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 108:1-13)
시편 57편 60편이 합쳐져 이루어진 108편
이 시편 108편은 시편 57편과 60편에 있는 말씀을 합쳐 다시금 읊은 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다음에 옛날에 다윗이 읊었던 시를 다시 한번 노래한 내용입니다.
시편 57편 7—11절의 역사적 배경 -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지은 시
시편 108편 1절부터 5절까지는 시편 57편에 있는 말씀으로 표현은 약간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틀 찬송하리이다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7-11)
이 시편 57편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굴에 숨었을 때에 다윗을 잡으려고 찾아다니다가 굴 어구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은 후에 사울 왕이 그 굴 어구에서 나가서 갈 때에 다윗의 신하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 옷자락을 잘랐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은 후에 사울 왕이 그 굴 어구에서 나가서 갈 때에 다윗이 뒤에서 사울 왕을 부르면서 "내가 무슨 허물이 있길래 나를 잡으려고 왔소. 그 옷자락을 보시오. 내가 죽이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소.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를 해칠 수 없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소."라고 고백하자 사울 왕이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헤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때 읊은 시가 이 57편의 내용입니다. 57편 처음부터 그런 내용이지만 특히 7절 11절까지의 내용이 108편에 다시 옮겨져 읊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자기 생명이 위태로운 어려움을 당했지만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기름 부음을 받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자기에게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사울에게 쫓기고 어려움을 당해도 결코 자신이 쓰러지지 않는다는 확실한 믿음을 기초로 이 시를 읊은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 다윗을 지켜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니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이 시를 읊은 것은 환난 속에서도 다윗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큰 환난에 처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행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읊은 시가 바로 그들 자신들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때를 기다린 다윗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시 108:1)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옷자락만 자르고 내보낸 것은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일찍이 소년 때에 기름 부음을 받아서 왕이 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약속 받았지만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때를 주시고 기회가 올 때에 되는 것이지 자기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통 우리들 같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내 힘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 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고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그것이 믿음의 생활이지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난관에 부딪혀도 걱정하고 염려하며 자기 노력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태도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생활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이 되게 하신다는 믿음을 확실히 가졌지만 자기 힘으로 왕의 지위를 얻으려 하는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네가 내게 절하면 이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겠다."는 말로 시험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넘겨진 세상인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다시 찾고 왕노릇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가 보내신 뜻을 실천하고 다음에 언젠가 재림하실 때에 왕노릇을 하시는 것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 예수님이 거쳐야 할 십자가와 고난의 길이 있고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한 고난과 시련의 과정
다윗의 생애는 이 예수님의 생애의 그림자입니다. 다윗도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지만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거지고 시련을 통과하는 훈련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함께 왕노릇할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만 그냥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난과 시련을 거쳐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는 것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하는 영광인데 그러한 영광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험을 참는 믿음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여기서 왜 "죽었으면"이라는 말을 했는가 하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옛 사람이 실제로 죽었기 때문에 확실히 자기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사는 부활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못 참으면 함께 왕 노릇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환난이나 시험을 참는 것이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참는 그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다윗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참는 생활을 못하니까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누가 미우면 욕설을 퍼붓고 앙갚음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확실히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꾹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삶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108:1-2)
우리 마음이 캄캄한 때가 언제입니까? 시험과 어려움과 고난을 받는 때가 밤중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의지할 데가 없어 굴 속에 깊이 숨어 있을 그때는 정말 캄캄하고 밤중 같은 시기였습니다.
다윗이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라고 한 말은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어릴 때 목자로 있으면서 들에서 수금을 타면서 노래를 잘 부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수금을 타는 그 자체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세계가 태양이 떠오르는 밝은 아침으로 변하듯이 그 마음의 상태가 환해지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험의 캄캄한 밤에도 수금을 타고 비파를 울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1-2)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죄악 세상에는 풀무불 같은 환난이 덮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믿음이 있으면 전혀 앞이 안 보이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마음에 밝은 빛이 비취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심령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시 108:3-4)
다윗이 직면한 현실은 참으로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다윗이 마음속에 확실한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놀라운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온 세상을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미리 예언적으로 내다봤습니다. 우리가 믿음 없이 비관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슬픈 죄악 세상이고 암담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가 이 세상에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예수님이 칠십 인을 전도 여행을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둘 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갔는데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으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권세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실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사탄에게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하나님의 시각이니까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그 권세를 잃은 것을 미리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사탄이 꽉 차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것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니 이 죄악 세상이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이 이 우주에 가득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성령으로 보았습니다. 자기가 악한 왕 사울에게 비록 쫓겨다니는 신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앞에 있는 일시적인 시련과 어려움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축복이 꽉 차 있다는 것을 보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노래로 승화된 다윗의 노래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시 108:4)
이 세상에 온통 거짓과 죄악과 폭력으로 꽉 찬 세상이라도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육신적으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나 염려스러운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온 세계에 가득찬 것을 그만 놓쳐버리고 못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온 우주에 가득찬 것을 보고 만민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찬송가도 우리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 지어놓은 찬송가를 우리가 부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다윗이 지어놓은 시를 다시 부른 것이 여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투영하는 다윗의 역정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시 108:5)
십자가가 우리 인간이 볼 때에는 땅에서 약간 높이 달린 것뿐이지만 사실 그 십자가는 온 세계 위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래입니다. 그 십자가 그늘 밑에 다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당한 어려움과 시련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믿음으로 이렇듯 자신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시편 60편 5-12절의 역사적 배경 - 이스라엘의 교만을 징계하시는 하나님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시 60:5-12)
이 시편 60편의 내용이 시편 108편 6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다윗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읊은 시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중이 되었기 때문에 그 시를 다시 그들의 시로서 읊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저 북쪽에 가서 다메섹을 쳐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때 저 사해동쪽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 주력부대가 없는 틈을 타 이스라엘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요압 장군은 북쪽 다메섹에 가서 크게 승리를 했기 때문에 아주 기세 당당하여 자기들이 전쟁을 잘해 이긴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먹고 그까짓 에돔쯤은 문제없다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가서 전쟁하다가 여지없이 패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일부러 낮추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의 심정을 다윗이 시로 읊은 것입니다. 그 후에 다시 에돔 사람을 죽이고 완전히 승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시편 60편 5절부터 12절의 내용을 시로 읊었는데 그 시가 이 시편 108편에 그대로 옮겨져 있습니다.
시편 60편은 그 제목이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익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그 역사적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시 108:6-7)
"내가 뛰놀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너무 기뻐서 춤을 추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장수 요압은 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압이 북쪽 아람을 쳐서 승리한 후 그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한 마음을 먹고 에돔에 갔을 때는 하나님께서 묵묵부답하시고 이스라엘을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큰 전쟁이든 작은 전쟁이든 자기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리고 성을 법궤를 메고 일곱바퀴를 돌 때에 그 성이 무너집니다.
그 다음에 아이성을 칠 때는 조그만한 성인데도 여지없이 패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셔야지 아무리 작은 적이라고 해도 해서 자기 힘으로 이기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승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가 뭘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꾀를 가지고 뭘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아주 약은 꾀를 부려 이렇게 저렇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꾀를 아무리 잘 부려보았자 일시적으로는 통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안 통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들은 꾀를 부린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의 지식이나 노력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그 주님의 이기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항상 승리했는데 믿음으로 싸웠지 자기 힘으로 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다윗도 한 번 큰 벌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숫자가 많은 것을 의지하려고 했을 때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던 일이 있습니다(역대상21장).
신앙생활은 우리 주위 환경이 만족할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믿음이 생길 때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안 생기는 사람이 있고 더욱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때 이제는 자기 힘으로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겠다는 마음 상태로 돌아갔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겸손해지고 낮아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춤을 추듯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회개하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겸손한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응답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이 말씀은 세겜과 숙곳 지역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소유로 완전히 확보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세겜은 옛날에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섬기게 하여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대가 나누어지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겜은 이스라엘 민족의 것으로 척량됩니다.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흘이며"(시 108:8)
길르앗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르단강 건너편에 있었는데 항상 원수들의 침범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 지역을 에브라임을 앞세워 확보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실지로 그 예언의 말씀대로 됩니다. 북쪽에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인인 요단강 건너편이 항상 침범당하는 것을 에브라임이 나서서 다시 찾는 일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나의 홀" 이라고 했는데 유다에게 왕권이 있다는 뜻입니다. 홀은 왕이 가진 것입니다.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시 108:9)
모압이 목욕통이란 말은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승리를 해서 목욕탕에서 발과 온 몸을 씻고 편안히 쉬는 것처럼 쉰다는 뜻입니 다.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며"
옛날에는 샌달 같은 것을 신고 전쟁터에 나갔는데 이제 그 신들메를 풀어버리고 완전히 쉬게 된다는 뜻입니다.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모암과 에돔 이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항상 괴롭히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이 옛날 블레셋인데 그 블레셋을 점령하고 승리의 개가를 그 지역에서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완전히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서 돌아올 당시는 캄캄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다윗이 읊은 시를 자기들 마음에 떠올리면서 하나님은 은혜가 크고 신실해서 절대로 변치 않으시고 말씀대로 시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57편과 60편에 있는 일부분의 내용을 합쳐 시편 108편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을 헛됨이니이다"(시 108:10-12)
이것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사람의 구원은 헛것이니 하나님이 원수를 이기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하 요압 장군이 교만한 마음을 먹고 에돔을 치다가 실패했지만 다윗은 책임자인 그 나라의 왕으로서 아주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바란다는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부르짖음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신 분이셨으니까 할만하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그 기도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님 운명하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 경지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나 십자가의 부르짖음을 마치 연극배우가 연극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런 기도와 간구를 안하셔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것이나 그밖의 여러 가지 행적들이 얼핏보면 꼭 연극 같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모르는 신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잘 모릅니다. 왜 예수님이 그런 고통을 당하셨는지 온전히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의미는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과 실지로 예수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려지는 그 순간은 보통 순간이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순간이 예수님께는 아주 캄캄한 순간이니까 그 순간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짖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지옥갈 때 부르짖어야 됩니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사람이 아직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지는 순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제 영원히 버려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려지시는 것이 우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믿음의 힘
예수님이 당하신 그 심각한 고통과 괴로움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굉장히 신비롭고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도 예수님이 지신 그 자취를 밟아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지기 싫고 예수님 가시는 그 발자취를 따라가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올 때마다 실망하고 낙담하고 곁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견딥니다. 믿음은 바로 성령의 힘을 끌어 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믿을 때에 주님이 능력을 힘입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빼앗아 개에게 주겠느냐"고 하실 때에 그 여인이 "옳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생겼을 때에 주님의 능력이 거기에 와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성령의 힘을 끌어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와 믿음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이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2-13)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히 행한 것이 다윗이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계속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었던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어떻고 저떻고 이론적으로 이길 수는 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5-7)
여기 보면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어떤 다툼이 생겼는데 이것을 모임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법정으로 끌고가는 사건이 나옵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 안 받은 사람과 문제가 생겼으면 법정으로 가야 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 때 법정으로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법정이 그것을 해결해 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끼리 문제가 생겼으면 법정으로 가지 말고 모임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서로 송사하는 그 자체가 벌써 허물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속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내가 속고 손해를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나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손해 보는 일에 참는 거기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용기입니다. 밑지는 것 같지만 밑지는 것이 아니고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참 분하고 억울하겠지만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진정한 용기와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시편 57편 60편이 합쳐져 이루어진 108편
이 시편 108편은 시편 57편과 60편에 있는 말씀을 합쳐 다시금 읊은 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다음에 옛날에 다윗이 읊었던 시를 다시 한번 노래한 내용입니다.
시편 57편 7—11절의 역사적 배경 -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에 지은 시
시편 108편 1절부터 5절까지는 시편 57편에 있는 말씀으로 표현은 약간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똑같습니다.
이 시편 57편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굴에 숨었을 때에 다윗을 잡으려고 찾아다니다가 굴 어구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은 후에 사울 왕이 그 굴 어구에서 나가서 갈 때에 다윗의 신하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그 옷자락을 잘랐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은 후에 사울 왕이 그 굴 어구에서 나가서 갈 때에 다윗이 뒤에서 사울 왕을 부르면서 "내가 무슨 허물이 있길래 나를 잡으려고 왔소. 그 옷자락을 보시오. 내가 죽이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소.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를 해칠 수 없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소."라고 고백하자 사울 왕이 내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헤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 때 읊은 시가 이 57편의 내용입니다. 57편 처음부터 그런 내용이지만 특히 7절 11절까지의 내용이 108편에 다시 옮겨져 읊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자기 생명이 위태로운 어려움을 당했지만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기름 부음을 받았고 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자기에게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사울에게 쫓기고 어려움을 당해도 결코 자신이 쓰러지지 않는다는 확실한 믿음을 기초로 이 시를 읊은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 다윗을 지켜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리니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이 시를 읊은 것은 환난 속에서도 다윗을 지켜주셨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큰 환난에 처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행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읊은 시가 바로 그들 자신들의 노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때를 기다린 다윗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옷자락만 자르고 내보낸 것은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일찍이 소년 때에 기름 부음을 받아서 왕이 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약속 받았지만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때를 주시고 기회가 올 때에 되는 것이지 자기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통 우리들 같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내 힘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 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고 때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그것이 믿음의 생활이지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난관에 부딪혀도 걱정하고 염려하며 자기 노력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태도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생활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왕이 되게 하신다는 믿음을 확실히 가졌지만 자기 힘으로 왕의 지위를 얻으려 하는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네가 내게 절하면 이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겠다."는 말로 시험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넘겨진 세상인데 예수님은 이 세상을 다시 찾고 왕노릇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가 보내신 뜻을 실천하고 다음에 언젠가 재림하실 때에 왕노릇을 하시는 것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 예수님이 거쳐야 할 십자가와 고난의 길이 있고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영광을 얻기 위한 고난과 시련의 과정
다윗의 생애는 이 예수님의 생애의 그림자입니다. 다윗도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지만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거지고 시련을 통과하는 훈련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함께 왕노릇할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만 그냥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난과 시련을 거쳐야 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는 것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노릇 하는 영광인데 그러한 영광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험을 참는 믿음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여기서 왜 "죽었으면"이라는 말을 했는가 하면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옛 사람이 실제로 죽었기 때문에 확실히 자기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사는 부활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반대로 읽으면 못 참으면 함께 왕 노릇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환난이나 시험을 참는 것이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참는 그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다윗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참는 생활을 못하니까 화가 날 때는 화를 내고 누가 미우면 욕설을 퍼붓고 앙갚음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확실히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꾹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삶
우리 마음이 캄캄한 때가 언제입니까? 시험과 어려움과 고난을 받는 때가 밤중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 의지할 데가 없어 굴 속에 깊이 숨어 있을 그때는 정말 캄캄하고 밤중 같은 시기였습니다.
다윗이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라고 한 말은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어릴 때 목자로 있으면서 들에서 수금을 타면서 노래를 잘 부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수금을 타는 그 자체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세계가 태양이 떠오르는 밝은 아침으로 변하듯이 그 마음의 상태가 환해지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험의 캄캄한 밤에도 수금을 타고 비파를 울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1-2)
앞으로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죄악 세상에는 풀무불 같은 환난이 덮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믿음이 있으면 전혀 앞이 안 보이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마음에 밝은 빛이 비취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심령
다윗이 직면한 현실은 참으로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다윗이 마음속에 확실한 믿음이 없었으면 이런 놀라운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온 세상을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하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미리 예언적으로 내다봤습니다. 우리가 믿음 없이 비관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슬픈 죄악 세상이고 암담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가 이 세상에 충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20)
예수님이 칠십 인을 전도 여행을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둘 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갔는데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으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권세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실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사탄에게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은 하나님의 시각이니까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그 권세를 잃은 것을 미리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사탄이 꽉 차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것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니 이 죄악 세상이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이 이 우주에 가득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성령으로 보았습니다. 자기가 악한 왕 사울에게 비록 쫓겨다니는 신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눈앞에 있는 일시적인 시련과 어려움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축복이 꽉 차 있다는 것을 보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노래로 승화된 다윗의 노래
이 세상에 온통 거짓과 죄악과 폭력으로 꽉 찬 세상이라도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이 세상에 꽉 차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육신적으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육신적으로는 어려운 일이나 염려스러운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온 세계에 가득찬 것을 그만 놓쳐버리고 못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온 우주에 가득찬 것을 보고 만민 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찬송가도 우리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 지어놓은 찬송가를 우리가 부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다윗이 지어놓은 시를 다시 부른 것이 여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투영하는 다윗의 역정
십자가가 우리 인간이 볼 때에는 땅에서 약간 높이 달린 것뿐이지만 사실 그 십자가는 온 세계 위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래입니다. 그 십자가 그늘 밑에 다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당한 어려움과 시련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믿음으로 이렇듯 자신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시편 60편 5-12절의 역사적 배경 - 이스라엘의 교만을 징계하시는 하나님
이 시편 60편의 내용이 시편 108편 6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다윗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읊은 시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중이 되었기 때문에 그 시를 다시 그들의 시로서 읊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저 북쪽에 가서 다메섹을 쳐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때 저 사해동쪽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 주력부대가 없는 틈을 타 이스라엘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요압 장군은 북쪽 다메섹에 가서 크게 승리를 했기 때문에 아주 기세 당당하여 자기들이 전쟁을 잘해 이긴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먹고 그까짓 에돔쯤은 문제없다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가서 전쟁하다가 여지없이 패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일부러 낮추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의 심정을 다윗이 시로 읊은 것입니다. 그 후에 다시 에돔 사람을 죽이고 완전히 승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시편 60편 5절부터 12절의 내용을 시로 읊었는데 그 시가 이 시편 108편에 그대로 옮겨져 있습니다.
시편 60편은 그 제목이 "다윗이 교훈하기 위하여 지은 익담, 영장으로 수산에둣에 맞춘 노래,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염곡에서 쳐서 일만 이천 인을 죽인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그 역사적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리의 비결
"내가 뛰놀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너무 기뻐서 춤을 추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장수 요압은 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압이 북쪽 아람을 쳐서 승리한 후 그 승리에 도취되어 교만한 마음을 먹고 에돔에 갔을 때는 하나님께서 묵묵부답하시고 이스라엘을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큰 전쟁이든 작은 전쟁이든 자기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리고 성을 법궤를 메고 일곱바퀴를 돌 때에 그 성이 무너집니다.
그 다음에 아이성을 칠 때는 조그만한 성인데도 여지없이 패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셔야지 아무리 작은 적이라고 해도 해서 자기 힘으로 이기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승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가 뭘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꾀를 가지고 뭘 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아주 약은 꾀를 부려 이렇게 저렇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꾀를 아무리 잘 부려보았자 일시적으로는 통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안 통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들은 꾀를 부린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의 지식이나 노력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신 그 주님의 이기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항상 승리했는데 믿음으로 싸웠지 자기 힘으로 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다윗도 한 번 큰 벌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숫자가 많은 것을 의지하려고 했을 때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던 일이 있습니다(역대상21장).
신앙생활은 우리 주위 환경이 만족할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믿음이 생길 때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안 생기는 사람이 있고 더욱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때 이제는 자기 힘으로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하겠다는 마음 상태로 돌아갔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겸손해지고 낮아져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춤을 추듯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회개하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겸손한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응답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이 말씀은 세겜과 숙곳 지역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소유로 완전히 확보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세겜은 옛날에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섬기게 하여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대가 나누어지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겜은 이스라엘 민족의 것으로 척량됩니다.
길르앗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르단강 건너편에 있었는데 항상 원수들의 침범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 지역을 에브라임을 앞세워 확보하겠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실지로 그 예언의 말씀대로 됩니다. 북쪽에 에브라임이 이스라엘인인 요단강 건너편이 항상 침범당하는 것을 에브라임이 나서서 다시 찾는 일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나의 홀" 이라고 했는데 유다에게 왕권이 있다는 뜻입니다. 홀은 왕이 가진 것입니다.
모압이 목욕통이란 말은 이스라엘이 모압에게 승리를 해서 목욕탕에서 발과 온 몸을 씻고 편안히 쉬는 것처럼 쉰다는 뜻입니 다.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며"
옛날에는 샌달 같은 것을 신고 전쟁터에 나갔는데 이제 그 신들메를 풀어버리고 완전히 쉬게 된다는 뜻입니다.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모암과 에돔 이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항상 괴롭히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이 옛날 블레셋인데 그 블레셋을 점령하고 승리의 개가를 그 지역에서 부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완전히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서 돌아올 당시는 캄캄하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다윗이 읊은 시를 자기들 마음에 떠올리면서 하나님은 은혜가 크고 신실해서 절대로 변치 않으시고 말씀대로 시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57편과 60편에 있는 일부분의 내용을 합쳐 시편 108편을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
이것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사람의 구원은 헛것이니 하나님이 원수를 이기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부하 요압 장군이 교만한 마음을 먹고 에돔을 치다가 실패했지만 다윗은 책임자인 그 나라의 왕으로서 아주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바란다는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부르짖음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신 분이셨으니까 할만하시거든 내게서 이 잔을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그 기도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님 운명하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 경지를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나 십자가의 부르짖음을 마치 연극배우가 연극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런 기도와 간구를 안하셔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것이나 그밖의 여러 가지 행적들이 얼핏보면 꼭 연극 같습니다. 거기에 우리가 모르는 신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잘 모릅니다. 왜 예수님이 그런 고통을 당하셨는지 온전히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의미는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다는 것과 실지로 예수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려지는 그 순간은 보통 순간이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순간이 예수님께는 아주 캄캄한 순간이니까 그 순간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짖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지옥갈 때 부르짖어야 됩니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그 순간에 말입니다. 사람이 아직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지는 순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제 영원히 버려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려지시는 것이 우리를 대신한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믿음의 힘
예수님이 당하신 그 심각한 고통과 괴로움에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굉장히 신비롭고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도 예수님이 지신 그 자취를 밟아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지기 싫고 예수님 가시는 그 발자취를 따라가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올 때마다 실망하고 낙담하고 곁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견딥니다. 믿음은 바로 성령의 힘을 끌어 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믿을 때에 주님이 능력을 힘입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빼앗아 개에게 주겠느냐"고 하실 때에 그 여인이 "옳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생겼을 때에 주님의 능력이 거기에 와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 성령의 힘을 끌어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와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히 행한 것이 다윗이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계속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자기 손으로 죽일 수 있었던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어떻고 저떻고 이론적으로 이길 수는 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5-7)
여기 보면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어떤 다툼이 생겼는데 이것을 모임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법정으로 끌고가는 사건이 나옵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 안 받은 사람과 문제가 생겼으면 법정으로 가야 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 때 법정으로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법정이 그것을 해결해 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끼리 문제가 생겼으면 법정으로 가지 말고 모임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서로 송사하는 그 자체가 벌써 허물입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속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내가 속고 손해를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나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손해 보는 일에 참는 거기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용기입니다. 밑지는 것 같지만 밑지는 것이 아니고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참 분하고 억울하겠지만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진정한 용기와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