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송하리이다 내가 완전히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말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시 101:1-8)
시편 101편과 관련하여 사무엘하 6장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문제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야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 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그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 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삼하 6:1-15)
시편 101편 내용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메어오는 일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무엘 상 하를 읽으면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고 법궤를 옮겨 오는 일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당시의 법궤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시편 101편은 하나님을 모시는 문제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나타난 시입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인자와 공의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여기서 인자와 공의를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은혜와 진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공의의 두 가지 성품을 아울러 지니고 계시는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말씀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이 두 가지 성품을 지니신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때는 죄도 짓고 실수를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의 입을 통해서 읊어지는 시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씀하는내용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온전한 사람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시 101:2)
하나님을 모시려면 언제나 완전한 길에 주의를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완전한 것일까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는 이 말씀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이상하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누구든지를 물론하고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온전' 이라는 말은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라는 뜻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이 젖 먹는 아들이 있고 밥 먹는 아들이 있는데 밥 먹는 아들은 장성한 아들입니다. 장성한 아들은 젖먹는 아들보다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젖먹는 아기도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목구비가 갖추어져 있고 사지가 있어 젖을 먹을 망정 사람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장성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며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도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하고 가까운 사람은 사랑하지만 자기하고 인연이 먼 사람 더더구나 원수는 사랑하라고 했지만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태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지 말고 장성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요 14: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구약시대에 다윗이 법궤를 자기가 사는 곳으로 가져와 모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신다는 뜻인데 이처럼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완전한 길에 주의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는 집은 신약시대로 말하자면 교회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자기 곳으로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인데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나의 계명은 새 계명을 말하는데 이 새 계명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대로 사랑이 온전할 때 장성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것입니다.
새 계명이 실천되는 곳-교회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란 말이 바로 새 계명을 지키면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되어 있는데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절대적인 요건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늘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고 머리되신 주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하나님이 홀로 계셨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이 목표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다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대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오셨을 때에 나타난 현상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재물을 제것이라 하는 사람이 없고 있는 것을 팔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로 사랑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근본 뜻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 즉 새 계명의 실천입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처럼 지식이나 능력이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는데 그 온전이란 것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에게 햇빛이나 비를 다 골고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이 자라서 마음이 넓어져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고 원수도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 자세가 되었을 때 그 상태를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이 개인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마음이고 교회적으로 보면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교제의 역사가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요일 4:12)
육신적인 사람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변화되어 가는 사람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시 101:3)
'비루' 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생각이 천하여 자기를 높여 자랑하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입 니다. "붙접지 아니하다"는 말은 내게는 합당하지 않다, 부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교회나 개인은 비루한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비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가 제일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아주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육신적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 그 정도가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근본 성품이 좀 경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온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속에서 고난과 훈련을 많이 받고 시련을 많이 겪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인격이 곡식처럼 익어가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어떤 신령한 능력이 생긴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인도하여 아주 인격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성령은 사람의 실제적인 생각을 바로잡아가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아주 신사적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 자기를 높이지 않고 인격이 차츰차츰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부러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안 됩니다. 그것은 많은 시련과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운동하는 사람이나 군인도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생활도 훈련입니다. 체력적인 훈련이 아니고 마음의 훈련입니다. 육신적이고 욕심이 많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들이 강한 훈련을 통해서 차츰차츰 변화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성경 진리를 깨달으면 한꺼번에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깨닫는 것하고 훈련을 받아 차츰차츰 인격이 변해가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루한 자는 신앙생활 속에서 전혀 훈련이 안된 사람,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겸손하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고 아주 고도로 훈련을 받은 사람 속에서 그런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배도-타락한 교회와 신앙생활의 이탈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했는데 역사적으로 배도자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입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가령 가룟 유다같은 사람이 배도한 사람입니다. '배도'는 도를 배반한다, 반역한다는 뜻인데 자기 욕심 때문에 배도를 합니다. 이 시대적인 배도는 교회의 타락입니다. 타락한 교회는 장차 적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계시록 17장에 보면 음녀가 나옵니다. 배도자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정절은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 이 교회가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지 않고 적그리스도를 남편을 모시게 됩니다. 계시록에 보면 음녀가 열 뿔 가진 짐승을 타고 나오는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타락한 교회가 적그리스도와 야합을 하여 마지막 시대를 꾸미게 되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배도입니다. 그 이외에도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배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물려버릴 수는 없지만 자기의 이권이나 개인의 사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온전한 길에 주의를 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집안에서 행하고 비루한 것을 눈앞에 두지 아니하고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여 그것에 붙접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고하고 정결한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의 자세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시 101:4)
사특하다는 말은 간사하고 인간적인 꾀가 많은 것을 말합니다. 아주 간사하고 요령을 잘 피우고 인간적인 꾀가 많은 것이 사특한 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들이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간사하고 꾀를 잘 부리는 사람은 윗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하지만 아랫 사람에게는 굉장히 엄하고 거만하고 가혹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조금 높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절하지만 아랫 사람에게는 지배자처럼 군림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의 자세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순진하지 못한 그런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습니다.
존 번연은 젊었을 때는 깡패 비슷한 생활을 했고 아주 험하게 살다가 어느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절대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판사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나가서 입을 다물고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만 약속하면 내보내 주겠다 했지만 그는 나가는 그 시간부터 복음을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우직할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에 크게 사역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디엘 무디도 그랬습니다. 무디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안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구원을 받고나더니만 주일학교에 열심히 봉사하다가 나중에 주일학교 교장선생님께 나도 주일학교 선생을 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너같이 공부도 안한 사람은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아이들을 끌어 모아 가르치면 괜찮겠느냐고 하자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무디는 그 길로 나가서 아이들을 끌어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무디의 성경공부반은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집이 세었지만 간사한 것이 없고 아주 순진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린애들을 보면 순진한 아이들이 고집이 셉니다. 고집세다고 다 좋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런 것이 사악한 마음과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간사하고 꾀가 많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사특하고 악한 마음-진리를 왜곡하고 반대하는 것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시 101:4)
이 악한 일을 내가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악한 일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도덕적으로 악하다든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6-18)
이런 것이 악한 것입니다.
"저희 말은 독한 창질에 썩어져 감과 같은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여 반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것은 잘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 말하는 내용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후메네오와 빌레도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으니 앞으로는 부활이 없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악한 것입니다. 누구의 믿음이든지 그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굉장히 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에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한 그 말 때문에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거나 믿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장난입니다. 우리는 도둑질한다든지 간음을 범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죄만 죄로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항상 믿음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진리를 뒤집어서 전함으로써 사람들의 용기를 꺾어버린다거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보통 악한 것이 아니고 사탄의 조종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을 때에 사람들은 가장 악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렇게까지 악하다고 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모임 안에서 좋지 않는 소문을 퍼뜨린다든지 자기의 불쾌한 마음 때문에 교회를 헐뜯고 나쁜 소문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것은 굉장히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으로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탄의 조종을 받은 것 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사탄의 목표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목표를 가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말이 옳고 바를지라도 그 말이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을 믿음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모임에서는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물질 문제 등이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되어가는 일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말로 퍼뜨려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시키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은 악한 짓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시키는 것은 완전히 사탄의 지배를 받은 행위입니다.
정의감보다 차원이 높은 사랑의 법칙
바른 말이라고 해서 항상 덕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바른 말도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서 나옵니다. 선악에 대한 개념이 사람 속에 있습니다. 물론 옳고 그른 것은 분간이 되어야 하지만 교회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가령 갑과 을이라는 사람 사이에 언쟁이나 어떤 시비가 생겼을 때에 그 시비를 완전히 가린다고 하면 굉장히 부작용이 커집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고전 6:1-8)
이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는 사랑의 법칙이 훨씬 더 높은 법칙입니다. 정의의 입장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는 사랑의 법칙이 훨씬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바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랑의 법칙이 깨질 수 있는 일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하고 뭔가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가?
만일 하나님께서 정의만 따지셨다면 우리는 다 지옥가는 운명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정의를 따지셨습니다. 그 대신 그 정의를 완성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그 죄를 그대로 심판하셨으면 우리는 다 멸망당했을 것이지만 우리 대신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주님이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거기서 정의는 정의대로 성립이 되고 나아가서 사랑의 법칙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항상 옳고 그른 것만 따져 시비를 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옳지 않았다면 내가 옳았다 내가 승리했다는 쾌감이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쾌감을 가진다면 그것 역시 얼마나 비열하고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교회는 정의를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정의 위에 사랑의 법칙이 있습니다. 만일 그 정의를 따질 때에 자기가 희생을 당함으로써 그 정의를 성립시킬 수 있다고 하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희생당할 수 없는데 정의만을 부르짖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 어떤 것은 분명히 틀렸습니다. 그때 조용히 내 생각은 이러이러한데 이것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바로잡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바로잡히는 것이 꼭 필요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를 기다려야겠지요. 주님보다 앞서 내가 기어이 바로 잡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헌신적인 사람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니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빌 2:19-25)
바울은 사도로 현재 터키지역인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말고도 그리스에 있는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저 밑에 고린도 등등의 지역에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인 빌립보 교회에 사람들을 보내려고 하는데 아무나 보낼 수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0-21)
항상 자기 이권만 주장하고 자기 욕심만 생각하는 사람은 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면 상황을 판단할 때에 자기 육신의 기준대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돌아올 때에는 잘못된 소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령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하면서 어떤 사실을 뒤집어서 말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람은 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는 바울의 마음 속에 상당히 고민이 많았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아주 희생적이었고 에바브로디도도 얼마나 희생적인지 자기가 병든 것도 게의치 않고 생명을 걸어놓고 주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일만 생각하고 주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사람은 모임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계해야 할 사람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시 101:5)
이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가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려고 하면 방금 얘기한 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은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통치자로서 사람을 쓰는데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나 하나님 앞에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은 쓰여지지 않습니다. 남을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을 교회에서는 특히 주의해야 됩니다. 교회는 사랑의 새 계명이 실천이 되어야 하고 화목과 화평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험과 어려움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한데 묶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도 앞에 오는 일들을 감당할까 말까 한데 그 중에 남을 헐뜯고 자꾸만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면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나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1-5)
고린도 교회가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패가 갈라져 서로 다툼을 벌였던 일이 있습니다. 바울 반대파는 바울이 열 두 사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바울을 무시했습니다.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최고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구원을 늦게 받았지만 그의 유창한 웅변술에 마음이 사로잡혀 아볼로가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반대파들은 바울을 이러쿵저러쿵 헐뜯었습니다. 갈라디아서 읽어보면 바울에게는 어떤 가시, 즉 질병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마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냄새나는 병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그것이 떠나기를 여러 번 기도했으나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는 외관상 흠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흉보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 일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처음 서두에 항상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열두 사도들은 인가를 받은 사도들이었지만 바울은 인간적으로 인가를 받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사람이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주님의 일꾼으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제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거기서 일을 맡은 사람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임 안에 이런 사람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만 우리는 인위적으로 어떤 제도를 세워서 전도인이나 소위 성직자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일을 맡은 사람은 충성스럽게 일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는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남을 헐뜯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남을 깎아내려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록 옳은 말을 하고 바른 판단을 해도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일 수가 없습니다.
처녀가 신랑을 고르는데 굉장히 눈이 높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눈이 높다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라는 말은 항상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일이나 남을 시키는 일은 좋아해도 남 밑에 들어가서 봉사하고 섬기는 일은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조금 안다고 하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선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 있든지 간에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웬만한 사람은 그냥 깔보는 것은 눈이 높은 것입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 신약시대에 와서 성령을 모신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이 겸손해지고 교만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섬기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일 수 있는 충성스러운 사람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시 101:6)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통치자와 함께 있으면서 제반 업무를 같이 거들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요? 그는 바로 충성된 사람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기를 원하면 마음이 충성스러워야 됩니다.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가랑잎처럼 가벼워 기분이 좋을 때는 열심히 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얼굴을 돌리고 불충실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든 안들든 꾸준하게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으면 주님은 그런 사람을 적제적소에 어디에서나 쓰십니다. 분명히 쓰십니다. 우리가 충성스러운 마음이 있으면 우리 모임 안에서 할 일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왜곡하고 선생 노릇을 하려는 자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그리스도인들도 가끔은 거짓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은 자기의 이권을 위해서 성경의 진리를 뒤집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가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모임을 떠나간 사람들 가운데 성경을 아주 이상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거짓말입니다. 이 성경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것이 제일 큰 거짓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 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초대 교회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본래부터 예수는 육신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고 그냥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것같이 보였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산 것같이 보여도 산 것이 아니라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이른바 영지주의자들이 그런 완전히 거짓된 주장을 하여 사람들을 미혹케 했습니다.
선생 노릇 하려는 자를 경계하라
모임에 있다가 뛰쳐나간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올바른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점점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어그러진 길로 갑니다. 안식을 얻었다 뭘 깨달았다 하면서 성경을 조목조목 푸는데 그러한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필요한 만큼 열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교회에 필요한 만큼 열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성전에 맡겨졌는데 누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아무렇게나 지껄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성경이 열려져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나버리면 완전히 딴소리가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럿 보았습니다. 모임 안에 있을 때는 상당히 건전하게 보이던 사람들도 모임을 떠나면 그만 엉뚱하게 변해 버립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성경이 열려 가는지 모르고 그냥 성경을 많이 읽으면 열리는 줄 아는데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잖습니까? 말씀이 맡겨진 성전 안에서 필요한 만큼 말씀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임을 떠나버리면 성경이 어떻게 열리겠어요. 처음에는 뭘 깨달았다고 할 때 가만히 들어보면 얼마큼은 맞는 듯한 말을 하는데 조금 있으면 아주 딴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특히 자매들이 뭘 깨달았다고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슬슬 별도의 모임을 형성하는데 나중에 보면 무엇을 알았다고 슬며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누가 무슨 말씀을 설령 깨달았다고 해도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가르칠 수 있는 은사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라고 주의를 주지만 참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어떤 조그만한 경험을 하면 이것을 계기로 자기가 선생이 된 줄로 압니다. 거기에서부터 잘못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고 하면 자기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는데 다 목사와 교사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자기 말에 사람들이 끌리면 스스로를 착각하게 되고 인기를 따라 더욱 선생 노릇을 즐기려는 경향이 생기고 나중에는 남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임 안에서는 누구나 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 안에서 주어진 은사가 각각 있고 그 안에서 말씀이 열려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법칙이고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고 무엇을 깨달은 것처럼 보여도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늘 그런 위치에 나타나면 그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자기 꾀로 그럴듯하게 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주 잘못된 말을 그럴듯하게 합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열심이 있고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믿고 순종하는 삶
"아침마다 내가 이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시 101:8)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 나라에서 악인을 제하고 죄악 행하는 자를 끊어지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었는데 자기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다윗이 여기에서 말한 악인은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말하는 악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도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망정 하나님을 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읽으면 다윗같이 죄를 지은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만 이해되지 않는 그런 면을 성경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지금 가고 있는 이 일 속에도 상당한 부정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부정적인 면만을 보고서 교회를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을 가집니다만 거기에는 우리로서는 잘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시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저도 도저히 이해 안되고 마음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믿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계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우리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부정적인 면이 있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웃사는 법궤를 실은 수레가 뛰자 법궤가 넘어질까 염려하여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분명히 현실적으로 보면 법궤가 넘어져 곤두박질할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염려하여 법궤를 붙들은 웃사를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인간적인 지나친 염려 때문에 어떤 부정적인 면만을 보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어떤 부정적인 면이 있어도 결국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고 경륜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편 101편과 관련하여 사무엘하 6장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문제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야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 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그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새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 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삼하 6:1-15)
시편 101편 내용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메어오는 일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무엘 상 하를 읽으면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고 법궤를 옮겨 오는 일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당시의 법궤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시편 101편은 하나님을 모시는 문제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나타난 시입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인자와 공의
여기서 인자와 공의를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은혜와 진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공의의 두 가지 성품을 아울러 지니고 계시는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말씀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이 두 가지 성품을 지니신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때는 죄도 짓고 실수를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의 입을 통해서 읊어지는 시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씀하는내용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온전한 사람
하나님을 모시려면 언제나 완전한 길에 주의를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완전한 것일까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는 이 말씀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이상하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누구든지를 물론하고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온전' 이라는 말은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라는 뜻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이 젖 먹는 아들이 있고 밥 먹는 아들이 있는데 밥 먹는 아들은 장성한 아들입니다. 장성한 아들은 젖먹는 아들보다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젖먹는 아기도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목구비가 갖추어져 있고 사지가 있어 젖을 먹을 망정 사람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장성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며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도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하고 가까운 사람은 사랑하지만 자기하고 인연이 먼 사람 더더구나 원수는 사랑하라고 했지만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태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지 말고 장성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요 14:23)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구약시대에 다윗이 법궤를 자기가 사는 곳으로 가져와 모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신다는 뜻인데 이처럼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사람은 완전한 길에 주의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는 집은 신약시대로 말하자면 교회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자기 곳으로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것인데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을 모실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나의 계명은 새 계명을 말하는데 이 새 계명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대로 사랑이 온전할 때 장성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것입니다.
새 계명이 실천되는 곳-교회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란 말이 바로 새 계명을 지키면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되어 있는데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절대적인 요건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늘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고 머리되신 주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하나님이 홀로 계셨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신 하나님이 목표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다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대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오셨을 때에 나타난 현상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재물을 제것이라 하는 사람이 없고 있는 것을 팔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로 사랑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근본 뜻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 즉 새 계명의 실천입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처럼 지식이나 능력이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했는데 그 온전이란 것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에게 햇빛이나 비를 다 골고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이 자라서 마음이 넓어져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고 원수도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 자세가 되었을 때 그 상태를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이 개인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마음이고 교회적으로 보면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교제의 역사가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요일 4:12)
육신적인 사람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변화되어 가는 사람
'비루' 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생각이 천하여 자기를 높여 자랑하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입 니다. "붙접지 아니하다"는 말은 내게는 합당하지 않다, 부합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교회나 개인은 비루한 것을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 중에도 비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가 제일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아주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육신적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 그 정도가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근본 성품이 좀 경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온유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속에서 고난과 훈련을 많이 받고 시련을 많이 겪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인격이 곡식처럼 익어가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어떤 신령한 능력이 생긴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인도하여 아주 인격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성령은 사람의 실제적인 생각을 바로잡아가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아주 신사적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 자기를 높이지 않고 인격이 차츰차츰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부러 그런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안 됩니다. 그것은 많은 시련과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운동하는 사람이나 군인도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생활도 훈련입니다. 체력적인 훈련이 아니고 마음의 훈련입니다. 육신적이고 욕심이 많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들이 강한 훈련을 통해서 차츰차츰 변화를 받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성경 진리를 깨달으면 한꺼번에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깨닫는 것하고 훈련을 받아 차츰차츰 인격이 변해가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루한 자는 신앙생활 속에서 전혀 훈련이 안된 사람,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겸손하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고 아주 고도로 훈련을 받은 사람 속에서 그런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배도-타락한 교회와 신앙생활의 이탈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했는데 역사적으로 배도자는 마지막 시대의 교회입니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가령 가룟 유다같은 사람이 배도한 사람입니다. '배도'는 도를 배반한다, 반역한다는 뜻인데 자기 욕심 때문에 배도를 합니다. 이 시대적인 배도는 교회의 타락입니다. 타락한 교회는 장차 적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계시록 17장에 보면 음녀가 나옵니다. 배도자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정절은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 이 교회가 예수님을 남편으로 모시지 않고 적그리스도를 남편을 모시게 됩니다. 계시록에 보면 음녀가 열 뿔 가진 짐승을 타고 나오는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타락한 교회가 적그리스도와 야합을 하여 마지막 시대를 꾸미게 되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배도입니다. 그 이외에도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배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물려버릴 수는 없지만 자기의 이권이나 개인의 사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주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온전한 길에 주의를 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집안에서 행하고 비루한 것을 눈앞에 두지 아니하고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여 그것에 붙접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고고하고 정결한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의 자세
사특하다는 말은 간사하고 인간적인 꾀가 많은 것을 말합니다. 아주 간사하고 요령을 잘 피우고 인간적인 꾀가 많은 것이 사특한 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들이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좋습니다. 아주 간사하고 꾀를 잘 부리는 사람은 윗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하지만 아랫 사람에게는 굉장히 엄하고 거만하고 가혹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조금 높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절하지만 아랫 사람에게는 지배자처럼 군림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의 자세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순진하지 못한 그런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습니다.
존 번연은 젊었을 때는 깡패 비슷한 생활을 했고 아주 험하게 살다가 어느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절대로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판사가 와서 말하기를 네가 나가서 입을 다물고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만 약속하면 내보내 주겠다 했지만 그는 나가는 그 시간부터 복음을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우직할 정도로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에 크게 사역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디엘 무디도 그랬습니다. 무디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안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구원을 받고나더니만 주일학교에 열심히 봉사하다가 나중에 주일학교 교장선생님께 나도 주일학교 선생을 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너같이 공부도 안한 사람은 안된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아이들을 끌어 모아 가르치면 괜찮겠느냐고 하자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무디는 그 길로 나가서 아이들을 끌어 모아놓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무디의 성경공부반은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집이 세었지만 간사한 것이 없고 아주 순진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린애들을 보면 순진한 아이들이 고집이 셉니다. 고집세다고 다 좋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런 것이 사악한 마음과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간사하고 꾀가 많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사특하고 악한 마음-진리를 왜곡하고 반대하는 것
이 악한 일을 내가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악한 일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도덕적으로 악하다든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6-18)
이런 것이 악한 것입니다.
"저희 말은 독한 창질에 썩어져 감과 같은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여 반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것은 잘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 말하는 내용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후메네오와 빌레도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으니 앞으로는 부활이 없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악한 것입니다. 누구의 믿음이든지 그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굉장히 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에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한 그 말 때문에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거나 믿음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장난입니다. 우리는 도둑질한다든지 간음을 범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죄만 죄로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항상 믿음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진리를 뒤집어서 전함으로써 사람들의 용기를 꺾어버린다거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보통 악한 것이 아니고 사탄의 조종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을 때에 사람들은 가장 악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렇게까지 악하다고 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모임 안에서 좋지 않는 소문을 퍼뜨린다든지 자기의 불쾌한 마음 때문에 교회를 헐뜯고 나쁜 소문을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것은 굉장히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으로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탄의 조종을 받은 것 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사탄의 목표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런 목표를 가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말이 옳고 바를지라도 그 말이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을 믿음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 모임에서는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물질 문제 등이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되어가는 일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말로 퍼뜨려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시키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은 악한 짓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시키는 것은 완전히 사탄의 지배를 받은 행위입니다.
정의감보다 차원이 높은 사랑의 법칙
바른 말이라고 해서 항상 덕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바른 말도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서 나옵니다. 선악에 대한 개념이 사람 속에 있습니다. 물론 옳고 그른 것은 분간이 되어야 하지만 교회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가령 갑과 을이라는 사람 사이에 언쟁이나 어떤 시비가 생겼을 때에 그 시비를 완전히 가린다고 하면 굉장히 부작용이 커집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고전 6:1-8)
이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는 사랑의 법칙이 훨씬 더 높은 법칙입니다. 정의의 입장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보다는 사랑의 법칙이 훨씬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바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랑의 법칙이 깨질 수 있는 일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하고 뭔가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가?
만일 하나님께서 정의만 따지셨다면 우리는 다 지옥가는 운명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정의를 따지셨습니다. 그 대신 그 정의를 완성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그 죄를 그대로 심판하셨으면 우리는 다 멸망당했을 것이지만 우리 대신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주님이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거기서 정의는 정의대로 성립이 되고 나아가서 사랑의 법칙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항상 옳고 그른 것만 따져 시비를 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옳지 않았다면 내가 옳았다 내가 승리했다는 쾌감이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쾌감을 가진다면 그것 역시 얼마나 비열하고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교회는 정의를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정의 위에 사랑의 법칙이 있습니다. 만일 그 정의를 따질 때에 자기가 희생을 당함으로써 그 정의를 성립시킬 수 있다고 하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희생당할 수 없는데 정의만을 부르짖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 어떤 것은 분명히 틀렸습니다. 그때 조용히 내 생각은 이러이러한데 이것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바로잡을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바로잡히는 것이 꼭 필요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를 기다려야겠지요. 주님보다 앞서 내가 기어이 바로 잡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 헌신적인 사람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니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빌 2:19-25)
바울은 사도로 현재 터키지역인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말고도 그리스에 있는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저 밑에 고린도 등등의 지역에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하나인 빌립보 교회에 사람들을 보내려고 하는데 아무나 보낼 수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0-21)
항상 자기 이권만 주장하고 자기 욕심만 생각하는 사람은 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면 상황을 판단할 때에 자기 육신의 기준대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돌아올 때에는 잘못된 소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령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하면서 어떤 사실을 뒤집어서 말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람은 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는 바울의 마음 속에 상당히 고민이 많았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아주 희생적이었고 에바브로디도도 얼마나 희생적인지 자기가 병든 것도 게의치 않고 생명을 걸어놓고 주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일만 생각하고 주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사람은 모임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계해야 할 사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가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려고 하면 방금 얘기한 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은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통치자로서 사람을 쓰는데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나 하나님 앞에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은 쓰여지지 않습니다. 남을 헐뜯기를 잘하는 사람을 교회에서는 특히 주의해야 됩니다. 교회는 사랑의 새 계명이 실천이 되어야 하고 화목과 화평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험과 어려움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한데 묶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도 앞에 오는 일들을 감당할까 말까 한데 그 중에 남을 헐뜯고 자꾸만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면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나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1-5)
고린도 교회가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패가 갈라져 서로 다툼을 벌였던 일이 있습니다. 바울 반대파는 바울이 열 두 사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바울을 무시했습니다. 바울보다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최고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구원을 늦게 받았지만 그의 유창한 웅변술에 마음이 사로잡혀 아볼로가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반대파들은 바울을 이러쿵저러쿵 헐뜯었습니다. 갈라디아서 읽어보면 바울에게는 어떤 가시, 즉 질병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마 사람들에게 상당히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냄새나는 병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그것이 떠나기를 여러 번 기도했으나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는 외관상 흠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흉보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 일로 인해 고린도 교회가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처음 서두에 항상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갈 1:1)
열두 사도들은 인가를 받은 사도들이었지만 바울은 인간적으로 인가를 받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사람이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주님의 일꾼으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제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거기서 일을 맡은 사람이 길러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임 안에 이런 사람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만 우리는 인위적으로 어떤 제도를 세워서 전도인이나 소위 성직자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일을 맡은 사람은 충성스럽게 일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 안에서는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남을 헐뜯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남을 깎아내려야 자기가 올라가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록 옳은 말을 하고 바른 판단을 해도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일 수가 없습니다.
처녀가 신랑을 고르는데 굉장히 눈이 높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눈이 높다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라는 말은 항상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일이나 남을 시키는 일은 좋아해도 남 밑에 들어가서 봉사하고 섬기는 일은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조금 안다고 하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선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 있든지 간에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웬만한 사람은 그냥 깔보는 것은 눈이 높은 것입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 신약시대에 와서 성령을 모신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이 겸손해지고 교만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섬기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쓰일 수 있는 충성스러운 사람
다윗은 이스라엘의 통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통치자와 함께 있으면서 제반 업무를 같이 거들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요? 그는 바로 충성된 사람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기를 원하면 마음이 충성스러워야 됩니다. 충성스럽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가랑잎처럼 가벼워 기분이 좋을 때는 열심히 하다가 기분이 나쁘면 얼굴을 돌리고 불충실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든 안들든 꾸준하게 주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으면 주님은 그런 사람을 적제적소에 어디에서나 쓰십니다. 분명히 쓰십니다. 우리가 충성스러운 마음이 있으면 우리 모임 안에서 할 일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왜곡하고 선생 노릇을 하려는 자들
그리스도인들도 가끔은 거짓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은 자기의 이권을 위해서 성경의 진리를 뒤집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가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모임을 떠나간 사람들 가운데 성경을 아주 이상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거짓말입니다. 이 성경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것이 제일 큰 거짓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 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
초대 교회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본래부터 예수는 육신을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고 그냥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은 것같이 보였어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산 것같이 보여도 산 것이 아니라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이른바 영지주의자들이 그런 완전히 거짓된 주장을 하여 사람들을 미혹케 했습니다.
선생 노릇 하려는 자를 경계하라
모임에 있다가 뛰쳐나간 사람들을 보면 처음에는 올바른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점점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어그러진 길로 갑니다. 안식을 얻었다 뭘 깨달았다 하면서 성경을 조목조목 푸는데 그러한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필요한 만큼 열려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교회에 필요한 만큼 열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성전에 맡겨졌는데 누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아무렇게나 지껄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성경이 열려져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나버리면 완전히 딴소리가 나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럿 보았습니다. 모임 안에 있을 때는 상당히 건전하게 보이던 사람들도 모임을 떠나면 그만 엉뚱하게 변해 버립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성경이 열려 가는지 모르고 그냥 성경을 많이 읽으면 열리는 줄 아는데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잖습니까? 말씀이 맡겨진 성전 안에서 필요한 만큼 말씀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임을 떠나버리면 성경이 어떻게 열리겠어요. 처음에는 뭘 깨달았다고 할 때 가만히 들어보면 얼마큼은 맞는 듯한 말을 하는데 조금 있으면 아주 딴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특히 자매들이 뭘 깨달았다고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슬슬 별도의 모임을 형성하는데 나중에 보면 무엇을 알았다고 슬며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누가 무슨 말씀을 설령 깨달았다고 해도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가르칠 수 있는 은사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라고 주의를 주지만 참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어떤 조그만한 경험을 하면 이것을 계기로 자기가 선생이 된 줄로 압니다. 거기에서부터 잘못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고 하면 자기가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을 해야 하는데 다 목사와 교사의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자기 말에 사람들이 끌리면 스스로를 착각하게 되고 인기를 따라 더욱 선생 노릇을 즐기려는 경향이 생기고 나중에는 남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임 안에서는 누구나 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임 안에서 주어진 은사가 각각 있고 그 안에서 말씀이 열려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법칙이고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고 무엇을 깨달은 것처럼 보여도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늘 그런 위치에 나타나면 그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자기 꾀로 그럴듯하게 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주 잘못된 말을 그럴듯하게 합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열심이 있고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믿고 순종하는 삶
다윗은 철저하게 자기 나라에서 악인을 제하고 죄악 행하는 자를 끊어지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었는데 자기는 죄인이 아닌 것처럼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다윗이 여기에서 말한 악인은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말하는 악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도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망정 하나님을 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 읽으면 다윗같이 죄를 지은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만 이해되지 않는 그런 면을 성경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지금 가고 있는 이 일 속에도 상당한 부정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부정적인 면만을 보고서 교회를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을 가집니다만 거기에는 우리로서는 잘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시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저도 도저히 이해 안되고 마음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믿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계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우리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부정적인 면이 있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웃사는 법궤를 실은 수레가 뛰자 법궤가 넘어질까 염려하여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분명히 현실적으로 보면 법궤가 넘어져 곤두박질할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염려하여 법궤를 붙들은 웃사를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인간적인 지나친 염려 때문에 어떤 부정적인 면만을 보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어떤 부정적인 면이 있어도 결국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계시고 경륜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