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9편]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그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중에는 사무엘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에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니 저희가 그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시 99:1-9)



재림하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예언하는 시


 시편 99〜98편에 이어서 이 99편도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천년 왕국을 통치하시는 일을 찬양하고 있는 시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으로서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시 99:1)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신약에는 그리스도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재림하셔서 통치하시는 일을 읊은 예언적인 시인 것입니다.



그룹의 상징적인 의미-예수님의 4가지 속성


 여기에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룹이라는 말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그룹은 천사를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같이 빛나며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같이 빠르더라"(겔 1:4-14)


 계시록에 나오는 이 네 생물은 어떤 영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계시록 4장이나 5장에도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 속에서 천사는 이런 생물의 모습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지성소를 보면 그 안에 법궤가 있는데 뚜껑 위에 날개를 펴고 있는 두 그 룹이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천막의 휘장에도 그룹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휘장은 예수님 자체를 상징합니다. 그 휘장의 새겨져 있는 그룹은 사람의 모습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버렸습니다. 그 휘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예수님의 육신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육신 속에 모든 사람을 담고 계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이 세상 모든 죄인들도 다 죽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우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는 말씀이나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롬 6: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 사람의 모든 운명이 다 담겨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우리 전부가 다 함께 죄인으로 죽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휘장에 새겨져 있는 그룹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법궤 뚜껑을 덮고 있는 두 그룹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천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네 그룹은 각각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 네 생물들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을 때에 나타날 네 가지 성격과 사명을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은 사자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다는 의미에서 그룹이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 다음에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종처럼 일하러 오셨다는 의미에서 소 복음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신령한 사실을 말합니다. 사 복음서 중에 특별히 요한복음은 주님의 육신의 성격보다는 하나님의 신성을 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 요한복음을 많이 인용합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이 다른 복음보다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룹에 의해서 표현된 예수님의 4가지 사명


"이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큰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1)


 계시록 2장 3장은 일곱 교회에 대한 얘기고 이 4장은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그 문을 통해 하늘로 들림을 받는 광경이 나타납니다. 하늘에 광경이 나타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이십사 장로들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또 신약 열두 사도들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네 생물이 나타나는데 사자와 소와 인자와 독수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자는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말하고 소는 섬기러 오신 사명을, 인자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면을 나타내고 독수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아 시행하는 그룹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을 때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그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창세기에서부터 그룹이 나옵니다,그룹이 어떤 면에서는 천사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속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룹은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고 또 여러 모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룹과 천사를 구별해 놓고 있기도 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이 그 그룹 사이에 좌정을 하시게 되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에 그 그룹들이 각기 그 성격을 따라서 예수님의 특명을 받고 예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권위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니까 그룹 같은 특별한 존재들이 보필하지 않더라도 혼자서 얼마든지 이 세상을 통치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천사나 그룹 같은 존재들이 있어가지고 명령을 받아 시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4장에서 하늘에 그러한 생물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에도 그룹들이 각기 맡은 자기의 사명을 주님의 명령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구원받은 이들을 위한 천사들의 역할


 한편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천사들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14절에 천사들은 구원받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어느날 어린아이들을 제자들이 업신여겨 예수님께 오지 못하도록 하자 예수님께서 그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그 어린아이의 천사들이 예수님 앞에서 얼굴을 뵙고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 구원받은 사람 개인개인마다 천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도 조금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


 여기는 구원 얻을 후사라고 말했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을 지키고 섬기는 천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우리를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할까요? 가령 우리가 죄를 지으려고 하면 죄를 못짓도록 할까요?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짓지요. 그렇지만 천사나 성령이나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압적으로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 순종할 때 나타나는 성령과 천사의 도움


"너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이 근심할 것이 없이 우리를 완전히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 될텐데 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양심을 통해서 어떤 문제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죄니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는 양심을 통한 가르침을 우리가 묵살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끌려가는 힘이 강하면 양심을 통해서 내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묵살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고 천사도 사람의 자유의지를 꺾어서 강제적으로 죄를 못짓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또 우리를 섬기는 천사도 있는데 가끔 가끔은 구원받은 사람 중에 교통사고나 암이나 그밖에 여러가지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사가 함께 있다면 보호를 하고 그런 위기에서 건져야 할텐데 왜 그렇게 되느냐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의지로서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만이 성령이나 천사가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우리 힘으로는 안되는 것을 도와 주는 것이 성령과 천사의 일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데 천사나 성령께서 우리를 순종하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거룩하심에 참예하기 위한 고난과 훈련의 과정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자유로우면서도 질서 있는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 의지로 주님께 순종을 하고 신앙의 결단을 내리려면 그만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거룩한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룦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8-13)


 여기에 보면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고 했는데 우리에게 징계가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의지가 훈련을 받아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훈련을 많이 받고 시험을 많이 통과한 사람은 하나님이 마음대로 그를 다스릴 수 있는 아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시킬 수 있고 쓰실 수 있습니다. 너무 뻣뻣한 사람은 일을 시키기가 참 어렵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일을 시키려고 하면 잔소리를 많이 하고 성질이 뻣뻣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일을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지요. 그러나 성격이 유순하고 겸손한 사람은 시키는 대로 일을 잘 하지요. 그처럼 우리 육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유순해지지 않은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쓰실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채소가 뻣뻣하지만 소금을 쳐버리면 푹 죽어버리듯이 우리의 성격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훈련을 많이 받아서 그렇게 되는 것 입니다. 사도 바울도 본래 얼마나 뻣뻣한 사람이었습니까? 뻣뻣하게 자기의 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루실 때에 나중에 얼마나 부드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된 사도 바울


 사도 바울도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은 다음에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25-26)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고전 7:36-38)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 7:40)


 사도 바울이 한 이 말씀들이 지금 우리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얘기입니다. 바울 당시의 풍습은 옛날 우리 나라의 풍습과 같았던 가봐요. 우리 나라도 옛날에는 딸을 시집보내는데 본인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부모가 결정해서 마음대로 결혼을 시켰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도 그랬습니다. 한 번도 선본 일이 없어요. 상대방의 얼굴도 본 일이 없고 부모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결혼했습니다. 참 지금 사람들 생각으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요.

 부모가 결정해서 결혼을 시키는 시절이었는데 여기에 보니까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괜찮지만 시집보내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입니다. 임박한 환난을 위해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런 성경을 읽으면서 참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아직 오실 날이 멀었으니까 어떻게 하라고 했으면 지금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게 써놓았으면 이 성경이 우리에게는 해당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언제든지 예수님이 곧 오실 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때려 치우고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에 휴거되기만을 기다리는 어떤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만 어느 시대의 사람이든지 예수님이 곧 오실 줄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한다"거나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 한 사도 바울의 의견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의견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고생과 고난 속에서 육신의 생각이 거의 사라져버리고 그 마음 자체가 성령 안에서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순종의 중요성


 잠시 본문에서 벗어난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를 섬기는 천사가 있는데 그 천사가 우리를 섬기도록 되자면 우리가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때에 천사가 우리 일을 뒤에서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주님 앞에서 충실하고 주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여러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나를 섬기는 눈에 안보이는 천사가 있어도 내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 천사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데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성령이 도와주시고 또 천사도 협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집을 피우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성령도 가만히 보고 계시고 천사도 그냥 지켜만 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천사가 있고 또 성령도 계시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해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 하고 결심을 해도 내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 안되는 것을 성령이 도와주시고 천사도 도와주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래서 있는 것이고 성령도 그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죄의 길을 택하고 딴길을 걸으면 성령이나 천사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낮아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주님의 은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4-8) 


 7절에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해놓고 그 다음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말했는데 우리가 스스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우리는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강합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하나님께는 순복하고 마귀는 대적하라고 하셨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려는 의지를 가졌을 때에 이미 마귀를 이기신 주님이 함께하시고 천사와 성령께서도 도와주셔서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자체가 마귀를 대적할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앞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였는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영적 간음입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는데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성령이 시기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시기하시지 말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붙잡고 말리시면 될텐데 그렇게 안하시는가봐요. 그러면 성령이 왜 시기하시는 걸까요? 진정한 사랑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인데 주님 말고 세상을 사랑하니까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강제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주님만을 사랑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아주 겸손하고 순한 양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고난과 시련을 많이 겪고 나서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 아무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고 말 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열심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아직은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했었다는 간증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고난을 많이 통과했을 때에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하고 낮아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움직여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온 세계를 통치하실 주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시 99:2)


 시온은 예루살렘입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는 찬송가처럼 이 시온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완전한 이상적인 도시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라는 말은 주님이 온 세계를 시온에서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중심지가 예루살렘이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주님의 이름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3)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는데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 이름에 복종하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그 주인격인 존재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주님이 재림하셔서 다스릴 때 가서는 그 모든 높은 이름들이 다 없어져버리고 주님의 이름만이 온 세계 위에 완전히 드러나 그 이름으로 세상을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사는가?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해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현재 우리가 얼마나 높이고 있느냐는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는 말씀도 있는데 우리가 아직 신앙생활이 미숙한 탓에 우리에게 주님의 이름이 계시다는 것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주님의 이름이 장차 어떻게 될 이름입니까? 장차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이름에 경배하며 무릎을 꿇게 되지 않습니까? 그 이름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그 이름을 감추고 싶어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구원받은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탄로가 날까봐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상태는 아닙니까?

 물론 이것은 우리가 지혜롭게 행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너무 지나치게 움츠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현재 이 세상에서 악평을 받는 것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그런 것이니까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그 일 때문에 잡혀 공회에 서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지 않았습니까? 그 이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기쁜 일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사는 사람


 우리는 어두운 속에서 어두운 일을 할 때에는 완전히 주님의 이름을 숨겨놓고 삽니다. 가령 죄를 지을 수 있는 틈이 내게 있을 때에 그냥 내가 죄를 지어 버리면 육신적으로 편하고 재미도 있을 것 같은 때가 더러더러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백성인데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하면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강력히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면 그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확실히 믿고 의지하면 이길 수 있는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물론 천사도 와서 돕겠지요. 그러나 죄에 빠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이 순간순간 무너질 때에 주님의 이름은 뒤로 물러가고 내 육신은 앞으로 나서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살다가 나중에 주님 앞에 선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우리는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이름이 계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그 주님의 이름을 싫어하고 핍박하고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를 욕하는 일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하고 잘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잘 하더라도 세상은 우리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그것을 더 깊이 느낍니다. 욥이 그 모양 그 꼴이 된 것은 사탄의 참소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완전한 사람이다, 이 세상 사람 가운데 욥처럼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사탄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하나님이 그를 잘 봐서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니까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데 자식이 죽고 재산이 없어지고 욥의 육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그 다음에 친구 셋이 찾아와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그렇지, 너의 꼴이 그게 뭐냐 죄 없으면 그런 꼴을 왜 당하느냐고 했습니다. 친구들도 사탄이 그렇게 한 줄을 몰랐고 욥 자신도 사탄이 자기를 그렇게 한 줄을 몰랐습니다. 나는 죄를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죄 있다고 하시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식으로 나갑니다. 욥이 만일 사탄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말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세 친구의 말도 달라졌겠지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주님의 이름 밑에 사는 사람이지만 배후에는 사탄의 공격이 있습니다. 내 육신에도 사탄이 있고 이 세상에도 사탄이 있고 우리를 욕하는 사람의 배후에도 사탄이 있습니다. 우리가 접촉하고 있는 모든 배후에는 전부 사탄이 있어요. 내가 관계하고 있는 돈 뒤에도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이 뒤에서 숨어 있으면서 어떤 사람은 돈으로 넘어뜨리고 어떤 사람은 친구로 넘어뜨리고 어떤 사람은 그의 육신의 생각으로 넘어뜨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확실히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사는 사람이라면 사탄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3)


 결국은 주님의 이름이 온 세계를 정복하고 사탄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두려운 이름인 것입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공의와 완전한 통치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시 99:4)


 우리 나라가 군사정권이 지나가고 민주정부가 되었는데 과거에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보면 공의로운 것이 결국은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은 절대적인 공의에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처럼 조금이라도 불의하거나 판단력이 흐리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입니다. 천년왕국 때에 주님이 통치하실 때에는 조금도 불의하거나 공평치 못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가장 이상적인 통치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공의가 시행되지 못합니다. 주님이 오셔야만 완전히 공의를 행하시고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온 땅이 주님을 경배함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5)


 세계의 온 땅이 주님이 발을 올려놓는 발등상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서 주님께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모세와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그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중에는 사무엘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시 99:6)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출 32:31-32)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고 있는 동안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버리려고 하시니까 모세가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만일 그들을 용서 안하시려고 하거든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 기도는 완전히 자기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내용입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사무엘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달라는 죄를 지었는데 나중에 사무엘의 기도에 의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인도를 받았습니다. 모세와 사무엘의 기도에 힘입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주님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에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니 저희가 그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9:7-8)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온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게 됩니다. 그동안에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제사장으로서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기 전에는 모세와 아론, 사무엘 같은 제사장의 계통이 있어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제 제사장의 사명이 끝나고 왕으로 군림을 하십니다. 모세나 아론이나 사무엘처럼 기도하시면서 제사장의 사명을 하시고 있는 예수님이 장차 온세계의 통치자로 군림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1-2)


 지금 우리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대변해 주시고 계시는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 제사장이신 주님이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의 주권자가 되고 통치자가 되십니다. 물론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도 그 왕권에 함께 참여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지금은 지성소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과 관계를 맺고 그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인도를 받는 사람은 나중에 주님과 함께 왕권에 동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등한히 여기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주님만 알지 나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은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기도합니까?



대제사장이신 주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는 생활


우리의 구원은 세 가지입니다.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육신의 구원. 현재는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에서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매일 살아가는 그 삶에서 구원을 경험합니까? 그 구원은 지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의 제사장 역할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지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지성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5장 끝에서 6장, 7장까지 죽 내려가다 보면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멜기세덱은 지성소 안에 계시는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이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생활이 차원이 높아지는 것은 그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장차 그분과 함께 왕노릇할 사람들입니다. 그러자면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주님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관계를 맺지 않았느냐고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구원받아도 현재 살아계신 주님과 관계를 깊이 맺지 않고 엉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삶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시 99:9)


 온 세상 만민이 그 성산에서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끝부분에 보면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자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다 예루살렘으로 와서 초막절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성산에서 경배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남아 있는 온 세상 만민이 한 분밖에 안 계시는 그 이름을 가진 그분 앞에 와서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았고 죄사함 받았으니까 이제 천당갈 수 있으니 다 되었다고 그만 신앙생활이 거기서 끝나버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간에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이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옳게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 중간 단계입니다. 이것은 천년왕국 동안에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왕노릇하는 문제와 지금 제사장으로 계시는 주님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사는 문제가 현재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성경을 읽고 무엇을 알아가거나 죄를 뉘우치는 문제도 전부 지금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그 주님을 깊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신앙생활이 더 철저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