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그 년수를 단촉게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 먹게 하소서 고리 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 저주가 그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같이 불려가오며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저희의 훼방 거리라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나의 대적으로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1-31)
이 시편 109편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라고 했습니다. 역사적 배경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다윗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읊은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내시는 동안 악인들에게서 받는 핍박과 고난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내용이 예언적으로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원수들이 멸망하기를 기도하는 내용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혀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독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시 109:1-3)
다윗은 측근들과 심지어 자기 아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사울의 목장장으로 있었던 도엑은 다윗과 잘 아는 사이 였는데 나중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밀고를 하고 다윗을 공격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다윗을 반역했는데 그때 다윗 왕의 총애를 받던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했고 시므이라는 사람은 다윗을 저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라고 한 것은 다윗에게 불리한 말과 욕을 한 것을 말합니다.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시 64:3)
말 속에는 독이 있고 칼과 같이 사람을 해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국 다윗이 평소에 사랑했던 사람들이 돌아서서 거짓말을 하고 다윗을 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고 사탄의 말인 것입니다. 본래 인류는 그 말 속에 있는 독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이브를 꾀인 뱀의 말 속에 독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마귀는 거짓말로 처음부터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오늘날도 이 말의 힘이 있어 말을 잘못하면 독이 나옵니다. 말 속에는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주는 독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책 잡고 반박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 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1-6)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혀 속에 사탄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 저런 말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영이 구원을 받긴 받았지만 육신은 아직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에 사탄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영은 구원을 받아서 성령이 함께하시지만 우리 육신에는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생각을 사탄이 조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서로가 말을 하면서 교제를 가지며 살아가는데 이 혀를 잘못 쓰면 사람을 해치고 모임을 해치는 독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은 평생을 완전히 망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온전히 바로잡고 말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신 주님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4)
마태복음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다윗이 '나는 기도할 뿐이라' 고 한 말은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내 욕을 하고 나에게 잘못했을 때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직접 속상한 것을 풀어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시 109:5)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 여러 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사울 왕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갈 때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티끌을 날리자 다윗의 신하가 내게 명령을 내리면 당장 가서 목을 베어 오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나를 저주하시는지 아느냐고 했습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어진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세상에 계실 때에 그처럼 살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는 기도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시 109:6)
다윗은 자기가 원수를 갚지 않고 기도할 뿐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6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이 원수가 망하기를 기도했으니 다윗이 원수를 미워하여 원수를 갚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가룟 유다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고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다고 했고 또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시지만 사탄을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망하기를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기도인 것입니다.
죄로 변하는 가증스러운 기도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시 109:7)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불의하고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가 죄로 변한 것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하나님이 아무 기도나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로 변하는 가증하고 더럽고 악한 기도가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도들이 있지만 실지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습니다. 다윗의 주변에서 다윗을 괴롭히던 사람들도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만 그러한 기도가 실제로는 죄로 변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
그 다음 8절은 분명히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년수를 단촉게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시 109:8)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기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 1:20)
이 가룟 유다는 목메어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가 죽은 후 베드로가 그 대신에 사도의 직분을 맡을 사람을 하나 뽑자고 할 때에 시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첫번째 말씀은 시편 69편 25절이고 두번째는 시편 109편 8절입니다. 이 시편 109편 8절 말씀은 다윗의 기도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먼 훗날에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 년수를 단촉게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 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시 109:8-15)
아마 가룟 유다도 아내와 자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자녀가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
15절까지의 내용은 다윗을 대항하고 해치려던 사람들을 향해서 한 말입니다. 실지로 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하면 마귀들의 후손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세례 요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후손들을 향해서 저주하는 내용의 말씀인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예수님이 보통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에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막 23:34)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도 완전히 버려진 저주의 사람들은 별도로 취급하셨습니다. 주님의 시각에서 보면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미 사탄에게 잡혀 있고 사탄의 이용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뱀의 후손들입니다. 버려진 인간들이고 저주받을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무분별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귀를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의인을 핍박하는 무리들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시 109:16)
그 때에 다윗은 쫓겨 다니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수백명이었지만 거처가 없었고 어떤 때는 배가 고파서 제사장에게 가서 진설병을 얻어 먹기까지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고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려 했다는 내용입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는 자들의 말로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 109:17)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1-40)
예수님께서 장차 온 세상을 양과 염소로 갈라놓고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는 영원한 복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는 이유가 뭐냐하면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이 없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고아원 사업을 한다든지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말씀을 읽으면 자선사업이나 고아원 사업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천 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 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은 항상 핍박을 받고 때로는 옥에 갇히고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옥에 갇히는 사람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비밀리에 도와주었습니다. 옛날 카다콤의 순교자 시대에 로마의 땅굴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양식을 구해다 대주며 열심히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분명히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서로가 사랑하고 돕기 위해서 받은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지옥 가지 않고 천당가기 위해서 받았다고 하지만 주님이 보실 때에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한 새 몸을 이루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도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완전히 마귀의 조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날은 형식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 정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새 계명을 지키는 생활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와 가깝고 친한 사람은 사랑하는데 그것은 육신적인 사랑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47)
친하고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통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은 도와줄 줄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처럼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고 성도들이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력이 너무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 은근하게 우러나는 그런 일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저주하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마침내 스스로가 완전히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됩니다.
저주의 옷과 의의 옷-율법주의와 복음
"저주가 그 입는 옷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시 109:19)
저주가 옷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여기 보면 구원의 옷이 있고 또 의의 겉옷이 있습니다. 계시록 19장에 보면 신부의 옷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에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해 무화과 나무 옷을 입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 옷은 종교와 율법이라는 옷입니다. "그 저주가 입는 옷 같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고 저주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 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13)
'저주의 옷을 입는다' 는 것은 율법주의 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저주가 그 입는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율법주의는 저주의 옷을 입는 것이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옷이잖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습니다. 병 고치신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병자가 병을 앓고 있으니 안식일에도 참된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병을 고쳐버리면 그 병자가 안식일에 참된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뜻은 모르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한다고 흠을 잡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의 진정한 뜻은 알지 못하고 율법의 문자만 가지고 따집니다. 참 안식을 모르는 그 상태가 얼마나 저주스럽습니까? 그래서 일일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헐뜯지 않았습니까? 정말 저주가 그 옷을 입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시 109:20)
영혼을 대적해서 악담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근거한 신앙생활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시 109:21)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하는 이것은 복음입니다. 율법주의 아래는 저주가 있지만 복음 안에서 선대하시고 건져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5-12)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하니까 그가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문중이 다 모여 두 사도를 재판했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의 대표자들을 향해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한 것이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의 다른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준 일이 없다고 정정당당하게 얘기 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에 속한 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엄청나게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 율법주의자들은 저주의 옷을 입었지만 우리들은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주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고, 율법 밑에 사는 신앙생활은 항상 전전긍긍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선한 거기에 근거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난과 예수님에 대한 예언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갈고 또 메뚜기같이 불려가오며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나는 또 저희의 훼방 거리라 저희가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시 109:22-25)
이 말씀은 다윗의 고난 받는 과정을 표현한 것인 동시에 예수님의 삶을 예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마치 메뚜기와 같은 생활을 하셨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2-34)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이 광경을 한번 보십시오. 바로 앞의 시편에 있는 말씀과 똑같지 않습니까?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에 앉아 지키더라" (마 27:35)
예수님의 이 모습을 다윗이 예언적인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의 영광스러운 면만 예수님의 그림자가 아니고 비참한 면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철저하게 배척을 받으시고 욕을 잡수시고 핍박을 받으시던 그대로를 완전히 재현했습니다.
다윗은 나중에 완전히 가나안 땅을 정복한 승리자가 되었지만 그에 앞서 왕이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는 오랜기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다윗은 쫓겨다니면서 핍박을 받고 철저하게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선지자들의 삶을 통과한 예언의 말씀
구약의 말씀을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예언한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들이 생활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예언한 사실들이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 바 될 것임이니라" (사 8:1-4)
이사야가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게 될 때에 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그냥 말로만 예언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장차 아들을 낳을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고 해서 그냥 말로만 예언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직접으로 경험할 일을 연관하여 장차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예언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일종의 예언인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데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실지로 우리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이루어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있으면 훨씬 더 예언의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성경을 들고 설교하는 사람들만 아니고 평신도들의 생활 속에도 있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굉장한 어려움이 함께 따릅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을 이겼을 때 그것이 힘찬 간증과 증거로 나타납니다. 우리 모임에서도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자기가 경험한 일을 힘 있게 간증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부활-주님의 완전하신 승리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시 109:26-27)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9-33)
다윗은 예수님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라고 한 말씀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는 말씀은 시편 27절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라는 말씀과 연관됩니다. 주님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셔서 부활 승천하신 이것을 온 세계 만방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주님이 완전히 승리하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신 그 말씀대로 최후의 승리를 하셨습니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저희는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시 109:28)
'저희' 는 다윗에게 있어서는 그 당시의 원수지만 예수님께는 사탄입니다. 이 구절은 완전히 주님이 승리 한다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와 그 세력들의 멸망-수치의 겉옷
"나의 대적으로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하소서" (시 109:29)
여기에 "겉옷같이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 겉옷은 교회의 옷입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계 17:1-4)
이 음녀가 뭡니까? 사탄의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타락을 해서 적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세계 평화, 사회 구원 운동을 기독교가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 세계를 통치할 준비입니다. 영적인 신앙생활이 뭔지 모르고 영혼의 구원 같은 것은 생각도 안합니다. 이 사회가 구원을 받아야 된다면서 공산주의와 비슷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 구원 운동은 적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운동입니다. 이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을 가로채는 운동을 벌입니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계 17:16)
나중에 이 적그리스도가 음녀로 표현된 거짓된 종교 집단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벌거벗게 하고 불로 사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갈고 많은 물 소리도 갈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6-8)
주님의 진정한 신부 되는 준비는 세마포를 입는 것입니다.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여기에 겉옷이 예복입니다. 속에는 구원의 옷을 입고 그 다음에 겉에는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신부가 입을 옷,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의 세계는 거꾸로 자기의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짓된 운동이 다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최후 승리와 구원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무리 중에서 찬송하리니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사탄은 사람의 영혼을 정죄하고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궁핍한 자 즉 구원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그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사탄의 계획을 다 물리치시고 구원하실 것을 분명히 압니다. 거짓 교회가 적그리스도와 짝해 진리를 대항하지만 결국은 주님이 완전히 승리하신다는 내용의 예언적인 시입니다.
이 시편 109편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라고 했습니다. 역사적 배경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다윗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읊은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지내시는 동안 악인들에게서 받는 핍박과 고난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내용이 예언적으로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원수들이 멸망하기를 기도하는 내용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혀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의 독
다윗은 측근들과 심지어 자기 아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사울의 목장장으로 있었던 도엑은 다윗과 잘 아는 사이 였는데 나중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에 밀고를 하고 다윗을 공격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다윗을 반역했는데 그때 다윗 왕의 총애를 받던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했고 시므이라는 사람은 다윗을 저주한 일이 있었습니다.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라고 한 것은 다윗에게 불리한 말과 욕을 한 것을 말합니다.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 속에는 독이 있고 칼과 같이 사람을 해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국 다윗이 평소에 사랑했던 사람들이 돌아서서 거짓말을 하고 다윗을 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고 사탄의 말인 것입니다. 본래 인류는 그 말 속에 있는 독 때문에 타락했습니다. 이브를 꾀인 뱀의 말 속에 독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마귀는 거짓말로 처음부터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오늘날도 이 말의 힘이 있어 말을 잘못하면 독이 나옵니다. 말 속에는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주는 독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책 잡고 반박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 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1-6)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혀 속에 사탄의 독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 저런 말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영이 구원을 받긴 받았지만 육신은 아직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에 사탄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영은 구원을 받아서 성령이 함께하시지만 우리 육신에는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생각을 사탄이 조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서로가 말을 하면서 교제를 가지며 살아가는데 이 혀를 잘못 쓰면 사람을 해치고 모임을 해치는 독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은 평생을 완전히 망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온전히 바로잡고 말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신 주님
마태복음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다윗이 '나는 기도할 뿐이라' 고 한 말은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내 욕을 하고 나에게 잘못했을 때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직접 속상한 것을 풀어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니면서 여러 번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사울 왕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갈 때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티끌을 날리자 다윗의 신하가 내게 명령을 내리면 당장 가서 목을 베어 오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나를 저주하시는지 아느냐고 했습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어진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세상에 계실 때에 그처럼 살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하는 기도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시 109:6)
다윗은 자기가 원수를 갚지 않고 기도할 뿐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6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이 원수가 망하기를 기도했으니 다윗이 원수를 미워하여 원수를 갚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가룟 유다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고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사탄이 예수님을 팔 생각을 넣었다고 했고 또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시지만 사탄을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망하기를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기도인 것입니다.
죄로 변하는 가증스러운 기도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불의하고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가 죄로 변한 것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하나님이 아무 기도나 다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로 변하는 가증하고 더럽고 악한 기도가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도들이 있지만 실지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런 기도였습니다. 다윗의 주변에서 다윗을 괴롭히던 사람들도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만 그러한 기도가 실제로는 죄로 변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
그 다음 8절은 분명히 가룟 유다에 대한 예언입니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기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행 1:20)
이 가룟 유다는 목메어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가 죽은 후 베드로가 그 대신에 사도의 직분을 맡을 사람을 하나 뽑자고 할 때에 시편에 있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첫번째 말씀은 시편 69편 25절이고 두번째는 시편 109편 8절입니다. 이 시편 109편 8절 말씀은 다윗의 기도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먼 훗날에 되어질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아마 가룟 유다도 아내와 자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자녀가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
15절까지의 내용은 다윗을 대항하고 해치려던 사람들을 향해서 한 말입니다. 실지로 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하면 마귀들의 후손들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세례 요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후손들을 향해서 저주하는 내용의 말씀인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예수님이 보통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에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막 23:34)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도 완전히 버려진 저주의 사람들은 별도로 취급하셨습니다. 주님의 시각에서 보면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미 사탄에게 잡혀 있고 사탄의 이용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뱀의 후손들입니다. 버려진 인간들이고 저주받을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무분별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귀를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의인을 핍박하는 무리들
그 때에 다윗은 쫓겨 다니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수백명이었지만 거처가 없었고 어떤 때는 배가 고파서 제사장에게 가서 진설병을 얻어 먹기까지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고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려 했다는 내용입니다.
마귀의 조종을 받는 자들의 말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 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1-40)
예수님께서 장차 온 세상을 양과 염소로 갈라놓고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는 영원한 복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는 이유가 뭐냐하면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이 없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고아원 사업을 한다든지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말씀을 읽으면 자선사업이나 고아원 사업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천 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 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은 항상 핍박을 받고 때로는 옥에 갇히고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옥에 갇히는 사람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비밀리에 도와주었습니다. 옛날 카다콤의 순교자 시대에 로마의 땅굴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양식을 구해다 대주며 열심히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분명히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매우 인색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서로가 사랑하고 돕기 위해서 받은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지옥 가지 않고 천당가기 위해서 받았다고 하지만 주님이 보실 때에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한 새 몸을 이루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도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완전히 마귀의 조종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날은 형식적인 신자를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 정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새 계명을 지키는 생활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와 가깝고 친한 사람은 사랑하는데 그것은 육신적인 사랑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47)
친하고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통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은 도와줄 줄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처럼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고 성도들이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력이 너무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 은근하게 우러나는 그런 일을 우리는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저주하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마침내 스스로가 완전히 저주를 받아 망하게 됩니다.
저주의 옷과 의의 옷-율법주의와 복음
저주가 옷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여기 보면 구원의 옷이 있고 또 의의 겉옷이 있습니다. 계시록 19장에 보면 신부의 옷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에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해 무화과 나무 옷을 입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 옷은 종교와 율법이라는 옷입니다. "그 저주가 입는 옷 같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율법이 사람을 죽이고 저주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 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0-13)
'저주의 옷을 입는다' 는 것은 율법주의 적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저주가 그 입는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율법주의는 저주의 옷을 입는 것이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옷이잖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습니다. 병 고치신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병자가 병을 앓고 있으니 안식일에도 참된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병을 고쳐버리면 그 병자가 안식일에 참된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뜻은 모르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한다고 흠을 잡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의 진정한 뜻은 알지 못하고 율법의 문자만 가지고 따집니다. 참 안식을 모르는 그 상태가 얼마나 저주스럽습니까? 그래서 일일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헐뜯지 않았습니까? 정말 저주가 그 옷을 입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는 대적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시 109:20)
영혼을 대적해서 악담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에 근거한 신앙생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하는 이것은 복음입니다. 율법주의 아래는 저주가 있지만 복음 안에서 선대하시고 건져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5-12)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하니까 그가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문중이 다 모여 두 사도를 재판했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의 대표자들을 향해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한 것이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의 다른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준 일이 없다고 정정당당하게 얘기 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에 속한 자가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엄청나게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 율법주의자들은 저주의 옷을 입었지만 우리들은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은 사랑과 은혜와 자비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주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고, 율법 밑에 사는 신앙생활은 항상 전전긍긍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선한 거기에 근거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고난과 예수님에 대한 예언
이 말씀은 다윗의 고난 받는 과정을 표현한 것인 동시에 예수님의 삶을 예언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마치 메뚜기와 같은 생활을 하셨습니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2-34)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이 광경을 한번 보십시오. 바로 앞의 시편에 있는 말씀과 똑같지 않습니까?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에 앉아 지키더라" (마 27:35)
예수님의 이 모습을 다윗이 예언적인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의 영광스러운 면만 예수님의 그림자가 아니고 비참한 면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철저하게 배척을 받으시고 욕을 잡수시고 핍박을 받으시던 그대로를 완전히 재현했습니다.
다윗은 나중에 완전히 가나안 땅을 정복한 승리자가 되었지만 그에 앞서 왕이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는 오랜기간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다윗은 쫓겨다니면서 핍박을 받고 철저하게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선지자들의 삶을 통과한 예언의 말씀
구약의 말씀을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예언한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들이 생활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예언한 사실들이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 바 될 것임이니라" (사 8:1-4)
이사야가 북쪽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게 될 때에 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그냥 말로만 예언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장차 아들을 낳을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고 해서 그냥 말로만 예언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직접으로 경험할 일을 연관하여 장차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예언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일종의 예언인데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데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실지로 우리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이루어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있으면 훨씬 더 예언의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성경을 들고 설교하는 사람들만 아니고 평신도들의 생활 속에도 있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굉장한 어려움이 함께 따릅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을 이겼을 때 그것이 힘찬 간증과 증거로 나타납니다. 우리 모임에서도 많은 형제 자매들이 자기가 경험한 일을 힘 있게 간증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부활-주님의 완전하신 승리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9-33)
다윗은 예수님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라고 한 말씀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는 말씀은 시편 27절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라는 말씀과 연관됩니다. 주님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부활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셔서 부활 승천하신 이것을 온 세계 만방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주님이 완전히 승리하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신 그 말씀대로 최후의 승리를 하셨습니다.
'저희' 는 다윗에게 있어서는 그 당시의 원수지만 예수님께는 사탄입니다. 이 구절은 완전히 주님이 승리 한다는 뜻입니다.
적그리스도와 그 세력들의 멸망-수치의 겉옷
여기에 "겉옷같이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 겉옷은 교회의 옷입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계 17:1-4)
이 음녀가 뭡니까? 사탄의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타락을 해서 적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세계 평화, 사회 구원 운동을 기독교가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 세계를 통치할 준비입니다. 영적인 신앙생활이 뭔지 모르고 영혼의 구원 같은 것은 생각도 안합니다. 이 사회가 구원을 받아야 된다면서 공산주의와 비슷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 구원 운동은 적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운동입니다. 이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통치할 것을 가로채는 운동을 벌입니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계 17:16)
나중에 이 적그리스도가 음녀로 표현된 거짓된 종교 집단을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벌거벗게 하고 불로 사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갈고 많은 물 소리도 갈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6-8)
주님의 진정한 신부 되는 준비는 세마포를 입는 것입니다.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여기에 겉옷이 예복입니다. 속에는 구원의 옷을 입고 그 다음에 겉에는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신부가 입을 옷,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의 세계는 거꾸로 자기의 수치를 겉옷같이 입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짓된 운동이 다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최후 승리와 구원
사탄은 사람의 영혼을 정죄하고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궁핍한 자 즉 구원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그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사탄의 계획을 다 물리치시고 구원하실 것을 분명히 압니다. 거짓 교회가 적그리스도와 짝해 진리를 대항하지만 결국은 주님이 완전히 승리하신다는 내용의 예언적인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