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성경을 읽다 보면 디모데전서 5장 8절과 같이 재물을 사용하는 데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성경의 각 구절을 읽을 때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 균형을 맞추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예를 들어서 한 달 쓸 수 있는 액수가 있다고 합시다. 해외에나 국내 여기저기에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일에 헌금을 하고 싶은데, 교육비 생활비 저축 등 집에서 쓸 돈을 계산해 보니 헌금 낼 돈은 없다고 합시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의는 상관없고 먼저 자신의 필요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육에 속해 있는지, 하나님의 것에 속 해 있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쓸 것을 아끼고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서를 읽어 보면, 요나는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박 넝쿨을 아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 넝쿨을 씹게 하시고 시들게 하셨습니다.
[말라기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도적질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에도 보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사람의 종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또 에서와 야곱 을 생각해 보면, 에서는 자기 아버지 옆에 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작정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돌담을 쌓고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습니다. 누구에게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실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십일조 문제를 정확하게 치렀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잘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사에는 교제라는 부분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2]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내 생활에 행동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찬송가를 부를 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저 북방 얼음산과 또 대양 산호섬" 하고 부르겠습니까, 아니면 온 세상 만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부르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움직이는 활동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고 ‘나’라는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무너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복음을 확실히 알고 성도들과의 교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개인이 무너지기는 어렵습니다.
질문
성경을 읽다 보면 디모데전서 5장 8절과 같이 재물을 사용하는 데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성경의 각 구절을 읽을 때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그 균형을 맞추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예를 들어서 한 달 쓸 수 있는 액수가 있다고 합시다. 해외에나 국내 여기저기에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일에 헌금을 하고 싶은데, 교육비 생활비 저축 등 집에서 쓸 돈을 계산해 보니 헌금 낼 돈은 없다고 합시다.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의는 상관없고 먼저 자신의 필요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육에 속해 있는지, 하나님의 것에 속 해 있는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쓸 것을 아끼고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서를 읽어 보면, 요나는 자신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었던 박 넝쿨을 아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 넝쿨을 씹게 하시고 시들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것을 도적질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에도 보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사람의 종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또 에서와 야곱 을 생각해 보면, 에서는 자기 아버지 옆에 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작정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돌담을 쌓고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했습니다. 누구에게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실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십일조 문제를 정확하게 치렀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잘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사에는 교제라는 부분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내 생활에 행동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찬송가를 부를 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저 북방 얼음산과 또 대양 산호섬" 하고 부르겠습니까, 아니면 온 세상 만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부르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움직이는 활동입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고 ‘나’라는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무너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복음을 확실히 알고 성도들과의 교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개인이 무너지기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