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시 113:1-9)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이 절기를 지킬 때에 부른 찬송입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 113편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형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1-3)
1절부터 3절까지가 반복하여 여호와의 이름에 찬송을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이름을 찬양하라 한 말씀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온 세계 인류 중에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약에 오면 교회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교회에게 맡겨졌고 교회는 그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집합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갈이 이르기를 나를 너회에게 보내신 이는 너회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 3:13-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 노릇을 하고 있을 때에는 마치 그들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과 애굽의 우상을 섬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민족을 구출해 내라는 말씀을 모세가 받고서 애굽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생활에서 해방 시키라고 하셔서 왔다고 말하면 그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텐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여쭈 었습니다. 모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자기 민족을 구출해야 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신 분, 영원한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다 피조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사람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로부터 비롯된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본래부터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가끔 젊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만들어진 분이 아니고 본래부터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제일 원인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제일 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부터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제일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민족 이스라엘
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 신의 이름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질문하고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이 말씀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잘 모르고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애굽에는 바로왕이 있었는데 그는 마귀의 상징 입니다. 그리고 애굽에는 다른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 애굽의 종교는 창세기 11장에 바벨 탑을 쌓는 데에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바벨탑 쌓는 데서부터 우상숭배하는 종교가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부가 바벨탑을 쌓는 우상의 종교 아래 있는 셈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시는 이유는 우상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민족을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떠나서 살아가게 됩니다. 시내산 밑에 가서 십계명을 받고 광야생활하면서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져서 하나님의 민족이 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
신약 시대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교회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것 역시 똑같은 의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이 오셨는데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오순절부터 교회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교회가 아직 시작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일하셨고 전도를 하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가 있었어도 그때는 아직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계셔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이 계시는 곳,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이 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의 이름이 주어졌을 때에 애굽에서 구출 받고 선택된 민족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처럼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오셨을 때에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고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주님의 이름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입니다. 날이 새면 예수님 이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그 날'은 여기서 성령이 오시는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성령이 안 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궁금한 것이 많고 예수님께 질문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그날부터 교회가 형성되고 이제 주님의 이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때까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회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 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였는데 인간적인 마음으로 합심을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합심이 돼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이용합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셨으니까 우리도 따로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무조건 같이 기도한다거나 모인다고 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자신의 이름을 과연 거기에 맡기셨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름을 맡기셨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일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것 말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거기에 있어야 주님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했는데 그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구원받을 때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령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구원받은 다음에 성령의 또다른 경험이 있어야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행 3:6-7)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베드로에게 구걸을 하자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니 내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보통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는 그런 일이 안 나타납니다. 구원받을 때에 받는 성령과 교회가 세워질 때에 받는 성령이 다릅니다. 그것은 개인개인마다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처음 출발할 때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미 있었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3-4장 죽 읽어가면 그 이름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말씀들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모임에서 분리되고 싶어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이용하면 그것은 완전히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성경을 완전히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이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지고 신약 시대에 교회에게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것과는 대조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갈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앞으로 이 세상은 666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를 다 받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에 이 세상의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마나 오른손에 받게 됩니다. 그 이름으로 지배를 받는 민족과 백성들이 되고 맙니다. 온세계가 다 그렇게 됩니다.
마귀는 지금도 이 세상 사람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나타나서 이마나 오른손에 이름을 표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그 이름의 수를 이긴 자"가 있습니다. 이긴 자는 주님의 이름을 받는것입니다.
사탄의 공격과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받느냐 마귀의 이름을 받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 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4-16)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과 성령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이 그 위에 계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살때에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가진 자임을 마귀가 알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미워하게 하고 핍박하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마귀의 이름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뿐이고 주님의 이름이 맡겨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었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평범하게 복음만 전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핍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핍박이 오는 이유는 분명히 주님의 이름이 맡겨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고 공격을 하고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받는 징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을 때 영광스럽게 생각하라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생각을 해보면 엄청난 축복 아래 우리 위치가 놓여 있습니다.
온세상에 전파되는 복음과 주님의 이름
시편 113장 3절의 "해 돋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이 칼처럼 기다란 나라인데 요단강 근처는 해돋는 동쪽이고 서쪽은 지중해 연안으로 해 지는 곳입니다. 그 작은 이스라엘이 온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오순절 이후에 복음이 온 세계에 퍼져서 지금 해 뜨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고 크게 영광스럽게 되는 사실을 시편 113편에서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높고높은 곳에서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신 주님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4-7)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5-6)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계셨고 아버지와 함께 영광 중에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시고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끌려왔는데 그 여자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고발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에 예수님은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을 재촉하니까 일어나사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고 두번째 또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첫번째 굽혀서 쓰신 것은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에는 율법으로 보시니까 죄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허리를 굽히셨다가 여자를 보고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은혜와 복음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허리를 굽혀 보시는 것 이 복음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굽어보시는 시대이고 신약 시대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인간 세상을 살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죄인 된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5-6)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이 세상을 살피지 않으시면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7)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 니다.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흙인데 이 육신 속에 파묻혀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을 거리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교회에게 자기의 이름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
이 세상에 육신이 되어 오신 일과 십자가에 죽으신 일과 부활하신 일 그리고 성령이 오신 일은 예수님이 결국은 자기 이름을 두실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에게 자기 이름을 주시려는 역사입니다.
온 세상이 전부 마귀의 이름 아래 마귀의 백성이 되어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건져내어 주님의 이름을 주시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113편 1절에서 3절까지 그 이름에 찬양하라고 반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것은 물론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관련되지만 사실은 성령을 보내시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성령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이름이 영광스럽고 위대합니까? 마땅히 찬양해야 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는 곳-성령과 교회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내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 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왕상 8:16-20)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 시옵소서 …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27-30)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낙성식을 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한 이 내용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후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 이름을 두실 곳이 어디냐 하면 다윗이 거처하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솔로몬은 하나님이 어떻게 땅에 거하시겠냐고 말했습니다. 성전은 땅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의 의자에 떡 앉아 계시고 땅에다가 발을 걸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땅에다 지은 이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시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두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조그마한 성전 안에 갇혀 계실 수는 없겠지요.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이곳을 향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죄를 사해주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뜻입니다. 이 솔로몬 성전은 신약 시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성전은 일차적으로 예수님 몸의 그림자입니다.
성전 된 예수님의 육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요 2:19-20)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46년간 걸려서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헤롯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일 동안 그것을 헐고 새로 성전을 짓는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사실 그 성전은 예수님의 육체의 그림자인데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육신인 성전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시는 것이 사흘만에 성전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3)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의 육신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계시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이름으로 오면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나타내고 모든 사람의 이마에 자기 이름을 새겨 자기 백성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받았으니까 마귀와 적그리스도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욜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욜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고전 3:16-17)
여기에 '너희' 는 고린도 교회를 말합니다. 이 고린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성전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육체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이 맡겨져서 세워진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시 113:6-8)
'거름 무더기'는 버려진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보실 때에는 이 세상에서 지위가 높은 왕이나 장관들보다 훨씬 더 존귀하고 높습니다.
성령으로 낳은 아들들의 어머니 교회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도다 할렐루야"(시 113:9)
여기서 일차적으로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는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의미합니다. 사라는 잉태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1-28)
물론 사라가 아브라함과 관계해서 이삭을 낳지만 그 이삭은 성령으로 낳은 아들의 예표입니 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고 하였는데 신약시대에 이방 교회가 원래 홀로 사는 남편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갈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사 54:1-6)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라는 남편이 있었고 이방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남편이 없는 과부인데 교회는 이천 년 동안 과부격인 이방 사람의 세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는 하나님도 없이 지나던 이방인이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성령이 오셔서 이천 년 동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태어나고 있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잉태하지 못한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시 113:9)
지금 우리도 이방 사람으로서 본래 하나님이 없던 세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동안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방 세계에는 구원이 전파되면서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계시록 2-3장에 보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오는데 그 지역이 지금의 터키입니다. 터키 서해안 쪽에 있었는데 그 터키가 이방 지역입니다. 터키에 있는 그 일곱 지역이 신약 시대 전체 교회의 대표입니다. 에베소부터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이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도 없고 남편도 없던 이방인이 성령이 오심으로써 많은 자녀를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개인적으로는 그 자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게 될 것인데 우리는 그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이름이 있고 우리 이마에도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과 축복
우리가 이 사실을 알면 진정한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 교회를 통해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니까 아무렇게나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기도의 상달은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교제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살면서도 그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상달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원리입니다. 앞으로 주님 오시면 우리는 휴거를 합니다. 휴거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서 몸인 교회를 들어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 성도의 교제 안에서 사는데 주님의 약속과 축복이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복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거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한다는 말은 성령으로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 기름이 흘러내립니다. 그 기름은 성령입니다. 머리에 있는 기름이 흘러내리고 거기서부터 복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축복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는 주로 이스라엘 민족이 절기를 지킬 때에 부른 찬송입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들이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 113편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오셔서 교회를 형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1절부터 3절까지가 반복하여 여호와의 이름에 찬송을 드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이름을 찬양하라 한 말씀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온 세계 인류 중에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약에 오면 교회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교회에게 맡겨졌고 교회는 그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집합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갈이 이르기를 나를 너회에게 보내신 이는 너회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 3:13-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 노릇을 하고 있을 때에는 마치 그들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과 애굽의 우상을 섬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종노릇을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민족을 구출해 내라는 말씀을 모세가 받고서 애굽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생활에서 해방 시키라고 하셔서 왔다고 말하면 그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텐데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여쭈 었습니다. 모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자기 민족을 구출해야 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스스로 계신 분, 영원한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다 피조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사람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로부터 비롯된 분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본래부터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가끔 젊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만들어진 분이 아니고 본래부터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제일 원인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제일 원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래부터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제일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민족 이스라엘
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 신의 이름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모세가 질문하고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이 말씀 속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잘 모르고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애굽에는 바로왕이 있었는데 그는 마귀의 상징 입니다. 그리고 애굽에는 다른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 애굽의 종교는 창세기 11장에 바벨 탑을 쌓는 데에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바벨탑 쌓는 데서부터 우상숭배하는 종교가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전부가 바벨탑을 쌓는 우상의 종교 아래 있는 셈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며 사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시는 이유는 우상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민족을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떠나서 살아가게 됩니다. 시내산 밑에 가서 십계명을 받고 광야생활하면서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져서 하나님의 민족이 된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
신약 시대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교회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것 역시 똑같은 의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이 오셨는데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오순절부터 교회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교회가 아직 시작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일하셨고 전도를 하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가 있었어도 그때는 아직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계셔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성령이 계시는 곳,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이 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의 이름이 주어졌을 때에 애굽에서 구출 받고 선택된 민족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처럼 신약 시대에는 성령이 오셨을 때에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고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주님의 이름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입니다. 날이 새면 예수님 이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그 날'은 여기서 성령이 오시는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이 오시면 성령으로 모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성령이 안 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궁금한 것이 많고 예수님께 질문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는 그날부터 교회가 형성되고 이제 주님의 이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때까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회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 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였는데 인간적인 마음으로 합심을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합심이 돼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이용합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셨으니까 우리도 따로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무조건 같이 기도한다거나 모인다고 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자신의 이름을 과연 거기에 맡기셨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이 이름을 맡기셨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일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것 말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거기에 있어야 주님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했는데 그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구원받을 때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령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말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구원받은 다음에 성령의 또다른 경험이 있어야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행 3:6-7)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베드로에게 구걸을 하자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니 내게 있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보통 구원받은 것만 가지고는 그런 일이 안 나타납니다. 구원받을 때에 받는 성령과 교회가 세워질 때에 받는 성령이 다릅니다. 그것은 개인개인마다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처음 출발할 때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미 있었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3-4장 죽 읽어가면 그 이름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말씀들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모임에서 분리되고 싶어서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이용하면 그것은 완전히 성령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성경을 완전히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이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지고 신약 시대에 교회에게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것과는 대조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갈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앞으로 이 세상은 666이라는 적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를 다 받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에 이 세상의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마나 오른손에 받게 됩니다. 그 이름으로 지배를 받는 민족과 백성들이 되고 맙니다. 온세계가 다 그렇게 됩니다.
마귀는 지금도 이 세상 사람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나타나서 이마나 오른손에 이름을 표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그 이름의 수를 이긴 자"가 있습니다. 이긴 자는 주님의 이름을 받는것입니다.
사탄의 공격과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받느냐 마귀의 이름을 받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 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4-16)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과 성령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이 그 위에 계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살때에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가진 자임을 마귀가 알기 때문에 사람을 통해 미워하게 하고 핍박하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마귀의 이름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뿐이고 주님의 이름이 맡겨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었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평범하게 복음만 전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별로 핍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핍박이 오는 이유는 분명히 주님의 이름이 맡겨지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고 공격을 하고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받는 징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을 때 영광스럽게 생각하라고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생각을 해보면 엄청난 축복 아래 우리 위치가 놓여 있습니다.
온세상에 전파되는 복음과 주님의 이름
시편 113장 3절의 "해 돋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라"고 했는데 이스라엘이 칼처럼 기다란 나라인데 요단강 근처는 해돋는 동쪽이고 서쪽은 지중해 연안으로 해 지는 곳입니다. 그 작은 이스라엘이 온 세계의 축소판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오순절 이후에 복음이 온 세계에 퍼져서 지금 해 뜨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고 크게 영광스럽게 되는 사실을 시편 113편에서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높고높은 곳에서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오신 주님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5-6)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계셨고 아버지와 함께 영광 중에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시고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끌려왔는데 그 여자를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고발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에 예수님은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을 재촉하니까 일어나사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고 두번째 또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습니다. 첫번째 굽혀서 쓰신 것은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에는 율법으로 보시니까 죄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뜻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허리를 굽히셨다가 여자를 보고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니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은혜와 복음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허리를 굽혀 보시는 것 이 복음의 시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굽어보시는 시대이고 신약 시대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인간 세상을 살피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죄인 된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이 세상을 살피지 않으시면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 니다.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흙인데 이 육신 속에 파묻혀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을 거리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교회에게 자기의 이름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
이 세상에 육신이 되어 오신 일과 십자가에 죽으신 일과 부활하신 일 그리고 성령이 오신 일은 예수님이 결국은 자기 이름을 두실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교회에게 자기 이름을 주시려는 역사입니다.
온 세상이 전부 마귀의 이름 아래 마귀의 백성이 되어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건져내어 주님의 이름을 주시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113편 1절에서 3절까지 그 이름에 찬양하라고 반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것은 물론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관련되지만 사실은 성령을 보내시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성령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이름이 영광스럽고 위대합니까? 마땅히 찬양해야 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는 곳-성령과 교회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내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 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왕상 8:16-20)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 시옵소서 …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27-30)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낙성식을 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한 이 내용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후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 이름을 두실 곳이 어디냐 하면 다윗이 거처하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솔로몬은 하나님이 어떻게 땅에 거하시겠냐고 말했습니다. 성전은 땅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시온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의 의자에 떡 앉아 계시고 땅에다가 발을 걸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땅에다 지은 이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시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두신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조그마한 성전 안에 갇혀 계실 수는 없겠지요.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이곳을 향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죄를 사해주시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뜻입니다. 이 솔로몬 성전은 신약 시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성전은 일차적으로 예수님 몸의 그림자입니다.
성전 된 예수님의 육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요 2:19-20)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46년간 걸려서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헤롯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일 동안 그것을 헐고 새로 성전을 짓는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사실 그 성전은 예수님의 육체의 그림자인데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육신인 성전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시는 것이 사흘만에 성전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3)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의 육신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계시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이름으로 오면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나타내고 모든 사람의 이마에 자기 이름을 새겨 자기 백성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받았으니까 마귀와 적그리스도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욜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욜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리라"(고전 3:16-17)
여기에 '너희' 는 고린도 교회를 말합니다. 이 고린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성전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육체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이 맡겨져서 세워진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거름 무더기'는 버려진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보실 때에는 이 세상에서 지위가 높은 왕이나 장관들보다 훨씬 더 존귀하고 높습니다.
성령으로 낳은 아들들의 어머니 교회
여기서 일차적으로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는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의미합니다. 사라는 잉태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1-28)
물론 사라가 아브라함과 관계해서 이삭을 낳지만 그 이삭은 성령으로 낳은 아들의 예표입니 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고 하였는데 신약시대에 이방 교회가 원래 홀로 사는 남편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갈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사 54:1-6)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라는 남편이 있었고 이방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남편이 없는 과부인데 교회는 이천 년 동안 과부격인 이방 사람의 세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는 하나님도 없이 지나던 이방인이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성령이 오셔서 이천 년 동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태어나고 있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방 사람으로서 본래 하나님이 없던 세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 동안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방 세계에는 구원이 전파되면서 교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계시록 2-3장에 보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오는데 그 지역이 지금의 터키입니다. 터키 서해안 쪽에 있었는데 그 터키가 이방 지역입니다. 터키에 있는 그 일곱 지역이 신약 시대 전체 교회의 대표입니다. 에베소부터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이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도 없고 남편도 없던 이방인이 성령이 오심으로써 많은 자녀를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개인적으로는 그 자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전부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게 될 것인데 우리는 그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이름이 있고 우리 이마에도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과 축복
우리가 이 사실을 알면 진정한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 교회를 통해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 개인주의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니까 아무렇게나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기도의 상달은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교제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떠나서 자기 멋대로 살면서도 그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상달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원리입니다. 앞으로 주님 오시면 우리는 휴거를 합니다. 휴거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서 몸인 교회를 들어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이 주어진 성도의 교제 안에서 사는데 주님의 약속과 축복이 있습니다.
복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거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한다는 말은 성령으로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 기름이 흘러내립니다. 그 기름은 성령입니다. 머리에 있는 기름이 흘러내리고 거기서부터 복이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축복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