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시 111:1-10)
이 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을 때에 읊은 것으로 '부활' 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직한 자들의 회와 공회-교회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1:1)
'정직한 자' 는 현재로 말하자면 구원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 2:11-13)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룩하게 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정직한 것이 없어진 세상입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기 때문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 세상은 완전히 부정직한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고 불신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정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 7:29 )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죄 때문에 더럽혀져 있는데 그 생각으로 꾀를 부리는 것입니다. 꾀 부리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도 인간의 생각과 꾀를 부리는 것을 악하게 여기십니다. 인간의 생각과 꾀는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정직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의 회'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는데 구속받은 이스라엘 민족,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데 진정한 감사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합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여호와의 크신 행사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시 111:2)
여호와의 행사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이 하나님의 행사인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키신 것도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사 교회가 이루어지고 오랜 세월 동안 교회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교회 속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제가「새길」에서 어떤 형제의 신앙 간증을 읽었습니다. 그 형제는 구원받기 전에는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었는데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변하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주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어떤 역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구원받은 것을 그리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육신의 생활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행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
여러분은 무엇을 연구합니까?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돈을 어떻게 벌까 연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 또 사업을 어떻게 할까 연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 저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연구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행사가 너무 크기 때문에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것만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그 큰 일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 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2-16)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면서 여러 번 여러 번 생각하게 한다고 한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크신 일은 우리가 평생을 연구해도 다 못합니다. 베드로는 내가 떠난 후에라도 이것을 생각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잡한 세상에 살면서 생각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한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이 변화하신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눈으로 본 그것을 자기는 평생동안 잊어버리지 않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변화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그 말씀이 항상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자기가 맡은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받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그 큰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구원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면 그것이 몽롱하고 희미해져 버리고 생각 속에 온통 딴 것이 들어와서 머리를 꽉 채워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평생을 연구해도 하나님의 행사를 다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조금씩 조금씩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연구입니다.
천지창조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시 11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일도 하나님의 행사인데 그 의가 영원히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8-11)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입니다.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하나님의 행사지만 부활하신 것이 하나님의 행사 가운데 가장 큰 행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행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사 우리의 죄를 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일, 예수님을 부활 승천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면서 제사장 노릇을 하시고 이 지상에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일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성령이 오사 주님의 몸이 형성되고 교회가 이루어지고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일보다 훨씬 큰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일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해놓으신 일들을 들음에서 비롯됨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시 111:4)
여기서 '기이한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일입니다만 사실 그것은 그림자적인 역사이고 실지로 기이한 일은 예수님께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성령이 오신 일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연구한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다만 그 기이한 일에 대하여 들은 것뿐입니다. 우리는 듣고 기억을 했는데 하나님의 그 큰일이 전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듣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구원받는 것만 들음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신앙 생활해 가는 과정에서도 들음에서 믿음이 생깁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사람들이 애써 무엇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간이 애쓰고, 고행도 하고 선행도 하고 최선을 다해서 무엇을 하도록 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이 무엇을 하도록 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해놓으신 것을 듣고 기억만 하면 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그 일을 듣고 마음에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구원도 되고 신앙생활도 되니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시 111:5)
주기도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현재 우리들에게는 별로 해당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돈을 가지고 가서 사면 일용할 양식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양식이 뭡니까? 말씀이 양식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양식이 되십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중동이나 서양에 가면 고기가 주식입니다. 우리나라는 고기가 부식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고기가 주식입니다. 그런데 주식인 그 양이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삶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지 않습니까? 그 피로 죄사함 받았는데 그 다음에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양식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생활이 신앙생활 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는 무궁무진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에 들어가면 지성소와 그 바깥 성소가 있는데 성소에 열두 덩이의 떡이 진설되어 있습니다. 그 떡은 예수님이 열두 지파의 생명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양식을 먹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라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인치심 안에서 사는 삶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우리의 영 속에 구원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영광은 약속되어 있지만 아직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회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어떤 남성과 여성이 약혼을 하는 것처럼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약혼이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 영혼 안에는 이루어졌지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장래의 약속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보증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의 보증수표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시험과 핍박을 받을 때가 있지만 한 가지 잃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영원한 약속이 있고 우리가 그 약속 안에서 살고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개인적인 약속입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다 그 약속 안에서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받은 사람은 멸망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비밀
"저가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시 111:6)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로 말미암아 퍼져 간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도 몰랐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18-19)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어도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오신 이후에 비로소 나중에 그 참뜻을 알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에도 무슨 뜻인지 모르다가 알게 되었지요.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메시야에 의해서 이상국가가 건설될 것을 늘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지금 우리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온 세계에 성령의 역사가 퍼져가서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는 거기에 우리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방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이 실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7-9)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데 모든 만물을 발등상 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철장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데 그것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해당 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고 땅 끝까지 열방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그 약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우리 설교를 듣고 구원받는 사람이 자꾸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복음이 서양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지금은 우리들을 통해서 이 복음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일본어권 등지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이 바로 그런 것입 니다. 열방을 주겠다 하신 그 말씀 속에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질적으로 협력을 해야 합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시 111:7)
지금 우리는 주님의 큰 축복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설교를 들어보면 아주 쉽게 구원을 받습니다.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일이 진실하지 않으신 것이 어디 있으며 공의롭지 못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는 확실한 공의요 법도입니다.
성경은 얼마나 과학적이고 역사적이고 또 논리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논리적인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얼렁뚱땅하지 않고 분명하고 세밀하게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설교를 듣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거나 수긍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 법도는 확실한 것인데 그것이 포착이 안되면 성경을 그냥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추상적으로 얘기하고 뜬구름 잡는 식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이 사실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정직한 마음에 알려지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말씀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시 111:8)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세밀하고 정확해도 하나님 만큼 정확하고 세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읽어갈수록 그것을 알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 "주의 말씀은 정밀하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치 못하고 정의가 없어서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정의롭고 진실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진실하고 정확하고 정의로우니까 우리의 성격과 근본적으로 잘 안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이 정직한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거리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고 양심에서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분야에 속한 것이 아니고 양심에 속한 것이기에 양심이 바르지 않으면 말씀이 알아지고 말씀이 알아질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항상 얘기 합니다만 양심적이란 말은 죄를 안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죄를 짓더라도 그 죄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성경이 알아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신 교회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진실성이 없다든지 정의롭지 않으면 구원의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티끌 만큼도 없는 아주 정확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는 능력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정직한 위치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라고 했는데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교회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만 생각하는데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 교회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놓고 봉헌식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 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이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틀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29)
솔로몬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신 집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해서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베드로는 이 일을 행한 것입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행사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보고 네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하니까 주저없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주님 이 자기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주님이 이름을 두셨다는 것은 굉장히 거룩한뜻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 라고 했는데 그냥 사람들이 모인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이 임했으면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구원받는 역사, 죄사함 받는 역사, 병 낫는 것 등등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주님의 이름이 계십니다.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했는데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사는 사람 들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도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민족이었고 지금 우리도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교회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시 111:10)
사도 바울은 그 시대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하면서 그 본래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늠름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천로역정을 지은 죤 번연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디엘 무디도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한때 이 세상을 움직인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지혜였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는 인간적인 학문에서 나온 지혜가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라고 했는데 '지각'은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힘을 말합니다.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변할 수 있는 사람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회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의의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이 믿음이 자라 예수님을 본받아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장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서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라고 했는데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한 자를 위해 기도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젖먹는 아들이 아니고 장성한 아들입니다. 그 장성한 아들로서 행할 수 있는 것을 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젖 먹는 아들은 구원받고 아직 믿음이 자라지 못하여 의의 말씀들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듣기는 듣고 머리로 이해는 해도 실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밑의 말씀을 보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지각이 생긴 사람이 장성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성장한 사람은 지각이 생긴 사람입니다. 지각이 생긴 사람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신앙생활 속에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선악을 분별한다고 했는데 선은 하나님의 뜻이고 악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도덕적인 선악의 개념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이 지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좀 지각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 영적 지각은 많은 연단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은 사람이 그 경험을 토대로 지각이 생겨납니다. 구원을 받고도 시련을 거치지 않고 연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선이요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연단받을 받아 선악을 분변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이 성장된 사람입니다. 믿음이 자란 사람은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을 받고 역경 속에서 조용히 믿음의 생활을 해가면 자연히 지각이 생기면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을 때에 읊은 것으로 '부활' 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직한 자들의 회와 공회-교회
'정직한 자' 는 현재로 말하자면 구원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히 2:11-13)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룩하게 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정직한 것이 없어진 세상입니다.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기 때문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이 세상은 완전히 부정직한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이고 불신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정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 7:29 )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죄 때문에 더럽혀져 있는데 그 생각으로 꾀를 부리는 것입니다. 꾀 부리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도 인간의 생각과 꾀를 부리는 것을 악하게 여기십니다. 인간의 생각과 꾀는 완전히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정직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정직한 자의 회'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는데 구속받은 이스라엘 민족,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데 진정한 감사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합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여호와의 크신 행사
여호와의 행사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한 것이 하나님의 행사인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키신 것도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사 교회가 이루어지고 오랜 세월 동안 교회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교회 속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제가「새길」에서 어떤 형제의 신앙 간증을 읽었습니다. 그 형제는 구원받기 전에는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었는데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변하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주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답니다. 자기가 어떤 역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구원받은 것을 그리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육신의 생활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행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
여러분은 무엇을 연구합니까?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돈을 어떻게 벌까 연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 또 사업을 어떻게 할까 연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 저것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연구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행사가 너무 크기 때문에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것만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그 큰 일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 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2-16)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면서 여러 번 여러 번 생각하게 한다고 한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크신 일은 우리가 평생을 연구해도 다 못합니다. 베드로는 내가 떠난 후에라도 이것을 생각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잡한 세상에 살면서 생각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한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이 변화하신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눈으로 본 그것을 자기는 평생동안 잊어버리지 않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 변화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그 말씀이 항상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자기가 맡은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구원받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그 큰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구원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면 그것이 몽롱하고 희미해져 버리고 생각 속에 온통 딴 것이 들어와서 머리를 꽉 채워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평생을 연구해도 하나님의 행사를 다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 조금씩 조금씩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연구입니다.
천지창조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일도 하나님의 행사인데 그 의가 영원히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8-11)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입니다.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하나님의 행사지만 부활하신 것이 하나님의 행사 가운데 가장 큰 행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행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사 우리의 죄를 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일, 예수님을 부활 승천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면서 제사장 노릇을 하시고 이 지상에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일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성령이 오사 주님의 몸이 형성되고 교회가 이루어지고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일보다 훨씬 큰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일 속에 살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해놓으신 일들을 들음에서 비롯됨
여기서 '기이한 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하신 일입니다만 사실 그것은 그림자적인 역사이고 실지로 기이한 일은 예수님께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성령이 오신 일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연구한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다만 그 기이한 일에 대하여 들은 것뿐입니다. 우리는 듣고 기억을 했는데 하나님의 그 큰일이 전부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고 듣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구원받는 것만 들음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신앙 생활해 가는 과정에서도 들음에서 믿음이 생깁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사람들이 애써 무엇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간이 애쓰고, 고행도 하고 선행도 하고 최선을 다해서 무엇을 하도록 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이 무엇을 하도록 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해놓으신 것을 듣고 기억만 하면 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그 일을 듣고 마음에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구원도 되고 신앙생활도 되니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주기도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현재 우리들에게는 별로 해당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돈을 가지고 가서 사면 일용할 양식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양식이 뭡니까? 말씀이 양식입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양식이 되십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중동이나 서양에 가면 고기가 주식입니다. 우리나라는 고기가 부식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고기가 주식입니다. 그런데 주식인 그 양이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삶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지 않습니까? 그 피로 죄사함 받았는데 그 다음에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양식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생활이 신앙생활 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는 무궁무진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에 들어가면 지성소와 그 바깥 성소가 있는데 성소에 열두 덩이의 떡이 진설되어 있습니다. 그 떡은 예수님이 열두 지파의 생명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양식을 먹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라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인치심 안에서 사는 삶
하나님의 언약 안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우리의 영 속에 구원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영광은 약속되어 있지만 아직 그것을 맛보지 못하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회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어떤 남성과 여성이 약혼을 하는 것처럼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약혼이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우리 영혼 안에는 이루어졌지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장래의 약속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보증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물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의 보증수표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시험과 핍박을 받을 때가 있지만 한 가지 잃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영원한 약속이 있고 우리가 그 약속 안에서 살고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개인적인 약속입니다. 여러분 개개인이 다 그 약속 안에서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구원받은 사람은 멸망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비밀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로 말미암아 퍼져 간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도 몰랐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18-19)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어도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오신 이후에 비로소 나중에 그 참뜻을 알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에도 무슨 뜻인지 모르다가 알게 되었지요.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메시야에 의해서 이상국가가 건설될 것을 늘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지금 우리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온 세계에 성령의 역사가 퍼져가서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는 거기에 우리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방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이 실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데 모든 만물을 발등상 되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철장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오는데 그것이 바로 천년왕국입니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해당 됩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고 땅 끝까지 열방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그 약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우리 설교를 듣고 구원받는 사람이 자꾸 일어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복음이 서양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지만 지금은 우리들을 통해서 이 복음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일본어권 등지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이 바로 그런 것입 니다. 열방을 주겠다 하신 그 말씀 속에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질적으로 협력을 해야 합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진리
지금 우리는 주님의 큰 축복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설교를 들어보면 아주 쉽게 구원을 받습니다.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일이 진실하지 않으신 것이 어디 있으며 공의롭지 못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진리는 확실한 공의요 법도입니다.
성경은 얼마나 과학적이고 역사적이고 또 논리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논리적인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논리,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얼렁뚱땅하지 않고 분명하고 세밀하게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 설교를 듣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거나 수긍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 법도는 확실한 것인데 그것이 포착이 안되면 성경을 그냥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추상적으로 얘기하고 뜬구름 잡는 식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이 사실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정직한 마음에 알려지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말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세밀하고 정확해도 하나님 만큼 정확하고 세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 읽어갈수록 그것을 알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 "주의 말씀은 정밀하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치 못하고 정의가 없어서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정의롭고 진실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진실하고 정확하고 정의로우니까 우리의 성격과 근본적으로 잘 안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이 정직한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거리낌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고 양심에서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의 분야에 속한 것이 아니고 양심에 속한 것이기에 양심이 바르지 않으면 말씀이 알아지고 말씀이 알아질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항상 얘기 합니다만 양심적이란 말은 죄를 안 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혹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죄를 짓더라도 그 죄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성경이 알아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신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진실성이 없다든지 정의롭지 않으면 구원의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티끌 만큼도 없는 아주 정확한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는 능력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정직한 위치에 서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라고 했는데 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교회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만 생각하는데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주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 교회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놓고 봉헌식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 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이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틀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29)
솔로몬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신 집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해서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베드로는 이 일을 행한 것입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행사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보고 네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하니까 주저없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주님 이 자기 이름을 두신 곳입니다. 주님이 이름을 두셨다는 것은 굉장히 거룩한뜻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 라고 했는데 그냥 사람들이 모인다는 뜻이 아니고 성령이 임했으면 주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이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구원받는 역사, 죄사함 받는 역사, 병 낫는 것 등등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주님의 이름이 계십니다.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했는데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사는 사람 들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도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민족이었고 지금 우리도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교회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
사도 바울은 그 시대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유대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하면서 그 본래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늠름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천로역정을 지은 죤 번연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디엘 무디도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한때 이 세상을 움직인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그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지혜였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는 인간적인 학문에서 나온 지혜가 아닙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라고 했는데 '지각'은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힘을 말합니다.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변할 수 있는 사람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회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3-14)
의의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이 믿음이 자라 예수님을 본받아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장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서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라고 했는데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한 자를 위해 기도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젖먹는 아들이 아니고 장성한 아들입니다. 그 장성한 아들로서 행할 수 있는 것을 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젖 먹는 아들은 구원받고 아직 믿음이 자라지 못하여 의의 말씀들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듣기는 듣고 머리로 이해는 해도 실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밑의 말씀을 보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희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니까 지각이 생긴 사람이 장성한 사람입니다. 믿음이 성장한 사람은 지각이 생긴 사람입니다. 지각이 생긴 사람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신앙생활 속에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선악을 분별한다고 했는데 선은 하나님의 뜻이고 악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도덕적인 선악의 개념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이 지각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좀 지각이 있는 사람은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지 않습니까? 영적 지각은 많은 연단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은 사람이 그 경험을 토대로 지각이 생겨납니다. 구원을 받고도 시련을 거치지 않고 연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선이요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연단받을 받아 선악을 분변할 수 있는 사람이 믿음이 성장된 사람입니다. 믿음이 자란 사람은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을 받고 역경 속에서 조용히 믿음의 생활을 해가면 자연히 지각이 생기면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