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4편]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 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 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 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시 104:1-35)


 이 시편 104편은 창세기 1장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2)


 이 말씀과 연속되는 내용입니다. 지금부터 적어도 3천여 년 전에 기록된 것으로 참으로 성령의 이끌림과 감동을 받아서 쓴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창조의 첫째 날


1절부터 4절까지는 창세기의 1장의 첫째날에 해당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1-4)


 이 시인은 모든 만물이 그냥 창조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귀와 권능과 능력이 그 기초가 되어서 생성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빛의 근원과 본질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2)


 창세기 1장에 보면 첫째날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빛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전기는 전기의 빛이 있고 태양에도 태양의 빛이 있는데 그 모든 빛들의 근원과 본질은 하나님 자체입니다. 라이터를 켜도 빛이 있고 무엇이 타도 빛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빛의 본질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빛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지만 그 빛의 본질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빛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영혼의 빛이 있고 이 세상 빛이 있습니다.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시 104:2)


 마치 천장에 전등불이 켜 있는 것처럼 먼 하늘에 별들이 반짝반짝하면서 지구를 둘러 있는 그것을 휘장같이 치셨다고 말하는 것 입니다.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시 104:3)


 이것은 땅에서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고 그 구름에서 비가 내리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구름 위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3-4)


 이 지상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도 높이 뜬 구름 위는 밝은 태양 빛이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둥 번개가 치는 구름 위에 마치 앉아 계시는 것처럼 계시면서 온 세상을 운영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여기서 일차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첫째 날의 광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과 광대하심이 이 모든 것을 안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날


그다음에 시편 5절부터는 창세기 1장의 둘째 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6절부터 보면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시 104:5)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땅속으로 깊이 내려가면 저 중심이 굉장히 견고한 물질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지구가 처음에 개스 뭉치였고 그것이 타면서 액체로 변하는 과정에서 가장 무거운 물질이 가라앉아서 지구의 기초가 형성되었습니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시 104:6)


 처음에는 육지가 보이지 않고 완전히 지구가 옷으로 덮인 것같이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시 104:7-8)


 그 후 남극과 북극이 생기면서 남극, 북극 쪽으로 물이 몰려가서 얼음 산들이 생겨나고 그다음에 육지가 생겨났습니다. 육지가 생겨났는데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이런 육지가 되었습니다.

 바다 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다 속에도 육지처럼 산이 있고 또 골짜기가 있습니다. 물이 줄어들면 현재 이 육지가 큰 산이 있고 큰 골짜기가 있는 것처럼 바다도 그런 상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 104:9)


 만일 북극이나 남극에 있는 얼음이 다 녹아버리면 아마 이 지구가 다시 물속에 다 잠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기후를 조절하셔서 넘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시 104:10)


 참 이상하게도 높은 산에도 물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나라 백두산 같은 데는 이천칠백 미터 이상 되는 높은 곳인데 그 위에 천지란 못이 있고 골짜기에서 샘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하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시 104:11-13)


 이 말씀은 자연계를 그냥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 속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깊은 뜻을 우리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자연의 세계에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속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만물 속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과 은혜와 자비가 있고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말씀대로 높은 산과 골짜기가 생겨서 물이 흐르도록 만들고 그 흐르는 물을 들의 각 짐승들이 마시고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깃들이면서 생존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셔서 거기에서 긱 짐승들이나 생명체에게 먹이를 주시고 또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자비하심이 지금부터 삼천 년 전쯤에 하나님의 창조에다가 근거를 두고 시로서 이렇듯 대자연을 표현한 것은 성경이 사람의 지식으로 씌여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씌여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 날의 창조 과정


14절부터는 셋째 날의 창조 과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 104:14-15)


 하나님은 사람이 생기기 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첫째 날은 빛을, 둘째 날은 궁창을, 셋째 날은 땅이 솟아나는 사실을 말씀을 하셨고 그 다음에는 푸른 채소와 씨 맺는 열매의 창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 1:9-13)


 이 셋째 날에 땅이 물에서 솟아났습니다. 전 지구가 물로 덮여 있을 때에 용암이 끓어 오르면서 땅이 솟아난 것입니다. 땅이 솟아난 다음에는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 등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의 하루의 길이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의 하루를 오늘날과 같은 길이의 하루 24시간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용암이 끓어 올라와서 그것이 식고 식어서 땅이 되고 오랜 세월이 흘러야만 거기에 풀이 돋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와이에 가보면 용암이 끓어 오르면서 흘러내려 갑니다. 굉장히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거기에 풀도 나기도 하고 씨가 날라와서 나무도 나기도 합니다.

 셋째 날만 하더라도 땅이 물에서 솟아나고 그 다음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들이 생겨나는데 그 기간이 굉장히 오랜 시간입니다. 그 기간을 하루로 표현한 것입니다.

 창세기에 하루란 것이 현재 우리가 계산하는 24시간의 하루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딤후 3:8)


 그래서 이 하루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울창한 수목들이 이 지구상에 꽉 들어찼던 그런 시절도 있었고 또 공룡들도 실지로 있었는데 그 모든 일들이 지금 같은 하루 24시간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법칙을 내놓으셨고 그 법칙에 의해서 서서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이라고 하는데 이 지구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전은 아닙니다. 지금 땅속에서 석유가 나오는데 그 석유는 그 옛날에 울창했던 수목들이 땅속으로 들어가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석유로 변한 것입니다. 브라질 같은 데 가보면 땅속에서 수정 같은 보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도 원래는 전부 나무입니다. 나무가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서 화석이 되었는데 그것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값진 보석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생겨나기 전에 오랜 과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보지 못 했던 그러한 일들이 흘러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세계가 먼저 준비가 되었고 오랜 후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것을 말합니다.



자연 계시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시 104:16-18)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것은 특별 계시라고 하고 이 자연의 세상은 자연 계시라고 말합니다. 이 자연계 속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운 속성과 성품이 전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정말 이 세상은 굉장히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아름   다운 그 성품을 이 자연계 속에 전부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셔서 이 모든 자연계가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고 탄식을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만일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굉장히 아름답고 행복한 세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아름답고 선한 성품이 이 모든 자연계 속에 그대로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이 다시 죄 없는 세상으로 회복되어 다시는 썩고 비참한 일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넷째 날-하늘의 광명을 총괄적으로 설명함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창 1:14-19)


 사람들이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이 넷째 날에 대해서 오해가 많습니다. 이 넷째 날에 하나님이 하늘의 태양을 비로소 만든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날에 보면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빛도 사실은 태양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이 넷째 날에 보면 두 큰 광명을 궁창에 두셨는데 낮을 주관하는 광명은 태양이고 밤을 주관하는 광명은 달이고 그다음에 별들을 창조했다고 되어 있어 넷째 날에 혼돈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것이 아닙니다. 넷째 날에는 현재 우리가 지구상에서 보는 천체 가운데 가장 가까운 달이 제일 나중에 생겨난 것을 말합니다. 달이 제일 나중에 생겨났을 때에 하늘의 광명들을 총괄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이 넷째 날입니다.

 그러니까 달이 만들어져서 달은 밤을 주관하고 그 먼저 있었던 태양은 낮을 주관하고 그다음에 별들이 운행되는데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넷째 날에 태양을 만들고 달을 만들고 별을 만들었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넷째 날에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달이 만들어지면서 총괄적으로 태양을 언급하고 그다음에 별들을 언급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중복적으로 설명이 되면서 넷째 날이 나옵니다.



달로 절기를 정하심


그래서 시편 104편 19절에 다음과 같은 달과 해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시 104:19)


 우리 한국에는 음력이라는 것이 있는데 음력은 달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사실 동양은 모든 절기가 달을 중심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태양력이 들어오면서 양력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달로 절기를 정하셨기 때문에 달을 보면 절기를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저 초하루니 보름이니 하는 것도 전부 달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시 104:20-23)


 밤은 주로 산에 있는 짐승들이 활동하는 시간이고 낮은 가축이나 사람이 활동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들이 활동하는 기간에는 사람이 조용히 쉬게 하고 또 사람이 활동하는 기간에는 짐승들이 조용히 쉬게 하셨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의 체력을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체력도 그렇고 짐승도 쉬는 시간이 없이 한없이 노동하고 움직이기만 하면 체력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밤을 만드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조용히 쉬게 하시고 짐승들은 밤에 활동을 하다가 해가 뜨기만 하면 물러가서 낮에는 굴속이나 어디 가서 조용히 쉬게 만드셨습니다. 짐승과 사람이 정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산중에 있는 짐승들이 밤에 나와서 활동하고 먹이를 찾고 사람은 낮에 노동하며 수고하다가 밤이 오면 조용히 쉬고 잠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된 바다


"여호와여 주의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 하나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 나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시 104:24-27)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삽니다만 바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다가 없으면 지상에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저 넓은 바다가 강렬한 태양의 열을 흡수하지 않으면 이 지구상에 사람이 못삽니다. 저 바다 속에 무수한 동물이 있는데 그 동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프랑크톤이나 바다 속 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마치 산천의 수목처럼 바다 속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종류의 고기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먹이도 되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재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만물을 나래 밑에 감추듯이저 넓은 바다 속에는 형형색색의 많은 바다 동물도 있고 고기도 있지 않습니까? 바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높고 낮음이 있을지라도 전부 다 똑같이 바다의 평평한 가운데 다 숨어버립니다. 작은 멸치에서부터 고래 같은 큰 고기까지 그 안에서 유유히 생존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만큼 너그럽고 섬세하신가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읊은 자연계의 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여 주의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의 부요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고 바다 속에도 수없이 많은 동물들이 있고 육지 위에도 동물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한 법칙 안에서 운행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 광대한 천체 이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크고 머리가 좋아도 이 우주 만물을 한 사람이 다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전담을 해가지고 동물학자도 생기고 식물학자도 생기고 천문학자도 생기고 해양학자도 생기고 별별 사람들이 전부 다 동원이 되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부유하고 넉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농부에게 많은 가축이 있다고 하면 그 가축을 먹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고 애를 씁니까? 하나님은 바다 속에 있는 그 수없이 많은 고기 떼들이 전부 먹고 살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산천에 있는 모든 동물들도 먹고 살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농사하지 아니하고 추수하지 아니하여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모든 것에게 전부 먹이를 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8-29)


 모든 자연의 식물이나 동물의 운명이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고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창조만 하시고 버려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머리터럭까지도 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고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보호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지 지옥을 가지 않기 위해서 죄사함 받은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어찌 하나님이 자기 자녀를 먹이시고 기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굶어 죽는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굶어 죽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피조물들에게 계속적으로 생명을 공급하시고 생존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동물들 짐승들에게도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현재 나와 같이 계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먹여주시고 입혀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믿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하고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먹이를 주시고 생존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데 구원받은 사람이 이걸 못 믿으니까 지나친 걱정을 합니다. 조금 형편이 어렵거나 사업하다 실패하면 무엇을 먹고 살까 걱정하고 괴로워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 모든 자연계는 다 흙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고기도 짐승도 모두 흙이니까 전부 흙 속에서 먹이를 얻어먹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짐승이나 사람이 다 흙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과 새 창조의 세계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여기에 "주의 영을 보내어"라는 말은 이중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사람만은 주의 영으로 창조했습니다. 사람은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 속에 영이 있어서 모든 짐승과는 위치가 다르고 그 삶의 의미가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여기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연인으로 창조하셨다는 단순한 처음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우리" 라고 하는 말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지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이미 예정해 놓으신 이 교회는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정해놓으신 그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교회의 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과 새 창조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신약 시대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교회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시 104:31)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나타내시다가 신약에는 교회를 통해서 나타내시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지속됩니다. 얼핏 보면 교회는 사람들이 오합지졸로 모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고 여호와의 행사, 즉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그 일을 위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의 그림자인데 신약시대에 성령이 오심으로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입니다.



인간 세상을 굽어보시는 하나님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시 104:32)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 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올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3-9)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굽어 보신다, 땅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사는 땅을 보시는 거기에 율법이 기록이 됩니다. 그 율법의 내용은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니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처음에 굽어 보시니까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을 보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첫번째로 인간을 굽어보신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으로 보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흔들리고 불이 붙은 아주 무시무시한 광경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서 인간을 보시는 관점이 그렇습니다. 그러한 광경이 출애굽기 19장에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는 장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손을 그에게 댐이 없이 그런 자는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거나 살에 쐬어 죽임을 당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모세가 산에서 내려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으로 성결케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말라 하니라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맡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 19:10-20)


 주님이 두번째 허리를 굽혀서 또 글씨를 쓰셨는데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두번째 인간을 굽어보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두번째 인간을 굽어보실 때에 인간은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죄사함을 받는 광경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의 내용이 사실은 역사적 배경으로 말하면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율법의 음성과 은혜의 음성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2-35)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그런 민족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멸망하지 않고 생존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무시한 데서 듣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듣는 시대입니다. 율법의 음성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음성을 듣고 사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은혜 시대에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즐거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시 104:33-34)

 우리는 이 시을 읊으면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편을 지은 시인은 물론 성령으로 시를 읊었지만 우리는 이 시인이 경험한 것 이상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구원 받은 사람이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계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보았습니다. 모든 동물의 세계, 심지어 바다 속에 있는 고기떼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서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더 나아가서 앞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세상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시고 넉넉하심이 이 자연 계속에 나타났다면 정말 아름답고 무한한 그 영광의 세계가 바로 우리들 앞에 예약이 되어 있다는 믿음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시인처럼 즐거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관된 살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에게 주어진 확실한 약속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시 104:35)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다 소멸하시고 마귀를 멸망시키시는 그 때가 오면 정말 이 세상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나타납니다. 천년왕국도 영원한 천국도 현재 우리들의 감각으로서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만. 그 때 가면 여기에 표현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부요 하심을 우리가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우리는 이 시편 104편에서 하나님의 부요를 배웠습니다. 지금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별로 느낄 수 없습니다. 물과 공기도 오염되고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세상입니다. 본래 모든 동물들 심지어 공중에 있는 새까지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부요하고 아름다운세상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어진 확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가뭄이 든 것처럼 메마르고 어려운 것 같지만 이것은 부요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 위한 하나의 시련의 과정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하나님의 부요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게는 그 소망에 대한 확실한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