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2편] 주님의 은혜와 상을 받을 수 있는 의인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저가 재물을 흘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시 112:1-10)


 시편 112편은 의인이 번성하고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물론 구원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의인입니다. 여기서는 이방 사람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의 복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할렐루야' 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계명을 지켜야 하는 민족입니다. 이것이 신약적인 입장에서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새 계명이 있습니다만 구약의 율법은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한다고 당장에 어떤 복이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가운데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마음속에 감사함이 있고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시 112:2)


 '그 후손' 은 구약 시대에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이 물론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할 때에는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믿음이 있는 자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듯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후손은 육신적인 후손도 포함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정직-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사 26:7)


 여기서 말하는 '정직' 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확고하여 흔들림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을 따라 흔들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의나 도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올바로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정직한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의를 앞세우며 자기가 정직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이들은 자기의 인간적인 판단을 가장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은 사회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인도해 가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믿음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이 가장 정직한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다 부정직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때에 영적인 축복이 언제나 있습니다.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시 112:3)


 이 성경을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마치 육신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축복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부요' 는 돈이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잠언에 보면 "재물의 부요함을 의지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이 말씀도 부하게 되려는 것을 경계하지 않았습니까? 시험과 올무에 빠진다고 말씀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모세 당대에는 예수님이 아직 안 오셨지만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통이나 괴로움이 진정으로 부요하게 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부요' 라는 말이 구약 시대에는 문자 그대로 물질적인 부요를 말했지만 신약에 넘어오면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그러한 부요가 헛되다는 것을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인은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잠 11:4)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 라"(잠 11:28)


 여기서 말하는 부요는 절대로 물질적인 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부요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에 일부러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는 것을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있는 말씀대로 선한 일을 위해서 부요하다면 참 좋은 것입니다. 내게 풍성한 물질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는 데 부요하다면 가치가 있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만 쓴다면 복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재물이 날아갈 때에는 큰 화를 가져온다고 했습니다.

 어떤 형제는 자기가 물질이 많았더면 그것에 끌려 주님을 깊이 사귀는 비밀을 알 수 없었을 것인데 가난했기 때문에 그 비밀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것을 조금도 한탄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 감사할 수 있는 그것이 진짜 부요입니다. 마음이 부요한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시 112:4)


 정직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106)


 여기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캄캄할 때에도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마음에 그 말씀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어두운 길에 다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 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도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았어도 우리에게 종종 캄캄한 때가 있습니다. 한국말을 못 하는 어떤 미국 형제가 쓴 간증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고 처음에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참 즐거워하고 좋았는데 한국 사람들만 모이니까 모임에 나와도 말도 못 알아듣고 차츰차츰 모임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전에 짓던 죄를 다시 짓고 깊이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갔답니다. 캄캄한 흑암 속에서 깊은 죄에 빠져 심지어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가 나중에 어떤 말씀이 마음에 스쳐가면서 구원의 기쁨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마냥 마음에 즐거움만이 있고 항상 마음에 환한 빛이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빛은 예수님이시지 자기 자신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육신에 빠지면 마음이 완전히 캄캄해집니다. 여러분도 구원받은 다음에 마음이 아주 캄캄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그런 고통 속에서 말씀을 통해 마음이 회복 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분명히 함께 계십니다. 성경에는 도저히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깊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항상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타난 그 사실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시고 말씀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시잖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육신에 파묻혀 있으면 아무 말씀도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마음이 캄캄하고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떤 말씀에서 뭔가를 발견하게 되면 참 빛이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리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갈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하면 주변을 밝게 비추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빛이 있는 사람은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삶이 나타납니다. 빛은 마음에 있지만 자기 혼자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생활에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이 큰 축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니까 그것을 찾으려고 점점 더 갈증이 생깁니다.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고 아무리 찾아봐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빛이 있으면 진정한 만족이 있습니다. 외부적인 만족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빛이 있을 때에 만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러한 축복보다 더 좋은 축복이 없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시 112:5)


 의인의 생활이 축복된 생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회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 6:34-35)


 우리가 이 말씀처럼 살 수 있다면 참으로 축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한다거나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 돈을 빌려 가면 그에게 이자를 받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런 이자는 받아도 상관이 없지만 급한 사정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갈 때에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들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빌려간 사람은 반드시 그 빚을 갚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갈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6-38)


 이 말씀은 구약에 있는 율법보다 훨씬 더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복음적으로 받아들이면 굉장히 축복된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남을 비판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비판을 잘합니다. 그런 성격이 있는데 비판하지 말라고 하니 어렵지 않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 마음이 아니면 이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마음으로 생각할 때에 얼마나 이 말씀이 푸근하고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그 말씀도 육신의 마음을 가지고는 도저히 을 용서 못할 것이 뭐냐 하는 마음이 들어 가면 그 마음은 즐겁고 자유롭고 행복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배후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굉장히 힘들고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무엇을 베풀어도 즉각적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일생을 통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보면 틀림없이 남을 잘 도와주거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틀림없이 후히 넘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안하십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말씀이 얼마나 풍성한 말씀입니까? 이것이 정직한 자, 의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복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모본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3-35)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책할 것을 모를 정도로 완벽하게 살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천막을 기워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열심히 천막을 지어 시장에 내다 팔고 얻은 돈을 가지고 일행들의 쓰는 돈을 담당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것이 주된 생활이었습니다. 바울은 열심히 일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바울이 태어난 다소라는 곳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앙카라에서 높은 산을 넘어서 차로 갔는데 하룻밤을 자고 또 다음날 높은 산을 넘으면서 사도 바울의 힘들었을 여정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는 지금 차를 타고 가지만 그 옛날에는 걸어서 갔을 것입니다. 천막 짓는 재료를 짊어지고 태산 준령을 넘어서 이 터키를 거의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터키는 땅이 굉장히 넓습니다. 한국의 10배 이상은 넓을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율법적으로 실천한 것이 아니고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실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동행들과 자기가 먹고 자면서 쓸 것을 직접 자기가 주동이 되어 벌어 가지고 썼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 주기도 했습니다. 조금도 인색한 마음이나 아깝다는 마음이 없이 풍성하게 남을 도와줄 수 있는 그 마음이 보통 마음이 아닙니다. 얼마만큼 마음이 즐거웠는지 옥중에 들어가서도 찬송을 부를 정도였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돈 많은 부자도 사도 바울만큼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 마음이 그처럼 부유할 수 있을까요?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0-14)


 이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는 돈벌이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빌립보 교회 신자들이 헌금을 거두어 바울을 도와준 것입니다. 바울은 그 돈을 기뻐한 것이 아니고 빌립보 교회 신자들이 자기가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그 사실이 굉장히 기뻤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그 어려운 일에 함께 동참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지만 기회를 못 얻다가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가 연보를 거두어 가지고 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굉장히 큰 축복이었습니다. 빌립보 신자들이 자기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기뻤던 것입니다. 이 바울 사도처럼 완벽하게 성령의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것입니다.



반석이신 주님 위에 서서 주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삶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시 112:5)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잘 됩니다. 돈 떼 먹은 사람은 잘 안 되지만 돈 꾸어 주었다가 떼이는 사람은 차라리 잘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것을 공의롭게 판단하십니다.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시 11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고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는 말씀(마 7:24-26)이 있지 않습니까? 의인이 끄떡하지 않는 이유는 반석이신 주님 위에 섰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았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6-19)


 예수님은 굳건한 반석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확실히 믿는다면 틀림없이 이 축복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차게 불어오는 세파에 밀려 그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의인은 영원히 기념되게 되리로다"라고 했는데 의인이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성찬식을 할 때마다 "떡을 먹고 이 피를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을 상고하곤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가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어떻게 기념해 줄까요?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를 대적하면서 자기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비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압살롬이 죽어 버리자 그 기념비가 무슨 소용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 얼마 동안 살다가 사라진다고 합시다. 그러면 누가 나를 어떻게 기념을 해 줄까요? 기념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과거를 어떻게 평가하고 인정을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내게 대한 인상이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평가하시는 평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 에서 블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8-10)


 여기에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라는 말씀은 구약 시대의 말씀이지만 예언이었습니다. 신약 시대는 주님의 이름을 기념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고 권능을 받고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그 이름을 기념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의 배후에는 주님이 행하신 엄청난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주님이 행하신 그 일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기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12장에 있는 말씀대로 내 위치에서 겸손하게 믿음을 지켜서 산다면 우리의 이름도 기념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이 해주시는 일입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천당 간다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아무렇게나 산다면 큰일입니다. 기념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갈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 3:6)


 성경을 보면 여자들이 더 담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무덤 속에 묻히셨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두려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몇 사람의 마리아는 향을 준비해 가지고 새벽에 그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신 일에 대해서 참 마음이 담대했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전해 들은 남자들은 겁이 나서 못 나올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담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기 남편을 든든히 믿고 그를 주라고 시인을 하면서 복종을 했다는 말과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적극적인 측면에서 선한 일을 하고 또 무슨 큰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시편에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 등등의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굉장히 무서워했지만 그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눈앞의 결과에 따라서 믿음이 좌우되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무사 태평하면 잘 믿고 문제가 생기면 믿음이 흔들려 버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주님을 믿는 신자일 뿐만 아니고 머리이신 주님의 몸이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흉한 소식이 들려오더라도 우리가 흔들릴 까닭이 없잖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핍박과 어려움을 당했지만 흔들림없이 살았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는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뒤집히려고 했습니다. 그때 모라비아 교도들이 풍랑 속에서도 태연하게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저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어서 저럴까 궁금했습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느냐고 물으니까 왜 두렵냐고 반문했습니다. 모라비아 교도들은 요한 웨슬레에게 당신 거듭 났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웨슬레는 목사였지만 그때까지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에 웨슬레는 성경을 읽다가 구원을 받게 됩니다. 프리머스란 곳이 있는데 옛날 청교도들이 타고왔던 큰 모형 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은 미국인데도 영국 사람들이 와서 관리를 합니다. 그때 청교도들이 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집을 짓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그 때 그 모라비아 교도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영국과 유럽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그 핍박을 피해서 자유 세계로 찾아온 것입니다. 관광 안내원에게 지금도 여기에 거듭 나는 사람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거듭나는 것이 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보존되어 내려오지 않고 시일이 흐르자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그 대적의 받는 도움을 필경 보리로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 112:8-9)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를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는 것 하나 뿐이고 생활 속에 의가 실천되는 것이 없으면 큰 문제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1-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틀림없이 우리는 행위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그것이 의의 말씀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들은 장성한 아들을 말합니다. 장성한 아들은 바로 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아 의인이 되었으면 그 의인으로서의 생활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의인으로서의 생활이 나타나자면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됩니다. 그런데 의의 말씀은 심한 고난과 역경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면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의의 생활이 조금씩 나타나게 됩니다. 그 생활이 성령으로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고을을 차지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얼마만큼 성령의 열매를 맺었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가령 이웃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는 새 계명을 자기는 지킬 수 없는데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니까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받는 의인만이 아니고 그 의를 실행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인으로서 의인이 되었다고 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의의 생활은 안 나타납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생활에서 그 의의 생활이 얼마만큼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라고 했는데 이러한 실천이 의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끼리 아웅다웅하고 물질 문제 때문에 원수가 되는 문제가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악인이 갈 멸망의 길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악인의 소욕을 멸망하리로다"(시 112:10)


 구원받고 믿음으로 살았던 초대교회 다른 예루살렘 성도들은 유무상통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 소욕을 버리고 성도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거기에 상이 있고 영원히 영광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것을 보고 이를 갈면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는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와 상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의롭게 나타날 수 있는 한없는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생각하니까 그것을 무시하고 육신의 소욕과 세상 생각에 휘감겨 그 기회를 다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 112편에 나타난 것처럼 의롭게 사는 사람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부요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