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7편]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 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 다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여호와여 주의 판단을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 위에 초월하시니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시 97:1-12)


 이 시편 97편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의 상황을 예언적으로 읊은 시로 지금부터 3천여년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때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그냥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통치와 회복된 만물의 찬양


"여호와께서 퉁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신약에는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5장을 읽어보면 모든 만물이 회복되어 주님을 찬양하며 노래하는 광경이 나타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통치권을 주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그가 타락을 하자 모든 만물도 함께 저주를 받은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로마서 8장에도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19-22)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인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을 했기 때문에 피조물들도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사탄에게로 지배권이 넘어가서 그때부터 피조물이 탄식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탄식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계의 탄식이고 다음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하는 탄식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지금도 탄식 속에 있습니 다. 우리 육신은 아직 구원을 못받았기 때문에 아직도 죄의 법칙 아래 있지만 안에는 새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 생명이 있지만 그 육신 안에 갇혀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는 사람과 '사망의 몸' 이 별개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하는 그 사람은 이 사망의 몸 속에 있는 구원받은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육신 안에 그 영이 갇혀서 너무도 답답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의 탄식은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입니다. 성령은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모든 자연의 세상에는 탄식이 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가 무엇입니까?

 지금도 우리가 전도를 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금은 구원을 받았어도 아직은 완전한 자유는 못 받고 있습니다. 육신까지도 완전한 자유를 받아야 되는데 그 자유에는 못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오시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영광의 자유에 들어가게 되고 모든 자연계도 사탄의 지배하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때가 되면 이 모든 세상이 기뻐합니다. 오랫동안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완전한 분의 통치가 시작이 되었을 때에 그렇게 됩니다.



사랑과 공의의 성품을 지니신 하나님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시 97:2)


 노아의 홍수 때의 홍수도 구름입니다. 그에 의해서 세상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구름 기둥이 있었는데 이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도 구름이 나타나고 천둥이 쳤습니다. 이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인 이 구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는 무서운 심판으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0장에 보면 그 때는 아직 장막 성전이지만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에 그 안에 구름이 차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던 내용이 나옵니다.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라고 했는데 그 구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흑암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구름 기둥이 애굽 사람들에게는 캄캄한 흑암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흑암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빛으로 나타나는 데 말입 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있는데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정반대로 흑암입니다.

 노아의 홍수 얘기도 읽어보면 구름 가운데 구멍이 뚫어지면서 빛이 비칠 때에 무지개가 나타납니다. 그 무지개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은혜를 상징합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아라랏 산에 갔을 때에 우연의 일치 인지는 모르지만 하루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그 앞에 찬란한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이 아라랏산은 무지개의 고향입니다. 무지개가 제일 먼저 나타났던 장소가 아라랏 산이지요. 아라랏 산에 가니까 그 아라랏 산의 전체 모습은 잘 안 보이 는데도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구약에서는 구름은 영광임과 동시에 심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은혜로서 나타나지 만 하나님의 원수 편에서는 볼 때는 무서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보통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한편 사랑이시고 또 한편은 의로우심이 나타납니다. 의로우신 면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불의와 타협할 수 없고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속에 근본적으로 죄성이 있기 때문에 웬만한 죄를 보더라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을 하거나 거짓말을 해도 자신도 가끔 욕을 하고 거짓말도 하니까 그것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죄 없으신 분이고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니까 티끌만큼의 불의도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틀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1-26)


 하나님께서는 호리만한 죄, 쉽게 말하면 티끌만한 죄도 결코 그냥 지나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이 죄에 대해서 더욱 민감하여 조그마한 죄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 다. 그런데 단번에 죄 용서받았으니까 죄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후에 오히려 구원받기 전보다 훨씬 더 생활이 못한 사람도 있어요.

 구원받기 전보다 훨씬 더 죄에 대해서 민감하고 작은 죄라도 그 죄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다고 해서 죄를 아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을 철저히 하시는 분입니다. 호리만한 죄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처리하셨는데 그 예수님은 완전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 의로우신 성품을 나타내셔서 죄를 철저하게 예수님을 통해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 안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 인간 편에서 그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에 근거해서 받은 것이고 절대로 흔들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도 함께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의와 공평이 하나님 보좌의 기초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의로우심이 십자가에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초가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만남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시 26:8)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의 역사가 지향하는 목표가 바로 심판대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심판의 길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 받으러 가는 그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심판하시는 길에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그 심판의 길에서 주님이 주시는 그 구원을 못받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심판을 받으신 거기에서 주님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인간 역사는 전체가 심판의 길인데 그 길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심판받아 주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나이다"(사 26:9)


 하나님의 의로움이 완전히 나타나는 것이 십자가에서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 마지막 심판 때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우심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거기에 참여한 사람은 그때에 하나님의 의를 배우게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 마지막에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심판을 받을 때에서야 하나님의 의를 배우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철저하게 죄를 심판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십자가에 나타났을 때에 의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의를 배우며 의를 행하는 신앙생활


"악인은 은총을 입을 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사탄의 인도를 받는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못배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곳이지만 악인은 거기에서 의를 못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자기가 심판을 받을 때에 비로소 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에 그 의를 배우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이 의로운 생활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서는 등한하고 내가 의롭다함을 받았다 하는 그것에 그만 만족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도 되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활이 의로운 생활로 나타나게 한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그냥 공짜로 구원을 받았다 하는 거기에만 비중을 둬버리고 그 다음에 의로운 생활을 철저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기 전에는 좋지 않은 행실을 안했는데 구원받은 때부터 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완전히 죄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다가 붙여가지고 이제 나는 의로운 생활을 안해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래서는 안됩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철저하게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로운 생활을 한다고 천당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생활이 지옥을 면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의로운 생활이 왜 필요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아주 작은 죄에도 민감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의 발전이 절대로 없습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의를 추구하고 철저하게 의를 좇아 살아야 겠다는 사람은 굉장히 신앙생활의 발전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16-24)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까 그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의로운 생활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육신의 생활로 들어가서 온갖 죄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 육신의 본능적인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 탈선하면 죄가 됩니다. 가령, 성적 욕구가 있는데 그 성적 욕구를 정당하게 충족시키기 위해서 결혼제도와 부부 관계가 있는데 거기에서 탈선하면 죄가 되어버립니다. 정당하게 부부생활을 했다면 그것은 육신을 따라 했지만 죄가 안되는 것입니다. 배고파서 밥을 먹는 것이 죄가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도 정상적인 생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아도 죄와 관계 없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단순한 욕구를 넘어서서 죄를 짓게 합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그런 것은 전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 안 받은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이 뭐가 다릅니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계시니까 그 성령을 따라 살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그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을 따라 살면 작은 죄라도 성령의 생각으로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속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있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성령의 생각 속에서 예민하다면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을 자기 양심이 정죄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높은 척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내 육신의 생각 속에 남보다 높아지고 싶어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대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큰 것보다는 항상 자기 앞에 나타난 작은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 작은 문제에서 이것이 의로운 일이냐 불의한 일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굉장히 섬세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신앙의 발전이 있습니다.

 큰 것만 생각하는 사람, 큰 과오나 없으면 작은 과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신앙생활을 올바로 못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실해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나타날 주님의 완전하신 심판


"불이 그 앞에서 발하여 사면의 대적을 사르는도다"(시 97:3)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이 마지막 때에 불바다가 될 것을 말합니다.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이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6-7)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지상에 일어날 이런 일들을 시편에서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시 97:4)


 이것을 영적인 뜻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고 실지로 심판의 때가 되면 정말 이 세상은 뜨거운 불이 비추는 것 같은 변괴가 일어날 것 입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갈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 8:11-13) 


 로마서에도 그런 말씀이 있듯이 악인이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다고 했습니다. 만일 사람이 도둑질을 할 때마다 벼락을 맞는다고 하면 도둑질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불의한 방법으로 살아가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떵떵거리고 세력을 피우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악인이 그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니까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한 것입니다. 양심을 속이고 죄를 지을 때 속히 징벌이 내린다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죄악 세상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을 사탄이 벌을 주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탄은 오히려 죄를 숨겨주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죄를 숨겨주는 그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티끌만한 죄도 숨겨지지 않고 다 드러나는 때가 옵니다. 완전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심판도 완전한 것입니다. 그 심판이 조금이라도 불의하거나 불공평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어느날 완전히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느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번개불처럼 비 추어 어두운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드러납니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시 97:5)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히 정의로우신 심판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다 녹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틀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갈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8-10)


 하나님 앞에 숨겨진 비밀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조차 번개 같은 하나님의 그 빛 앞에 다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도 지옥 가는 죄는 해결이 되어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심판받을 죄는 있습니다. 지옥은 안 가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마음에 품었던 죄, 손으로 지은 죄가 다 한 번 드러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신이 있고 악이 있는데 그것이 어느날 다 드러나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심판을 거쳐야 됩니다. 물론 지옥가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거쳐서 깨끗해져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깨끗해야 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6-9)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그 예비한 세마포를 입었는데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 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이사야서에 보면 구원의 옷이 있고 의의 겉옷이 있는데 그 옷이 서로 다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구원의 옷을 입고 있지만 또 신부의 옷을 입어야 되는데 그 신부의 옷이 바로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의 옳은 행실도 육신적으로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따라서 행한 옳은 행실이 신부의 옷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그때부터 성령의 시대가 되었는데 그 성령을 좇아 행한 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요 그것이 신부의 자격을 갖추는 세마포 옷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지은 죄가 심판의 과정을 거쳐서 정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욕하기를 저 사람들은 단번에 구원받았으니까 죄 지어도 괜찮다고 한다며 억지 소리를 하는데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장차 선포될 하나님의 의-멸망받을 자들이 깨닫는 의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시 97:6)


 여기에 보면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이루어질 심판의 때에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하늘이 떠나가는 일 즉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이 이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 7:28-30)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침례를 받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습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35)


 이것은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라고 고백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피흘려 십자가에 돌아 가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 버 렸습니 다. 구원을 못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 롭다고 하는 참된 고백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마지막에 가서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의로 우신 것을 깨닫게 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당할 수치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97:7)


 물론 이것은 구원 안받은 사람에 대한 말입니다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돈을 섬기는 것도 우상입니다.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명예가 우상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항상 마음에 귀하게 여기는 그것도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허무한 우상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라고 했는데 구원받은 사람이 다 신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우리들은 신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날


"여호와여 주의 판단은 시온이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인하여 즐거워하였나이다"(시 97:8)


 시온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영적인 뜻으로는 우리도 시온에 사는사람들입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는 찬송처럼 교회도 시온에 포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너무도 불의하고 부조리하고 불법이 성행되고 있는 불안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이 세상 부조리를 보면서 어떻게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느냐, 신이 있다면 이렇게 모순이 많은 세상이 있겠느냐, 이런 세상을 신이 어떻게 만들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어 이유를 대거나 핑계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는 아주 철저히 믿는데 지옥은 안 믿는다고 합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믿는데 지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지옥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 이성의 이론으로 따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성경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도 그날 가면 다 드러나고 소 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의로우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 사람들에게 늘 핍박과 고난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뭔가 억울하고 답답한 것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지막 때에 가면 정말 오랫동안 응어리 지고 답답하고 괴롭던 문제가 그냥 다 풀려버릴 것입니다. 그 때에 얼마나 기뻐 하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 위에 초월하시니이다"(시 97:9)


 지금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극히 상식적인 말씀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온 땅 위에서 하나님이 제일 높으시고 모든 신 위에 뛰어 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실지로 그 때에 가면 우리가 그 현장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 세상이 시끌시끌하고 사람들이 입을 벌려 진화론을 주장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날에 가면 다 드러나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느끼고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 해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셨는데 악을 또 사랑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지긋지긋한 죄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그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의 손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우리가 그 악을 좋아할 수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념하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시 97:11)


 여기에 빛을 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내가 곧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빛을 뿌린다 하는 말은 우리 마음이 본래 어두웠고 이 세상은 갑갑하고 어두운 세상인데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되는 곳에 빛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세상에 빛으로 뿌려져 우리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죽어야 할 장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자기들 앞에 찾아오는 조그마한 목마름이나 배고픔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몽땅 잊어버리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우리 속에도 있습니다. 구원받았을 때에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그러나 조금 지나고 나서 조그마한 어려움을 당하면 언제 구원받았는가 싶습니다. 구원을 헌신짝같이 여기고 마음에는 불평과 불신만 꽉 차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마음속에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기념이라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갈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


 우리가 세상의 이런저런 어 려 움을 당해도 구원과 비교해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조그마한 어려움을 못참아 가지고 "구원을 좀 늦게 받았더라면···"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시 97:12)


 기념이란 말은 밑의 난 외주에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뻐하며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할지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심판받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기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제 곧 우리 앞에 얼마 안 있으면 그 심판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틀림없이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할 것입니 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이 세상을 사랑하고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 떠나 있으면 주님 오실 때에 부끄러움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위로부터 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은 계속 위를 쳐다 봐야지 그냥 땅만 돌아보아서는 안됩니다. 땅에 속해 아직도 땅이 주는 것만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면 주님이 위로부터 오실 때 얼마나 부끄럽겠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그렇게 마음이 땅을 향하고 있을 때에 주님이 오시면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