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5편]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은 자들의 승리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마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주셨도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 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시 115:1-18)


 이 시편 115편은 언제 어떤 환경에서 지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승리가 이루어졌을 때에 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의 결과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


 이 말은 승리가 왔을 때에 그 영광을 승리한 사람에게 돌리지 말게 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가끔가끔 우리 생활 속에서 시험에서 승리를 경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가 잘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장 시험에 들기 쉬운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어떤 일을 주체가 되어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독백을 했습니 다. '사망의 몸' 이라고 했는데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육신이 살아서 움직이더라도 그 육신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한계에 도달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시라고 말한 이 시편 기자는 이 문제를 확실히 깨달아 안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잘했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니고 그 승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것은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고 시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 하심과 진실하심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이지 자기가 무엇을 잘하고 열심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신약적인 의미에서 보면 주님의 이름의 권능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교회는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교회는 그 주님의 이름이 일을 하는 곳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모든 역사가 나타납니다. 주님의 이름에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 열심이나 능력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원수들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시 115:2)


 이 말씀은 원수들이 하나님을 무시 하고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7장을 찾아보겠습니다.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 나의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거하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놓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사 37:10-20)


 이것은 앗수로 왕 산헤립이 북쪽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남쪽 유대 땅도 예루살렘 성만 남고 다른 성은 다 멸망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그 다음에 예루살렘도 이제 곧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때 산헤립은 이 편지를 써서 히스기야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 당시 앗수르는 현재 터키의 동부와 이란의 서부 지역까지를 포함하는 아주 큰 제국이었습니다. 그 앗수르의 왕이 세계를 모두 지배하다시피하여 거의 점령을 해 갔습니다.

 그 큰 나라의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여러 도성을 점령했는데 그 나라나라마다에 섬기는 신이 있는데 그 신들이 내 손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지지 못했다고 하면서 여호와라는 신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제 예루살렘을 칠 터인데 건질 수가 있느냐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글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때에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참 신이 아니고 나무나 돌로 만든 신이니까 건지지 못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참 신이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신데 어떻게 저 앗수르 왕에게서 건지지 못하시겠습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 왕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앗수르 왕이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산헤립은 돌아가서 자기 아들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에워싼 이방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도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지 말라


신약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계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곳이 교회인데 그 교회를 거스리고 욕하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고 하나님을 헐뜯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시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교회를 욕하고 도전하면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너희' 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그를 멸한다고 했습니다. 건물을 더럽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교제를 더럽히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흉을 보면서 그릇된 말을 퍼뜨리는 것이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또 무리를 지어 모임에 대적하여도 전하는 것도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는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는데 당장에 죽여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이 죽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성령과 관계 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신령한 세계에 계신 하나님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출애굽기나 다른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것은 그 민족 속에 계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땅에 있으면 방해를 많이 받지만 하늘에 계시면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유자재로 하실 수 있습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회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왕상 8:46-49)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하늘이라고 했는데 성전이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성전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자기 백성들이 그곳을 향하여 무엇이든지 간구하면 들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가령, 죄를 지어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갔어도 이 성전을 향해 회개하고 기도하면 들으시고 돌아보신다고 했습니다. 성 전은 주님 의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교회에 주님의 이름을 두시고 성령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이 하늘은 지구상의 하늘이나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물리적인 하늘이 아닙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이 영적인 신령한 세계에 계십니다.



그리스도 함께 하늘에 앉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혼


육신은 땅에 있지만 구원받은 우리의 영혼도 하늘에 있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우리 영혼은 본래 구원받기 전에는 죽은 상태였는데 구원을 받았을 때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함께 일으키사 그 영혼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이 땅에 있어도 영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하늘은 이 육신의 물리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성령이 계시는 역시 하늘에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성령을 육신적으로 느낀다든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거나 마음속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우상과 문화의 탈을 쓴 사탄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말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시 115:4-7)


 이 우상과 다른 신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둘째 계명이 우상에 관한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눈에 보이게 금이나 은이나 쇠나 나무 따위로 무슨 형상을 따라 만든 것이 우상입니다. 그 우상 자체는 물질에 불과한 것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탐심은 곧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그 앞에서 절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도 금을 가지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금송아지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우상의 배후에는 분명히 다른 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 있습니다. 귀신을 체험한다고 연필이나 볼펜을 들고 주문을 외웁니다. 내 영혼을 가져가고 내게 무엇을 달라고 주문을 외웁니다. 그 주문을 자꾸 외우면 응답이 온다는 것입니다. 점치는 것처럼 내 영혼을 가져가고 내게 응답을 주라고 하면 질문하는 대로 응답이 온대요. 지어낸 말이 아니고 사실로 있었던 이야기랍니다. 그래서 어떤 학생 하나가 귀신에 들렸는데 그 학생이 아버지가 대학교 교수랍니다. 그 교수가 그런 내용을 알고 한번 시험적으로 해 본 것이 당장에 자기 아들에게 옮아가서 아들이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사이에 이 세상이 엄청나게 변해가고 있습니 다 지금은 사탄이 아주 적극적인 방법으로 문화를 이용해서 자기의 영역을 넓혀간다고 합니다. 방송 매체도 그런 운동을 조장하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문화하면 좋게 들리니까 그 문화라고 하는 탈을 쓰고 사탄이 이 세상을 완전히 점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고등학생이 몇 사람을 죽였는데 그 부모들은 상당히 지식층들입니다. 잘 살고 있는 가정인데 그 집안의 아이가 그런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록이라는 음악을 듣는 중에 "그를 죽이라 그를 죽이라."는 소리를 자꾸 들으면서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 나서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귀신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까지 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지금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구원받았다 하는 학생들이라도 안심을 못합니다. 우리가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현대 문화라는 이기를 이용해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탄이 완전히 이 세상을 사로잡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끼리 지내니까 그런 일을 잘 모르고 있는데 이 세상이 너무너무 부패해가고 있고 노골적으로 사탄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정말 주님 오실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젊은 청년들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세상 문명에 너무 젖어들어 가서는 안됩니 다. 문명이라고 해서 너무 받아들이고 흡수해서는 안 됩니다. 경계선을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TV도 사람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TV를 전혀 안 볼 수는 없지만 골라봐야 합니다. TV속에 나오는 만화도 사람의 혼을 지배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잡아갑니다. 감수성이 아주 예민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가는 추세입니다.

 영국에 굉장히 큰 교회가 있는데 영국에 공부하러 갔던 한 사람이 큰 기대에 부풀어서 그 교회에 주일날 갔더니 노인들 열두 명만 왔더랍니다. 주일 집회에 노인 열두 사람만 오고 목사와 피아노를 치는 나이 많은 부인만 와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 피아노 치는 나이 많은 부인에게 이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이 교회가 전에는 사람이 꽉꽉 차 창문을 열어놓고 밖에서 예배를 봤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다 세상으로 끌려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에도 벌써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굴지의 교회들에 젊은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끌고갑니다. 이 문명이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끌고 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의 우상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


 우상을 만드는 자도 그와 같다는 것은 사람이 말도 하고 움직이지만 영적인 감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우상이 있으면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립니다. 이 성경을 읽거나 듣거나 해도 감각이 없고 양심 속에 뉘우치는 마음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처음에 구원받았을 때에는 굉장히 감사하고 구원의 감격에 사로잡혀서 미친 듯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그 영적인 감각이 둔해집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별로 성장이 없는 상태가 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죄를 지어도 양심이 무디어져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문둥병 자가 그 상처를 바늘로 찔러도 모르는 것처럼 감각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감각이 없는 상태니까 회개할 줄도 모르고 무덤덤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감사한다든지 하는 반응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마음속에 우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무엇인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떨쳐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물질을 의지하거나 내 힘이나 머리를 의지하거나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환난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생활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시 115:9-10)


 아론의 집은 제사장 집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되고 또 아론의 집은 제사장 집이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가졌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으면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또 제사장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갈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것은 신약시대에 구원받은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것은 현재로 말하면 주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 일 없이 무사하고 평범하게 지낼 때는 의지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주님을 의지해서 사는지 내가 내 힘으로 사는지 잘 모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봤을 때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인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인지가 판가름이 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 도저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는 자기가 포기되고 주님께 의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착같이 자기 머리를 굴려 자기 수단과 방법과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주님께 의지하게 만들려고 우리에게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시험이 없으면 주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한데 주님을 의지할 것이 있습니까? 견딜 수 없는 어떤 시험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때 가서 주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계속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일이 닥치고 핍박이 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비방을 받는 일이 생깁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있듯이 세상 줄을 끊기 위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시련과 환난 속에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무사 태평하고 안일하고 아무 문제없이 그냥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도 잘 되고 육신도 잘 되고 가정도 잘 되고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성장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회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회 방패시로다"(시 115:11)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의지하세 의지하세" 하며 찬송을 부르지 않습니까. 그 때에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했는데 우리를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돕지 않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주님을 의지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구원을 받을 때 주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지만 특히 우리 신앙 생활에서 믿는다는 말은 신앙 생활에서 주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면 성령이 나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방패가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의지하지 않으면 성령께서 근심을 하시면서 물끄러미 보십니다.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성령이 그렇게 보시고 근심을 하시면서 계십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4-6)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향해서 간음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장차 우리 남편이 되실 분인데 주님은 우리 사랑을 독점하시기를 원하시지 우리 사랑을 딴 곳으로 흘려 보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남편은 아내가 완전히 자기만을 사랑하기 원하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성령이 시기를 하십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성령은 강제로 어떤 사람을 어떻게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사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령은 어떤 면에서도 상당히 약하십니다. 육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강제로 어떻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순종하기만 하면 굉장히 강하신 분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복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시115:12-13)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순종하는 삶이 경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우리가 이런 말씀을 잘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8가지 복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이 성경에 보면 복에 관한 말씀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믿지를 않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는데 막상 애매히 욕을 먹고 핍박을 받으면 이것이 주님의 복이라 느끼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핍박을 받고 욕을 먹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진실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청해서 욕을 먹는다든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욥을 보면 욥의 세 친구가 와서 욥을 자꾸자꾸 공격을 합니다.

 "네가 죄를 지어서 그렇지. 하나님은 죄인을 벌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네가 지금 죄를 지어서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욥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는 하나님께 죄 지은 일이 없었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욥기 처음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욥은 모릅니다. 그렇지만 자기 양심 속에 뚜렷이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죄를 짓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못 살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욥은 어떤 때는 실망했다가 어떤 때는 또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마음입니다. 욥은 어떤 때는 실망하고 어떤 때는 의심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기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나중에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습니다. 욥을 공격한 친구들은 마귀가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 위로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위로는커녕 욥을 오히려 공격하고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현실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현실이 앞에 이르렀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마귀의 공격인데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사실이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의지하는 믿음을 배워가면 갈수록 복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분명히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회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시 115:14)


 이 자손은 믿음의 자손을 말합니다.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시 115:15)


 이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지 다른 데서는 복이 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복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새 세계를 창조한다고 자꾸 말하는데 사람이 무엇을 창조합니까.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그 안에 새것도 있고 옛것도 다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복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복이 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영적인 축복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시 115:1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회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여기 보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라고 했습니다. 하늘 문을 열지 않으면 복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복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 땅에는 없습니다. 땅에 무슨 복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한번 믿어 봅시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영적인 축복은 이 지상에 쌓을 곳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부자가 곡식이 풍부하니까 창고를 헐고 넓혀서 큰 창고를 만들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복을 땅에 쌓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을 불러가버리면 그 재산은 뉘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땅에 무엇을 쌓아보아야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쌓아두라고 한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은 이 땅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복은 땅에 쌓아 둘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사람들에게 줄 복이 하늘에 있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땅에만 계시면 우리에게 복을 못 주십니다. 복은 하늘 문이 열려서 하늘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 복을 우리가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은 전부가 땅에서 오는 복만 기다립니다. 땅에서 오는 물질적인 복만 기다려요.



하늘을 정복하고 싶은 마귀의 생각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너는 땅을 정복하라 바다와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늘을 정복하려 합니다. 인공 위성도 하늘을 정복하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짓입니까. 마귀는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떨어져서 공중 권세를 잡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아담 부부에게 거짓말하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 람에게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마귀가 준 그 말이 있거든요. 할 수만 있으면 내가 높이 되겠다고 합니다. 높이 된다는 말은 하늘을 정복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든지를 물론하고 높이 되고 싶은 그 마음이 있습니다. 그 높이 되고 싶은 그 마음이 하늘을 정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준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마귀가 아담에게 준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했지 하늘을 정복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에 속아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생각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행동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에 높이 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마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높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정복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땅에 사는 인간들이니까 복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눈을 부라리면서 살펴도 땅에는 복이 없어요. 땅은 저주 받은 곳인데 무슨 복이 있겠습니까. 아담이 죄를 지어 하나님이 땅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가인이 또 죄를 지었습니다. 가인이 사는 땅이 또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땅이 무슨 복이 있겠습니까? 땅에는 복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복을 구하려고 땅을 온통 다 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땅 속에 묻히고 맙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온 생명을 못 받은 상태입니다. 영생은 하늘로부터 온 생명입니다. 그것은 땅의 생명이 아닙니다. 구원 못 받은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데 그것은 땅엣 것입니다. 아무리 아무리 섬겨도 그 땅의 것을 가지고는 안됩 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전부가 땅엣 것을 찾는 것입니다. 땅에서 무엇을 찾는 것이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윤리 도덕 철학 전부가 땅의 것을 살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찾게 만들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가지고 오신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이십니다. 그 생명을 받아서 우리가 이 땅의 생명은 죽었고 하늘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올바른 방법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위엣 것을 찾으며 살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땅에 살면서 위를 쳐다보고 살 수 있는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실패한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복은 하늘에 있지 땅에는 없다는 데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씀이 분명히 사실이고 그 믿음을 가진다면 정말 복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 복을 땅에 쌓지 말라 하늘에 쌓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쌓아도 하늘에 쌓고 무엇을 찾아도 하늘의 것을 찾으며 살 수 있는 하늘의 백성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


"죽은 자가 여호와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이것은 영이 죽은 자를 말합니다. 영이 죽은 자는 영원히 땅에만 속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고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시 115:18)


 우리는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서 하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