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소산을 취케 하시며 또 복을 주사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그 가축이 감소치 않게 하실지라도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저희로 감소하여 비굴하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케 하시나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악인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1-43)
이 시편 107편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에 읊은 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사실을 4중으로 읊고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오늘날 교회 역사의 한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시 107:1-3)
이 말씀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뜻도 있고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도 됩니다. 이중 삼중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내용이 깊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기 어렵습니다.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벌 한 벌 벗길수록 그 뜻이 더욱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문제를 풀어주는 말씀도 되고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의 말씀도 되고 또 현재 교회의 역사에 적용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 1절에서 3절까지 보면 분명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다가 나중에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해방령이 내려 고토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시 107:3)
이스라엘 민족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 각 지역에서 모으셨다고 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사 43:5-6)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예언한 말씀으로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만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갔는데 그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방에서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만 이것은 그 때로 보아서 먼 미래 곧 우리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에서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예언도 되는 것입니다.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지금은 러시아입니다만 옛 소련 지역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많이 돌아오고,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또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이디오피아 등지에서도 많이 돌아오는 일들을 예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시대에 와서 온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랑의 생활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4-7)
"저희가 광야 사막에서 방황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에 흩어져서 이방의 지배를 받는 삶이 마치 사막과 같은 생활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과 선민의 땅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을 떠나 정처없이 끌려다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온세상에 흩어져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성 쌓는 역사의 기원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말랐다"고 했는데 이 성에 대해서는 창세기 4장에서 이미 공부한 바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 4:16-17)
이 성 쌓는 역사는 가인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은 것은 그가 동생을 죽인 후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흘린 동생 아벨의 피가 땅에 호소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후 그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벌 주려는 자들이 있다는 위기 의식 때문에 성을 쌓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원수를 막는 의미에서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인에게 "너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언젠가는 자기의 지은 죄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고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는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을 쌓는 역사의 기원입니다.
두 도성-바벨탑과 예루살렘 성
창세기 11장에 가서 보면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바벨탑은 신전으로 그것도 일종의 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불안한 것을 항상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도 성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좋지 않은 성도 있고 좋은 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뭔가 마음에 불안이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 의식을 가질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을 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쌓아야 할 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성은 바로 예루살렘 성입니다.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페르시아 왕을 섬기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페르시아 왕에게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 가서 성을 쌓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 성을 쌓듯이 우리도 이 세상의 힘에 의해서 침범을 당하지 않도록 성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이방 세계와 하나님의 백성의 땅을 구분하여 주는 거룩한 경계선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자기 노력으로 가인처럼 성을 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계를 지어놓고 마음을 닫고 항상 대립하는 성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집을 지어도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담이 별로 없습니다. 개인적인 집을 지어도 담이 없습니다. 도둑놈 단속은 그 집의 문을 잘 잠그는 것이지 담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아주 담을 높이 쌓고 다른 사람이 내 경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담이 있어 각각 작은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마음의 성을 하나 가져야 됩니다.
시온산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시 48:1-3)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시온 산에서 세워진 성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은 큰 왕의 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들도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씀했습니다.
현재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예루살렘 시온산이 있고 거기에 아주 두텁게 쌓여진 성이 있고 돌아가면서 대문이 있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은 영원한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그 성은 다른 곳과 완전히 구별된 장소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성을 잃어버리고 쫓겨나 멀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또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서 안정된 피난처가 없는 상황 속에서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나중에 예루살렘을 다시 복구해서 성을 쌓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지 않았을 때에 우리 마음의 상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마음속에는 뭔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 늘 있습니다. 피난할 수 있는 튼튼한 성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왔고 뭔지 모르지만 든든함이 왔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성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성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신앙을 가졌던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70년 , 또 그 다음에 이천년 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안식처를 얻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지은 책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도 많은 전쟁을 겪으며 항상 불안한 가운데 살아간 모습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받는 비참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또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성경을 믿으며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민족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멸망을 당하는 어려운 지경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알리시는 것이 하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섬기지 않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항상 섬기기 쉬운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이 얻게 되는 영광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6-7)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야 하고 그 은혜에 굶주린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만족한 상태에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환경이 좋고 아무 불편이 없는 상태에 있으면 솔직히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경험하기가 힘듭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아무 문제 없이 평안하게만 지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참 견디기 어려운 많은 문제가 생기고 깊은 고뇌 속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때 가서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기도가 나오고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편안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안 내립니다. 항상 얘기하는 것입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영광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와 역사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8-9)
육신적으로 너무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으면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4)
신앙생활은 우리가 얼마만큼 성령으로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시대이고 예수님 당시는 아들 시대이고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주님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자기 스스로 말하시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행하신 그 모든 일을 알리십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압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도말해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다. 이런 간단한 내용에 대해서는 압니다만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할 부분이 그것 말고도 굉장히 많습니다. 아주 깊고 깊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그 엄청난 그 일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서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그것 알아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문제를 예수님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지금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잘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 풍성함이 예수님 안에 있는데 그것이 교회 안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실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때 교회가 완성이 되어 버립니다. 현재는 주님의 큰 계획 안에서 나타날 일들이 역사적인 과정 속에 꾸며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총동원하여 주님의 교회를 완성시켜 가시는 과정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중에 가서 보면 '아, 만물이 충만한 것이 교회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풍성하고 부요한 사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데 그 성령의 가르침은 그냥은 안됩니다. 값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물론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그 값을 지불한다는 것은 우리 육신의 생각이 부숴지고 중지되는 그 시점에 가서 성령의 은혜가 완전히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이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 육신의 생각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는 자세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시 107:10-14)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였다는 것은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 것은 아담 때부터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겨났고 캄캄한 어두움 속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어떤 고난과 괴로움이 여러분 앞에 닥칠 때에는 자기를 반성해 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멸시한 것은 없는지 혹시 지은 죄가 뭔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물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에 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만 보통 구원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어떤 죄를 지었거나 또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가는 때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찾아가기도 하지만 별로 도움을 못받습니다. 종종 느끼는 일인데 어떤 분들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상담을 의뢰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들어주기는 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성경을 읽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해주면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참으로 깨닫는 것을 방해하기 쉽습니다. 성경 가지고 적당히 맞춰 이야기 해줘버리면 상담받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에게 찾아가서 얘기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적당하게 얼버무려 넘어가 버리는 것은 손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는 당하면 당한 만큼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때에 진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누군가를 붙들고 상담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상담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조금 문제만 생기면 누구를 쫓아가서 얘기하고 너무 쉽게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무슨 문제를 해결해 줍니까? 성경 몇 구절 안다고 해서, 몇 마디 얘기해준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그냥 당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철저히 낮추시는 하나님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흑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26-33)
사람이 높이 올라가려고 하면 먼저 바닥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가야 다시 올라가는 것이지 바닥까지 내려가지도 않고 중간에서 내려가면 그것은 옳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고통과 어떤 시험이 오면 여기 이 말씀대로 주께서 내게 짐을 지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라는 말씀은 철저하게 낮아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애 3:30)
누가 나를 때리거든 실컷 한번 때려보라고 놔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안간힘을 써서 그걸 이겨보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애 3:30)
예수님의 생애가 이와 같았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워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사람들이 침뱉고 조롱하고 그 원수들이 수욕으로 배부를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애 3:31)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닥까지 내려가야 됩니다. 그걸 사람들이 못견뎌 자기 방법대로 적당히 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흘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
주님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당하며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러한 일이 있어야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시 107:13-14)
그런 연후에야 그 얽은 줄을 끊어버리고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치료되는 영혼의 상처와 고통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고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5-20)
미련한 자는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고 했는데 심지어 이것은 육신적으로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우리 영적 생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죽어버리면 성경 말씀을 들어도 아무 감각이 없고 마음 상태가 기진맥진합니다. 신령한 양식을 먹을 수 있는 힘이 다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특히 성적인 죄를 지은 사람은 회복이 잘 안됩니다. 고린도서에도 말했지만 다른 죄는 다 몸 밖에 있는 죄지만 성적인 죄는 몸 안에 있는 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잘 안됩니다. 물론 절대로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신 굉장한 고통이 지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적인 죄를 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돌아다니는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들어보았자 한 마디도 마음에 안 들어옵니다. 그러한 죄에 자포자기합니다. 나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포기하고 맙니다. 다른 물질적인 죄는 물질을 갚는 것이 자백을 하는 뜻이 되고 처리가 될 수 있지만 성적인 죄는 그렇게 처리가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깊은 회개와 고통이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죄도 정말 어떤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면 마음 상태가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 죄를 짓고 평생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이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에 뉘우침이 있고 주님께 간구하면 구원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말씀이 와서 마음을 치료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병자가 나았고 사도들 당시에는 안수해서 병이 나았습니다만 지금은 말씀을 깨달을 때에 치료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진정한 감사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시 107:21-22)
정말 그러한 경험이 있을 때에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늘 함께하시는 주님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시 107:23-27)
이것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민물 바다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배가 조그마한 노젓는 배이니까 파도가 조금만 쳐도 굉장히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언젠가 250명쯤 타는 배를 타고 울릉도를 갔다 오는데 11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4시간 쯤 걸리는 빠른 배가 있지만 그때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 떠나서 한 2시간쯤 오니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데 파도 높이가 4미터나 되었습니다. 일등칸에 탔는데도 누워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약간만 움직이면 속에서 뭔가 올라오려고 해요. 파도가 배 위를 완전히 덮고 높이 섰다가 떨어질 때는 꽝 하는데 비상벨이 울리고 야단났습니다.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이 50년만에 처음이라고 해요. 그 때에 제 마음속에는 나 혼자 탄 것이 아니고 우리 형제들도 10여 명 탔는데 설마 중간에 파손하랴는 든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말 신앙이 없었으면 정말 혼날 뻔했습니다. 배 안에서 통곡이 터져 나오는데 막 야단났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번 했어요.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이 주무실 때에 사람들이 노저어 가다가 풍랑이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모든 자연법칙을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시니까 바다 물결이 일어난다고 했잖습니까?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시 107:26)
배가 풍랑이 닥쳐 올라갈 때는 둥그렇게 뜹니다. 그 다음에 풍랑이 내려가 물이 양 쪽에 벽처럼 이렇게 섭니다.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시 107:26-27)
지각이 혼돈한다는 말은 정신을 못 차린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지중해를 거쳐서 로마까지 갈 때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천년 동안의 교회 역사가 바울이 배를 타고 가는 여행처럼 항상 파도에 시달림을 받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을 상징하는데 또 교회를 상징하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해 가는데 한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이 배가 파도에 시달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바다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있는데 그 바다가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넓은 물결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교회라는 배를 탔습니다. 굉장히 큰 풍랑이 일고 하늘에 올라갔다가 깊이 빠지는 것처럼 어떤 때는 정말 빠져죽는 줄 생각하는 그런 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주님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퉁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8-30)
소원의 항구가 어디겠어요? 우리 찬송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지요. 예수님이 배를 타시고 주무시는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빠져 죽는가 싶어서 걱정을 했는데 예수님이 나중에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일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지바보들 같습니다. 그래 예수님이 그 배를 타셨는데 아무리 풍랑이 심한들 빠져죽을까봐 걱정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도 하시고 병자도 살리시고 죽은 자도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 예수님이 거기에 타셨는데도 빠져죽을까 걱정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전이요 성령이 계시는 곳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망할까봐 걱정을 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모임을 떠나버린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이 교회가 망할까 걱정하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우리는 우리가 소원하는 그 항구까지 갑니다. 이 파도치는 세상을 거쳐서 틀림없이 우리가 바라던 항구에까지 도착합니다. 그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불신앙-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을 못믿는 것
우리의 생활은 그런 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항상 얘기합니다만 구원받은 사람의 불신앙은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을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교회라면 모르지만 진짜 교회라면 틀림없이 머리가 주님이십니다. 진정으로 우리 모임이 구원받은 역사가 있고 성도의 교제가 있고 성령의 교제가 있다면 분명히 머리되신 주님도 함께 계시는데 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현실적으로 구원은 받기는 받았는데 현재 믿음이 없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성령을 못믿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틀림없이 소원의 항구까지 주님이 우리들을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세상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합니다. 여러가지 핍박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고 걱정하고 괴로워하지만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를 소원의 항구까지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기이한 일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시 107:31-32)
장차 이 큰 찬송을 부를 날이 올 것입니다만 지금도 우리는 믿음 안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33절부터 43절까지는 별도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소산을 취케 하시며 또 복을 주사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그 가축이 감소치 않게 하실지라도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저희로 감소하여 비굴하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케 하시나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악인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33-43)
여기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아담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죽 살펴봅시다. 한때는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다 허망한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다. 옥토를 사막같이 변하게 하시는 것도, 사막을 옥토로 만드시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거기를 떠나버리고 난 다음에는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땅이 지금은 다시 옥토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옥토를 사막으로 만드시기도 하고 사막을 옥토로 만드시기도 하는 일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줄 사람들을 모릅니다. 원하시는 계획대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는 절대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백성편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부 다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자연적인 조건도 그렇고 영적인 조건도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 107편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건져주신다는 이야기를 4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지 우리를 버리시려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확실히 배울 수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보고 깨닫는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 107편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에 읊은 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사실을 4중으로 읊고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오늘날 교회 역사의 한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
이 말씀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뜻도 있고 과거 역사에 대한 기록도 됩니다. 이중 삼중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내용이 깊기 때문에 우리가 다 알기 어렵습니다.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벌 한 벌 벗길수록 그 뜻이 더욱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문제를 풀어주는 말씀도 되고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의 말씀도 되고 또 현재 교회의 역사에 적용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 1절에서 3절까지 보면 분명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다가 나중에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해방령이 내려 고토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 각 지역에서 모으셨다고 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사 43:5-6)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예언한 말씀으로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만 끌려간 것이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갔는데 그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사방에서 돌아올 것을 말합니다만 이것은 그 때로 보아서 먼 미래 곧 우리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에서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예언도 되는 것입니다.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지금은 러시아입니다만 옛 소련 지역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많이 돌아오고,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또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이디오피아 등지에서도 많이 돌아오는 일들을 예언한 말씀인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시대에 와서 온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랑의 생활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4-7)
"저희가 광야 사막에서 방황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에 흩어져서 이방의 지배를 받는 삶이 마치 사막과 같은 생활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과 선민의 땅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곳을 떠나 정처없이 끌려다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온세상에 흩어져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성 쌓는 역사의 기원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말랐다"고 했는데 이 성에 대해서는 창세기 4장에서 이미 공부한 바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창 4:16-17)
이 성 쌓는 역사는 가인에게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은 것은 그가 동생을 죽인 후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흘린 동생 아벨의 피가 땅에 호소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후 그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벌 주려는 자들이 있다는 위기 의식 때문에 성을 쌓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원수를 막는 의미에서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인에게 "너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언젠가는 자기의 지은 죄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고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는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을 쌓는 역사의 기원입니다.
두 도성-바벨탑과 예루살렘 성
창세기 11장에 가서 보면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바벨탑은 신전으로 그것도 일종의 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불안한 것을 항상 지키기 위해서 성을 쌓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도 성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좋지 않은 성도 있고 좋은 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뭔가 마음에 불안이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 의식을 가질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을 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쌓아야 할 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성은 바로 예루살렘 성입니다.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페르시아 왕을 섬기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페르시아 왕에게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에 가서 성을 쌓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 성을 쌓듯이 우리도 이 세상의 힘에 의해서 침범을 당하지 않도록 성을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이방 세계와 하나님의 백성의 땅을 구분하여 주는 거룩한 경계선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자기 노력으로 가인처럼 성을 쌓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계를 지어놓고 마음을 닫고 항상 대립하는 성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집을 지어도 담을 쌓고 살아갑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담이 별로 없습니다. 개인적인 집을 지어도 담이 없습니다. 도둑놈 단속은 그 집의 문을 잘 잠그는 것이지 담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아주 담을 높이 쌓고 다른 사람이 내 경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담이 있어 각각 작은 성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마음의 성을 하나 가져야 됩니다.
시온산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시온 산에서 세워진 성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은 큰 왕의 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들도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말씀했습니다.
현재도 이스라엘에 가보면 예루살렘 시온산이 있고 거기에 아주 두텁게 쌓여진 성이 있고 돌아가면서 대문이 있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은 영원한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그 성은 다른 곳과 완전히 구별된 장소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성을 잃어버리고 쫓겨나 멀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고 또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서 안정된 피난처가 없는 상황 속에서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나중에 예루살렘을 다시 복구해서 성을 쌓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지 않았을 때에 우리 마음의 상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마음속에는 뭔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 늘 있습니다. 피난할 수 있는 튼튼한 성 안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왔고 뭔지 모르지만 든든함이 왔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의 성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성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신앙을 가졌던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70년 , 또 그 다음에 이천년 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 안식처를 얻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지은 책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에 살면서도 많은 전쟁을 겪으며 항상 불안한 가운데 살아간 모습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받는 비참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또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성경을 믿으며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민족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멸망을 당하는 어려운 지경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알리시는 것이 하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섬기지 않고 무서운 하나님으로 항상 섬기기 쉬운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이 얻게 되는 영광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시 107:6-7)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야 하고 그 은혜에 굶주린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만족한 상태에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환경이 좋고 아무 불편이 없는 상태에 있으면 솔직히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경험하기가 힘듭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아무 문제 없이 평안하게만 지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은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참 견디기 어려운 많은 문제가 생기고 깊은 고뇌 속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때 가서 진정으로 주님을 향한 기도가 나오고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저 편안한 사람에게는 절대로 안 내립니다. 항상 얘기하는 것입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영광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와 역사
육신적으로 너무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으면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4)
신앙생활은 우리가 얼마만큼 성령으로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시대이고 예수님 당시는 아들 시대이고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은 주님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자기 스스로 말하시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행하신 그 모든 일을 알리십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압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도말해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다. 이런 간단한 내용에 대해서는 압니다만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할 부분이 그것 말고도 굉장히 많습니다. 아주 깊고 깊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그 엄청난 그 일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서만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그것 알아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문제를 예수님 안에서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으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지금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잘 채워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 풍성함이 예수님 안에 있는데 그것이 교회 안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실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때 교회가 완성이 되어 버립니다. 현재는 주님의 큰 계획 안에서 나타날 일들이 역사적인 과정 속에 꾸며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이 모든 우주 만물을 총동원하여 주님의 교회를 완성시켜 가시는 과정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중에 가서 보면 '아, 만물이 충만한 것이 교회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풍성하고 부요한 사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데 그 성령의 가르침은 그냥은 안됩니다. 값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물론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그 값을 지불한다는 것은 우리 육신의 생각이 부숴지고 중지되는 그 시점에 가서 성령의 은혜가 완전히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이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 육신의 생각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는 자세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였다는 것은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 것은 아담 때부터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겨났고 캄캄한 어두움 속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어떤 고난과 괴로움이 여러분 앞에 닥칠 때에는 자기를 반성해 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멸시한 것은 없는지 혹시 지은 죄가 뭔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물론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에 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만 보통 구원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어떤 죄를 지었거나 또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가는 때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찾아가기도 하지만 별로 도움을 못받습니다. 종종 느끼는 일인데 어떤 분들이 어떤 문제가 생기면 상담을 의뢰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들어주기는 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성경을 읽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해주면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참으로 깨닫는 것을 방해하기 쉽습니다. 성경 가지고 적당히 맞춰 이야기 해줘버리면 상담받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누군가에게 찾아가서 얘기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적당하게 얼버무려 넘어가 버리는 것은 손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는 당하면 당한 만큼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때에 진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누군가를 붙들고 상담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상담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조금 문제만 생기면 누구를 쫓아가서 얘기하고 너무 쉽게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무슨 문제를 해결해 줍니까? 성경 몇 구절 안다고 해서, 몇 마디 얘기해준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그냥 당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철저히 낮추시는 하나님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흑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 3:26-33)
사람이 높이 올라가려고 하면 먼저 바닥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가야 다시 올라가는 것이지 바닥까지 내려가지도 않고 중간에서 내려가면 그것은 옳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고통과 어떤 시험이 오면 여기 이 말씀대로 주께서 내게 짐을 지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라는 말씀은 철저하게 낮아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애 3:30)
누가 나를 때리거든 실컷 한번 때려보라고 놔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해 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안간힘을 써서 그걸 이겨보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애 3:30)
예수님의 생애가 이와 같았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워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사람들이 침뱉고 조롱하고 그 원수들이 수욕으로 배부를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애 3:31)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닥까지 내려가야 됩니다. 그걸 사람들이 못견뎌 자기 방법대로 적당히 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흘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2-33)
주님께서 우리 구원받은 사람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당하며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러한 일이 있어야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그 얽은 줄을 끊어버리고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치료되는 영혼의 상처와 고통
미련한 자는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고 했는데 심지어 이것은 육신적으로 죽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우리 영적 생활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죽어버리면 성경 말씀을 들어도 아무 감각이 없고 마음 상태가 기진맥진합니다. 신령한 양식을 먹을 수 있는 힘이 다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특히 성적인 죄를 지은 사람은 회복이 잘 안됩니다. 고린도서에도 말했지만 다른 죄는 다 몸 밖에 있는 죄지만 성적인 죄는 몸 안에 있는 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잘 안됩니다. 물론 절대로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신 굉장한 고통이 지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회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적인 죄를 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돌아다니는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들어보았자 한 마디도 마음에 안 들어옵니다. 그러한 죄에 자포자기합니다. 나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포기하고 맙니다. 다른 물질적인 죄는 물질을 갚는 것이 자백을 하는 뜻이 되고 처리가 될 수 있지만 성적인 죄는 그렇게 처리가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깊은 회개와 고통이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죄도 정말 어떤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면 마음 상태가 회복이 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그 죄를 짓고 평생을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이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에 뉘우침이 있고 주님께 간구하면 구원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말씀이 와서 마음을 치료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병자가 나았고 사도들 당시에는 안수해서 병이 나았습니다만 지금은 말씀을 깨달을 때에 치료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진정한 감사
정말 그러한 경험이 있을 때에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늘 함께하시는 주님
이것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민물 바다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배가 조그마한 노젓는 배이니까 파도가 조금만 쳐도 굉장히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언젠가 250명쯤 타는 배를 타고 울릉도를 갔다 오는데 11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은 4시간 쯤 걸리는 빠른 배가 있지만 그때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 떠나서 한 2시간쯤 오니 풍랑이 일기 시작하는데 파도 높이가 4미터나 되었습니다. 일등칸에 탔는데도 누워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약간만 움직이면 속에서 뭔가 올라오려고 해요. 파도가 배 위를 완전히 덮고 높이 섰다가 떨어질 때는 꽝 하는데 비상벨이 울리고 야단났습니다.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이 50년만에 처음이라고 해요. 그 때에 제 마음속에는 나 혼자 탄 것이 아니고 우리 형제들도 10여 명 탔는데 설마 중간에 파손하랴는 든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말 신앙이 없었으면 정말 혼날 뻔했습니다. 배 안에서 통곡이 터져 나오는데 막 야단났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번 했어요.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이 주무실 때에 사람들이 노저어 가다가 풍랑이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것은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모든 자연법칙을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시니까 바다 물결이 일어난다고 했잖습니까?
배가 풍랑이 닥쳐 올라갈 때는 둥그렇게 뜹니다. 그 다음에 풍랑이 내려가 물이 양 쪽에 벽처럼 이렇게 섭니다.
지각이 혼돈한다는 말은 정신을 못 차린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이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지중해를 거쳐서 로마까지 갈 때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천년 동안의 교회 역사가 바울이 배를 타고 가는 여행처럼 항상 파도에 시달림을 받는 일의 그림자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을 상징하는데 또 교회를 상징하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해 가는데 한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이 배가 파도에 시달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바다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있는데 그 바다가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넓은 물결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교회라는 배를 탔습니다. 굉장히 큰 풍랑이 일고 하늘에 올라갔다가 깊이 빠지는 것처럼 어떤 때는 정말 빠져죽는 줄 생각하는 그런 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주님
소원의 항구가 어디겠어요? 우리 찬송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지요. 예수님이 배를 타시고 주무시는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빠져 죽는가 싶어서 걱정을 했는데 예수님이 나중에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일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지바보들 같습니다. 그래 예수님이 그 배를 타셨는데 아무리 풍랑이 심한들 빠져죽을까봐 걱정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도 하시고 병자도 살리시고 죽은 자도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런 예수님이 거기에 타셨는데도 빠져죽을까 걱정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전이요 성령이 계시는 곳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망할까봐 걱정을 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모임을 떠나버린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이 교회가 망할까 걱정하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우리는 우리가 소원하는 그 항구까지 갑니다. 이 파도치는 세상을 거쳐서 틀림없이 우리가 바라던 항구에까지 도착합니다. 그것은 불을 보듯 환한 일입니다.
불신앙-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을 못믿는 것
우리의 생활은 그런 것을 보지는 못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항상 얘기합니다만 구원받은 사람의 불신앙은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을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 교회라면 모르지만 진짜 교회라면 틀림없이 머리가 주님이십니다. 진정으로 우리 모임이 구원받은 역사가 있고 성도의 교제가 있고 성령의 교제가 있다면 분명히 머리되신 주님도 함께 계시는데 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현실적으로 구원은 받기는 받았는데 현재 믿음이 없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성령을 못믿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틀림없이 소원의 항구까지 주님이 우리들을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세상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합니다. 여러가지 핍박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고 걱정하고 괴로워하지만 결국 주님께서는 우리를 소원의 항구까지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기이한 일을 찬송하라
장차 이 큰 찬송을 부를 날이 올 것입니다만 지금도 우리는 믿음 안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33절부터 43절까지는 별도의 말씀입니다.
여기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아담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죽 살펴봅시다. 한때는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다 허망한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다. 옥토를 사막같이 변하게 하시는 것도, 사막을 옥토로 만드시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거기를 떠나버리고 난 다음에는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땅이 지금은 다시 옥토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옥토를 사막으로 만드시기도 하고 사막을 옥토로 만드시기도 하는 일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줄 사람들을 모릅니다. 원하시는 계획대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우리는 절대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백성편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부 다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자연적인 조건도 그렇고 영적인 조건도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 107편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건져주신다는 이야기를 4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지 우리를 버리시려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확실히 배울 수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보고 깨닫는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