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 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을 살랐도다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 자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져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 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저희는 그 행위로 더러워지며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저희를 치리하였도다 저희가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 수하에 복종케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저희가 괴로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낮아 짐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06:1-48)
이 시편 106편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후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곤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충실한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그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합당한 삶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할꼬"(시 106:1-2)
누구든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확실히 알고 체험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사적을 전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잘못된 것은 참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론적으로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전파할 수 있는 증인이 되려면 거기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이 아닌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3-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극히 육신적이고 또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 개인이 은혜와 복을 받고 싶어하는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내리는 은혜에 자기도 함께 참여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구원"은 민족 전체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 받기를 원하는 그 초점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든 간에 나만 좀 더 신령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전부 육신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현재 주님의 몸인 교회에 주님의 백성으로서 행하는 일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형통하고 축복받는 데서만 기쁨을 찾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의 형통함을 보고 기뻐하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의 기자로 말하는 주의 기업은 자기 개인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인데 그것이 오늘날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개인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는 것보다는 교회에 내리는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율 행하였으며 악을 지었나이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106:6-8)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 가에 도착했을 때에 모세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인도했냐고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니까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구원해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역시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 민족 속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금방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평 했던 민족입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0-13)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애굽 사람에게 내렸습니다. 그 재앙을 내릴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사했고 마지막에 장자가 죽는 재앙 속에서도 이스라엘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니까 모세를 원망하며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로 끌어냈느냐고 거역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거나 고난과 위험에 처했을 그때 그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뻗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위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불성실하고 잘못됨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 이름 때문에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시 106:9-11)
그래서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다 빠져 죽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무사히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올라간 것을 여기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경험할 때 우러나는 찬송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 106:12)
여기서 찬송을 불렀다는 것은 출애굽기 15장에 모세의 누이미리암이 북을 치며 모든 백성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아니시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일입니 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안 보이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내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 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백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갈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출 15:1-18)
이 시를 보면 마치 하나님이 손이 있어 그 손으로 일하시는 것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손이 보인다든지 하나님이 보이신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찬송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경험해야 찬송이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찬송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서 어떤 시련을 이기는 그 때가 바로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아무런 소득이 없는 육신의 요구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 106:13-15)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육지 이 건너는 큰 구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어려움이 오니까 그것을 그만 잊어버렸습니 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에 하나님 을 원망했고 또 고기가 먹고 싶을 때 차라리 우리가 애굽 에서 고기 가마 옆에서 고기를 마음껏 먹었으면 좋을 뻔했다고 말하면서 원망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15절에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메추라기를 주셔서 그들은 고기를 마음껏 먹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혼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습니다. 영혼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지만 그들이 욕심대로 부르짖으니까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한 고라당
"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 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을 살랐도다"(시 106:16-18)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1-3)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세운 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세와 아론같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너희들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처신하냐면서 도전을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도전했습니다. 바울이 그 때 강력하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고린도후서의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파가 생기고 베드로파, 아볼로 파 등 여러 패가 생겼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바울이고 바울이 사도 직분을 발휘하여 교회가 세워 진 것인데도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바울의 사도직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자기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아 아니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직을 받았음을 확실히 말한 것이 고린도후서의 중심 내용입니다. 항상 이 교회의 역사에는 언제나 도전자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을 세우십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부터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이런 직분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가끔 누구만 직분을 받은 것이냐 나도 하겠다고 나서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도 여러 번 모임을 도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모세를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분명히 교회가 세워지는 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 있어야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없었으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지 못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일꾼들인데 너만 하느냐 우리도 한다고 하면서 고라 자손이 도전을 했던것입니다.
"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보내었더니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민 16:12-14)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일어나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가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좇았더라 모세가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 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매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을 떠나고 다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 문에 선지라"(민 16:25-27)
그후 고라의 무리들이 완전히 다 멸망해 버리는 내용입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밀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민 16:31-33)
땅이 갈라져서 그들을 삼켜버렸다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이 직접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육신이 완전히 세상에 빠져버린다는 뜻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마음 - 눈에 보이는 육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시 106:19-20)
이것은 출애굽기 32장부터 나오는 사건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40일 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내려오니까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금을 모아 아론에게 맡겨서 금송아지를 만든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계속 인도함을 받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 다. 그것은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안 내려오자 그가 죽어버렸다고 하면 서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보이는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이 뭡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약속과 모든 은혜가 내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2-24)
하나님은 형상으로 섬기면 안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어 섬기면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천주교에서 마리아상을 만들어 그 앞에 복을 받기를 원하는 그것은 큰 죄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육신의 소욕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인데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다니 말이 됩니까? 풀은 너무도 하찮은 존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했잖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나타나는 거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과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영광을 찾습니까? 구원을 받았지만 항상 눈에 보이는 영광을 찾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영광은 육신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지금 읽고 있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끈질기게 붙어 떠나지 않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약속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그 약속은 눈에는 안 보이는 약속입니다. 안 보이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광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만족과 즐거움과 기쁨은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것입니 다. 우리들의 마음이 전부 눈에 보이는 그 영광을 사랑하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 지위나 명예 물질 따위의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그림자 모세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그는 함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일을 행하신 자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시 106:21-23)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하시니까 모세는 대신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도말해달라고 하면서 자기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대변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돌이키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무너져야 깨달을 수 있는 교회의 비밀
"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 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서 흘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시 106:24-27)
이것은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틀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아말렉 인과 가나안 인이 골짜기에 거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민 14:24-25)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데스바네아까지 갔는데 그곳은 가나안 땅 경계입니다. 거기서 12 사람을 택해 정탐하러 보냈는데 10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면서 원망하는 소리를 했습니다.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 그들의 창은 베틀채 같고 우리는 그 사람들과 비교하면 메뚜기 같다, 모세가 우리를 멸망시켜려고 여기에 데려왔다고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시편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저희가 그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낙토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이 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냈는데 그 낙토를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포도송이 한 송이를 두 사람에 매고 올 정도로 아주 비옥한 땅이 었습니다. 그 땅의 아낙 자손을 보고 너무 두려워하여 이렇게 말했지만 갈렙은 "아니다, 저희들은 우리 밥이다. 우리가 가면 틀림없이 차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10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부터 38년 동안 이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고 광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교회가 가나안 땅입니다. 그 다음에 미래로서는 천년 왕국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는 사람은 교회적으로 생각하면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합체라는 정도는 알지만 더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에 대해서 자주 자주 얘기하지만 개인의 육신적인 생각 때문에 교회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무너져야 교회가 무엇인지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말고는 광야에서 다 죽어버리는데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다 무너진 사람만이 교회가 뭔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붙어 있는 한 진정한 교회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죽었다 하는 것이 지금은 우리 육신의 생각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무너져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광야에서 헤매다 다 죽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으로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광야에서 난 사람만 들어가게 됩니다. 가나안은 성령이 계시는 곳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곳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생각만 가진 사람은 이 교회가 가고 있는 일의 참 뜻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복음 19장에 므나를 최소한 은행에 맡기는 생활을 하면 주님께 책망은 안 받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음행하는 마음을 쳐부수는 믿음의 행위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시 106:28-3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1-5)
민수기 23장, 24장에 보면 발락이라는 왕이 발람을 청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는데 막상 발람이 입을 열면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 나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축제 때의 일입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숭배할 때에는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바알 신은 태양신이고 여신 아스다롯은 땅의 신으로 부부 신입니다. 바알은 태양신 으로 빛을 주고 아스다롯은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랑의 신입니다. 이 바알브올도 그런 종류의 신인데 그 제사날에는 큰 축제를 벌이면서 남녀가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축제를 구경하러 가서 유혹을 받아 음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눈에 보이는 행사요 죄였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한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고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에서 살아가는 거기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이것 해봐도 재미 없고 저것 해봐도 재미가 없으니까 자꾸 자꾸 재미나는 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도 은근히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족속들의 우상을 섬기는 축제에 놀러가서 유혹을 받아 음행을 행한 것과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 세상으로 끌려가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런 말씀을 읽어도 그것 뿐이고 실제로 우리 마음이 자꾸 세상으로 끌려가는데 그것이 바알브올에게 속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민 25:6-9)
그래서 바알브올에 속한 자 다 죽이라고 해서 다 죽인 이야기를 이 시편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잔인하신 것 같습니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청년과 이방 여자를 창으로 찔러 죽여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를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 구약의 사건들은 전부 다 영적인 뜻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자기 동족이 이방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을 죽인 것은 자기의 육신을 친다는 뜻입니다. 비느하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혀 죽겠다고 하실 때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는 그 마음은 자기 육신의 생각입니다. 우리도 자기 육신의 생각을 가차없이 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자기 동족을 친 것은 하나님의 의를 도전하는 육신을 쳤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과 음행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칼로 베듯이 쳐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게 된 모세와 아론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 106:32-33)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 20:2-14)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 민족이 마실 물이 없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니까 모세가 홍해를 치던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라고 해서 물이 나와서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는 그곳과 장소가 다른데 또 물이 없어 이스라엘 민족이 원망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로 물을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 앞에 있는 지팡이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를 잡고 반석을 향해서 치라는 말씀은 없고 그냥 말로 물을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화가 나서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두번이나 쳤습니다. 물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그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전부 다 그림자적인 역사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나오는 반석을 치는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 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승천하셔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홍해를 가른 지팡이가 아니고 성소 안에 있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말씀만 전하면 사람들 이 성령을 받습니다. 싹난 지팡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모세가 반석을 칠 필요가 없이 그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반석을 보고 물이 나오라고 하면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은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만 전하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명철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여기에 물을 마시라는 말은 성령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말씀을 깨닫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이 세상에 계시니까 반석을 칠 필요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냥 말씀만 전하면 성령을 받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으면 성령을 언제든지 경험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원받을 때 한번만 받았다고 해서 그걸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성경을 깨달을 때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구원받을 때 받는 성령은 한번이지만 그 이후에는 말씀을 계속 깨닫는 것이 성령을 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에 가나안에 못들어갑니다. 율법적인 생활은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는 생활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생활은 율법에서 해방되어 쉬는 생활입니다.
이방 신을 섬기고 이방인과 동화된 이스라엘 민족
"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율무가 되었도다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저희는 그 행위로 더러워지며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저희를 열방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이 저희를 치리하였도다 저희가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 수하에 복종케 되었도다"(시 106:34-42)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간하지 못하고 불순종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방 사람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어떤 때는 마음에 돌이킬 때도 있지만 또 조금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으로 돌아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다가 어떤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면 또 돌이키곤 합니다. 모임의 역사도 똑같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여호와께서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저희가 꾀로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희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시 106:43-46)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또 이천 년 동안 온세계에 흩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끝에 가서는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민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 약속을 잊어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징계를 받고 시험을 당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때마다 우리는 돌이키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약속을 잊어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약속 때문에 종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역시 우리도 주님이 오시면 완전히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하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06:47-48)
이것은 미래를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지면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넘어지면 또 일으키시고 어떤 때는 징계를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약속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과 약속 때문에 그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지 나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약속을 지키시고 넘어지는 동안에도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편 106편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후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곤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충실한 이스라엘 민족이라도 그들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합당한 삶
누구든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확실히 알고 체험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사적을 전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잘못된 것은 참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론적으로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전파할 수 있는 증인이 되려면 거기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이 아닌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삶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극히 육신적이고 또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 개인이 은혜와 복을 받고 싶어하는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내리는 은혜에 자기도 함께 참여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구원"은 민족 전체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 받기를 원하는 그 초점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든 간에 나만 좀 더 신령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전부 육신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현재 주님의 몸인 교회에 주님의 백성으로서 행하는 일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형통하고 축복받는 데서만 기쁨을 찾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의 형통함을 보고 기뻐하도록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의 기자로 말하는 주의 기업은 자기 개인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인데 그것이 오늘날은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개인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는 것보다는 교회에 내리는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 가에 도착했을 때에 모세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인도했냐고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니까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구원해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역시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 민족 속에 포함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금방 그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평 했던 민족입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0-13)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애굽 사람에게 내렸습니다. 그 재앙을 내릴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사했고 마지막에 장자가 죽는 재앙 속에서도 이스라엘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니까 모세를 원망하며 우리를 죽이려고 여기로 끌어냈느냐고 거역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받거나 고난과 위험에 처했을 그때 그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뻗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위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은 불성실하고 잘못됨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 이름 때문에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군대는 홍해에 다 빠져 죽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무사히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올라간 것을 여기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경험할 때 우러나는 찬송
여기서 찬송을 불렀다는 것은 출애굽기 15장에 모세의 누이미리암이 북을 치며 모든 백성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아니시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일입니 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안 보이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니이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내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 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백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갈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출 15:1-18)
이 시를 보면 마치 하나님이 손이 있어 그 손으로 일하시는 것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손이 보인다든지 하나님이 보이신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찬송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경험해야 찬송이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찬송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서 어떤 시련을 이기는 그 때가 바로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아무런 소득이 없는 육신의 요구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육지 이 건너는 큰 구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어려움이 오니까 그것을 그만 잊어버렸습니 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에 하나님 을 원망했고 또 고기가 먹고 싶을 때 차라리 우리가 애굽 에서 고기 가마 옆에서 고기를 마음껏 먹었으면 좋을 뻔했다고 말하면서 원망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15절에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메추라기를 주셔서 그들은 고기를 마음껏 먹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영혼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습니다. 영혼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지만 그들이 욕심대로 부르짖으니까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도전한 고라당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1-3)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세운 종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세와 아론같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너희들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처신하냐면서 도전을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도전했습니다. 바울이 그 때 강력하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고린도후서의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파가 생기고 베드로파, 아볼로 파 등 여러 패가 생겼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는 바울이고 바울이 사도 직분을 발휘하여 교회가 세워 진 것인데도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바울의 사도직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은 자기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아 아니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직을 받았음을 확실히 말한 것이 고린도후서의 중심 내용입니다. 항상 이 교회의 역사에는 언제나 도전자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을 세우십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부터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이런 직분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가끔 누구만 직분을 받은 것이냐 나도 하겠다고 나서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도 여러 번 모임을 도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모세를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분명히 교회가 세워지는 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 있어야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없었으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지 못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일꾼들인데 너만 하느냐 우리도 한다고 하면서 고라 자손이 도전을 했던것입니다.
"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보내었더니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민 16:12-14)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습니다.
"모세가 일어나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가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좇았더라 모세가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 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매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을 떠나고 다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 문에 선지라"(민 16:25-27)
그후 고라의 무리들이 완전히 다 멸망해 버리는 내용입니다.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밀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민 16:31-33)
땅이 갈라져서 그들을 삼켜버렸다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로 말하면 어떤 사람들이 직접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육신이 완전히 세상에 빠져버린다는 뜻입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마음 - 눈에 보이는 육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
이것은 출애굽기 32장부터 나오는 사건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40일 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내려오니까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금을 모아 아론에게 맡겨서 금송아지를 만든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계속 인도함을 받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 다. 그것은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40일 동안 안 내려오자 그가 죽어버렸다고 하면 서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보이는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이 뭡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약속과 모든 은혜가 내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2-24)
하나님은 형상으로 섬기면 안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어 섬기면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천주교에서 마리아상을 만들어 그 앞에 복을 받기를 원하는 그것은 큰 죄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육신의 소욕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인데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다니 말이 됩니까? 풀은 너무도 하찮은 존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했잖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나타나는 거기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과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은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영광을 찾습니까? 구원을 받았지만 항상 눈에 보이는 영광을 찾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영광은 육신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지금 읽고 있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끈질기게 붙어 떠나지 않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약속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그 약속은 눈에는 안 보이는 약속입니다. 안 보이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신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항상 그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광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만족과 즐거움과 기쁨은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것입니 다. 우리들의 마음이 전부 눈에 보이는 그 영광을 사랑하다 보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 지위나 명예 물질 따위의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그림자 모세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멸해 버리겠다고 하시니까 모세는 대신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도말해달라고 하면서 자기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대변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돌이키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무너져야 깨달을 수 있는 교회의 비밀
이것은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틀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아말렉 인과 가나안 인이 골짜기에 거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민 14:24-25)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데스바네아까지 갔는데 그곳은 가나안 땅 경계입니다. 거기서 12 사람을 택해 정탐하러 보냈는데 10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면서 원망하는 소리를 했습니다.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 그들의 창은 베틀채 같고 우리는 그 사람들과 비교하면 메뚜기 같다, 모세가 우리를 멸망시켜려고 여기에 데려왔다고 불평과 원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시편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저희가 그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낙토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이 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냈는데 그 낙토를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은 포도송이 한 송이를 두 사람에 매고 올 정도로 아주 비옥한 땅이 었습니다. 그 땅의 아낙 자손을 보고 너무 두려워하여 이렇게 말했지만 갈렙은 "아니다, 저희들은 우리 밥이다. 우리가 가면 틀림없이 차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10명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부터 38년 동안 이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고 광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교회가 가나안 땅입니다. 그 다음에 미래로서는 천년 왕국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는 사람은 교회적으로 생각하면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합체라는 정도는 알지만 더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에 대해서 자주 자주 얘기하지만 개인의 육신적인 생각 때문에 교회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무너져야 교회가 무엇인지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말고는 광야에서 다 죽어버리는데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다 무너진 사람만이 교회가 뭔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붙어 있는 한 진정한 교회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죽었다 하는 것이 지금은 우리 육신의 생각이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무너져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광야에서 헤매다 다 죽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으로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광야에서 난 사람만 들어가게 됩니다. 가나안은 성령이 계시는 곳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곳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생각만 가진 사람은 이 교회가 가고 있는 일의 참 뜻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복음 19장에 므나를 최소한 은행에 맡기는 생활을 하면 주님께 책망은 안 받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음행하는 마음을 쳐부수는 믿음의 행위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1-5)
민수기 23장, 24장에 보면 발락이라는 왕이 발람을 청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했는데 막상 발람이 입을 열면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 나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축제 때의 일입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숭배할 때에는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바알 신은 태양신이고 여신 아스다롯은 땅의 신으로 부부 신입니다. 바알은 태양신 으로 빛을 주고 아스다롯은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랑의 신입니다. 이 바알브올도 그런 종류의 신인데 그 제사날에는 큰 축제를 벌이면서 남녀가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축제를 구경하러 가서 유혹을 받아 음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눈에 보이는 행사요 죄였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한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고 놀고 먹고 마시는 것을 보면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에서 살아가는 거기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이것 해봐도 재미 없고 저것 해봐도 재미가 없으니까 자꾸 자꾸 재미나는 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도 은근히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족속들의 우상을 섬기는 축제에 놀러가서 유혹을 받아 음행을 행한 것과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 세상으로 끌려가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이런 말씀을 읽어도 그것 뿐이고 실제로 우리 마음이 자꾸 세상으로 끌려가는데 그것이 바알브올에게 속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민 25:6-9)
그래서 바알브올에 속한 자 다 죽이라고 해서 다 죽인 이야기를 이 시편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잔인하신 것 같습니다.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청년과 이방 여자를 창으로 찔러 죽여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를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 구약의 사건들은 전부 다 영적인 뜻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자기 동족이 이방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을 죽인 것은 자기의 육신을 친다는 뜻입니다. 비느하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혀 죽겠다고 하실 때에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하는 그 마음은 자기 육신의 생각입니다. 우리도 자기 육신의 생각을 가차없이 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자기 동족을 친 것은 하나님의 의를 도전하는 육신을 쳤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과 음행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칼로 베듯이 쳐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입니다.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게 된 모세와 아론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가로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 좋을 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의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 20:2-14)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 민족이 마실 물이 없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니까 모세가 홍해를 치던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라고 해서 물이 나와서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는 그곳과 장소가 다른데 또 물이 없어 이스라엘 민족이 원망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로 물을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 앞에 있는 지팡이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를 잡고 반석을 향해서 치라는 말씀은 없고 그냥 말로 물을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화가 나서 그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두번이나 쳤습니다. 물이 나오기는 나왔지만 그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전부 다 그림자적인 역사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나오는 반석을 치는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 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승천하셔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홍해를 가른 지팡이가 아니고 성소 안에 있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말씀만 전하면 사람들 이 성령을 받습니다. 싹난 지팡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모세가 반석을 칠 필요가 없이 그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반석을 보고 물이 나오라고 하면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은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셔서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만 전하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명철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여기에 물을 마시라는 말은 성령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말씀을 깨닫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이 세상에 계시니까 반석을 칠 필요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냥 말씀만 전하면 성령을 받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으면 성령을 언제든지 경험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구원받을 때 한번만 받았다고 해서 그걸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성경을 깨달을 때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구원받을 때 받는 성령은 한번이지만 그 이후에는 말씀을 계속 깨닫는 것이 성령을 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기 때문에 가나안에 못들어갑니다. 율법적인 생활은 가나안 땅에 못들어가는 생활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생활은 율법에서 해방되어 쉬는 생활입니다.
이방 신을 섬기고 이방인과 동화된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간하지 못하고 불순종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방 사람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에게 동화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어떤 때는 마음에 돌이킬 때도 있지만 또 조금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으로 돌아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다가 어떤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면 또 돌이키곤 합니다. 모임의 역사도 똑같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또 이천 년 동안 온세계에 흩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끝에 가서는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민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 약속을 잊어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징계를 받고 시험을 당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때마다 우리는 돌이키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약속을 잊어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약속 때문에 종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처럼 역시 우리도 주님이 오시면 완전히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미래를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지면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넘어지면 또 일으키시고 어떤 때는 징계를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약속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과 약속 때문에 그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지 나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약속을 지키시고 넘어지는 동안에도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