리. 아멘.”
이 감격스러운 날이야말로 파스칼의 인생 행로를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파스칼은 폴 로와이얄수도원에 들어가 경건한 성직자들과 함께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는 그들과 함께 일을 하고 때때로 금식하였으며 밤을 새워가며 기도도 하였다.
“모든 쾌락과 모든 사치를 물리치라”는 것이 그의 생활 신조였다. 말과 마치를 팔았고 장식품이나 귀금속도 다 처리하였다. 음식은 나무 젓가락으로 먹고 식기는 토기를 사용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책들도 신앙에 관계되는 것 외에는 모두 남에게 주어 버렸다.
얼마 후 로마 교황청이 쟝세니우스파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때 파스칼은 제수이트 교단을 공격하고 쟝세니우스파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그 것은 ‘전원(田園)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으며 쉽고 풍자적으로 씌어졌다.
이 글이 발표되자 독자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었고, 파스칼은 이같은 소책자를 18권이나 저술함으로써 대중을 매혹시켰다. 그 뒤 파스칼은 무신론자와 자유 사상가들을 공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떠오르는 생각을 작은 메모지에 적기도 했고 스스로 글을 쓰기가 힘들 때에는 그의 조카나 하인을 시켜 적도록 불러 주기도 하였다. 파스칼은 이 글들을 편집할 만한 힘도 없이 1662년 39살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죽기 전, 왜 영원한 구원이나 영생을 믿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만일 내 말이 옳지 않고, 우리가 죽은 후에 내세(천국과 지옥)가 없다 해도 나는 결코 손해 본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이 옳고 우리가 죽은 후 내세가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가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