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 이에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 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1-28)
이 시편 102편은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가 있을 동안에 지어진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 환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내용으로 발전합니다. 이 시는 내가 부르짖는다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나중에 보면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기 민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102:1-2)
이 기도는 자기 민족이 처한 환경을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의 간절한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거나 시련에 처할 때에는 마음이 초조해지고 고민을 하지만 교회 전체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인은 비록 개인적으로 기도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자기 개인의 사정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하는 상태에서 이 시를 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안에 있는 자들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종종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고 또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는 일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주의 얼굴을 가리우신다는 것이 성령이 떠나신다든지 또 성령께서 근심을 하신다든지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백성인데 그들이 선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신다고 하는 표시로서 이방 사람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괴롭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지 아니하신다면 우리 역시 이 세상 세력이나 그 밖의 것에 의해 위험을 당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놓으신 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계
물리적인 자연의 세계가 모든 것이 질서있게 잘 운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든 것이 자연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이성적인 생각으로 보면 자연도 하나의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난다든지 폭풍이 분다든지 천재 지변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자연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추어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고 또 공중에 나는 새나 들에 피는 백합화는 농사짓지 아니하고 길쌈하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연법칙 안에서 되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자연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물질계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섭리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대자연계가 하나님께서 미리 내놓으신 자연 법칙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얼굴을 가리우심
그렇다면 옛날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도 같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때에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는 이방 민족들이 쳐들어와서 괴롭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의 죄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령 이스라엘 민족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고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이 얼굴을 외면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우리 마음이 세속화되어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별로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인데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이 주님께로부터 도피하는 생활을 하니까 자연히 주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멀리 떠나신 것 같은 상태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 102:3-7)
이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한 상황을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시 102:3)
연기는 솟아오르지만 바람이 불면 공중으로 꺼져버리고 흔적도 남지 않게 됩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악착같이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좀더 힘있게 재미있게 살까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데 그런 삶은 소멸되는 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시 102:3)
냉과리는 덜 구어져서 피울 때 연기와 냄새가 나는 숯을 말합니다. 뼈가 마치 덜 탄 숯덩이처럼 그을려져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갈이 쇠잔하였사오며"(시 102:4)
너무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음식 먹기도 잊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에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도 별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찬송 부르고 기도할 마음도 사라져버리는 쇠잔한 상태를 말합니다.
가끔 그러한 때가 우리의 생활에 찾아옵니다.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시 102:5)
뼈에 살이 붙었다는 것은 살이 다 빠졌다는 뜻입니다. 윤기가 전혀 나지 않는 기름기 없는 바싹 마른 상태, 가끔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마냥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하고 마음의 윤택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시 102:6)
당아새는 독수리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먹을 것도 없는 광야와 황폐한 곳에 사는 독수리와 부엉이같이 힘겨운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멀리 떠나신 것 같은 상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을 보면 돈 벌어 재미있고 즐겁고 아기자기하게 사는 것 같은데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그렇게 푹 빠져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진 상태에 사는 것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셨지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어려운 상태에 처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그러한 마음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시 102:7)
밤새도록 잠도 안자고 짹짹거리는 참새처럼 외로운 신세. 세상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재미있는 것도 없는 굉장히 외로운 상태, 그런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때때로 겪는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함께하시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성령의 비호를 받을 때에는 힘차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고 치우치면 힘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뭘 잡으려고 하고 찾으려고 하지만 마음이 매우 허전하고 외로운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교제 교제하는데 이 성령 안에서 교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만나서 서로 얘기도 하고 웃고 지나도 그 마음이 고독한 상태에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시를 읊고 있는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간 상태거나 다른 나라들에게 공격을 받아서 어려운 지경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고 얼굴을 외면하신 것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싶은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 정말 그 원인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육신적인 생활 속에 찾아오는 원수들과 마귀의 훼방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며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시 102:8)
우리는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생활은 적극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확실히 주님 편에 서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고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어물어물하면 항상 마귀에게 조롱을 받고 원수에게 훼방을 받게 됩니다.
우리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지만 속에 있는 영은 주님 편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니까 우리는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마지못해하면 우리 양심 속에 늘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서로 씨름을 하여 갈등을 겪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부터 수치심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 무엇을 잘하면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매사에 항상 패배의식과 수치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원수의 조롱을 당하는 것이고 훼방을 당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적극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수치심이 멀리 떠나버리고 활기차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는 거기에 수치심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맹세입니다.
재에 불과한 세상 양식과 즐거움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시 102:9)
재는 타고 남은 찌꺼기인데 그것은 먹어도 아무런 영양가가 없고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고 그것을 마치 양식처럼 먹으려고 합니다. 세상 즐거움이나 영광스러운 그런 것을 양식같이 먹으려 하는데 그것이 실지로는 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영양가가 되지 못하고 실지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음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시 102:10)
그렇게 된 이유는 내가 하나님 앞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갈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시 102:11)
지금 이 시인은 아주 고통스럽고 외롭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도 꼭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지만 가끔 가끔 이러한 심정을 토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12절부터는 조금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님을 향해서 떠진 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02:12)
답답하고 외롭고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은 신세, 정말 외로운 참새 같은 처량한 신세, 먹을 것이 없는 독수리나 부엉이 같은 자기 자신을 한탄하고 있다가 12절에 와서 주님을 향해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을 떠서 주님이 영원히 계시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대대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쇠잔해지는 불 같은 자신은 너무도 가치없고 힘없는 인생이지만 주님을 향해서 눈이 열리면 모든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영원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함
히브리서 13장 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도 자신의 상태에만 마음이 잡혀 있을 때에는 너무 한탄스럽고 허무한 것을 느꼈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영원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영혼이 새롭게 소생합니다. 출애굽기 29장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애굽에서 인도해 낸 민족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6)
하나님이 영원히 계셔도 하나님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했는데 기념 명칭이 뭡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유월절이라는 기념일이 있었고 또 오순절이라는 기념일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신다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는데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에 이 주님의 이름을 기념합니다. 떡을 먹고 내 살을 기념하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우리가 영원히 기념해야 할 명칭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말할 수 없이 캄캄하고 허전한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해 눈을 떴을 때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자기와 민족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한을 정해 놓고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시 102:13)
그래서 점점 더 신앙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나아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어떤 때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를 정해놓고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가령,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천 년 동안이나 온 세계에 흩어져서 거의 버려진 상태에 있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그 시선을 집중하시고 때가 되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 때를 하나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전혀 모르면 현재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됩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그 때를 향해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환난이나 시험에서 받는 구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5-6)
지금 우리는 이 말세에 살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는 말 앞에 "너희가"라고 했는데 "너희"는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또 구원을 얻기 위해서" 라는 말은 심한 환난이나 시험에서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하였는데 시련과 큰 환난 속에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깨달을 때에 영혼이 단번에 구원을 받았지만 그때부터 구원이 연속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에서 구원받아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떤 시련이나 핍박에서 구원받아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죄 지을 수 있는 유혹을 받을 때에 구원을 받아야 하는 그런 구원의 연속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원도 역시 믿음이 있어야 받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구원을 못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생활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말세에 살고 있는데 이러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 믿음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강한 믿음 더 굳센 믿음. 우리 신앙생활에 말세적인 것 같은 어려움이 개인적으로도 있는데 믿음만이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우리가 훨씬 더 전진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데 믿음이 없어서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애굽에서 무서운 바로의 세력 밑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해 주어도 그걸 잊어버리고 또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게 해줘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또 만나를 내려서 먹여주셔도 그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어려움만 오면 하나님이 자기들과 같이 계신다는 그 믿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그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충분히 하나님을 믿고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견딜 만한데 그 다음에 또 물이 없으니까 언제 하나님이 그랬냐는 식이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시거든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시니까 어려움을 당하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계명을 받고 있을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섬겼던 것이 그 민족의 꼴새입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뿐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현재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는 바울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4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이 4파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바울은 너희 가운데 성령이 계신 것을 왜 모르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서로 싸우는 거기에 성령이 계시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모임 가운데 이런저런 여러가지 부작용이 있고 부정적인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랑을 조금도 느낄 수 없고 그저 물질문제에 시달리고 생각해 보면 영 자기 마음과 안 맞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떠났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성령 떠났다고까지는 말 안하더라도 성령이 함께 계신다는 그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시련이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저 하늘에 계신 주님은 믿어도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은 안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계시지만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 아들도 계시고 아버지도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늘 함께 계시는 삼위 하나님
구약 시대는 아버지 하나님 시대로 아버지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지시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가시는 시대이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직접 가르치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 내신 일 등도 모두 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시대에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같이 계셨습니다. 지금도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일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성령만 계시고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교회 가운데에는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도 계시고 성령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캄캄하고 답답하고 정말 마음이 허전하여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다가 눈을 딱 떠 보니까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가 정해져 있고 그때에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힘이 다시 용솟음쳤습니다.
교회의 머릿돌 되시는 주님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히 여기나이다"(시 102:14)
여기에 "시온의 돌들"이란 것이 뭡니까? 시온은 예루살렘인데 지금도 거기에 가보면 집을 짓는데 전부 돌로 지어요. 내부야 물론 목재를 사용하겠지만 겉은 전부 돌입니다. 아무리 높은 집도 전부 돌로 짓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도 돌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돌은 영적으로 주님이 머릿돌이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티끌을 연휼히 여긴다'는 말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 티끌은 티끌 같은 인생을 말합니다.
예언으로 발전되는 기도
"이에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시 102:15-16)
굉장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기도를 시작하면서 나중에 예언으로 이 말씀이 변화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예루살렘이 건설되고 또 영적으로는 교회가 건설될 그런 예언으로 기도가 발전이 됩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시 102:17-22)
아무리 고통스럽고 쓸쓸하고 사막 같은 가운데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때가 되면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완전히 실천하시고 이루셔서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을 예언해놓고 있는 말씀입니다.
중도에 꺾어지는 인생
"저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케 하시며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시 102:23)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사람은 다 중도에 폐망하는 인생입니다. 사람마다 멀리 희망을 걸고 살고 있지만 전부 중도에 실패합니다. 아직 희망은 멀리 있지만 그 희망에 도달하기 전에 좌절되어 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의 기준이라는 것을 정해놓고 그 기준을 향해서 악착같이 달려가기 바쁜데 나중에 보면 병들어 중간에 죽습니다. 살고 싶은 만큼 못살고 하고 싶은 일도 다 못하고 성공하는데 도달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멀리 목표가 달아나버립니다. 사람은 중도에 죽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고 해도 다 중간에 실패해 꺾어집니다.
주님의 연대와 연결되는 삶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시 102:24)
그러니까 우리의 골인 지점은 주님의 연대에 연결이 되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주님의 연대와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열심으로 살아가는 그 삶이 주님의 연대, 주님의 계획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전부 다 중도에 다 꺾어져 버립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유한한 세상과 영원하신 하나님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5-27)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8-12)
히브리서 1장, 2장의 내용은 천사보다 위대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3장, 4장은 제사장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제사장보다 위대한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시편에 있는 이 말씀이 실상은 예수님을 향해서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기초공사를 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세상은 낡아지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시각에서 보아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 큰 변동이 생기고 끝이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지만 영원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땅의 기초를 두셨고 또 천체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지만 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다 낡아 의복처럼 갈아 입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는 여전하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원하신 주님과 관계있는 일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 주님의 연대와 관계없는 일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과 관계가 없거든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과 관계를 맺으면 그 일은 영원한 사업이 됩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우리 신앙생활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현재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고 중도에 다 실패하고 마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과 연결되는 진리의 후손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28)
주의 종들의 자손은 진리를 따라 사는 자를 말합니다. 주의 종은 주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리를 좇는 사람을 통해서 그 진리가 그 다음 세대로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갑니다. 학문도 그렇습니다. 우리 학문도 주님의 진리와 관계가 있으면 굉장히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진리의 후손이 되어서 주님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도 주님을 섬기는 종의 진리를 전해줌으로써 결단코 헛되지 않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처음에는 참으로 캄캄하고 답답한 가운데서 기도를 시작했지만 눈이 열린 다음에는 굉장히 희망찬 말씀으로 예언을 했고 마지막으로 아주 힘있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도 항상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빛을 받고 그 시점에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향해서 눈이 뜨이면서 무한한 세계에 연결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편 102편은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가 있을 동안에 지어진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 환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내용으로 발전합니다. 이 시는 내가 부르짖는다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나중에 보면 예루살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기 민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
이 기도는 자기 민족이 처한 환경을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의 간절한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거나 시련에 처할 때에는 마음이 초조해지고 고민을 하지만 교회 전체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인은 비록 개인적으로 기도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자기 개인의 사정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하는 상태에서 이 시를 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안에 있는 자들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종종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고 또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는 일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주의 얼굴을 가리우신다는 것이 성령이 떠나신다든지 또 성령께서 근심을 하신다든지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백성인데 그들이 선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신다고 하는 표시로서 이방 사람들이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와서 괴롭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지 아니하신다면 우리 역시 이 세상 세력이나 그 밖의 것에 의해 위험을 당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놓으신 법칙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계
물리적인 자연의 세계가 모든 것이 질서있게 잘 운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든 것이 자연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이성적인 생각으로 보면 자연도 하나의 법칙이 있어서 그 법칙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난다든지 폭풍이 분다든지 천재 지변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자연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이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추어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고 또 공중에 나는 새나 들에 피는 백합화는 농사짓지 아니하고 길쌈하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연법칙 안에서 되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자연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물질계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섭리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대자연계가 하나님께서 미리 내놓으신 자연 법칙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얼굴을 가리우심
그렇다면 옛날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도 같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때에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에는 이방 민족들이 쳐들어와서 괴롭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의 죄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령 이스라엘 민족이 지은 우상 숭배의 죄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고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이 얼굴을 외면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으로 죄를 지었을 때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우리 마음이 세속화되어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별로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인데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부패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이 주님께로부터 도피하는 생활을 하니까 자연히 주님이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멀리 떠나신 것 같은 상태
이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한 상황을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연기는 솟아오르지만 바람이 불면 공중으로 꺼져버리고 흔적도 남지 않게 됩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악착같이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좀더 힘있게 재미있게 살까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데 그런 삶은 소멸되는 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냉과리는 덜 구어져서 피울 때 연기와 냄새가 나는 숯을 말합니다. 뼈가 마치 덜 탄 숯덩이처럼 그을려져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너무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음식 먹기도 잊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에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어도 별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찬송 부르고 기도할 마음도 사라져버리는 쇠잔한 상태를 말합니다.
가끔 그러한 때가 우리의 생활에 찾아옵니다.
뼈에 살이 붙었다는 것은 살이 다 빠졌다는 뜻입니다. 윤기가 전혀 나지 않는 기름기 없는 바싹 마른 상태, 가끔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마냥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하고 마음의 윤택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아새는 독수리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먹을 것도 없는 광야와 황폐한 곳에 사는 독수리와 부엉이같이 힘겨운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멀리 떠나신 것 같은 상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을 보면 돈 벌어 재미있고 즐겁고 아기자기하게 사는 것 같은데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그렇게 푹 빠져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진 상태에 사는 것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할 때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셨지만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어려운 상태에 처했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그러한 마음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밤새도록 잠도 안자고 짹짹거리는 참새처럼 외로운 신세. 세상 친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재미있는 것도 없는 굉장히 외로운 상태, 그런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때때로 겪는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함께하시지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성령의 비호를 받을 때에는 힘차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고 치우치면 힘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열심히 뭘 잡으려고 하고 찾으려고 하지만 마음이 매우 허전하고 외로운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교제 교제하는데 이 성령 안에서 교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만나서 서로 얘기도 하고 웃고 지나도 그 마음이 고독한 상태에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시를 읊고 있는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간 상태거나 다른 나라들에게 공격을 받아서 어려운 지경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고 얼굴을 외면하신 것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싶은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 정말 그 원인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육신적인 생활 속에 찾아오는 원수들과 마귀의 훼방
우리는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생활은 적극적인 생활이 아닙니다. 확실히 주님 편에 서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지 않고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어물어물하면 항상 마귀에게 조롱을 받고 원수에게 훼방을 받게 됩니다.
우리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지만 속에 있는 영은 주님 편입니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니까 우리는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마지못해하면 우리 양심 속에 늘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서로 씨름을 하여 갈등을 겪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부터 수치심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 무엇을 잘하면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매사에 항상 패배의식과 수치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원수의 조롱을 당하는 것이고 훼방을 당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적극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수치심이 멀리 떠나버리고 활기차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훼방하는 거기에 수치심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나를 대하여 미칠 듯이 날치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맹세입니다.
재에 불과한 세상 양식과 즐거움
재는 타고 남은 찌꺼기인데 그것은 먹어도 아무런 영양가가 없고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고 그것을 마치 양식처럼 먹으려고 합니다. 세상 즐거움이나 영광스러운 그런 것을 양식같이 먹으려 하는데 그것이 실지로는 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영양가가 되지 못하고 실지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음
그렇게 된 이유는 내가 하나님 앞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이 시인은 아주 고통스럽고 외롭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도 꼭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지만 가끔 가끔 이러한 심정을 토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12절부터는 조금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님을 향해서 떠진 눈
답답하고 외롭고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은 신세, 정말 외로운 참새 같은 처량한 신세, 먹을 것이 없는 독수리나 부엉이 같은 자기 자신을 한탄하고 있다가 12절에 와서 주님을 향해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을 떠서 주님이 영원히 계시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대대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쇠잔해지는 불 같은 자신은 너무도 가치없고 힘없는 인생이지만 주님을 향해서 눈이 열리면 모든 것이 달라져 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영원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함
히브리서 13장 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도 자신의 상태에만 마음이 잡혀 있을 때에는 너무 한탄스럽고 허무한 것을 느꼈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영원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영혼이 새롭게 소생합니다. 출애굽기 29장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애굽에서 인도해 낸 민족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6)
하나님이 영원히 계셔도 하나님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했는데 기념 명칭이 뭡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유월절이라는 기념일이 있었고 또 오순절이라는 기념일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신다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는데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에 이 주님의 이름을 기념합니다. 떡을 먹고 내 살을 기념하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 피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우리가 영원히 기념해야 할 명칭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말할 수 없이 캄캄하고 허전한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해 눈을 떴을 때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자기와 민족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한을 정해 놓고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
그래서 점점 더 신앙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나아가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어떤 때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를 정해놓고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가령,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천 년 동안이나 온 세계에 흩어져서 거의 버려진 상태에 있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그 시선을 집중하시고 때가 되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 때를 하나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전혀 모르면 현재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됩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그 때를 향해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환난이나 시험에서 받는 구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 1:5-6)
지금 우리는 이 말세에 살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는 말 앞에 "너희가"라고 했는데 "너희"는 이미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또 구원을 얻기 위해서" 라는 말은 심한 환난이나 시험에서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하였는데 시련과 큰 환난 속에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깨달을 때에 영혼이 단번에 구원을 받았지만 그때부터 구원이 연속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에서 구원받아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떤 시련이나 핍박에서 구원받아야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죄 지을 수 있는 유혹을 받을 때에 구원을 받아야 하는 그런 구원의 연속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원도 역시 믿음이 있어야 받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구원을 못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생활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지금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말세에 살고 있는데 이러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 믿음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강한 믿음 더 굳센 믿음. 우리 신앙생활에 말세적인 것 같은 어려움이 개인적으로도 있는데 믿음만이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우리가 훨씬 더 전진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데 믿음이 없어서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애굽에서 무서운 바로의 세력 밑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해 주어도 그걸 잊어버리고 또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시게 해줘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또 만나를 내려서 먹여주셔도 그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어려움만 오면 하나님이 자기들과 같이 계신다는 그 믿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그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충분히 하나님을 믿고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견딜 만한데 그 다음에 또 물이 없으니까 언제 하나님이 그랬냐는 식이었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시거든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시니까 어려움을 당하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계명을 받고 있을 동안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섬겼던 것이 그 민족의 꼴새입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뿐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현재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는 바울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4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이 4파가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바울은 너희 가운데 성령이 계신 것을 왜 모르느냐고 했습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서로 싸우는 거기에 성령이 계시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도 모임 가운데 이런저런 여러가지 부작용이 있고 부정적인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랑을 조금도 느낄 수 없고 그저 물질문제에 시달리고 생각해 보면 영 자기 마음과 안 맞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떠났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성령 떠났다고까지는 말 안하더라도 성령이 함께 계신다는 그 믿음이 없기 때문에 시련이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저 하늘에 계신 주님은 믿어도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은 안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계시지만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 아들도 계시고 아버지도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늘 함께 계시는 삼위 하나님
구약 시대는 아버지 하나님 시대로 아버지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지시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가시는 시대이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직접 가르치고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귀신을 쫓아 내신 일 등도 모두 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 시대에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같이 계셨습니다. 지금도 역시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일하시는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성령만 계시고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교회 가운데에는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도 계시고 성령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캄캄하고 답답하고 정말 마음이 허전하여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 있다가 눈을 딱 떠 보니까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가 정해져 있고 그때에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알고 마음의 힘이 다시 용솟음쳤습니다.
교회의 머릿돌 되시는 주님
여기에 "시온의 돌들"이란 것이 뭡니까? 시온은 예루살렘인데 지금도 거기에 가보면 집을 짓는데 전부 돌로 지어요. 내부야 물론 목재를 사용하겠지만 겉은 전부 돌입니다. 아무리 높은 집도 전부 돌로 짓습니다. 옛날 예루살렘 성전도 돌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돌은 영적으로 주님이 머릿돌이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티끌을 연휼히 여긴다'는 말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 티끌은 티끌 같은 인생을 말합니다.
예언으로 발전되는 기도
굉장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기도를 시작하면서 나중에 예언으로 이 말씀이 변화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예루살렘이 건설되고 또 영적으로는 교회가 건설될 그런 예언으로 기도가 발전이 됩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
아무리 고통스럽고 쓸쓸하고 사막 같은 가운데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때가 되면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완전히 실천하시고 이루셔서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때가 온다는 것을 예언해놓고 있는 말씀입니다.
중도에 꺾어지는 인생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사람은 다 중도에 폐망하는 인생입니다. 사람마다 멀리 희망을 걸고 살고 있지만 전부 중도에 실패합니다. 아직 희망은 멀리 있지만 그 희망에 도달하기 전에 좌절되어 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의 기준이라는 것을 정해놓고 그 기준을 향해서 악착같이 달려가기 바쁜데 나중에 보면 병들어 중간에 죽습니다. 살고 싶은 만큼 못살고 하고 싶은 일도 다 못하고 성공하는데 도달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멀리 목표가 달아나버립니다. 사람은 중도에 죽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고 해도 다 중간에 실패해 꺾어집니다.
주님의 연대와 연결되는 삶
그러니까 우리의 골인 지점은 주님의 연대에 연결이 되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읽으면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주님의 연대와 연결이 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열심으로 살아가는 그 삶이 주님의 연대, 주님의 계획과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전부 다 중도에 다 꺾어져 버립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유한한 세상과 영원하신 하나님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히 1:8-12)
히브리서 1장, 2장의 내용은 천사보다 위대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3장, 4장은 제사장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제사장보다 위대한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시편에 있는 이 말씀이 실상은 예수님을 향해서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기초공사를 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세상은 낡아지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시각에서 보아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 큰 변동이 생기고 끝이 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지만 영원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땅의 기초를 두셨고 또 천체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지만 이 모든 것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다 낡아 의복처럼 갈아 입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는 여전하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원하신 주님과 관계있는 일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 주님의 연대와 관계없는 일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과 관계가 없거든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과 관계를 맺으면 그 일은 영원한 사업이 됩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우리 신앙생활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현재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고 중도에 다 실패하고 마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과 연결되는 진리의 후손
주의 종들의 자손은 진리를 따라 사는 자를 말합니다. 주의 종은 주님을 섬기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리를 좇는 사람을 통해서 그 진리가 그 다음 세대로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갑니다. 학문도 그렇습니다. 우리 학문도 주님의 진리와 관계가 있으면 굉장히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진리의 후손이 되어서 주님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도 주님을 섬기는 종의 진리를 전해줌으로써 결단코 헛되지 않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처음에는 참으로 캄캄하고 답답한 가운데서 기도를 시작했지만 눈이 열린 다음에는 굉장히 희망찬 말씀으로 예언을 했고 마지막으로 아주 힘있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도 항상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빛을 받고 그 시점에서 우리가 새로운 것을 향해서 눈이 뜨이면서 무한한 세계에 연결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