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마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 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 105:1-45)
이 시편 105편은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과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에게 은혜를 나타내신 하나님, 또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을 은혜로 다스리시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역대상 16장8절에서 22절까지가 시편 105편 1절로 16절까지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역대상 16장 1절을 보면 이 시가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05편의 배경-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면서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니라"(대상 16:1)
이 시편 105편 말씀과 역대상 16장 8절부터의 말씀은 다윗 왕이 법궤를 자기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셔간 때에 하나님 앞에 부른 찬송입니다. 그 일이 다윗에게는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이 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의 처소에 모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일로 생각이 되기 때문에 아주 영광스러운 의식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찬송가가 따로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찬송가를 따로 만들어서 부른 것이 아니고 시편에다가 곡을 붙여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1-4)
이것은 매우 신령한 노래입니다. 자기 집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된 것이 다윗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형성되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또 유무상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찬송하며 교제를 나누었고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역사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하신 그 만물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신 것을 노래한 시가 시편 103편이었는데 이 시편 105편은 그 선택한 민족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일을 행하셨는지 노래하고 기억하는 시입니다.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행하신 기사와 그 이 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시 105:5-11)
105편의 후반부에도 나옵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냥 우연히 흘러가는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시고 이루어가시는 역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그 언약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곳을 완전히 점령한 것이 아니고 그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이삭 때에도 그렇고 그 다음에 야곱 때에도 가나안 땅에서 이리저리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도 죽고 그 다음에 야곱도 죽고 나중에 4백 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시 105:7-8)
하나님은 언약을 하시고 식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신 것은 언젠가는 꼭 이루시는 분임을 이스라엘 민족이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고 교회가 형성되었는데 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있고 핍박이 있고 또 여러 가지 시련이 있습니다. 이 시련 속에 시달리고 어려움을 당하다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신 것 같고 인간의 판단으로서는 버림 받은 것 같은 상황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거나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시 105:12-13)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가나안을 정복해서 그 땅에다가 선민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를 이룩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왜 그때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가나안의 칠족속을 다 무찌르고 그 땅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능력이면 못할 것은 없지만 너무 적은 숫자가 그 땅을 다 관리하고 차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아질 때까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리는 기간이 얼마나 되느냐하면 아브라함 때로부터는 한 5백년 가까이 되고 야곱 시대부터는 한 4백년쯤 됩니다.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종노릇하고 살았는데 그동안 굉장히 빨리 사람이 불어나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나오게 될 때에는 장정만 육십만이나 되는 많은 숫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일하시지만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일을 못하셔요. 신약시대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꺼번에 구원받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서 교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역사를 거쳐서 구원을 조금씩 받아 나중에 구원받은 숫자가 완전히 찰 때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그 다음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집니다.
천년왕국이 가나안 땅이거든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의 숫자가 차야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의 숫자가 차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는 숫자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 숫자가 차야 예수님이 오시고 그 다음에 천년왕국인 가나안 땅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가 형성되는 시련과 훈련의 과정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나그네 생활을 했고 그 땅을 차지해서 살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족속 저 족속에게 가서 붙어 살았습니다. 가령 블레셋 사람 아비멜렉 따위에 붙어 살았습니다. 그 과정이 시련을 받는 과정입니다. 한 민족이 태동될 때 그러한 여러 가지 시련과 훈련을 받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거쳐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교회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을 받고 또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형성되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은 완전한 교회는 아닙니다. 완전한 교회는 아직 될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구원의 숫자가 차고 주님이 오셔야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천년왕국인 가나안 땅에 들어 가서 주님과 교회가 신랑과 신부로서 다스리는 시대가 됩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시 105:14-15)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이 족속에서 저 족속으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늘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서 이방으로 하여금 그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창 21:22-2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직계를 통해서 한 민족을 형성하실 계획이 계셨기 때문에 그 중간에 누구든지 그들을 해쳐 멸망하지 않도록 항상 보호하시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언제 기름 부음 받았다는 상세한 내용은 성경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실 때에 이미 그 약속을 통해서 기름 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해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 해치는 일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지만 순교를 했는데 자기 할 사명을 다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해쳐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육신을 해친다고 해서 해쳐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나 영적 생활이 해쳐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기름 부음이 있어서 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핍박을 받고 또 어떤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전히 신앙생활이 약화되지 않고 조금도 굴복되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여전히 주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것은 해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해침을 받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런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육신적으로 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탄에 의해서 우리가 해쳐진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함을 당하고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우리의 영적 생활이 약화되지 않고 여전히 신앙생활을 지켜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뜻입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세력에 의해서 공격을 받아 우리가 완전히 없어진다든지 그렇게 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라고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시련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주님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시 105:16)
요셉이 종으로 팔려서 애굽에 간 후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동안 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도 큰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양식 사러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그 결과로 요셉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야곱의 가족이 요셉을 만날 수가 없었습 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에 요셉을 만나서 요셉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가정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양식이 풍부했으면 그 양식을 의지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요셉을 만날 기회가 오질 않습니다. 믿고 사는 양식을 끊어버리니까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양식은 요셉이 주관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 때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만일 그들이 먹을 것이 풍성했으면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그것이 진짜로 들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풍성한 양식이 있는데 애굽에 양식이 있으면 뭘해요. 양식이 끊어지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양식을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활이 너무 편안하고 부유하고 잘 지나면 주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이 편안하고 부유하게 넉넉하게 잘 살면 신앙생활 잘 할 것 같지만 육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물질적인 문제뿐만 아니고 여러 가지 시련이 오지 않으면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주님을 찾아 만나야 됩니다.
시련을 통해 체험적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여기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란 말이 처음에 구원받을 때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예수님이 피 흘려 우리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살아가는데 우리가 시련 속에 있을 때에 그 속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함께 계셔서 그 어려움에서 보호해주시는 예수님을 따로 알아야 됩니 다. 그래서 예수님을 차츰차츰 더 알아가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밤낮 구원받은 것만 아는 생활은 젖먹이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체험 속에서 알아야 됩니다. 체험 속에 안다는 것은 시련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모릅니다. 많은 시험을 거치고 괴로움을 겪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주님이 보호해 주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알면 그 신기한 능력 , 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때에 우리가 이론으로서 받은 것이 아니고 말씀을 경험해서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극복할 때에 주님을 또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 에게 주사" 라고 했잖습니까?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슨 약속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이 세상은 우리를 자꾸 유혹합니다. 물질적인 욕심이나 쾌락을 좋아하는 마음,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 정욕인데 이 썩어질 것을 피하여 차츰차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우리의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3-17)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셨고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에 내가 너를 번성케 하리라,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들이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아직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없을 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셨어요. 보통 우리 사람들이 맹세하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든지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보다 큰 존재가 없으니까 하나님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번성케 한다 하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받는 데 있어서 굉장히 오래 참았습니다. 물론 중간에 이스마엘도 낳고 여러 가지 과정이 있기는 합니다만 끝까지 참고 견뎌서 이삭을 얻었고 그 다음 아브라함 당대에도 번창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여기 보세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약속을 지금 믿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물론 첫째는 영원한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년 왕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들림을 받을 것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약속이 있어요.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현실 생활 속에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희미한 사람은 현재 이 생활 속에서 찾아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 유혹에 넘어갑니다.
"피하여 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이 우리를 뒤에서 잡아 당겨 앞으로 못 가게끔 따라옵니다. 이 세상의 물질, 돈, 육신적인 쾌락, 정욕등이 우리를 자꾸 붙잡습니다.
요한일서 2장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 자꾸 뒤에 따라옵니다. 따라오고 따라와서 우리를 잡으려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아주 굳게 잡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이기면서 신앙생활을 해갈 수 있고 그 약속을 확실히 못 잡으면은 그냥 이 세상에 잡혀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롯의 처가 되어 버립니다.
시련 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섭리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시 105:16)
아까 말씀드린대로 가나안 땅에 흉년이 안들었으면 아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요셉을 만날 길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없으면 예수님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재미나게 잘 사는데 예수님을 더 알려고 할 필요가 있겠어요. 가만히 보면 가난할 때에는 굉장히 열심을 내던 사람이 돈을 조금 버니까 신앙생활이 싹 식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 좀 벌었다고 모임에 안 나오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 다. 돈 없고 가난할 때에는 열심이었는데 조금 돈 벌어가지고 편안하게 사니까 신앙생활을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실은 너무도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불탈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림자 요셉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시 105:17-18)
여기서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요셉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그 다음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결정적으로 이 요셉 시대에 와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라는 사람이 형들에게 팔려가는 그것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팔려 고난받는 것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렸잖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열둘이 있는데 가룟 유다만 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인물입니다. 전부 다 갈릴리 사람들인데 가룟 유다만 유대 지역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의 대표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유다 지파이신데 예수님이 그 유다 지파에 의해서 팔린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요셉이 옥에 갇힌 것이 예수님의 고난받으신 것의 그림자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몽해 줌으로써 일약 옥에서 나와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기까지 요셉은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 믿음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전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유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예수님은 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되셨을까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왜 육신 속에 오셔야 되는 이유는 그 말씀이 반드시 육신 안에서 단련을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단련을 받아야 구원의 능력이 있는 말씀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 한 마디면 다 구원하실 수 있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말씀과 사람을 구원하시는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능력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만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은 그냥 능력만은 안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서 육신이 고난을 받아야 됩니다.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하나님의 말씀은 풀무불 속에 단련받은 은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의 말씀이 순결한 말씀입니다. 단련을 하면 불순물은 다 제해지고 순결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9-10)
그러면 예수님이 고난을 안 받으셨으면 온전치 못합니까?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니까 온전하다 하는 것하고 구주로서 온전한 것하고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까 온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다고 해서 구원의 주로서 온전하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주로서 온전하신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주로 온전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의 몸 안에서 단련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생애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능력의 말씀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의미는 알 수 있습니다만 우리의 생활에서 고난을 통과함으로 우리에게 알아지는 것과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말씀하고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육신의 고난을 통과해서 알아진 이 성경 말씀은 훨씬 더 깨끗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훨씬 더 능력있는 말씀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심으로 그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안 받으셨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말씀을 전하는 증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가령 고린도전서 6장이나 고린도후서 1장 등을 죽 보면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의 일꾼인데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고생한 만큼 바울의 말씀은 순전했고 깨끗했고 힘이 있었고 참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련이나 핍박 속에서 어떤 말씀이 알아졌다고 하면 굉장히 힘이 있고 깨끗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림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요셉을 내세워가지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 고난을 받게 한 것입니다. 형들이 팔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꾼들에게 팔렸고 다시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지만 그 유혹을 물리쳤기 때문에 오해를 받아서 욕에 갇히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옥에서 나온 것이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그 다음에 요셉은 나중에 총리가 됩니다. 그것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7년 풍년이 들고 7년 흉년이 드는 과정은 환난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맞이해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있을 동안에 이 세상은 큰 환난의 때로 들어섭니다. 요셉의 가족들이 7년 흉년을 면하는 과정은 이러한 일의 그림자입니다. 자기가 그들이 요셉을 만나 요셉이 주는 양식을 먹는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에 있으면서 먹던 양식하고는 다른 양식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는 관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시 105:20-23)
이 "열방의 통치자"가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바로 왕은 그 시대의 세계 지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70인이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가 그 땅 즉 함 땅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장차 많은 큰 민족을 이루어 나오게 될 때에 하나님의 굉장히 크신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고생한 기간이 무려 400년이나 됩니다. 400년 동안 살아갈 때에 어떤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의 채찍에 맞아죽기도 했습니 다. 개인적으로 보면 그러한 일들이 도대체 축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부터 보면 아들을 낳으면 죽여버리고 딸만 낳으면 살려두었는데 그 중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불행하고 도저히 복이라고 할 수 없는 캄캄한 시절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개인의 관심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개개인에게 무슨 구원을 약속하신다든지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다 구원을 받고 복을받고 잘된다는 그런 약속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점차 가나안을 점령해서 그 안에서 선민의 역사를 이루고 나중에 예수님이 그 민족 속에 오시는 그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고 다 지옥갈 자식들이 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해서 하나도 좋은 것이 없잖습니까.
교회에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하나이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
지금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약속이 교회에 대해서도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교회에 붙어 있고 그 약속을 귀한 것으로 알면 우리가 그 약속에 함께 참예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무슨 축복을 받고 개인적으로 잘 사는 것을 만일 약속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몸 안에, 성전 안에 약속이 있는 것이지 개인에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에게 따로 약속이 있으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법궤 그 안에 약속이 있는 것이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약속을 믿고 그 안에 함께 참예하지 않고 또 그것을 모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하면 그것은 약속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들림받는데 그것은 교회가 들림 받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교회 안에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론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고 개인에게도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음 안에서 교회가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것이 큰 약속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령이 있지만 개인의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이신 성령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개인이 아니고 하나이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신으로 개인적인 생활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활을 하니까 그것이 롯의 처처럼 되는 것입니다. 롯의 처도 구원을 못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심판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머리 되신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붙어있어야 약속이 있는 것이지 붙어 있지 않으면 약속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강성케 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시 105:24)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은 거기서 애굽 사람들보다 숫자가 많아지고 강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의 핍박과 하나님의 섭리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시 105:25)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교활하게 행한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 대신이 되어 있을 때에는 굉장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는데 요셉이 죽고 또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난 다음에는 마음이 변해 그들을 미워 하고 종으로 삼았습니다. 전부 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물론 바로 왕은 사탄의 그림자이니까 사탄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만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거기에서 구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증인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시 105:26-27)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내 보내지 않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린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으로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그 민족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고난받고 노예생활하고 한 것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교회도 2천여 년 간 항상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모임도 그런 역사 속에 배척을 받아가면서 지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증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고 해서 꼭 겉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그런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회복과 영광의 그림자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시 105:37-38)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을 달라고 하니까 막 주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그 역사는 이 세상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의 그림자입니다.
이사야서 60장을 읽어보면 세계의 재물이 이스라엘로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될 때에 여기에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은금을 가지고 나온 것처럼 열방의 재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는 굉장히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을 말합니다.
약속을 반드시 기억하고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반석을 가르신 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갈이 흘렀으니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105:39-42)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켜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사실을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몇백 년 후에 그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절대로 하나님은 이 교회를 저버린다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성령이 떠난 것 같다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하면서 실망스러워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무시하고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현실적으로 육신적인 안목에서 볼 때에 굉장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가운데서 기어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 거룩한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시 105:43-45)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법을 좇는 선민으로서 살게 해서 온 세상 만방에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낼 때까지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그마한 한 민족이지만 그 민족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구약시대에도 그 이스라엘 한 민족 안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지 다른 민족에게 나타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들이 죄를 톡톡히 지으면 벌을 받지만 그래도 망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기도 하고 이방 사람이 와서 치기도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셨습니다.하여튼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민족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그 민족 속에 탄생하셔서 그 민족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온 세계에 퍼져가도록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오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교회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교회 밖에는 성령이 안 계십니다. 물론 성령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든지 하는 것은 있지만 실지로 역사하는 성령은 교회 안에만 계십니다. 교회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없이 성령 따로 역사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필요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통해서 성령이 나타나시고 성령이 일을 해가십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여러 가지 시련을 거치고 그 말씀이 단련받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더 힘이 있고 더 깨끗한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너무 안일하고 편안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고난 영광의 길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벧전 5:1)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도 장로 된 자인데 고난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안받고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증인입니다. 나중에 그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다 순교했습니다. 이상하게 하나님의 충실한 일꾼들이 다 순교했어요.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 순교자들이 고난의 증인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고난의 증인들을 통해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 자신이 고난을 받아서 이 구원의 복음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전하는 것도 고난을 통해서 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유익하니 고난 받을 때에 즐거워하라 한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편 105편은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경영과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에게 은혜를 나타내신 하나님, 또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을 은혜로 다스리시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역대상 16장8절에서 22절까지가 시편 105편 1절로 16절까지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역대상 16장 1절을 보면 이 시가 쓰여진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05편의 배경-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면서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니라"(대상 16:1)
이 시편 105편 말씀과 역대상 16장 8절부터의 말씀은 다윗 왕이 법궤를 자기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셔간 때에 하나님 앞에 부른 찬송입니다. 그 일이 다윗에게는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이 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의 처소에 모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일로 생각이 되기 때문에 아주 영광스러운 의식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찬송가가 따로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찬송가를 따로 만들어서 부른 것이 아니고 시편에다가 곡을 붙여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매우 신령한 노래입니다. 자기 집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된 것이 다윗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형성되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또 유무상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항상 찬송하며 교제를 나누었고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역사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하신 그 만물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신 것을 노래한 시가 시편 103편이었는데 이 시편 105편은 그 선택한 민족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일을 행하셨는지 노래하고 기억하는 시입니다.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105편의 후반부에도 나옵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냥 우연히 흘러가는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시고 이루어가시는 역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그 언약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곳을 완전히 점령한 것이 아니고 그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이삭 때에도 그렇고 그 다음에 야곱 때에도 가나안 땅에서 이리저리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도 죽고 그 다음에 야곱도 죽고 나중에 4백 년이 지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오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언약을 하시고 식언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신 것은 언젠가는 꼭 이루시는 분임을 이스라엘 민족이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고 교회가 형성되었는데 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있고 핍박이 있고 또 여러 가지 시련이 있습니다. 이 시련 속에 시달리고 어려움을 당하다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신 것 같고 인간의 판단으로서는 버림 받은 것 같은 상황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거나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가나안을 정복해서 그 땅에다가 선민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를 이룩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왜 그때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가나안의 칠족속을 다 무찌르고 그 땅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능력이면 못할 것은 없지만 너무 적은 숫자가 그 땅을 다 관리하고 차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 수가 많아질 때까지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기다리는 기간이 얼마나 되느냐하면 아브라함 때로부터는 한 5백년 가까이 되고 야곱 시대부터는 한 4백년쯤 됩니다.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가서 종노릇하고 살았는데 그동안 굉장히 빨리 사람이 불어나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나오게 될 때에는 장정만 육십만이나 되는 많은 숫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일하시지만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이 일을 못하셔요. 신약시대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꺼번에 구원받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서 교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의 역사를 거쳐서 구원을 조금씩 받아 나중에 구원받은 숫자가 완전히 찰 때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그 다음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집니다.
천년왕국이 가나안 땅이거든요.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의 숫자가 차야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사람의 숫자가 차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는 숫자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결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 숫자가 차야 예수님이 오시고 그 다음에 천년왕국인 가나안 땅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가 형성되는 시련과 훈련의 과정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나그네 생활을 했고 그 땅을 차지해서 살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족속 저 족속에게 가서 붙어 살았습니다. 가령 블레셋 사람 아비멜렉 따위에 붙어 살았습니다. 그 과정이 시련을 받는 과정입니다. 한 민족이 태동될 때 그러한 여러 가지 시련과 훈련을 받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거쳐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교회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을 받고 또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형성되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은 완전한 교회는 아닙니다. 완전한 교회는 아직 될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구원의 숫자가 차고 주님이 오셔야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천년왕국인 가나안 땅에 들어 가서 주님과 교회가 신랑과 신부로서 다스리는 시대가 됩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이 족속에서 저 족속으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늘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서 이방으로 하여금 그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창 21:22-2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직계를 통해서 한 민족을 형성하실 계획이 계셨기 때문에 그 중간에 누구든지 그들을 해쳐 멸망하지 않도록 항상 보호하시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언제 기름 부음 받았다는 상세한 내용은 성경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실 때에 이미 그 약속을 통해서 기름 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해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 해치는 일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은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지만 순교를 했는데 자기 할 사명을 다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해쳐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통해서 보면 육신을 해친다고 해서 해쳐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나 영적 생활이 해쳐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기름 부음이 있어서 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핍박을 받고 또 어떤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전히 신앙생활이 약화되지 않고 조금도 굴복되지 않는 가운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여전히 주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것은 해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해침을 받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런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육신적으로 좀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탄에 의해서 우리가 해쳐진다는 뜻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함을 당하고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우리의 영적 생활이 약화되지 않고 여전히 신앙생활을 지켜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뜻입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세력에 의해서 공격을 받아 우리가 완전히 없어진다든지 그렇게 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라고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시련을 통해서 인도하시는 주님
요셉이 종으로 팔려서 애굽에 간 후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동안 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도 큰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양식 사러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양식이 떨어졌는데 그 결과로 요셉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야곱의 가족이 요셉을 만날 수가 없었습 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에 요셉을 만나서 요셉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가정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양식이 풍부했으면 그 양식을 의지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요셉을 만날 기회가 오질 않습니다. 믿고 사는 양식을 끊어버리니까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의 양식은 요셉이 주관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 때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만일 그들이 먹을 것이 풍성했으면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그것이 진짜로 들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풍성한 양식이 있는데 애굽에 양식이 있으면 뭘해요. 양식이 끊어지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양식을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생활이 너무 편안하고 부유하고 잘 지나면 주님이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이 편안하고 부유하게 넉넉하게 잘 살면 신앙생활 잘 할 것 같지만 육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물질적인 문제뿐만 아니고 여러 가지 시련이 오지 않으면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주님을 찾아 만나야 됩니다.
시련을 통해 체험적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여기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란 말이 처음에 구원받을 때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예수님이 피 흘려 우리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살아가는데 우리가 시련 속에 있을 때에 그 속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예수님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함께 계셔서 그 어려움에서 보호해주시는 예수님을 따로 알아야 됩니 다. 그래서 예수님을 차츰차츰 더 알아가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밤낮 구원받은 것만 아는 생활은 젖먹이 생활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체험 속에서 알아야 됩니다. 체험 속에 안다는 것은 시련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모릅니다. 많은 시험을 거치고 괴로움을 겪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주님이 보호해 주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알면 그 신기한 능력 , 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때에 우리가 이론으로서 받은 것이 아니고 말씀을 경험해서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극복할 때에 주님을 또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 에게 주사" 라고 했잖습니까?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무슨 약속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이 세상은 우리를 자꾸 유혹합니다. 물질적인 욕심이나 쾌락을 좋아하는 마음,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 정욕인데 이 썩어질 것을 피하여 차츰차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우리의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3-17)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하셨고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에 내가 너를 번성케 하리라,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고 또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들이 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아직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없을 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를 하셨어요. 보통 우리 사람들이 맹세하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든지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보다 큰 존재가 없으니까 하나님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번성케 한다 하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받는 데 있어서 굉장히 오래 참았습니다. 물론 중간에 이스마엘도 낳고 여러 가지 과정이 있기는 합니다만 끝까지 참고 견뎌서 이삭을 얻었고 그 다음 아브라함 당대에도 번창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가나안 땅을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여기 보세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약속을 지금 믿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물론 첫째는 영원한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천년 왕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들림을 받을 것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약속이 있어요.
그러나 그 약속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현실 생활 속에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희미한 사람은 현재 이 생활 속에서 찾아오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 유혹에 넘어갑니다.
"피하여 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이 우리를 뒤에서 잡아 당겨 앞으로 못 가게끔 따라옵니다. 이 세상의 물질, 돈, 육신적인 쾌락, 정욕등이 우리를 자꾸 붙잡습니다.
요한일서 2장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 자꾸 뒤에 따라옵니다. 따라오고 따라와서 우리를 잡으려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아주 굳게 잡는 사람은 이 세상을 이기면서 신앙생활을 해갈 수 있고 그 약속을 확실히 못 잡으면은 그냥 이 세상에 잡혀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롯의 처가 되어 버립니다.
시련 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섭리
아까 말씀드린대로 가나안 땅에 흉년이 안들었으면 아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요셉을 만날 길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없으면 예수님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재미나게 잘 사는데 예수님을 더 알려고 할 필요가 있겠어요. 가만히 보면 가난할 때에는 굉장히 열심을 내던 사람이 돈을 조금 버니까 신앙생활이 싹 식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 좀 벌었다고 모임에 안 나오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 다. 돈 없고 가난할 때에는 열심이었는데 조금 돈 벌어가지고 편안하게 사니까 신앙생활을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모르지만 실은 너무도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불탈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림자 요셉
여기서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요셉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그 다음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이 결정적으로 이 요셉 시대에 와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이라는 사람이 형들에게 팔려가는 그것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팔려 고난받는 것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에 의해서 팔렸잖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열둘이 있는데 가룟 유다만 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인물입니다. 전부 다 갈릴리 사람들인데 가룟 유다만 유대 지역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의 대표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유다 지파이신데 예수님이 그 유다 지파에 의해서 팔린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요셉이 옥에 갇힌 것이 예수님의 고난받으신 것의 그림자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몽해 줌으로써 일약 옥에서 나와 총리 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기까지 요셉은 하나님을 철저히 믿는 믿음의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도 전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유
예수님은 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되셨을까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왜 육신 속에 오셔야 되는 이유는 그 말씀이 반드시 육신 안에서 단련을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단련을 받아야 구원의 능력이 있는 말씀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 한 마디면 다 구원하실 수 있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말씀과 사람을 구원하시는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능력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만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은 그냥 능력만은 안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서 육신이 고난을 받아야 됩니다.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풀무불 속에 단련받은 은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의 말씀이 순결한 말씀입니다. 단련을 하면 불순물은 다 제해지고 순결합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9-10)
그러면 예수님이 고난을 안 받으셨으면 온전치 못합니까?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니까 온전하다 하는 것하고 구주로서 온전한 것하고가 다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니까 온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다고 해서 구원의 주로서 온전하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주로서 온전하신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주로 온전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의 몸 안에서 단련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생애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능력의 말씀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의미는 알 수 있습니다만 우리의 생활에서 고난을 통과함으로 우리에게 알아지는 것과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말씀하고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육신의 고난을 통과해서 알아진 이 성경 말씀은 훨씬 더 깨끗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훨씬 더 능력있는 말씀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심으로 그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말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안 받으셨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말씀을 전하는 증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가령 고린도전서 6장이나 고린도후서 1장 등을 죽 보면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의 일꾼인데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고생한 만큼 바울의 말씀은 순전했고 깨끗했고 힘이 있었고 참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련이나 핍박 속에서 어떤 말씀이 알아졌다고 하면 굉장히 힘이 있고 깨끗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림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요셉을 내세워가지고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 고난을 받게 한 것입니다. 형들이 팔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꾼들에게 팔렸고 다시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하지만 그 유혹을 물리쳤기 때문에 오해를 받아서 욕에 갇히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옥에서 나온 것이 부활의 그림자입니다. 그 다음에 요셉은 나중에 총리가 됩니다. 그것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7년 풍년이 들고 7년 흉년이 드는 과정은 환난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맞이해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있을 동안에 이 세상은 큰 환난의 때로 들어섭니다. 요셉의 가족들이 7년 흉년을 면하는 과정은 이러한 일의 그림자입니다. 자기가 그들이 요셉을 만나 요셉이 주는 양식을 먹는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에 있으면서 먹던 양식하고는 다른 양식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는 관점
이 "열방의 통치자"가 애굽의 바로 왕입니다. 바로 왕은 그 시대의 세계 지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70인이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가 그 땅 즉 함 땅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장차 많은 큰 민족을 이루어 나오게 될 때에 하나님의 굉장히 크신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고생한 기간이 무려 400년이나 됩니다. 400년 동안 살아갈 때에 어떤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의 채찍에 맞아죽기도 했습니 다. 개인적으로 보면 그러한 일들이 도대체 축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부터 보면 아들을 낳으면 죽여버리고 딸만 낳으면 살려두었는데 그 중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불행하고 도저히 복이라고 할 수 없는 캄캄한 시절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개인의 관심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개개인에게 무슨 구원을 약속하신다든지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다 구원을 받고 복을받고 잘된다는 그런 약속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점차 가나안을 점령해서 그 안에서 선민의 역사를 이루고 나중에 예수님이 그 민족 속에 오시는 그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고 다 지옥갈 자식들이 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해서 하나도 좋은 것이 없잖습니까.
교회에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약속-하나이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
지금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약속이 교회에 대해서도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교회에 붙어 있고 그 약속을 귀한 것으로 알면 우리가 그 약속에 함께 참예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무슨 축복을 받고 개인적으로 잘 사는 것을 만일 약속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몸 안에, 성전 안에 약속이 있는 것이지 개인에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에게 따로 약속이 있으면 큰일나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법궤 그 안에 약속이 있는 것이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약속을 믿고 그 안에 함께 참예하지 않고 또 그것을 모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하면 그것은 약속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들림받는데 그것은 교회가 들림 받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교회 안에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론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고 개인에게도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 부음 안에서 교회가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것이 큰 약속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령이 있지만 개인의 성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이신 성령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개인이 아니고 하나이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신으로 개인적인 생활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활을 하니까 그것이 롯의 처처럼 되는 것입니다. 롯의 처도 구원을 못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심판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머리 되신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붙어있어야 약속이 있는 것이지 붙어 있지 않으면 약속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강성케 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은 거기서 애굽 사람들보다 숫자가 많아지고 강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굽의 핍박과 하나님의 섭리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교활하게 행한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 대신이 되어 있을 때에는 굉장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는데 요셉이 죽고 또 요셉을 모르는 왕이 난 다음에는 마음이 변해 그들을 미워 하고 종으로 삼았습니다. 전부 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물론 바로 왕은 사탄의 그림자이니까 사탄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만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거기에서 구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증인
바로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내 보내지 않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린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으로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그 민족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고난받고 노예생활하고 한 것은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교회도 2천여 년 간 항상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모임도 그런 역사 속에 배척을 받아가면서 지나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증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고 해서 꼭 겉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그런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회복과 영광의 그림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을 달라고 하니까 막 주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그 역사는 이 세상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의 그림자입니다.
이사야서 60장을 읽어보면 세계의 재물이 이스라엘로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될 때에 여기에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은금을 가지고 나온 것처럼 열방의 재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장차는 굉장히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을 말합니다.
약속을 반드시 기억하고 이루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켜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사실을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몇백 년 후에 그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절대로 하나님은 이 교회를 저버린다거나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성령이 떠난 것 같다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하면서 실망스러워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너무 무시하고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현실적으로 육신적인 안목에서 볼 때에 굉장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가운데서 기어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 거룩한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법을 좇는 선민으로서 살게 해서 온 세상 만방에 하나님이 계심을 나타낼 때까지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그마한 한 민족이지만 그 민족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구약시대에도 그 이스라엘 한 민족 안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지 다른 민족에게 나타나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들이 죄를 톡톡히 지으면 벌을 받지만 그래도 망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기도 하고 이방 사람이 와서 치기도 하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셨습니다.하여튼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민족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그 민족 속에 탄생하셔서 그 민족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온 세계에 퍼져가도록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오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교회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교회 밖에는 성령이 안 계십니다. 물론 성령이 이 세상에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든지 하는 것은 있지만 실지로 역사하는 성령은 교회 안에만 계십니다. 교회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없이 성령 따로 역사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필요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통해서 성령이 나타나시고 성령이 일을 해가십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여러 가지 시련을 거치고 그 말씀이 단련받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더 힘이 있고 더 깨끗한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너무 안일하고 편안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고난 영광의 길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벧전 5:1)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도 장로 된 자인데 고난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안받고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증인입니다. 나중에 그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다 순교했습니다. 이상하게 하나님의 충실한 일꾼들이 다 순교했어요.
바울도 순교했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 순교자들이 고난의 증인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고난의 증인들을 통해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 자신이 고난을 받아서 이 구원의 복음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전하는 것도 고난을 통해서 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유익하니 고난 받을 때에 즐거워하라 한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