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용력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하나님 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하소서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 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19)
시편 80편에는 '아삽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둣에 맞춘 노래' 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소산님에둣' 은 시편을 노래로 부른 멜로디인 것 같습니다. 이 시도 79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 읊은 시입니다. 극한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예언적인 의미와 교훈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은소-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시 80:1)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메고 가는데 그 법궤를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사방에 세 지파씩 나누어 진영을 형성하면서 나아갔습니다.
1절에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룹은 일종의 천사로 하나님을 옹위하는 존재였습니다. 법궤 뚜껑을 시은 소라고 하는데 그 시은소 양편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그 그룹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십계명을 새긴 돌비가 담겨 있는 법궤의 뚜껑을 가리켜 시은소라고 하는데, 시은소는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 뚜껑 양쪽에 천사의 형상을 한 그룹이 날개를 펴고 내려다보는 듯한 것이 지성 소 내부의 모습인데 거기에 하나님이 형체로는 나타나시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지켜보시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 오셨는데 시은소가 있는 거기에 하나님이 좌정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시대로 말하면 그 법궤는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새계명이 주어진 곳인데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은소는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말씀이신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데 그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멀리 바벨론으로 옮겨져 갔을 때 왜 이같은 기도를 드렸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과거에 시은소에 계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던 것처럼 지금도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던 것입니다. 이 시가 씌여진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완전히 흑암기였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이스라엘과 세계를 정복하면서부터 이방의 시대가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아주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용력을 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시 80:2)
이 구절도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지파는 말하지 않고 왜 유독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세 지파만을 거론했을까요?
"서편에는 에브라임의 군대의 진 기가 있을 것이라 에브라임 자손의 족장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그 군대는 계수함을 입은 자 사만 오백 명이며 그 곁에는 므낫세 지파가 있을 것이라 므낫세 자손의 족장은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요 그 군대는 계수함을 입은 자 삼만이천 이백 명이며 또 베냐민 지파라 베냐민 자손의 족장은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요 그 군대는 계수함을 입은 자 삼만 오천 사백 명이니 에브라임 진에 속한 계수함을 입은 군대의 총계가 십만 팔천 일백 명이라 그들은 제 삼대로 진행할지니라"(민 2:18-24)
이스라엘의 진영은 법궤를 메는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가 중간에 있고 열두 지파가 동서남북 네 대열로 나누어 진을 쳤는데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는 서편에 진을 쳤습니다. 동편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남편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가 북 편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각각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법궤의 진행 방향으로 볼 때 법궤가 나아가는 방향이 동쪽으로 앞이기 때문에 서쪽은 법궤가 진행하는 방향을 따라서 법궤를 뒤따른 쪽이 었습니다.
법궤를 중심으로 서편은 법궤의 제일 뒷쪽이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세 지파가 서편 진영인데 그들이 법궤를 따라서 앞으로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군대에 끌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때는 법궤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 같은 답답하고 암담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법궤를 뒤따른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서 구원해 주시고 앞으로 인도하여 주시리라는 뜻으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얼핏 읽어서는 뭐가 뭔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빛을 나타내소서
"하나님이여 우리»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말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이 교회에 계심으로써 교회에 시선을 집중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한 죄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을 당하고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로부터 70년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고토로 돌아옵니다만 사실은 그때부터 암흑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즉 이방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방의 시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선민의 역사를 꾸며가는 시대가 아니고 거꾸로 이방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 암흑의 상태에 하나님이 얼굴 빛을 비춰서 구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방의 때가 끝이 나고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 간 후 70년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전처럼 회복은 안되었습니다. 왕의 제도가 없어지고 무정부 상태에 들어가서 계속 이방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후에 네 나라로 갈라졌는데 네 나라가 서로 싸우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늘 피해를 봤습니다. 시리아가 이집트를 치러 갈 때에 이스라엘을 거쳐갔고 이집트가 시리아를 칠 때에 또 이스라엘을 거쳐가면서 그때마다 약탈을 자행했습 니다. 현재 아마겟돈이라는 지역이 그 당시에 시리아와 이집트가 서로 교차하면서 치고 받던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므깃도 골짜기의 넓은 분지가 들판인데 그곳은 역사 이래로 전쟁터였습니다.
페르샤의 고레스 왕은 이방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70년만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암담한 상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저회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4-7)
여기 이 말씀을 보면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은 몹시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환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후 A. D. 70년에는 로마가 완전히 이스라엘을 점령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온 세계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그들에게는 칼이 뒤따랐습니다. 지금 은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이 되고 있지만 또 한번 이스라엘은 대환난 기에 야곱의 환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마지막으로 정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는 그런 때가 다시 옵니다. 그때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멸망하는 것이니까 예루살렘은 도합 3번이나 멸망하는 운명인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들은 삼중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그들이 부르짖을지라도 전혀 응답이 없는 상태에서 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을 싫어하는 미련한 마음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 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회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회에게 보이리라 내가 부를지라도 너회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옷으리라 너회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회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니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 1:22-33)
이 솔로몬의 잠언은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들을 행해서 말한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련하게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미련한 것이 벗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거부하는 기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련입니다.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잠 1:23-25)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현재 우리는 이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교훈을 듣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실지로 우리의 삶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훈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 말고도 받아야 할 은혜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의 손을 펴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미련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고난과 시련을 통해 육신을 쳐부수는 과정을 거쳐서 오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거치지 않고 오는 주님의 은혜는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 있는 고난과 시련을 두려워하며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육신적인 것을 정리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육신의 소욕에 눌려서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육신의 생각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술이나 담배, 놀음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여전히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과감하게 그런 것들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 1:28)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친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민족이었지만 이방 사람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의 생활 풍속을 본받아 거기에 끌려간 결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환난을 당해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이 묵묵히 계시렵니까 하고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
이스라엘 민족은 또 A. D. 70년에 멸망을 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신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들의 형식적이고 거짓된 마음을 지적하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인 율법을 예수님이 무시하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등 그들의 종교관과 사상에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껍데기인 형식만을 붙든 것입니다. 안식일날 병자는 자기 병이 나음으로써 참된 안식을 얻었던 것인데 그 차원 높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고 유대 율법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생각으로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인기가 점점 줄어들자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그후 이스라엘 민족은 2천 년 동안은 세계에 흩어져서 가는 곳곳마다 박해와 수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사 이스라엘을 완전히 외면하신 2천 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야말로 완전히 흑암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거기서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하지만 그것은 다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것도 다 우상숭배나 거짓된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이 마지막으로 3번째로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미련합니까. 그런데 그런 미련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미련이 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원망을 늘어놓으면서 신앙을 잊어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마음들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나중에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될 것인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몸으로 그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심판을 안 받지만 행위의 심판은 받습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현재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이고 말씀 앞에 정직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지만 꾸준히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말씀대로 계속 이 길을 걸어가는 기간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굉장히 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눈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우리들에게 오는 영광은 영원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짤막한 인생 동안 신앙생활을 잘해야 할 텐데도 이 육신의 미련이 있어서 그렇게 잘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도 잘 되지 않는 이유를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나 A. D. 70년에 로마에게 멸망당할 때도 많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고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보지만 그래도 캄캄하고 답답한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도의 응답이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조롱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시 80:6)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민족에게 조롱거리가 된 것처럼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여러 가지 고난을 받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항상 세상의 핍박과 조롱을 받아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지만 장차 주님이 오시면 모든 문제가 다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의 억울함이 해결되기만을 바라지 말고 주님이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참고 견디면서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7)
우리를 떠나가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서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도 있고 제자들의 기도도 있고 여러 기도가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응답이 되었습니다. 이 시를 읊었던 기자도 기도의 응답을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 기도의 응답이 당장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이 변함으로써 받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상황이라든지 운명이 즉시 바꾸어지지 않더라도 내 마음의 문제가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응답입니다. 그 응답을 가지고 있으면 내 상황이 바뀌어지든 안 바뀌어지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만을 응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갈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1-7)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 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우리 눈앞에 즉시 나타나시도록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감동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는 장차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질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항상 눈앞에 물리적으로 무언가가 나타나야 응답인 줄 아는데 비록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성경 안에는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현실적으로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사실상 이 시편 기자의 기도의 응답은 주님이 오셔야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예언적인 의미에서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이스라엘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갈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은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짜게 하셨나이까"(시 80:8-11)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고 심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 포도나무가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땅에서 이미 자라서 아주 무성하게 되어 산들을 가리고 가지는 바다까지 뻗고 넝쿨은 강까지 뻗었다고 하였습니다. 유브라데스 강과 홍해 사이가 바로 하나님의 구역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심어서 번창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가는 모든 자로 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이 범죄한 결과로 인해 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합니다. 지나간 자가 이것을 따 먹었다 하였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집어 삼킨 것을 말합니다.
짐승의 시대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이 먹나이다"(시 80:13)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중단이 되고 짐승의 시대가 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네 짐승이 나오는데 느부갓네살왕이 첫번째 짐승이고 그 다음에 페르시아, 다음에 알렉산더 대왕, 로마가 각각의 짐승으로 나타납니다. 이방 짐승의 시대가 되어서 그들에게 이스라엘이 먹히는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 시편 기자는 이미 마음에서 계시로 알았던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사 80:14)
이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1-2)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신약시대의 교회의 그림자이고 신약시대의 교회는 주님의 몸이므로 교회가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참 포도나무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주님의 빛을 잃고 세속화되어 버리는 일이 자꾸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는 사탄이 들어앉아 있는 장소도 됩니다. 겨자씨 한 알을 심어놓았는데 자라서 나무가 되매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고 하였는데 이 새가 바로 사탄입니다. 이 새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살게 되면 교회가 변질되고 세상과 벗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 타락한 교회는 적그리스도를 섬기는 음녀가 됩니다. 사탄은 참으로 지혜로워서 교회를 타락시켜 교회를 자기의 아지트로 삼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아들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 80:15-17)
창세기 35장 17-18절에 보면 라헬이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죽는데 그녀가 죽기 직전에 그를 '베노니' 라고 불렀습니다. '내 슬픔의 아들'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아들을 베냐민이라고 불렀는데 '오른손의 아들'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회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몸은 비록 이 땅 위에 있지만 영은 사실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에서 항상 우편은 권위, 능력, 주권 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은 버림을 받아서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또 주가 손을 얹는다는 말씀은 주님이 판결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일반 교회들은 손 얹어 안수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목사들이 가정 심방을 가면 부부를 양쪽으로 갈라놓고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상고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욥기를 보면 손을 얹어 판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손을 얹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손을 얹어 안수하십시오"라는 말은 이 버려진 것 같은 민족에게 주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 주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일이 오늘은 우리에게는 확실히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하는 진정한 교회라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수되어 성령이 임하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의 권위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죄를 짓거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러한 사실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안수의 의미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8)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눅 13:13)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낫는데 왜 안수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병자들에게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안수를 하셔서 병이 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인간과 접촉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듯 아주 깊은 뜻이 있는데 요즈음은 안수를 함부로 남발을 합니다.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손을 얹어 안수하면서 거룩한 체합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안수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도 초창기에는 안수를 해서 병이 금방 나아버리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습관적으로 하면 그것은 변질된 것입니다. 복음의 초창기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고 신약의 교회도 그렇고 얼굴빛이 없어진다는 말은 주님이 외면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도 보면 종종 그런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말씀이 열려지면 주님의 교회가 형성되어가고 있고 복음이 전해지고 있지만 앞으로 만일 세월이 흘러 주님 오시는 것이 100년 후쯤 된다면 주님의 얼굴빛이 우리에게도 숨겨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진정한 교회이고 복음이 진짜로 전해지고 있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변질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교회사 속에서 보게 됩니다.
이 교회 역사를 보면 100년 이상 지속한 신앙운동이 별로 없습니다. 복음의 한 세대가 지나가면서 점차 복음이 빛을 잃게 되고 순수성이 사라지면서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말씀을 전해도 이론으로 그쳐 버리고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차츰차츰 세상적으로 교회가 변해가는 것입니다. 장로교나 그밖의 교파도 처음 출발할 때는 왕성한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형식화되면서 힘을 잃어버리고 나중에는 그 전통만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처럼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돌려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현재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젊은 세대들만이 자라서 교회를 이끌어 간다고 합시다. 그때쯤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참으로 지속되려고 하면 현재 젊은이들 속에서 주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 어떤 인물들이 일어나 계속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사물을 보면 깨끗한 것일수록 변질이 잘 되는데 복음이 원래 깨끗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변질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도 부패의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물질에 치중을 하고 마음이 쾌락에 빠져 있는 경향이 상당히 있는 것같습니다. 처음에 우리 안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숫자가 얼마 안되었지만 그때는 매우 깨끗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숫자가 많다 보니 잘못된 부분도 많고 여러 가지 반성할 점도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참으로 죄를 뉘우치고 잘못된 부분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잃어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시편 80편에는 '아삽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둣에 맞춘 노래' 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소산님에둣' 은 시편을 노래로 부른 멜로디인 것 같습니다. 이 시도 79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에 읊은 시입니다. 극한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예언적인 의미와 교훈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은소-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메고 가는데 그 법궤를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사방에 세 지파씩 나누어 진영을 형성하면서 나아갔습니다.
1절에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룹은 일종의 천사로 하나님을 옹위하는 존재였습니다. 법궤 뚜껑을 시은 소라고 하는데 그 시은소 양편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그 그룹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십계명을 새긴 돌비가 담겨 있는 법궤의 뚜껑을 가리켜 시은소라고 하는데, 시은소는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 뚜껑 양쪽에 천사의 형상을 한 그룹이 날개를 펴고 내려다보는 듯한 것이 지성 소 내부의 모습인데 거기에 하나님이 형체로는 나타나시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지켜보시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속에 오셨는데 시은소가 있는 거기에 하나님이 좌정해 계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시대로 말하면 그 법궤는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새계명이 주어진 곳인데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은소는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말씀이신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데 그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을 등지고 멀리 바벨론으로 옮겨져 갔을 때 왜 이같은 기도를 드렸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과거에 시은소에 계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던 것처럼 지금도 인도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던 것입니다. 이 시가 씌여진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완전히 흑암기였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이스라엘과 세계를 정복하면서부터 이방의 시대가 되고 이스라엘 민족은 아주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 구절도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지파는 말하지 않고 왜 유독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세 지파만을 거론했을까요?
"서편에는 에브라임의 군대의 진 기가 있을 것이라 에브라임 자손의 족장은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요 그 군대는 계수함을 입은 자 사만 오백 명이며 그 곁에는 므낫세 지파가 있을 것이라 므낫세 자손의 족장은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요 그 군대는 계수함을 입은 자 삼만이천 이백 명이며 또 베냐민 지파라 베냐민 자손의 족장은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요 그 군대는 계수함을 입은 자 삼만 오천 사백 명이니 에브라임 진에 속한 계수함을 입은 군대의 총계가 십만 팔천 일백 명이라 그들은 제 삼대로 진행할지니라"(민 2:18-24)
이스라엘의 진영은 법궤를 메는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가 중간에 있고 열두 지파가 동서남북 네 대열로 나누어 진을 쳤는데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는 서편에 진을 쳤습니다. 동편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남편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가 북 편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각각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법궤의 진행 방향으로 볼 때 법궤가 나아가는 방향이 동쪽으로 앞이기 때문에 서쪽은 법궤가 진행하는 방향을 따라서 법궤를 뒤따른 쪽이 었습니다.
법궤를 중심으로 서편은 법궤의 제일 뒷쪽이었던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세 지파가 서편 진영인데 그들이 법궤를 따라서 앞으로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군대에 끌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는데 그때는 법궤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 같은 답답하고 암담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지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법궤를 뒤따른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서 구원해 주시고 앞으로 인도하여 주시리라는 뜻으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얼핏 읽어서는 뭐가 뭔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빛을 나타내소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는 말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성령이 교회에 계심으로써 교회에 시선을 집중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한 죄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을 당하고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로부터 70년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고토로 돌아옵니다만 사실은 그때부터 암흑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즉 이방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방의 시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선민의 역사를 꾸며가는 시대가 아니고 거꾸로 이방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 암흑의 상태에 하나님이 얼굴 빛을 비춰서 구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방의 때가 끝이 나고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 간 후 70년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전처럼 회복은 안되었습니다. 왕의 제도가 없어지고 무정부 상태에 들어가서 계속 이방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세계를 지배했던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후에 네 나라로 갈라졌는데 네 나라가 서로 싸우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늘 피해를 봤습니다. 시리아가 이집트를 치러 갈 때에 이스라엘을 거쳐갔고 이집트가 시리아를 칠 때에 또 이스라엘을 거쳐가면서 그때마다 약탈을 자행했습 니다. 현재 아마겟돈이라는 지역이 그 당시에 시리아와 이집트가 서로 교차하면서 치고 받던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므깃도 골짜기의 넓은 분지가 들판인데 그곳은 역사 이래로 전쟁터였습니다.
페르샤의 고레스 왕은 이방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70년만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는 암담한 상태
여기 이 말씀을 보면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은 몹시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환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후 A. D. 70년에는 로마가 완전히 이스라엘을 점령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온 세계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그들에게는 칼이 뒤따랐습니다. 지금 은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이 되고 있지만 또 한번 이스라엘은 대환난 기에 야곱의 환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마지막으로 정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는 그런 때가 다시 옵니다. 그때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멸망하는 것이니까 예루살렘은 도합 3번이나 멸망하는 운명인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들은 삼중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그들이 부르짖을지라도 전혀 응답이 없는 상태에서 이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을 싫어하는 미련한 마음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 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회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회에게 보이리라 내가 부를지라도 너회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옷으리라 너회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회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니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잠 1:22-33)
이 솔로몬의 잠언은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들을 행해서 말한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련하게도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미련한 것이 벗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거부하는 기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미련입니다.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잠 1:23-25)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현재 우리는 이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교훈을 듣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실지로 우리의 삶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훈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것 말고도 받아야 할 은혜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은혜의 손을 펴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의 미련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늘 고난과 시련을 통해 육신을 쳐부수는 과정을 거쳐서 오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거치지 않고 오는 주님의 은혜는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 있는 고난과 시련을 두려워하며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육신적인 것을 정리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육신의 소욕에 눌려서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육신의 생각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술이나 담배, 놀음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여전히 즐기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과감하게 그런 것들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 1:28)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친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민족이었지만 이방 사람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의 생활 풍속을 본받아 거기에 끌려간 결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환난을 당해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없이 묵묵히 계시렵니까 하고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
이스라엘 민족은 또 A. D. 70년에 멸망을 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신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들의 형식적이고 거짓된 마음을 지적하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인데 이 그림자인 율법을 예수님이 무시하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등 그들의 종교관과 사상에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껍데기인 형식만을 붙든 것입니다. 안식일날 병자는 자기 병이 나음으로써 참된 안식을 얻었던 것인데 그 차원 높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고 유대 율법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생각으로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인기가 점점 줄어들자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그후 이스라엘 민족은 2천 년 동안은 세계에 흩어져서 가는 곳곳마다 박해와 수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사 이스라엘을 완전히 외면하신 2천 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야말로 완전히 흑암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거기서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하지만 그것은 다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진정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것도 다 우상숭배나 거짓된 종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이 마지막으로 3번째로 멸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미련합니까. 그런데 그런 미련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도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미련이 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원망을 늘어놓으면서 신앙을 잊어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고 싶은 마음들이 나타납니다. 그 결과 나중에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될 것인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몸으로 그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심판을 안 받지만 행위의 심판은 받습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현재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받아들이고 말씀 앞에 정직하게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지만 꾸준히 믿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말씀대로 계속 이 길을 걸어가는 기간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굉장히 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눈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우리들에게 오는 영광은 영원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이 짤막한 인생 동안 신앙생활을 잘해야 할 텐데도 이 육신의 미련이 있어서 그렇게 잘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도 잘 되지 않는 이유를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나 A. D. 70년에 로마에게 멸망당할 때도 많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고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보지만 그래도 캄캄하고 답답한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도의 응답이 당장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조롱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 민족에게 조롱거리가 된 것처럼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여러 가지 고난을 받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항상 세상의 핍박과 조롱을 받아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지만 장차 주님이 오시면 모든 문제가 다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의 억울함이 해결되기만을 바라지 말고 주님이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참고 견디면서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
우리를 떠나가셨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서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기도는 응답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도 있고 제자들의 기도도 있고 여러 기도가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응답이 되었습니다. 이 시를 읊었던 기자도 기도의 응답을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이 기도의 응답이 당장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이 변함으로써 받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상황이라든지 운명이 즉시 바꾸어지지 않더라도 내 마음의 문제가 믿음으로 해결되는 것이 응답입니다. 그 응답을 가지고 있으면 내 상황이 바뀌어지든 안 바뀌어지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적으로 우리 눈앞에 물리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만을 응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갈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1-7)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 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우리 눈앞에 즉시 나타나시도록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감동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는 장차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질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항상 눈앞에 물리적으로 무언가가 나타나야 응답인 줄 아는데 비록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성경 안에는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현실적으로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사실상 이 시편 기자의 기도의 응답은 주님이 오셔야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예언적인 의미에서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나무-이스라엘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고 심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 포도나무가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땅에서 이미 자라서 아주 무성하게 되어 산들을 가리고 가지는 바다까지 뻗고 넝쿨은 강까지 뻗었다고 하였습니다. 유브라데스 강과 홍해 사이가 바로 하나님의 구역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심어서 번창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가는 모든 자로 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이 범죄한 결과로 인해 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합니다. 지나간 자가 이것을 따 먹었다 하였는데 느부갓네살 왕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집어 삼킨 것을 말합니다.
짐승의 시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중단이 되고 짐승의 시대가 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네 짐승이 나오는데 느부갓네살왕이 첫번째 짐승이고 그 다음에 페르시아, 다음에 알렉산더 대왕, 로마가 각각의 짐승으로 나타납니다. 이방 짐승의 시대가 되어서 그들에게 이스라엘이 먹히는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 시편 기자는 이미 마음에서 계시로 알았던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사 80:14)
이 말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1-2)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신약시대의 교회의 그림자이고 신약시대의 교회는 주님의 몸이므로 교회가 포도나무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참 포도나무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주님의 빛을 잃고 세속화되어 버리는 일이 자꾸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는 사탄이 들어앉아 있는 장소도 됩니다. 겨자씨 한 알을 심어놓았는데 자라서 나무가 되매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고 하였는데 이 새가 바로 사탄입니다. 이 새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살게 되면 교회가 변질되고 세상과 벗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 타락한 교회는 적그리스도를 섬기는 음녀가 됩니다. 사탄은 참으로 지혜로워서 교회를 타락시켜 교회를 자기의 아지트로 삼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아들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 80:15-17)
창세기 35장 17-18절에 보면 라헬이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죽는데 그녀가 죽기 직전에 그를 '베노니' 라고 불렀습니다. '내 슬픔의 아들' 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아들을 베냐민이라고 불렀는데 '오른손의 아들'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회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몸은 비록 이 땅 위에 있지만 영은 사실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성경에서 항상 우편은 권위, 능력, 주권 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은 버림을 받아서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또 주가 손을 얹는다는 말씀은 주님이 판결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일반 교회들은 손 얹어 안수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목사들이 가정 심방을 가면 부부를 양쪽으로 갈라놓고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상고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33)
욥기를 보면 손을 얹어 판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손을 얹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손을 얹어 안수하십시오"라는 말은 이 버려진 것 같은 민족에게 주의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 주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일이 오늘은 우리에게는 확실히 나타났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하는 진정한 교회라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수되어 성령이 임하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의 권위 아래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적으로 죄를 짓거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러한 사실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안수의 의미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눅 13:13)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낫는데 왜 안수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병자들에게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안수를 하셔서 병이 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인간과 접촉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듯 아주 깊은 뜻이 있는데 요즈음은 안수를 함부로 남발을 합니다. 자기가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손을 얹어 안수하면서 거룩한 체합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 안수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도 초창기에는 안수를 해서 병이 금방 나아버리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습관적으로 하면 그것은 변질된 것입니다. 복음의 초창기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고 신약의 교회도 그렇고 얼굴빛이 없어진다는 말은 주님이 외면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도 보면 종종 그런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말씀이 열려지면 주님의 교회가 형성되어가고 있고 복음이 전해지고 있지만 앞으로 만일 세월이 흘러 주님 오시는 것이 100년 후쯤 된다면 주님의 얼굴빛이 우리에게도 숨겨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진정한 교회이고 복음이 진짜로 전해지고 있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변질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교회사 속에서 보게 됩니다.
이 교회 역사를 보면 100년 이상 지속한 신앙운동이 별로 없습니다. 복음의 한 세대가 지나가면서 점차 복음이 빛을 잃게 되고 순수성이 사라지면서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말씀을 전해도 이론으로 그쳐 버리고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차츰차츰 세상적으로 교회가 변해가는 것입니다. 장로교나 그밖의 교파도 처음 출발할 때는 왕성한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형식화되면서 힘을 잃어버리고 나중에는 그 전통만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처럼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돌려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현재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젊은 세대들만이 자라서 교회를 이끌어 간다고 합시다. 그때쯤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참으로 지속되려고 하면 현재 젊은이들 속에서 주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 어떤 인물들이 일어나 계속적으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사물을 보면 깨끗한 것일수록 변질이 잘 되는데 복음이 원래 깨끗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변질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도 부패의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물질에 치중을 하고 마음이 쾌락에 빠져 있는 경향이 상당히 있는 것같습니다. 처음에 우리 안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숫자가 얼마 안되었지만 그때는 매우 깨끗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숫자가 많다 보니 잘못된 부분도 많고 여러 가지 반성할 점도 많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참으로 죄를 뉘우치고 잘못된 부분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잃어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