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4편]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백성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산들은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너희 산들아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1-8)

 시편 114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상황이 묘사 되어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때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은 이중 삼중의 이면적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상황과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상황, 그리고 나중에 이 세상 끝에 가서 이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예언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교회와 연관된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런 의미들을 잘 생각하면서 읽으면 훨씬 더 잘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이 영토가 되었도다"(시 114:1-2)


 이 세상은 모든 것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죄악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실 민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어, 그들 가운데 거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유다가 여호와의 성소가 되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성전이 지어지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민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5-46)


 이전까지는 하나님이 이 지상에 있는 어떤 민족에게도 거하실 수 없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들 속에 하나님이 계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2장부터 3장까지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스라엘 민족의 부르짖음이 내게 들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 내어 그들 가운데 거하시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다른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됩니다.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실만한 민족으로서의 자격이 갖춰지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어디에나 안 계시는 곳이 없으신데, 하필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신다고 하신 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이나 성전이 지어지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천지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신약시대의 교회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은 아무 데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십니다. 구약시대는 아버지 하나님의 시대이고 신약시대는 성경 하나님의 시대입니다. 신약 시대는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때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교회 밖에는 성령이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시면서 머리 되신 주님의 일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잘 모르고, 교회 생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신약시대에는 교회 생활하는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던 그 하나님이 다시 고레스왕을 통해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서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사를 꾸며가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기업


2절에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0장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삼하 20:19)


다윗 왕 당시에 다윗 왕에게 반역하여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숨어 있는 성을 요압이 공격하여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삼하 20:14-19)


 그때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려 하냐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일터로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민족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여 요단은 물러갔으며"(시 114:3)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바다가 갈라져 건너고 또 여호수아가 법궤를 메고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첫 번째는 바다를 건넜고 두 번째는 강을 건넜습니다. 바다를 건널 때에는 바닷물이 도망갔고, 그 다음에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요단강 물이 내려오다가 정지가 되고 아래 물은 내려가 이스라엘 민족이 건너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된 시내산


"산들은 수양갈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시 114:4) 


 이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성경 다른 곳을 찾아봅시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회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시 68:17-18)


 여기 보면 시내산 성소가 나오는데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율법을 받은 그 때에 천지가 진동하고 큰 우레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굉장히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인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시내산을 성소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당시 율법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그 산에 내려 오시니까 그 산들이 너무 좋아서 뛰었다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시니까 시내산이 성소가 되었기 때문에 주변의 작은 산들이 전부 진동을 하는 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두렵고 무서운 하나님이시지만 자연계로 볼 때는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산에 내려오시니까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환영하여 기쁘게 춤추는 것을 산들이 뛰놀고 작은 산들이 뛰었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성령의 은사


그 다음 18절에는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라고 하였는데 신약시대에 교회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성령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7-12)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부활 승천하실 때에 마귀에게 사로 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구원하여 하나님께 바치니까 성령이 오셔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은혜가 11절로 연결이 됩니다.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등의 직분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단순히 모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목사, 복음 전하는 자, 교사 등등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세워져서 이루어지고 그들 가운데 성령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은사가 성령의 은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었는데 영생은 은사가 아니고 생명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생명을 받았지 일을 하기 위한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가 이루어져가는 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산들은 수양갈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 바다여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리감은 어찜인고 너희 산들아 수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같이 뛰놂은 어쩜인고"(시 114:4-6)


 작은 산들이 뛰놀았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하나님이 그 산에 임하시니까 기뻐서 뛰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5-6절 은 3-4절의 내용을 반복하여 말한 것입니다. 홍해 바다가 물러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차하시는 길을 바다가 가로막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안에 계시기 때문에 바다가 갈라지는 것이지 이스라엘 민족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가 있지 않았습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 법궤를 메고 가는데 어떻게 요단강이 그것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영적인 전쟁의 그림자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회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수 3:6-13)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한 발자국 물에 들어서자 내려오던 물은 서 버리고 흘러가던 물은 밑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증거였습니다. 가나안의 칠 족속을 쫓아낼 수 있다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가나안 칠 족속을 쫓아낸 것이지 이스라엘 민족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면 홍해의 물이나 요단강 물인들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가야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우리가 이것을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홍해를 건넌 것이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육신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꺾일 때에 성령에 의해서 생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도 역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이 계시는 곳으로, 교회가 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홍해는 건넜습니다만 아직도 앞길에는 광야 생활이 있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원수와 싸우는 생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요단강을 건넌 후에는 또 가나안 사람들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가나안사람들과의 전쟁은 영적인 전쟁의 그림자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 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투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고 습격하는 사탄의 힘과 싸우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사탄과 싸워 이기고 싶어도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결심을 단단히 한다고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훈련 속에서 육신이 깨어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성령을 의지하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


그래서 새로운 믿음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효과적인 싸움을 싸워갈 수 있게 됩니다. 전에도 종종 얘기했습니다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신앙 생활을 제대로 못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패배한 것도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보다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훨씬 좋아 보여서 하나님을 그만 잊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세력을 들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구원 안 받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훨씬 더 재미있게 보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고달프고 경제적으로 시달리는데 구원 안 받은 사람들의 세계는 풍부하고 재미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동경하면서 우리 가운데 성령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성령이 계시는 것을 느끼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슬그머니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그 모습과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똑같습니다. 구원받고 모임 안에 살면서도 악착같이 돈에 대한 집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들은 거의가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에 완전히 잡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이 세상에서는 출세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마음 속에 믿음의 축복과 영혼의 축복이 있는데 그 런 것은 잘 모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골짜기 입니다. 요단강은 죽는다는 뜻입니다. 홍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이 무너지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인데 그 죽는 고비가 우리에게는 닥쳐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교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이 시편 114편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홍해 물도 요단강물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그 민족 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시내산부터서는 법궤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 법궤를 메고 가는 길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어떤 시험이나 박해도 우리를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은 지금까지 앞길을 방해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가시는 길을 막을 수가 없는것입니다. 앞으로도 틀림없이 또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문제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령이 계시면 막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 땅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 떨지어다"(시 114:7)


여기서 땅은 가나안 칠 족속이 사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서 그 땅에 들어가 가나안 칠 족속을 물리치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석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생명수


"저기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시 114:8)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갈 때에 물이 없어 불평을 했는데 모세가 반석을 치자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반석은 생명이 없는 것이지만 거기서 샘물이 펑펑 솟아났습니다. 그래서 사막 같은 온 들판에 샘이 솟아서 물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8-9)


 하나님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돌은 생명이 없지만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넣으시면 그 돌도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하나님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우리도 이전에는 죽어 있었는데 이제 산 돌이 되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복을 받아 아브라함의 자 손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 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이스라엘 민족이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왔는데 그 반석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깨지시고 거기서 생수가 나왔습니다. 생수는 성령의 그림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생명수가 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듯이 원래 이방인인 우리들이 생명이 없는 돌 같은 존재들이었지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성경이 먼저 알고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들이 진행하는 과정에는 바다도 물도 가로막 을 수 없고 산들이 진동하면서 뛰놀고 하나님이 임하시는 거기에 영광스럽고 권위 있는 일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년왕국과 영원한 세상에서 얻을 영광을 준비하는 훈련의 기간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확실히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은 우리 가운데 성령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령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육신적으로도 항상 영광스럽고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육신의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이 실패한 그 길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이스라엘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된다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고 불신앙 때문에 망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번창하게 되고 행복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의 이 육신은 꺾어지고 무너져야 됩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영광을 누리고 행복을 찾으면 영적인 축복이 없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육신 속에 요단강물이 있고 험난한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박차를 가하고 영적인 성장을 하려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육신입니다. 육신적으로도 영광스럽게 되고 행복하게 되면 신앙은 정반대로 내리막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 육신 자체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통해서 이 육신을 꺾어가야 합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키는 이유는 육신을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침례받으시고 난 다음에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생각에 의해서 못 이기도록 하기 위해서 사탄이 시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생각을 아시고 다 말씀으로 물리치고 승리를 하셨습니다. 우리도 평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시련과 훈련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삶은 이 세상에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삶은 천년왕국과 영원한 세상에서입니다. 천년왕국과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기 위해서 지금은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후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 기간이 천년왕국과 영원한 세상에서 살 때를 맞이해서 훈련 받는 기간입니다. 그 훈련을 시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 넘어지고 실망하는 경향이 있습니 다. 그래서 성경은 욥의 인내를 가르쳤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는 환난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셔도 우리를 육신적으로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참 믿음이 있으면 육신적으로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마음에 평안과 승리와 감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