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풍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1-22)
이 시편 103편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큰 어려움을 당하다가 거기에서 해방되었을 때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 지어졌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징계의 의미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또 죄를 지어 징계도 여러 번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인 만큼 징계도 많이 받은 것을 우리는 그의 생애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징계를 받는다는 생각을 가집니다만 징계는 반드시 어떤 죄의 대가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으려고 하면 철저히 훈련을 받는 과정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 사람일수록 많은 징계를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6-13)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고난 등은 다 징계의 일종인데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징계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 앞에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징계를 통과한 후에 우러나는 영혼의 찬양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1-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 '속사람' 이 진정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들 머리로만 찬송을 부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고난을 통과한 경험, 또 징계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만큼 영혼이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찬양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은 육신적인 생각만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진정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겪은 후에 거기서 구출이 되었다든지 승리를 얻었다고 하면 그때는 우리 영혼이 찬송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찬송한다는 말은 바로 성령으로 찬송을 한다는 뜻입니다.
찬양은 성령과 육신의 관계가 아니고 성령과 영의 관계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은 분명히 깊은 고난과 어려움을 통과한 확실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을 때에 단지 그냥 생각으로만 이렇게 찬양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굉장히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때에 참 감사했고 매우 기쁜 마음으로 찬송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는데 그에 대해서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징계와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그것과 씨름을 하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어느날 주님께서 또 용서해 주신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죄는 지옥가는 죄는 아니지만 그 죄도 심판을 받아야 할 죄입니다. 육신적으로 징계를 받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죄를 지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람도 봅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반면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속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이 구원을 받았는데 왜 한 사람은 그냥 무사태평하게 잘 지날 수 있고 왜 다른 사람은 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거쳐야 하는지 사람으로서는 잘 평가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만 그 문제를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그 사람이 오히려 행복한 것 같고 더 축복을 받은 것같이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도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지 않습니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받는 그 모든 것이 다 징계인데 그것이 죄를 지은 데서 오는 것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쓰시려고 할 때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평가하면 그냥 구원받고 나서 별 문제 없이 편안하게 지나면 그 사람은 참 믿음도 좋고 잘 믿는가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틀림없이 구원받은 이후에 어떤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이 심하면 그러한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것이 오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었고 또 인구조사하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국민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윗에게는 시련이었고 징계였습니다. 그는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무시무시한 징계를 받아 어떤 때는 자기 아들에게 쫓기고, 또 어떤 때는 신하들에게 쫓기는 비참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혼으로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처리되는 원리-회개와 자백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지옥자식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분명히 지옥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3장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장래 노하심을 피하게 하더냐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책망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개별적으로라기보다는 민족적으로 받는 표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도덕적으로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무시한 죄, 우상 숭배한 죄 등등의 죄를 짓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서 모든 국민을 배후에 두고 그 대표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사해 주신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1-5)
이것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그 죄를 뉘우치며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을 해서 간음죄를 지었을 때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죄를 책망하였을 때에 다윗은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이 시를 얼핏보면 굉장히 모순이 많습니다. 자기가 분명히 밧세바를 통해서 죄를 지었는데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라고 했습니 다.
자기 앞에는 항상 죄가 있다고 느끼면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죄를 짓고 죄의 책망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너는 의롭다 너는 순전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아는데 하나님 앞에 그것을 내놓고 자백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지은 그 죄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했습니다. 간음을 범했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같이 죄인이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할 수 있는 심판권이 없습니다. 사람이 심판권이 없으니까 모든 죄는 사람 앞에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지은 것이니까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실 때에 의롭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고 순전하심을 말합니다. 다윗은 모든 표준을 하나님 앞에 두었습니다. 자기가 비록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사람과 관계되지만 하나님 앞에 그 죄가 정말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비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사함받아야 됩니다.
사람을 속이고 사람과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무슨 죄든지 죄는 먼저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도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지옥갈 죄는 영원히 사함받아 눈과 같이 희게 되었고 양털같이 씻음을 받았습니다만은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도 하나님 앞에 자백을 해서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하였는데 어떤 병은 죄와 관계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4-16)
여기에 보면 병 낫기 위하여 죄를 서로 고하고 서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임 초기에는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 낫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그런 것을 못봅니다. 어떤 질병은 죄와 관계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4-5)
이런 일은 물질이나 외적 조건이 넉넉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적으로는 넉넉하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그 마음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굉장히 풍요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그렇게만 마음이 단순하면 이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아주 잘 들어오면서 알아지게 됩니다. 그 마음이 행복하고 힘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7-31)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 마음은 주위 환경에만 시선이 갑니다. 이것을 봐도 시원찮고 저것을 봐도 시원찮아 걱정과 한숨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생활은 주위 환경을 보고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내 모든 문제가 주님 안에서 해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위 환경만 자꾸 돌아보면 아무리 찾아보아도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의를 바라보라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시 103:6)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신다고 했고 또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신다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내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은 의로울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의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고 행해주시는 것이 완벽하게 의로운 일입니다. 그 의로운 일이 동시에 우리에게도 의롭게 되는 일입니다. 그 의를 우리가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판단해 놓으신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징계를 받아서 마음이 곤경에 이르렀고 큰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 다음 순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본 결과 주님의 올바른 판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역사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 103:7)
이스라엘의 역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삭과 야곱을 거쳐 오늘날에까지 이르지만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등장하는 민족의 역사는 모세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었고 여호수아 때에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서 한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시는 행사를 보이셨는데 그것이 바로 판단의 능력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역사 속의 사건 속에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잘 판단해서 과오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그 의로운 일과 그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내신 일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피는데 그 역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역사입니다. 사람이 무슨 좋은 일을 했다고 하는 그런 역사가 아니고 순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 능하신 일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도 순전히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이 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후로도 계속적으로 성령이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역사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허물 투성이고 잘못된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은 성령으로 일하시는 그 자취를 남기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임의 역사도 여러분들이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물론 이 모임의 역사 속에는 인간들이 잘못한 부정적인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일하시는 그 부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성령으로 일하시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은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시던 하나님의 행사, 거기에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두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늘 불평과 원망을 하고 심지어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고 했던 불순종의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사람들 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계속적으로 그들을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 면을 다윗이 보고 그의 믿음의 근거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많고 죄를 많이 지었어도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로운 일을 나타내셔서 행해가시는 하나님을 다윗은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이스라엘 민족하고 똑같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원망하고 속으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하고 다를 게 없어요.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빠진 함정 속에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고 여호수아는 은혜 시대의 성령의 그림자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들어가서 행하는 역사인데 그런 것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우리 모임 역사가 책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 속에 인간으로서 잘못된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어떻게 일을 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와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03:8-9)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더듬어 보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우리를 죽이려고 애굽에서 건져냈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기름 가마 옆에 있고 고기와 부추를 먹고 배불리 먹던 그때가 좋았다고 하면서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 가실 때에 목마를 때는 물을 주시고 배고플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또 원수하고 싸울 때에는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이 죄를 짓고 징계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가 생길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더욱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셨습니다. 이천 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온 세상으로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하심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 스라엘 민족이 지금도 계속해서 고토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 죄대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시 103:10)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도 죄를 짓는데 만일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하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다음에도 이런저런 죄를 짓습니다. 살인이나 강도 따위의 큰 죄는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밖의 크고 작은 죄를 짓는데 죄는 크건 작건 본질상 똑같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
이것은 죄를 한 가지만 지어도 십계명을 어긴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큰 죄를 지었으니까 죄고 작은 죄를 지으면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작거나 크거나 역시 죄를 많이 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죄대로 우리를 취급하시면 아무리 구원을 받았어도 벌써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에 크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주님이 피 흘려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신 것을 압니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가 지은 죄도 그 죄대로 당장 처치하시거나 갚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만큼 우리를 벌주신다든지 우리 죄를 그대로 갚으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깨우치거나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어떤 때 징계라는 것을 주십니다. 뉘우치라는 뜻으로, 굉장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죄만큼은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걱정거리가 생겨 괴로워하는 그것도 징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의 죄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깨우치시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어떤 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거운 것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얄팍하기 때문에 조금만 답답하고 고통스러워도 못 견뎌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경험하는 삶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갈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1)
땅에서 하늘이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은 크시다고 말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현재의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완전히 평안해집니다. 그러한 사실이 내 영혼 속에 실지로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과를 영원히 없애버리신 주님
"동이 서에서 먼 것 갈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동과 서는 서로 만날 수 없어요. 동쪽에 사는 사람이 서쪽에 사는 사람과는 만날 수 있지만 동과 서 자체는 만나지지 않습니다. 또한 지구상에서 제일 먼 거리가 남에서 북까지가 아니라 동에서 서까지 입니다. 우리의 죄를 동이 성에서 먼 것같이 멀리 옮기셨다 하는 말씀은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옮겨졌는데 그 옮겨진 죄가 다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만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실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6-10)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 16:21-22)
여기에 '아사셀' 이라는 말의 뜻은 완전히 없앤다, 완전히 정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는데 한 마리는 아론이 안수해서 잡고 죽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또 한 마리 염소는 아론이 그 머리에 안수해서 백성들의 죄를 고합니다. 고한 후에 그 염소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들판으로 놓아보내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영원히 없애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이런 내용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지로 죄는 내가 지었지만 예수님이 내 죄를 완전히 없애주신 거기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동과 서가 만날 수 없는 것같이 내 죄가 멀리 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지옥 갈 죄는 완전히 나하고는 관계가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사셀 염소이신 예수님이 영원히 가지고 가버렸어요.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죄도 역시 그렇습니다. 자백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기억을 안하시고 없애버리십니다. 우리는 진짜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을까, 정말 하나님은 내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실까 걱정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거든요.
누가 내게 죄를 지었으면 잊어버리고 완전히 기억도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조금이라도 에누리가 있을 수 없어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백하면 완전히 우리 죄를 사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참으로 믿어야 됩니다. 정말 용서해 주실까? 어찌할까? 하는 것은 완전히 믿음이 아닙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는 이 말씀을 믿으면 이 말씀이 사실이 되고 우리 마음에 경험이 됩니다.
불완전한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주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고 했는데 우리 체질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약하고 부패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그 피를 받아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하신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가령 어린 아들이 있는데 체질이 약한 그 아들을 보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라고 하는 그런 아버지가 있겠어요. 가다가 쓰러지면 너는 본래부터 체질이 약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너는 못해라고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가 본래 그런 인간인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수도 하고 죄도 짓는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애를 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계속 노력을 하는데 그것은 자기는 흙뭉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본래 죽은 인간인데 이 죽은 인간이 뭘 한다는 것입니까? 거기에 이르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어버립니다. '아, 나는 죽은 인간이다, 그런데 내가 산 것처럼 뭘 하려고 애를 쓰느냐,' 하는 거기에서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우리의 체질, 나라고 하는 이 인간이라는 체질은 구원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간에 보잘것이 없는 것이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다가 어떤 기대를 걸지 않고 오직 주님께 기대를 걸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인간 자체는 풀과 풀의 꽃처럼 뜨거운 바람이 불어버리면 시들시들 말라버리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 앞에서 가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 때에 신앙생활이 올바로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사람이 매우 가치 있는 존재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것과 반대입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된 삶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7-18)
아무런 가치가 없고 바람이 불면 그냥 흙먼지처럼 날아가버릴 인생이지만 주님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자비함과 은혜와 생명이 내게로 와서 내가 그 큰 은혜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인생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이 되어버리면 정말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의 신앙생활도 내 육신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무가치한 인생 자체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자손에게까지 미친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한 말씀 등등이 다 약속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만일 죄가 생겼으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죄를 자백하고 사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성경 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니까 그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고 순종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 행하면 비록 지푸라기 같은 인간, 먼지 같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그 큰 은혜에 연결이 되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19절에서 22절까지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우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의 위가 하늘인데 하나님은 그 하늘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 사실이 이해가 안 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작은 것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는 하나님보다 작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현재 이 역사는 마귀가 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마귀를 이 잡듯이 죽여버리면 될 텐데 왜 남겨 두실까요? 이 마귀를 멸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마귀를 죽이는 일을 하시잖아요. 그것이 몇천 년이 되어도 하나님께는 눈 깜박할 사이의 한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순간 마귀를 멸망시키는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완벽한 통치를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보필하는 천사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0)
천사 루시퍼가 타락한 것이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 타락한 천사들뿐만 아니고 또 많은 천사들이 있는데 그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큰 권위를 가지고 통치를 하십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 구원받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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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1-22)
다윗은 자기의 허물과 죄 때문에 일시적으로 징계를 받았지만 너무도 자비 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가 도말이 되고 용서되었고 또 모든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실수를 하고 죄를 짓지만 그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용서해 주실 때에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짓자고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2)
그래서 우리는 혹시 실수해서 죄를 짓고 징계를 받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어 놓고 뻔뻔스럽게 굴지 않고 깊이 뉘우치고 자백하면 너무도 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다시 새롭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이러한 말씀들이 재현이 된다면 정말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편 103편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큰 어려움을 당하다가 거기에서 해방되었을 때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언제 어떤 환경에서 지어졌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징계의 의미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또 죄를 지어 징계도 여러 번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인 만큼 징계도 많이 받은 것을 우리는 그의 생애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징계를 받는다는 생각을 가집니다만 징계는 반드시 어떤 죄의 대가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으려고 하면 철저히 훈련을 받는 과정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 사람일수록 많은 징계를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6-13)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고난 등은 다 징계의 일종인데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징계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 앞에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징계를 통과한 후에 우러나는 영혼의 찬양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 '속사람' 이 진정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들 머리로만 찬송을 부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고난을 통과한 경험, 또 징계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만큼 영혼이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찬양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은 육신적인 생각만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진정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을 겪은 후에 거기서 구출이 되었다든지 승리를 얻었다고 하면 그때는 우리 영혼이 찬송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찬송한다는 말은 바로 성령으로 찬송을 한다는 뜻입니다.
찬양은 성령과 육신의 관계가 아니고 성령과 영의 관계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은 분명히 깊은 고난과 어려움을 통과한 확실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을 때에 단지 그냥 생각으로만 이렇게 찬양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굉장히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때에 참 감사했고 매우 기쁜 마음으로 찬송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짓는데 그에 대해서 징계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징계와 고통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그것과 씨름을 하고 괴로움을 당하다가 어느날 주님께서 또 용서해 주신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죄는 지옥가는 죄는 아니지만 그 죄도 심판을 받아야 할 죄입니다. 육신적으로 징계를 받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죄를 지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람도 봅니다.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반면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 속에서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이 구원을 받았는데 왜 한 사람은 그냥 무사태평하게 잘 지날 수 있고 왜 다른 사람은 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거쳐야 하는지 사람으로서는 잘 평가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만 그 문제를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어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그 사람이 오히려 행복한 것 같고 더 축복을 받은 것같이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도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지 않습니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받는 그 모든 것이 다 징계인데 그것이 죄를 지은 데서 오는 것도 있지만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들어 쓰시려고 할 때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평가하면 그냥 구원받고 나서 별 문제 없이 편안하게 지나면 그 사람은 참 믿음도 좋고 잘 믿는가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틀림없이 구원받은 이후에 어떤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이 심하면 그러한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것이 오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을 해야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서 죄를 지었고 또 인구조사하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국민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윗에게는 시련이었고 징계였습니다. 그는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무시무시한 징계를 받아 어떤 때는 자기 아들에게 쫓기고, 또 어떤 때는 신하들에게 쫓기는 비참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러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혼으로 찬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처리되는 원리-회개와 자백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지옥자식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분명히 지옥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3장에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장래 노하심을 피하게 하더냐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책망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은 구원을 개별적으로라기보다는 민족적으로 받는 표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도덕적으로 죄를 짓거나 하나님을 무시한 죄, 우상 숭배한 죄 등등의 죄를 짓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서 모든 국민을 배후에 두고 그 대표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사해 주신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시를 읊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그 죄를 뉘우치며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을 해서 간음죄를 지었을 때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죄를 책망하였을 때에 다윗은 침상이 젖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이 시를 얼핏보면 굉장히 모순이 많습니다. 자기가 분명히 밧세바를 통해서 죄를 지었는데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라고 했습니 다.
자기 앞에는 항상 죄가 있다고 느끼면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죄를 짓고 죄의 책망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너는 의롭다 너는 순전하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아는데 하나님 앞에 그것을 내놓고 자백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지은 그 죄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했습니다. 간음을 범했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같이 죄인이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할 수 있는 심판권이 없습니다. 사람이 심판권이 없으니까 모든 죄는 사람 앞에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지은 것이니까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실 때에 의롭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고 순전하심을 말합니다. 다윗은 모든 표준을 하나님 앞에 두었습니다. 자기가 비록 어떤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사람과 관계되지만 하나님 앞에 그 죄가 정말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비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사함받아야 됩니다.
사람을 속이고 사람과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무슨 죄든지 죄는 먼저 하나님 앞에 가져가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도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지옥갈 죄는 영원히 사함받아 눈과 같이 희게 되었고 양털같이 씻음을 받았습니다만은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도 하나님 앞에 자백을 해서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하였는데 어떤 병은 죄와 관계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4-16)
여기에 보면 병 낫기 위하여 죄를 서로 고하고 서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임 초기에는 기름을 바르면서 기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 낫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그런 것을 못봅니다. 어떤 질병은 죄와 관계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이런 일은 물질이나 외적 조건이 넉넉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적으로는 넉넉하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그 마음은 그런 것과 상관이 없이 굉장히 풍요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그렇게만 마음이 단순하면 이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아주 잘 들어오면서 알아지게 됩니다. 그 마음이 행복하고 힘있는 그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7-31)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시험을 당할 때에 우리 마음은 주위 환경에만 시선이 갑니다. 이것을 봐도 시원찮고 저것을 봐도 시원찮아 걱정과 한숨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생활은 주위 환경을 보고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내 모든 문제가 주님 안에서 해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위 환경만 자꾸 돌아보면 아무리 찾아보아도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의를 바라보라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신다고 했고 또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신다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내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은 의로울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의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놓고 행해주시는 것이 완벽하게 의로운 일입니다. 그 의로운 일이 동시에 우리에게도 의롭게 되는 일입니다. 그 의를 우리가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판단해 놓으신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징계를 받아서 마음이 곤경에 이르렀고 큰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 다음 순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본 결과 주님의 올바른 판단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삭과 야곱을 거쳐 오늘날에까지 이르지만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등장하는 민족의 역사는 모세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었고 여호수아 때에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서 한 국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시는 행사를 보이셨는데 그것이 바로 판단의 능력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역사 속의 사건 속에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잘 판단해서 과오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그 의로운 일과 그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내신 일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피는데 그 역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역사입니다. 사람이 무슨 좋은 일을 했다고 하는 그런 역사가 아니고 순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 능하신 일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도 순전히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이 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후로도 계속적으로 성령이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복음의 역사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은 허물 투성이고 잘못된 점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은 성령으로 일하시는 그 자취를 남기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임의 역사도 여러분들이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물론 이 모임의 역사 속에는 인간들이 잘못한 부정적인 부분이 상당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일하시는 그 부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성령으로 일하시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은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시던 하나님의 행사, 거기에 믿음의 확실한 근거를 두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늘 불평과 원망을 하고 심지어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고 했던 불순종의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사람들 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계속적으로 그들을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 면을 다윗이 보고 그의 믿음의 근거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많고 죄를 많이 지었어도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로운 일을 나타내셔서 행해가시는 하나님을 다윗은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이스라엘 민족하고 똑같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원망하고 속으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하고 다를 게 없어요.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빠진 함정 속에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고 여호수아는 은혜 시대의 성령의 그림자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들어가서 행하는 역사인데 그런 것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우리 모임 역사가 책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 속에 인간으로서 잘못된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어떻게 일을 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와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더듬어 보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우리를 죽이려고 애굽에서 건져냈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기름 가마 옆에 있고 고기와 부추를 먹고 배불리 먹던 그때가 좋았다고 하면서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어 가실 때에 목마를 때는 물을 주시고 배고플 때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셔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또 원수하고 싸울 때에는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이 죄를 짓고 징계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가 생길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더욱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셨습니다. 이천 년 전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온 세상으로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노하심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 스라엘 민족이 지금도 계속해서 고토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 죄대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도 죄를 짓는데 만일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하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다음에도 이런저런 죄를 짓습니다. 살인이나 강도 따위의 큰 죄는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밖의 크고 작은 죄를 짓는데 죄는 크건 작건 본질상 똑같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10-11)
이것은 죄를 한 가지만 지어도 십계명을 어긴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큰 죄를 지었으니까 죄고 작은 죄를 지으면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작거나 크거나 역시 죄를 많이 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죄대로 우리를 취급하시면 아무리 구원을 받았어도 벌써 어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은혜에 크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주님이 피 흘려 우리 죄를 다 용서해 주신 것을 압니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가 지은 죄도 그 죄대로 당장 처치하시거나 갚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만큼 우리를 벌주신다든지 우리 죄를 그대로 갚으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깨우치거나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어떤 때 징계라는 것을 주십니다. 뉘우치라는 뜻으로, 굉장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죄만큼은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에 걱정거리가 생겨 괴로워하는 그것도 징계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의 죄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깨우치시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어떤 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거운 것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얄팍하기 때문에 조금만 답답하고 고통스러워도 못 견뎌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경험하는 삶
땅에서 하늘이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은 크시다고 말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현재의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완전히 평안해집니다. 그러한 사실이 내 영혼 속에 실지로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과를 영원히 없애버리신 주님
동과 서는 서로 만날 수 없어요. 동쪽에 사는 사람이 서쪽에 사는 사람과는 만날 수 있지만 동과 서 자체는 만나지지 않습니다. 또한 지구상에서 제일 먼 거리가 남에서 북까지가 아니라 동에서 서까지 입니다. 우리의 죄를 동이 성에서 먼 것같이 멀리 옮기셨다 하는 말씀은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옮겨졌는데 그 옮겨진 죄가 다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만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실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6-10)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 16:21-22)
여기에 '아사셀' 이라는 말의 뜻은 완전히 없앤다, 완전히 정해버린다는 뜻입니다. 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는데 한 마리는 아론이 안수해서 잡고 죽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또 한 마리 염소는 아론이 그 머리에 안수해서 백성들의 죄를 고합니다. 고한 후에 그 염소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가서 들판으로 놓아보내버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또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영원히 없애버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이런 내용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실지로 죄는 내가 지었지만 예수님이 내 죄를 완전히 없애주신 거기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동과 서가 만날 수 없는 것같이 내 죄가 멀리 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지옥 갈 죄는 완전히 나하고는 관계가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사셀 염소이신 예수님이 영원히 가지고 가버렸어요.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짓는 죄도 역시 그렇습니다. 자백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기억을 안하시고 없애버리십니다. 우리는 진짜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을까, 정말 하나님은 내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실까 걱정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거든요.
누가 내게 죄를 지었으면 잊어버리고 완전히 기억도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조금이라도 에누리가 있을 수 없어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백하면 완전히 우리 죄를 사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참으로 믿어야 됩니다. 정말 용서해 주실까? 어찌할까? 하는 것은 완전히 믿음이 아닙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는 이 말씀을 믿으면 이 말씀이 사실이 되고 우리 마음에 경험이 됩니다.
불완전한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주님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고 했는데 우리 체질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약하고 부패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그 피를 받아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하신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가령 어린 아들이 있는데 체질이 약한 그 아들을 보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라고 하는 그런 아버지가 있겠어요. 가다가 쓰러지면 너는 본래부터 체질이 약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너는 못해라고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가 본래 그런 인간인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수도 하고 죄도 짓는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애를 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계속 노력을 하는데 그것은 자기는 흙뭉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본래 죽은 인간인데 이 죽은 인간이 뭘 한다는 것입니까? 거기에 이르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어버립니다. '아, 나는 죽은 인간이다, 그런데 내가 산 것처럼 뭘 하려고 애를 쓰느냐,' 하는 거기에서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우리의 체질, 나라고 하는 이 인간이라는 체질은 구원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간에 보잘것이 없는 것이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다가 어떤 기대를 걸지 않고 오직 주님께 기대를 걸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인간 자체는 풀과 풀의 꽃처럼 뜨거운 바람이 불어버리면 시들시들 말라버리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 앞에서 가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 때에 신앙생활이 올바로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사람이 매우 가치 있는 존재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것과 반대입니다. 자기 부정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된 삶
아무런 가치가 없고 바람이 불면 그냥 흙먼지처럼 날아가버릴 인생이지만 주님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자비함과 은혜와 생명이 내게로 와서 내가 그 큰 은혜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인생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이 되어버리면 정말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의 신앙생활도 내 육신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무가치한 인생 자체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자손에게까지 미친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한 말씀 등등이 다 약속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만일 죄가 생겼으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죄를 자백하고 사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성경 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으니까 그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고 순종을 해야 되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 행하면 비록 지푸라기 같은 인간, 먼지 같은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그 큰 은혜에 연결이 되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19절에서 22절까지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우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의 위가 하늘인데 하나님은 그 하늘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그 사실이 이해가 안 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작은 것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는 하나님보다 작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현재 이 역사는 마귀가 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마귀를 이 잡듯이 죽여버리면 될 텐데 왜 남겨 두실까요? 이 마귀를 멸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마귀를 죽이는 일을 하시잖아요. 그것이 몇천 년이 되어도 하나님께는 눈 깜박할 사이의 한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순간 마귀를 멸망시키는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완벽한 통치를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보필하는 천사들
천사 루시퍼가 타락한 것이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 타락한 천사들뿐만 아니고 또 많은 천사들이 있는데 그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큰 권위를 가지고 통치를 하십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 구원받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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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송축하라
다윗은 자기의 허물과 죄 때문에 일시적으로 징계를 받았지만 너무도 자비 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가 도말이 되고 용서되었고 또 모든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실수를 하고 죄를 짓지만 그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용서해 주실 때에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짓자고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2)
그래서 우리는 혹시 실수해서 죄를 짓고 징계를 받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히 너무도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어 놓고 뻔뻔스럽게 굴지 않고 깊이 뉘우치고 자백하면 너무도 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다시 새롭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이러한 말씀들이 재현이 된다면 정말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