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0편]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찬송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1-5)


 시편에는 깊은 영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시인들이 지은 시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더더욱 이 시편은 영적인 뜻이 이면에 담겨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주받은 땅이 다시 회복될 때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시 100:1)


 이 100편은 하나님 께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라고 하였는데 성경적으로 '땅' 이라고 하면 주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온 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이 계시록 5장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회복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책을 받으시 니까 천군 천사와 모든 만물이 노래하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이런 노래를 부르게 될까요? 



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땅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아담이 죄를 지어 그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았고 저주가 그 후의 모든 사람에 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원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에 대한 권리를 다 부여하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고 그 다음에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고 또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의 권세는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권세를 받은 아담이 죄를 지어 그만 땅이 저주가 되어 버렸습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8-19) 


 저주받은 땅은 비옥하고 기름진 것이 없어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도 말을 잘 듣지 않는 환경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는 고통과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비단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모든 되어지는 일들에 저주 받은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환경 문제도 땅이 저주를 받은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에는 고통스럽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을 위협하는 조건을 지닌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에덴 동산은 아름답고 살기 좋고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았으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으로서 그 땅을 지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을 때에는 현재와 같이 사람들이 죄를 짓고 음란한 행위를 하면서 그러한 상태에서 불의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아주 악한 세상이 되어 버릴 것을 예상하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그 땅은 굉장히 아름답고 살기 좋고 복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땅은 저주를 받았고 그 저주가 현재는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 위에도 임했습니다. 하여튼 이 땅 위에 엄청나게 많은 재앙이 따르고 있고 전쟁이나 질병 그밖에도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는 피조물들이 탄식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7-23)


 창세기 3장에 있는 말씀대로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다 저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차피 고생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값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땅이 허무한 데 굴복을 했고 또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고 탄식을 하는 세계에 우리도 갇혀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롬 5:12-17)


 14절 끝에 가서 보면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동안 이 땅이 저주를 받은 결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이 되었고 그래서 모든 인간과 자연계와 만물이 사망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하게 이 땅을 회복하시는 그 때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 육체로부터 동물 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만물이 자꾸만 더 나빠지고 썩고 냄새나는 방향으로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도 역시 고통을 당하고 있고 공해와 환경 문제로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무엇인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것은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또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건의 찌꺼기가 넘쳐나서 생겨난 결과로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는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완전히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희망을 걸 것도 없고 미련을 둘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정말 모든 것이 사망과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거나 우리의 모든 생각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아래 갇혀 답답하게 탄식하는 이러한 세상이 예수님이 오시면서 완전히 저주가 풀리고 에덴동산으로 회복이 되는 그때는 정말 생명력을 발휘하는 생생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온 땅이 여호와께 즐거이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에서 그것을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물도 마음놓고 마실 수 없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폐병 든 소를 잡아가지고 판다는 방송을 들은 이후로부터는 고기 맛이 삭 가셔 버렸어요. 폐병 든 소는 불사루어 없애버려야 되는데 그걸 잡아 정육점에 판대요. 그 얘기를 들은 후부터는 고기를 잘 안 먹습니다. 채소를 팔 때도 생생하게 보이기 위해 독이 든 약품을 친다고 그래요. 그러니 채소인들 마음대로 먹을 수 있습니까? 또 밀가루는 미국에서 수입해 오는데 상하지 말라고 올 때 굉장히 독한 약을 친답니다. 현재 이 세상은 사람의 마음만 썩은 것이 아니고 모든 물질도 다 썩고 냄새가 납니다. 이런 세상이 만일 오래 간다면 정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이상 기온으로 비가 안 오는 곳은 몇년 동안이나 비 구경을 하지 못해 가물어 굶어죽는 상황입니다. 오존층이 파괴되어 사람의 얼굴이 타고 암을 유발하는 자외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주님이 오셔서 모든 저주가 다 풀리면 그때는 과일 하나를 먹어도 아주 기분 좋게 먹을 수 있겠지요. 지금은 과일도 마음대로 못먹습니다. 껍질과 살 사이에 가장 좋은 양분이 있지만 농약 때문에 아주 두껍게 깎아서 내어버리고 먹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신 그 저주가 인간의 운명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어가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완전히 회복이 되고 진정한 자유가 왔을 때에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하는 말씀이 실감이 나고 얼마만큼 깊이 있는 말씀인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계가 무슨 생각이 있어 노래를 부르고 찬송을 부르겠습니까만 이 모든 자연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본연의 상태로 돌아갔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듯한 생생한 생명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세상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온전하지 못합니다. 아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마음이 그 속에 있었다면 사탄의 꾀 임을 받고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성령이 그 안에 없었습니다. 아직은 죄가 없는 상태였지만 아담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 었고 하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을 온전히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 불완전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전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이 좋아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 아담은 죄가 없는 상태였고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그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거듭난 시점에서 아담을 생각할 때 아담은 완전히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준비된 사람이고 그 준비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성령을 불어 넣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담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겼으면 사탄의 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라고 했는데 이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첫째 믿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분명히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많은 나무와 실과가 있고 그 중에는 생명과도 있었는데 그 생명과는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물론 사탄이 하와를 먼저 꾀었고 다시 하와가 아담을 꾀었지만 아담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현재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조금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는 상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벧전 1:22)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우선은 우리 영이 깨끗해져 있으니까 이 깨끗해져 있는 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온전히 섬기지 못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계십니까? 물론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실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5절에 보면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속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이 육신이 말을 안 듣습니다. 우리의 육신까지 구원을 받아야 완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이 육신이 변화받기 전에는 완전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또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죄에 빠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곁길로 가버립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커다란 문제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든지 불가능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내가 자책할 것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직 한 사람, 바울만이 하나님을 완벽하게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구원을 받았지만 위선의 죄를 범했습니다. 베드로도 완전히 하나님을 섬기지는 못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갈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1-14)


 바울 당시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교회의 책임자였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바리새파가 가장 힘이 있었는데 바리새파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 우두머리가 야고보라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지금의 시리아 지역인데 바울은 이방 지역인이 안디옥을 근거로 터키 전 지역과 그리스 쪽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때 이방 교회로서 굉 장히 역사가 많은 곳이었는데 베드로가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안디옥은 이방 사람 중심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구원을 받은 이방 사람과 베드로가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왔는데 베드로가 이방 신자들과 같이 음식을 먹다가 그만 슬그머니 자리를 했습니 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앉아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파 교인들은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율법 주의나 유대인이라는 우월감에서 완전히 마음이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방 사람을 무시하고 이방 사람들과 같이 앉아 음식을 먹지 않는 습관이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다가 피해버린 것은 예루살렘에서 온 그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앉아 먹으면 예루살 렘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공격을 받을까 싶어 피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그러한 행동이 위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 2:14)


 바울이 베드로에게 한 말은 구원받은 세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교제할 수 있고 그렇게 했으면서 정 작 유대인들이 올 때 그 자리를 피한 것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는 뜻이 있지 않느냐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도 위선의 죄를 분명히 범했습니다. 이 때는 벌써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상당한 시일이 흘렀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신령하고 믿음이 좋아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만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를 판단하실 이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다, 주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로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섬길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완전히 기뻐하실 수 있는 만큼은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감사한 것은 하나님도 우리의 그러한 상태를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현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만큼 섬기면 기뻐 받으시고 그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비결


 그렇지만 육신이 변화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비결입니다. 현재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사람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세상이나 물질을 더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좀더 이 육신의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더욱 섬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을 때에 이미 지옥갈 죄는 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사실 죄 자체가 지옥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지옥을 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면 죄의 여부에 따라서 공정한 심판에 의해서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 형벌 받을 죄는 우리가 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그 죄를 완전히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짓는 죄는 우리가 고백을 하고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남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갚아야 되고 서로 마음이 상한 것이 있으면 자백해야 합니다. 그런 자백을 통해서 죄가 용서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지옥갈 죄는 단번에 영원히 드려진 예수님의 대속의 피에 의해서 해결되었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자백할 때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가깝게 섬기려면 우리 생활 속에서 죄를 정리해야 됩니다. 죄를 지었는데 그 죄를 그냥 두고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모든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진정으로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으니까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은혜로운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현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더 가까이 섬기는 사람이 있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함으로 사함 받아버리면 그 죄가 끝나버리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미루어 놓으면 나중에 들림 받은 후에 심판을 받습니다. 들림을 받은 후 심판의 과정을 거치고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게 됩니다.

 현재 우리 마음으로는 그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구원받은 이후에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결심을 한 일이 있으십니까? 자신을 주님께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에 따르는 시련을 거치는 만큼 하나님을 섬겨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어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세상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때는 이 세상이 변하고 모든 만물이 회복됩니다. 그 세상은 마귀가 없는 세상이 되어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세상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과 피조물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섬기고 또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선생은 학생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거기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그 동기가 불순하고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아름답고 질서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현재 이 세상에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가령 부모가 자식이 사랑스러우면 그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뭐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한 단어 한 구절이라도 슬쩍 읽고 지나가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 말씀 속에 우리 마음이 동참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을 그냥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성경 말씀을 읽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면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거나 누구에게 묻기보다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뜻일까 자꾸 생각을 하면 나중에 어느 시점에 가서 '아 그렇구나 바로 그 말씀이구나' 하고 알게 되고 그 말씀 안으로 몰입이 되어 그 말씀 속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라고 되어 있는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면서 살 수 있는 그 세계를 어렴풋이라도 생각하며 지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년왕국 때의 찬송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여기에 노래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찬송과는 다른 것입니다. 계시록 14장에 보면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그 노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때 가면 언어가 완전히 통일될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마다 언어가 다릅니다. 찬송가는 성경처럼 전세계적으로 완전히 통일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나 유럽에는 우리가 부르지 않는 찬송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번역이 되어 현재 우리가 부르는 찬송도 많습니다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작곡한 찬송도 여럿입니다. 김활란 박사나 김재준 교수, 김정준 박사 같은 이들이 작사 작곡한 찬송은 세계 다른 데 가면 들을 수 없는 찬송입니다. 천년왕국 때는 제각기 다른 이 찬송이 통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주일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고 성가대의 성가를 듣는데 우리 마음에 드는 찬송을 부르면 굉장히 힘이 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때에 가서 부르는 찬송과 노래가 얼마나 아름답고 즐겁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쁘게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찬송의 근거-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고린도후서 5장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가 주님과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 5:4-7) 


 여기에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처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보는 것 같으면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늘 우리 곁에서 계시지만 우리 눈에 안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시험을 받아도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시험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안 믿어지는 사람은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는 주님과 내가 따로 있는 것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주님 편에서 볼 때는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고 가는데 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나중에 또 갑자기 안 보이셨습니다. 또 열 한 제자가 방 안에서 문을 닫고 있는데 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또 안 보이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안 보이시지만 늘 옆에 계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변화받은 다음에는 믿음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육신이 변화받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가면 그때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첫째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시 106:9-1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종노릇하던 백성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불쌍해서 구원하셨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려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주 원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장차 거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온 세상에 구원을 전파할 민족을 삼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온 세상이 마귀의 백성이고 마귀에 속해 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원수에게서 그들을 건 지신 하나님을 믿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우리들도 찬송을 부릅니 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찬송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을 온전히 보게 되고 완전한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라는 말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를 지으셨다는 말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시켜 새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도 함께 사고 구경도 하고 학생들은 구원받은 학생이나 안 받은 학생이나 다같이 학교에 가서 책상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고 세상 지식을 배웁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외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 보면 자칫 내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살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세계에 가서 누구하고 접촉하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할지라도 마음속에 항상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면 무언가 생활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됩니다. 그 세계에 푹 빠져가지고 같이 지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옛 세상, 죄악 세상, 생명이 없는 세상에 그냥 푹 빠져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고 살지는 않겠지요.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 접촉하면 할수록 나는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다 하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요" 라는 이 사실이 확실하면 거기에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그때 가서 더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세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8-19)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속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현재는 우리들이 세상에 자주 발을 들여놓곤 하니까 세상과 구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가면 완전히 구별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의 세계가 완전히 구별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 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갈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이 세상 사람들은 많지만 주님의 양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잃어진 양이었는데 지금은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이 성경 구절을 읽다가 구원받는사람도 꽤 많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요 10:1-6)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고침을 받은 날이 안식일인데 유대인들은 이 일을 빌미로 예수님을 비방하고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뛰어넘어 들어간 자들입니다. 지금도 목자로 자처하면서 울타리를 뛰어 넘어들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은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문도 되시고 목자도 되시고 여러 가지 의미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거듭난 경험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주님의 양을 기를 수 있는 목자가 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를 받아야 되는 것이지 그냥은 안됩니다. 이런 것이 다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 지금 시대입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했는데 여러분의 이름을 예수님이 언제 부르셨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으실 때에 여러분의 이름을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가 받는 것이 아니고 '내' 가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면 양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 가 되어버리죠. 구원받을 때는 각자가 받지만 그 후에는 무리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구원받고 주님의 음성을 잘 따르면 배불리 먹고 잘 자랄 수 있습니다. 가끔가끔 구원받은 이후에 무리를 떠나 진탕 고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이 확실하면 다른 어떤 가르침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음성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7-11)


 전에는 잃어졌지만 이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 따르면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도 많지만 희미한 것도 있어요. 우리 육신의 생각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확실하고 실감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는 사람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이제 조금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갑니다. 그 궁전이 교회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전이 궁전인데 실지로 우리가 그 궁전에 들어갑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하심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5)


 그때 가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됩니다. 지금도 물론 우리가 상식적으로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것을 알지만 그 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에 동참하여 그 선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때는 지금은 미지수로 남아 있는 모든 문제가 다 풀려버리니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미지수로 이해가 안되는 것들이 조금은 있습니다. 아직은 갈등들이 있지만 그 때 가면 다 풀려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할 때가 옵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것을 믿고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을 섬깁니다만 그때는 하나님을 직접 섬기며 정말 감사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