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0편]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재림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 110:1-7) 


 이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로 재림하실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것입니다. 전체 내용이 신약 성경 속에 여러 번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재림에 관한 예언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 110:1)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도 있고 사도행전에도 있고 또 히브리서에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유대인들 중에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천하 만국을 통치하실 것을 믿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바로 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그들이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44절에 보면 다이아몬드 표가 있는데 시편 110편 1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2장을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3-36)


 여기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 베드로가 설교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시편 110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는 말씀이 정확하게 응한 것이라고 베드로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 앞에 또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행 2:25-28)


 시편 16편에 있는 말씀을 베드로가 읽으면서 다윗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예언한 그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29-33)


 다윗은 선지자요 왕인데 그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니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에서 '주께서' 라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를 말합니다. '내 주에게' 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주라고 했고 예수님을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도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께 말씀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윗 왕 당시에는 예수님이 아직 이 세상에 탄생하지 않으셨지만 이미 하나님 앞에는 예수님이 계셨으니까 성령으로 이 말씀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여기서 발등상은 발을 얹어 놓는 의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정복하고 완전히 승리하시는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동안에 마귀를 완전히 정복하시고 짓밟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히브리서 1장에도 있고 그밖의 여러 곳에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신약성경 여기 저기에서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예언한 말씀이 그대로 응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처럼 육신을 가진 분이요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그 오른쪽에 계시는 것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이 아니신데 무슨 우편이 있고 좌편이 있겠습니까? 성경적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물리적인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육신이 하늘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는 말은 우리 죽은 영이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는데 우리의 무엇이 하늘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 육신은 아직 이 땅에 있는데 왜 하늘에 있다고 했을까요?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새 생명은 하늘에 속한 생명이고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은 저 높은 물리적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세계, 신령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받은 영은 그 신령한 세계인 하늘에 있습니다. 내 육신 안에 거듭난 새 생명이 있지만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니까 우리하고는 아주 높이 먼 거리에 계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뿐이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 눈에는 안 보이시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셨는데 구름에 가리워서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육신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현실이 바로 하늘입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갑자기 갈릴리에도 나타나시고 갑자기 사라져버리신 것처럼 신비롭고 신령한 몸인데 그러한 몸은 보일 수 있게 나타날 수도 있고 또 갑자기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이 지구를 떠나 멀리 어떤 하늘에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 다. 다만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온 세상에 가득찬 분이 하나님이신데 왜 우편에 계신다고 하셨을까요? 우편은 힘을 상징하며 좌편과는 늘 구별되는 말입 니다.

 주님이 하늘에 계시듯 우리의 영혼도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고 되어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께 순종을 하면 주님이 우리 영과 함께 계시는 인도를 받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구원의 선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이후 지금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의 진영을 대적해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다시 사로잡아 구출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고 했습니다.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마귀로부터 그 사람을 다시 주님이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실지로 복음의 역사는 마귀와 투쟁을 해서 주님이 마지막 승리를 향해서 가고 있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전투에서 주님의 포로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8)


 이것은 시편 68편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주님에게 속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라고 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문이 열리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승천하셨다는 그 자체가 우리를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선물'이 곧 구원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나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나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9-10)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 하는 것보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 "만물을 충만케 한다"는 말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고 있는 그 근본적인 뜻을 완전히 성취시킨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만물이 마귀에게 넘어가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은 썩고 냄새나고 부패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상태에서 구원을 베푸사 이 모든 자연계도 완전히 복구되고 에덴 동산의 상태로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조금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것은 전 우주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충만케 하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전파되면서 마귀의 진영이 차츰차츰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은 만큼 마귀의 진영이 무너지고 우리는 주님께 사로잡힌 주님의 전리품으로서 큰 은혜에 참여합니다. 정말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를 통치하실 주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시 110:2)


 시온은 예루살렘 입니다.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여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에 시온이 온 세계의 수도가 됩니다. 적그리스도도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자기의 수도로 만들려 합니다. '홀' 은 옛날 왕이 가졌던 지휘봉인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권세를 의미합니다.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보내시리니"라고 했는데 힘의 지팡이를 나타내시리니라고 그 밑에 씌여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낸 모세의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 등등 성경에 보면 지팡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권능의 홀은 통치하시는 지휘봉인데 지팡이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원수들 중에서 다스립니다. 차츰차츰 중동 지역에 평화가 형성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가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거짓 평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짓 평화니까 어느날 갑자기 주님 공중 재림하시면 들림받는 일이 있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이 환난 세상으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평화조약도 성경을 이루어 가는 한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거짓 평화가 올 것입니다. 그 후에 환난 세상에서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 때에 많은 사람이 죽고 나머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천년왕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됩니다. 그 때는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1장과 계시록 19장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못받은 사람도 그 시절에 가면 예수님께 굴복하고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거룩한 옷을 입은 성도들의 헌신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이 주의 권능의 날은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일본어 성경에는 주의 군사를 성산에 인도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천군 천사들과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옷은 에베소서 6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0-17)


 여기에 있는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전쟁을 할 때 갖추어야 할 무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거룩한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 19:11-16)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광경입니다. 이 가운데 특히 14절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되어 있는데 시편 110편에 있는 거룩한 옷을 입은 군대가 여기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군대가 천사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마포란 가느다란 베실로 짠 옷인데 그것은 예복을 의미 합니다. 하늘에 있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그를 따르는 군대는 시편 110편 3절에 있는 주의 권능의 날에 거룩한 옷을 입은 주의 백성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할 때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전쟁을 하는 때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과 마귀를 정복하실 그 때에 신앙생활의 정도에 따라서 함께 동참을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로서 역시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들 즉 마귀를 향해서 전쟁하는 것입니다. 마귀하고 전쟁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마귀가 어디 있느냐 하면 내 육신 속에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 육신의 생각을 꼬드겨 자꾸 죄를 짓게 만듭니다. 우리 육신의 생각을 자꾸 부추겨 세상의 영광이나 쾌락이나 물질 따위에 마음을 자꾸 끌리도록 만드는데 우리가 정말 무장이 잘 되어 있으면 그런 생각이 올지라도 멀리하고 승리할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는 사도 바울을 위시해서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고 정말 신앙생활을 깨끗하게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과거에 모라비아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 대륙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예배당을 짓고 다음에 학교를 짓고 마지막에 자기 집을 짓는 희생적인 생활을 했는데 이 기독교 역사 속에는 그런 용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귀를 물리치고 살아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정말 거룩한 옷 세마포를 입고 예수님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고 했는데 왜 청년들을 새벽 이슬 같다고 했을까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 26:19)


 중동지역은 주로 사막이 많은데 거기에도 풀과 나무들이 있습니다. 비가 와서 적시는 것이 아니고 이슬이 내려 수분을 공급합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을 읽어보면 비가 오기 전에는 이슬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슬이 보통 양이 아니고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사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가득한 사막과 같은 이 세상에 이슬이 내리니까 죽은 자들이 마치 죽어가던 풀이 살아나는 것처럼 살아나고 모든 만물이 소생합니다. 이사야 26장도 역시 이 마지막 시대에 되어질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온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청년은 우리 육신의 연령을 따져서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요일 2:12-13)


 여기에 보면 이 청년은 마귀와 싸움을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승리가 성령으로 내게 오는 것입니 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앙생활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인데 그가 바로 청년입니다. 그러니까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은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간에 소생시킵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정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그 때에는 현재 이 세상에서 승리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세마포,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의 왕권에 동참을 하여 이 패역한 세상, 사막 같은 세상을 기름지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바로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하고 그냥 세속에 물 들고 세파에 시달려 끌려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행동이 구원 안 받은 사람과 똑같고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짜 구원 받은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진짜 받았으면 정말 에베소 6장에 있는 말씀대로 신앙의 무장을 단단히 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는데 이것을 잘 통과하면 무한한 영광을 얻게 됩니다. 정말 마귀는 굉장히 힘이 셉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속 사람이 육신에 갇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창세기 14장에 보면 소돔 고모라성이 점령을 당해 다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가족들도 잡혀갔는데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데리고 있던 삼백십팔 인을 데리고 멀리 북쪽에까지 가서 바벨론과 앗수르 지역의 동맹군들을 파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을 다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것은 아브라함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환영하는 사람이 둘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소돔 왕이고 하나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었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 14:17-18)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히 5:6-1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는 것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 계통을 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형 되는 아론이 처음 제사장이 되었고 그 아론의 혈통을 따라서 제사장이 이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 제사장은 그와는 다른 아주 독특한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 5:1-5)


 이 멜기세덱의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의 제사장에 대해서는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차례를 따라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교리적으로 안다고 멜기세덱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대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신앙생활에서 승리를 한다든지 또 시험에서 건짐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제사장으로 계시는 주님과 믿음으로 연결돼 있을 때입니다. 주님과 연결이 돼 있지 않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상징인 소돔 왕과 예수님의 그림자 멜기세덱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1-3)


 이 살렘 왕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성경에는 전혀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았고 예수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멜기세덱 제사장이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한편 소돔 왕도 멜기세덱처럼 와서 아브라함을 영접했는데 이 소돔 왕은 마귀의 상징입니다.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매우 이익이 될만한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은 내게 돌리고 찾은 물건은 다 네가 가지라고 했습니다. 소돔 왕은 아브라함을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단호히 네가 주는 것은 한 오라기라도 받지 않겠다. 내가 그것을 받으면 네가 나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 것은 싫다고 말했습니다. 멜기세덱 제사장은 전쟁에 승리한 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너를 승리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아브라함은 소돔왕이 주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마음에 항상 모시고 사는 사람은 소돔왕이 주는 것, 세상이 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오는 즐거움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만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멜기세덱 제사장과 관계가 올바로 맺어질 수가 없습니다. 소돔왕이냐 멜기세덱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소돔 왕이 세상 것으로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했어도 원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네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멜기세덱과 관계를 맺으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됩니다.


영원한 대제사장과 생활의 구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4-25)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시고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넉넉히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이런 저런 시험과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이래야 할지 저래야 할지 참 어려울 때에 은은히 들려 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는 온전히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영혼의 구원이 아니고 위기 상황과 시험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무슨 환경이 좋아진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데서 넘어지지 않고 믿음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잃을망정 믿음을 잃지 않는 그것이 승리입니다. 이 구원이 생활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멜기세덱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생활에서 계속 구원을 받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시험을 받을 때에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이 이 시간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우리는 연약합니다. 어떤 일에 시험을 받거나 문제가 생기면 굉장히 괴로워하고 답답해 합니다. 그 때에 주님도 우리 연약함에 동참을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사정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큰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죄 없으셨지만 여러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가지 시험 당하신 것은 영원한 뜻 안에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현재도 예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시험과 고난을 아시고 함께 맛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의 보좌가 어딥니까? 성전 안에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는데 제사장이 그곳에 제물을 바칩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당신의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거기가 은혜의 보좌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약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위에서 기도하시고 대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 멜기세덱 제사장이 현재 우리들을 위한 제사장으로 계시니까 우리는 그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예수님을 힘입어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쳐놓고 직접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항상 두려움이 있습니다. 심판과 책망을 받을까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고 시험을 받으셨고 고난을 겪은 그 속에 이미 내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환난의 때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시 110:5-7)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라고 했는데 그 날은 은혜의 시대가 끝난 후에 닥칠 환난의 때입니다. 교회가 들림을 받는 일이 지나버리면 성령이 떠나 가버리십니다. 그러면 은혜 시대가 끝나는 것입니다. 은혜 시대가 끝나면 무시무시한 진노의 날이 닥칩니다.

 "머리"는 왕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이 큰 환난을 받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생명의 강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그러나 그 환난이 지나고 나면 만물이 다시 회복이 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네 강물이 흘러나오듯이 그 때는 예루살렘에서 강물이 흘러내립니다. 에스겔서 48장이나 계시록 22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강물이 흘러 내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길가에 시냇물을 마시고" 라고 했는데 예루살렘 통곡의 벽 옆에 가면 굴 같이 생긴 곳이 있는데 들어가면 물 흐르는 소리가 줄줄 납니다. 

 큰 우물처럼 물이 모여 있고 어디서 흘러 나오는지 철철 흘러 내립니다. 장차 이것이 큰 샘이 되어서 흐르게 될 것입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3)


 이 생명수 강은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신령하고 거룩한 영적인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장차 예루살렘에서 흘러나는 물이 온 지역을 다 적시게 될 것인데 그때 주님이 왕이 되십니다.

 시편 110편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왕이 되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되실 것을 예언적으로 읊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말씀대로 곧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