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칼빈

(John Calvin)


프랑스 종교 개혁자, 신학자.


1509. 7. 10
프랑스의 북부 피카르디 지방 노와용에서 출생.
1523
마르쉬대학과 몽테귀대학에서 인문 과학을 수학함.
1532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를 공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음.
1533
돌연한 중생으로 복음주의(福音主義)의 입장을 명확히 밝힘.
1536
스위스 바젤로 도피하여 「그리스도교 강요」저술. 제네바로 망명하였으나 축출당함.
1539
제네바에서 초빙. 이 때부터 제네바는 그의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됨.
1564. 5. 27
제네바에서 사망.


주요 저서
「그리스도교 강해」
「로마서 주해」
「교회 규율」등.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칼빈을 뽑는 데에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과 말과 행동 등 모든 것을 뒤바꿔 놓은 거듭남의 체험은 너무도 갑작스런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러나 칼빈의 중생의 체험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어서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데 큰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칼빈이 당대에 빼놓을 수 없는 현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밖의 사항은 유감스럽게도 극히 조금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매우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엄격한 면도 지니고 있어 만년에는 단호한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평생 동안 은유하고 독실한 성품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과 교회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사랑했다. 당시의 어떤 이름 있는 의사는 그를 ‘유럽 최대의 학자’라고까지 극찬했다. 어쨌든 칼빈은 깊이 있는 학자였다.


이러한 말을 듣게 된 배후에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정신적인 인고(忍苦)가 있었다.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까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빈은 14세 때에 파리에 있는 마르쉬대학과 몽테귀대학에서 신학과 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학 시절은 초라했고, 건강마저도 아주 좋지 않았지만, 그는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원래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칼빈은 아버지에 대해 지극히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신학 공부를 단념하였다. 칼빈은 그 때의 마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를 신학자로 키우고 싶은 꿈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법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비교적 잘 살게 되는 것을 아시고, 급히 그 계획을 변경하시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법률학을 공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28년 그는 아버지로부터 신학에서 법학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받고 진로를 변경했다. 이후 칼빈은 오를레안 (Orleans)과 부르쥐(Bourges)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법률학뿐 아니라 그 외의 학문도 닥치는 대로 공부해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였고, 놀라운 정력으로써 온갖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는 동안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나 1531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와야 했다.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점점 퍼져서 바야흐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칼빈은 카톨릭 교회야말로 구원을 주는 유일한 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완강하게 그것에 대항했고, 전력을 다하여 카톨릭 교회를 옹호했다. 그렇지만 다른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적인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에라스무스의 저서를 탐독하기도 했다. 그리고 돌연히 그의 생애의 큰 전환기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 이후로 종교 개혁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가 갑자기 로마 카톨릭을 반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16세기 당시 프랑스에는 여러 부류의 복음주의자들이 있었다. 프랑스 종교 개혁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레페브르(Lefevre) 교수를 비롯하여,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한 에라스무스, 헬라어로 된 신약 성서와 히브리어 구약 성서의 연구 붐을 일으킨 라벨레(Rabelais) 등을 중심으로 개혁 사상이 퍼져 나갔고, 이들을 따르는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칼빈이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프랑스왕 프란시스(Francis) 1세와 신성 로마 황제인 찰스 5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프랑스왕이 참패를 당해 마드리드로 체포되어 가기까지 했는데 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프랑스 국민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였다.


이 책임은 곧 이교도들에게 돌려졌고, 카톨릭 미사 중에, 프랑스 국민의 고통에 대한 속죄양으로 신교도들이 처벌되어야 한다는 기도가 드려졌다. 그리하여 1525년 경에 이단자의 화형식이 늘어났는데, 어느 날 칼빈은 광장에서 거행된 이단자의 화형식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순교자의 얼굴에 평화의 빛이 반짝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원래 신학에 뜻을 두고 여러 학문을 맹렬하게 공부하고 있던 칼빈은 그의 마음 속에 이는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시대에 있었던 모든 종교적인 문제들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칼빈의 사촌인 올리베탄은 프란시스코 교단을 이탈하고 프랑스어역 성서를 낸 개혁주의자로 칼빈의 신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칼빈에게 헬라어를 가르친 볼마르(Wolmar) 역시 루터의 신앙을 좇는 개혁 주의자였다.


그러나 칼빈이 심각한 내적인 갈등을 겪고 구원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은, 그가 법률 공부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1531년 이후였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개혁주의자들과 만나 ‘내적인 빛’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1533 년 어느 날 드디어 하나님의 빛이 그의 마음의 모든 의심을 걷히게 한 순간이 왔다. 그가 ‘시편 주석 서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은 그야말로 ‘갑작스런 전환’이었다.


“이 갑작스런 전환으로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유순하게 만들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힘들었던 나를 단번에 굴복시키신 것이다.”


그 날 그는 성경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발견하였다. 그리고 “오오 아버지! 그의 희망은 당신의 진노를 그치게 하고 그의 피는 나의 많은 허물을 씻어버리고 그의 십자가는 나의 저주를 대신 지고 그의 죽음은 나의 속량이 되었나이다. 우리가 자신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쓸데 없고 어리석은 방법들을 써 보았지마는 당신은 거룩한 말씀을 등불과 같이 내 앞에 다시고 또한 당신은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나로 하여금 예수의 공로 이외에는 아무것도 상관치 않게 하셨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여왕


그럴 즈음 파리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주목을 끄는 설교가 행해졌다. 그것이 반드시 다 복음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문호를 개방했다. 특히 프란시스 1세의 누이 동생이며, 나바라의 여왕 마가렛트 발로아는 단호히 개혁파로 전향했다. 그녀가 쓴 소책자의 ‘죄를 범한 영혼의 거울’ 은 그 사실을 아주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칼빈은 그 후 스스로 성경 연구를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교황청의 미신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나를 끄집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칠흑 속에 한 줄기 번뜩이는 섬광을 보듯 내가 얼마나 혼란 속에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사돌레 주교에게 답하는 편지 속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자신의 경험을 간단하게 기록했지만, 그것은 교회사에 빛나는 인물 중 한 사람의 중생의 경험이 되었다. 그것은 전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제네바의 역사가 이로 말미암아 완전히 다른 과정을 밟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 또한 이 일로 인하여 중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에 대해서 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불굴의 정신으로써 용감히 그 진리를 옹호한 것이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진리를 알고자 하는 순전한 마음과 순순히 따르고자 하는 자세를 주신 것이다.’’


그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참 빛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받은 감화도 아니었고, 순간적인 충동도 아니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그 그릇을 예비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가르침과 생활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전에 그는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카톨릭 교회를 위해 싸웠지만, 이제 참 복음을 위하여 싸우고 독특한 방법으로 그 복음을 위하여 살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신앙 태도를 보여 주는 일례가 있다.


1533년의 어느 날 파리대학에선 당시에 복음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던 코프(Cop) 박사를 학장으로 선출했다. 그 때 그와는 막역한 친구였던 칼빈은 코프를 만나 학장 취임 연설에서 새로운 교리를 위한 길을 열게 했다. 유럽 학계 최고의 명성을 가진 파리대학 강단에서 순수한 진리를 선포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실제로 코프는 칼빈이 제의하기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연설의 원고를 쓰는 데 칼빈의 도움을 요청했다. 칼빈은 그것을 승낙했고, 연설을 거의 독자적으로 완성했다. 연설 제목은 ‘그리스도교 철학’이었다.


E. 슈티켈베르거는 칼빈에 관하여 명확하고도 감동적인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이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일은 *만성절(萬聖節-11월 1 일)날 마츄런 교회에서 벌어졌다. 청중 가운데는 많은 수도승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프란시스코파의 수도승들이었고, 궁정 사람들고 참석해 있었다. 또 새로운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도 뜻을 같이 하는 학장의 연설을 뒤쪽에서 침을 삼켜가며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다지 풍채도 없고, 혈색도 좋지 않은 청년이 한 사람 끼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이 대학에, 아니 전국에 대단한 충격을 줄 연설문을 지은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종교적으로 프랑스가 로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불안과 긴장 속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명료한 말씨로 청중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한 젊은 학장의 음성은 처음에는 떨렸으나, 곧 힘차게 울려 퍼졌다. 그의 최초의 한 마디는 즉각 경악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들은 그 효용 때문에 학문을 찬미한다. 그러나 철학을 탐구하면서도 그 어느 철학도 아직 발견할 수 없었던 저 숭고한 철학, 즉 오직 한 분,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우리가 배우는 모든 학문은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대다수의 청중은 의혹에 가득차 이 연설을 들었다. 그 날은 다른 날도 아닌 카톨릭 교회의 만성절이었던 것이다. 모든 성자들의 덕을 예찬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는 이 날에 그것에 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다. 그뿐인가, 그는 다음과 같은 말까지도 서슴지 않고 하였다.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 저희들은 아버지 앞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 기도합니다. 당신의 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비춰 주소서. 우리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주님을 앙망하며, 주님을 느끼고, 주님 앞에 예배하며, 거룩하신 구주께서 우리들의 영에 스며드시어서 우리 영을 주님의 은총 속에 잠겨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청중은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었고, 참석한 성직자들 중에는 음험(陰險)한 눈초리가 엿보였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날 중 여러 성자들에게 바쳐진 이 날에 ‘유일하신 중재자 그리스도’라고 했으니 말이다. 계속해서 연설자는 산상수훈(山上垂訓)에 대해서 말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받을 복에 대해 새로운, 지금까지 듣던 바와는 너무도 색다른, 복음적인 방법으로 설명했다. 대학에서는 이와 같은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연설에 대해 걷잡을 수 없는 반대가 일어났고, 코프 자신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칼빈 역시 이 연설을 썼다는 것이 알려져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료들은 사도 바울처럼 그를 이불보에 싸서 창문으로 달아내린 뒤 숨겨 주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칼빈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서 최초의 고백을 한 셈이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의 복음이 공공연히 증언된 것이었다. 그리고 사태는 점차로 진전되어 갔다. 칼빈은 오류를 헤치고 굉장한 싸움을 거쳐 참 복음의 길을 열어 주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와 평화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었다.


성서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그의 내적 변혁은 그의 생애에 한 특색을 부여했고, 그 특징으로 나타난 것이 하나님 의 거룩하신 주권 아래 굴복하고, 끊임없는 경외심으로써 말씀에만 전념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중생만큼 광범위한 의의를 지니는 것도 역사상 보기 드문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 속에서까지 역사해 나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富)에 대한 엄숙한 기쁨이었다.


칼빈이 종교개혁 운동을 주도했던 제네바시의 성 피에르교회. 제네바 시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위치해 제네바의 상징으로 불린다.

* 에라스무스(Erasmus) : 1466년 네델란드 출생. 소르본에서 수학하고 영국에서 수도승과 학자를 풍자한 ‘우신예찬(愚神禮讚)’을 썼음. 라틴어 번역이 붙은 신약 성서를 간행하여 세계에 으뜸가는 대학자로 평가되었음. 광신을 싫어하고, 개인주의에 철저했으며, 종교 개혁을 지지했으나, 루터와 논쟁하여 신 • 구 양 파에게 공격을 받았음. 만년에는 병고에 시달려 불우하게 지냈음. 1536년 사망.


* 만성절 : 천주교, 성공회 등에서 11월 1일에 지키는 절기로서, 성 안드레의 날, 성 도마의 날, 성 바돌로메의 날 등 자기 이름으로 일컫는 축일이 제정되어 있는 성자(목자)들 이외의 모든 성자들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사항은 이들 구교 계통의 교회에서는 이 성자나 순교자 등은 특별히 축복된 자들로서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축복을 줄 수 있고, 초 인간적인 권능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각 성자의 날에는 그 해당 성자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그에 게 복을 비나, 11월 1일에는 모든 성자들에게 축복을 받으려고 기원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