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3년, 아마 연초였을 것이다. 당시 29세였던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고탑 안에서 중생을 경험했다. 그 사실에 대하여 루터는 “나는 완전히 새로 태어나 열린 문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튜빙겐 지방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한스 루터 (Hans Luther)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하였으나 양친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아버지는 엄격한 성품을 가졌다. 루터는 가정에서 신앙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어렸을 때 십계명, 사도신경, 기도문 등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도교는 몹시 율법적으로 굳어져 그리스도를 심판자로서 설명하여, 그리스도는 은총의 중심이기보다는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였으며, 죄에 대한 중보자로서 성모 예배가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루터가 아직 어렸을 때 그의 가정은 만스펠트로 이사했다. 1496년 그는 만스펠트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의견대로 형제단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생활 형편이 어려워 친척들이 살고 있던 아이재낫하의 라틴어학교로 전학하였다.
1501년 봄에는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명문 에어푸르트대학(The University of Erfurt) 문학부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다. 그가 대학 시절에 겪었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하던 그는 우연히 라틴어로 된 성경을 발견했다. 그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신 • 구약 성경을 보고 그는 매우 기뻐했고, 한가할 때면 도서실로 가서 성경을 읽고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엘상을 읽다가 한나와 사무엘의 일을 알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주께서 내게 성경을 주셨으니 소원을 이루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1502년 9월 그는 문학사 학위를 받았고, 1505년 1월 동 (同)대학에서 2등으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그즈음 인간의 죽음의 문제에 심각하게 부딪히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동급생인 히에로 니무스분즈가 시험 도중에 급성 늑막염으로 죽었는데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또 그해 7월 어느 날 만스펠트에서 에어푸르트로 가던 중에 무서운 낙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싸여 땅에 엎드린 채 “사랑하는 성 안나시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7월 17일에 바로 에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에 들어 갔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그 후 1521년에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늘로부터의 무서운 환상으로 말미암아 나는 소멸되었읍니다. 어떤 동경 같은 것으로 수도사가 된 것이 아니며, 먹고 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염려에서 어쩔 수 없이 수도사가 되겠다고 맹세했을 뿐입니다.” 라고 술회하였다.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규칙에 따라 매일 일곱 차례씩 기도를 드렸고, 새벽 한 시나 두 시에 종소리와 함께 일어나 십자가를 가슴에 그리고 나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두번째 종소리에 맞추어 교회로 들어가 성수를 뿌리고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이런 판에 박힌 생활 거듭하던 그는 1507년 4월 3일 신부로 임명되었고, 5월 2일 첫 미사를 드렸다.
그는 수도원에서 특히 죄 문제로 고민하였다.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수도원 안에 틀어 박혀 도를 닦는 것이 죄를 벗는 길이며 그것이 바로 성결(聖潔)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이전보다 더욱 힘써 도를 닦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평안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두문불출하고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사는 것은 다만 문 밖의 악한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자 더러운 풍속을 피한 것 뿐이지, 마음 속의 악한 생각은 없애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악한 생각을 억제하지 못해 라틴어로 된 기도문을 수백 번씩 외웠으며 어떤 날은 종일토록 금식할 때도 있었다. 또 성경을 읽는 중에 ‘온갖 더러운 것에 자신을 깨끗히 하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을 상고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의 죄가 더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동료 중의 한 사람이 루터에게 ‘만일 네가 선한 일을 많이 행하여 공로를 쌓게 되면 하나님의 선한 권고(眷顧)를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루터는 그 말을 믿고 마음에 두어 실천하려고 하였으나 확신이 없었다.
“나의 이런 선행이 내 죄를 도말(塗抹)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과연 면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금식, 철야 기도, 참회, 미사, 그밖의 여러 가지 고행(苦行)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는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나같이 심약한 자가 선을 행한다고 해서 어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인가. 큰 죄짐이 자꾸 나를 억누르는구나.”
또한 그는 때때로 자책하기를. “나에게는 아직까지 투기하고 분노하는 것이 있는데 이처럼 근심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슬프다. 곤고한 자로다. 나는 왜 이렇게 고민해야만 하는가?” 하면서 홀로 골방에 들어가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금식하였다.
루터는 이 모든 갈등을 고해로써 해결하려고 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어떤 때는 6시간을 계속 고해한 적도 있었다. 어떤 죄인이든 토해 내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는 동안 하나의 문제점이 크게 부각되었다.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기억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그를 괴롭게 한 것은 그 영혼을 더듬어 수색하고 철저하게 찾아내더라도 아직 죄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즉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 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루터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하나님 앞에 의롭다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자기는 혹시 영원히 멸망받을 사람으로 예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어둑어둑한 때 일어나 보면 자기 생명을 데려 가려고 누가 찾아와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루터를 도와 준 사람이 있었는데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간부이며, 비텐베르크 대학장직을 맡고 있던 슈타우피츠(Staupitz)였다. 후에 그는 루터를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한편 문학부에서 철학을 강의하게 하였다. 루터는 슈타우피츠와 가깝게 지내면서 자기 마음이 평안치 못하고 번민하는 이유를 소상히 말해 주었다.
“내가 내 마음에 뜻을 세우고 하나님께 맹세하기를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심중(心中)의 악한 생각들을 일체 끊어 버리고 성결함을 이루겠다’고 하였으나, 더 많은 악한 생각들이 내 속에 맹렬히 타오르고 있으니, 나는 능히 이것을 억제할 수 없고 그저 공연히 헛수고만 합니다.”
그러자 슈타우피츠는 “나의 친구여, 원컨대 그대는 이 일 때문에 너무 근심하지 말게. 나도 전에는 항상 뜻을 세우고 주께 맹세하여 소원을 이루려 하였으나 여의(如意)치 않아 맹세는 안하기로 했네. 왜냐하면 일을 도모(圖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으나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지 아니하셨으면 자기의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내가 많은 죄를 인하여 서원(誓願)도 못하고 공로도 못 쌓으면 지극히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루터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으로 번민하며 스스로 괴롭게 하면서 어찌 구세주의 공로에 온전히 몸과 마음을 의뢰하지 않는가? 이제부터는 다만 구주만 믿고 그 하신 일을 힘입고 그 의로우신 것을 의지하고, 또 구속하신 것을 믿고 그 명하신 말씀을 순종하게나. 주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부르시고, 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가볍게 하여 주시는데 어찌 그대는 주를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말에 “내가 내 마음을 변화시킨 후에야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시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슈타우피츠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대가 몸과 마음의 변화를 원하거든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주되신 것을 믿게나. 그대가 죄악을 인하여 복잡한 생각 속에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헛일이거늘, 지금부터는 다만 예수만 바라보게. 그가 그대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그대는 예수를 사랑하게나. 예수께서 그대의 죄를 인하여 대신 죽으사 구속하여 주시고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올라가 구주가 되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네.”
루터는 이 말을 듣고 시원함을 느꼈으나 진정 그의 영혼에 참빛이 비추지는 못했다. 그 마음에 확실한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슈타우피츠와의 대화는 후일 그가 복음을 깨닫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루터는 1510년 가을부터 1511년 1월까지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27세의 철학 교수이자, 신학도였던 루터에게 로마는 여러 가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참회자의 불결한 모습, 수도사들의 무식과 무질서에 놀랐다. 로마에는 빌라도의 계단이 있는데, 로마 교황이 규례를 정해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기어올라가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루터도 자기 죄를 사함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올라 가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 : 17) 는 말씀이 스치면서 이 일은 어리석은 자의 행하는 것인 줄을 알고 부끄럽게 여겨 계단을 다시 내려왔다는 일화가 있다.
아뭏든 그가 로마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을 때는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승격되었고, 설교자가 되었다. 1512년 그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비텐베르크 신학 교수가 되었다. 슈타우피츠는 자기가 맡고 있었던 성경 강좌를 루터에게 양보하였다. 루터가 29세 되던 이듬해(1513년), 그의 내적인 갈등이 결정적인 결말에 이르렀다.
이 때 루터는 바울의 서신을 깊이 상고하던 중에 자신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한 단어에 봉착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義)’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교수로서 ‘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강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름난 여러 사람들의 저술에서 ‘의’나 ‘정의’가 논해진 것을 주의 깊게 읽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근본적으로 활동적인 것으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 즉 하나님의 특수한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루터를 더욱 고뇌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마침내 루터는 하나님의 요구는 여러 계명에 외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물론이고 순수하고 온전한 마음을 요구하는 내적 동기와 의도에까지 미치는 것이라고 보게 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혹한 요구라고 결론지었다.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으로서 인간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율법에 복종할 수 없다는 느낌은 그에게 자신은 위선자라는 느낌을 더해 주었다. 그 당시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의(義)라는 말을 싫어했다. 나는 모든 설교자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대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죄인과 의인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고정 관념으로 정착한 의에 관하여 철학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한 사람의 수도사로서 아무리 흠없이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 스스로 몹시 불안한 양심을 지닌 죄인임을 느꼈으며, 또한 나는 하나님을 충분히 만족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사실 정의의 하나님을 미워하기까지 하였다. 비록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많은 불평을 통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으며, 가끔 이렇게도 생각했다. ‘저 비참한 죄인들이, 원죄로 말미암아 버림받고 십계명을 통해 온갖 압박을 당하는 것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충분치 못한 것처럼, 하나님은 슬픔 위에 슬픔을 더하시고 복음에서까지 분노를 보이셨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나는 격렬하게 분노하였다. 그러면서도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다는 갈급한 열성으로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열렬히 추구했다. 마침내 하나님은 나를 불쌍히 여기셨다.”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은 전적으로 인간 자체라는 것을 루터는 간파하게 되었다. 또 자신의 고해를 들어 주는 사람의 위로뿐 아니라 어떤 위로도 아무 쓸데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일일이 열거하고, 고백하고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어떤 특수한 죄보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은 인간의 성품 그 자체가 타락해 있다는 것이다. 고해가 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은 특수한 죄만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 다.”
1545년 라틴어로 출간된 루터의 전집 제1권 서문에서 그는 비텐베르크의 고탑 속에서의 경험과 그것이 얼마나 그의 영혼에 큰 기쁨을 던져 주었는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모든 사고를 뒤바꿔놓은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나는 생각을 가다듬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 : 17)는 말씀에 집중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 즉 믿음으로 사는 의라는 것을 알았으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그 의가 복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천국으로 들어가는 듯한 새로운 느낌을 받았으며 성경 전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갔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굉장한 혐오로 배척했으나 이제는 사랑을 가지고, 그야말로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가장 달콤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울이 말한 로마서 말씀은 내게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되었던 것이다.”
비텐베르크 탑 속에서의 체험은 루터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그 후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1515년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사원 건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속죄권을 발행하였다. 이 속죄권을 사면 속죄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도 연옥에서 건져낼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인츠와 마그네부르크의 대주교 알베르트는 독일에서의 속죄권 판매권을 얻어 가지고 그 판매 주임으로 도미니크파의 신부 요한 테첼을 임명하였다. 속죄권은 잘 팔렸으나 뜻 있는 인사들은 염려 하였다.
루터는 속죄권의 악영향을 잘 알았기 때문에 1516년 두 차례에 걸쳐서 속죄권 문제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 후부터는 이 문제의 뿌리가 좀더 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신학자들간에 신학적 문제로서 깊이 토론하기 위해 1517년 10월 31일에 ‘속죄권의 효력을 밝히기 위한 토론’이란 문제로 *95개 조의 라틴어 토론 제목을 비텐베르크성당에 게시하였다. 이 95개 조 논제는 모두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사들로부터 배운 것에 대하여 품은 의혹을 폭로한 내용 이었다.
물론 이 논제가 복음주의 정신을 모두 대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 기본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었다. 원래 이 논제를 내건 목적은 대학생과 교수를 상대로 토론을 전개해 보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세계적인 파문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이것은 마침내 전독일을 휩쓸었고 1개월도 못되어 전유럽에 요원의 불길처럼 파급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 조의 변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크의 성문.
1518년 5월 루터는 95개 조에 대한 변명서를 로마 교황에게 보냈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종교 개혁의 근본 원리를 밝히는 대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1520년 6월 15일 로마 교황청은 60일 이내로 모든 것을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는 교황령을 발표했고 루터가 이에 응하지 않자 이듬해 1월 3일 정식으로 파문장을 발표하여 루터가 이단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루터는 로마 카톨릭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게 되었다. 이 때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어떠한 일이 일어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또 구태여 알려 하지 않는다…매로 나를 칠 대로 치라.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 잎의 나뭇잎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종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을 것이냐?…우리가 그로 더불어 죽으면 또한 그로 더불어 살리라. 그가 우리보다 먼저 경험한 것을 우리 도 또한 경험하게 되면, 지금 우리가 그와 더불어 살고, 또한 그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던 중 1521년 4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의 요청으로 웜스 국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국회는 루터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4월 16일 웜스성으로 향했다.
나라의 고관(高官) 대작(大爵)들과 카톨릭 교회의 최고 성직자 등 모든 권부(權府)가 총집결한 자리에서, 이단적인 교리를 자꾸 퍼뜨린다는 죄목을 스스로 해명하기 위해 루터는 단신(單身)으로 적진 중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물론 황제는 루터가 웜스에 있는 동안 그의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약속을 했지만, 과격한 카톨릭 교인들은 그의 생명을 해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극도의 위험 속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주님께 기도했다. “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이 얼마나 무서운 세상입니까! 보십시오. 사단이 입을 벌리고 한 입에 저를 삼키려 하고 있읍니다. 저는 너무도 믿음이 약합니다. 이 육신은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러나 사단은 얼마나 강대합니까! 제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 오직 이 세상에 속한 힘이라면 저는 이미 끝장이 난 몸입니다. 저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읍니다. 저는 이미 정죄된 몸입니다……”
“하나님 하나님…나의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지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제게 주십시오! 꼭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읍니다. 이것은 저의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저에겐 아무런 힘이 없읍니다. 세상의 이와 같은 강자들을 대항할 힘은 전혀 없읍니다.”
“저 역시 행복스럽고 평안하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의로운 일이요, 영원한 일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신실하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저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모두 불안합니다.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은 다 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까? 나의 하나님, 하나님은 죽으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읍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감추고 계실 뿐입니다.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그러니 일어나셔야 합니다. 하나님, 제 옆에 서십시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서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저의 요새시요, 저의 방패이시요, 저의 강한 산성이십니다.”
“주님, 어디서 주님 자신을 나타내시려 하십니까? 오, 나의 하나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이제, 저는 준비되었읍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릴 모든 준비가 되었읍니다……. 어린 양과 같이 감내하겠읍니다. 이 모든 것은 다 공의로운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결단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읍니다. 비록 세상이 마귀들로 온통 가득차 있다 할지라도, 이 몸 역시 죽임을 당하여, 길바닥 위에 나둥그러지고, 토막토막으로 짤리어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제 영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제게 유일한 보증입니다. 제 영혼은 하나님께 속했읍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아멘 하나님, 저를 도와주 소서! ……아멘.”
4월 18일 오후 6시, 5천여 명의 군중이 꽉찬 회의장에서 루터는 황제의 질문에 대하여 자기의 주장이나 논문에 기록된 내용을 전혀 취소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황제는 루터를 독일 제국의 죄인으로 단정하였으나 프리드리히 제후가 그를 보호하였다.
그 후 루터는 바이마르시 가까운 곳에 있는 봐르트부르크(Wartburg)성에서 도피 생활을 하면서 회랍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 독일어역 성서가 세상에 나옴으로써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접하게 되었고 복음의 문이 이 세상에 활짝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루터가 숨어 살면서, 희랍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봐르트부르크성 안의 방.
이렇게 루터는 비텐베르크 고탑 안에서의 경험 때문에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마음에 큰 기쁨을 얻었다. ‘하나님의 의’를 경험한 이후로 루터는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이란 사람의 중심에 박혀 있는 활력소(活力素)로서 극히 실천적이며, 생동하며 활기 있고, 힘찬 것이다. 그래서 이를 소유하면 활동을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자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로서, 이로써 우리 전체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의지한다. 이와 같은 굳은 신뢰는 사람의 심령을 높이 들어올리며, 이를 격려(激勵)하여, 그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충만히 채운다. 믿는 사람은, 홀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고결하고 영웅적인 사상, 고상한 영혼의 비약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사람의 심중에 이루어지며 이 성령은 믿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한다. 마치 불에서 열과 빛을 뗄 수 없음 같이 믿음에서 실천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위로이시다’라는 것이 그의 신앙 생활의 기조(基調)였으며, 이것은 훗날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