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저희 귀인으로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저희 모든 방백으로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저희로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초개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은 화염같이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저희를 두렵게 하소서 여호와여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저희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18)
이 시편 83편은 여호사밧 왕 때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지어졌습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혹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고하여 가로되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 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사람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 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 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대하 20:1-20)
시편 82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아합 왕의 권유로 함께 전쟁을 하러 나갔다가 선지자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었지만 우상숭배를 했던 악한 아합 왕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여호사밧은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적군의 주축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과 모압이었는데 그들은 본래 롯의 후예들이었습니다. 롯은 자기의 두 딸들과 관계를 가져 자식을 낳았는데 하나는 모압이고 하나는 암몬이었습니다. 현재 요르단의 수도가 암만인데 이 암만은 암몬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세일이라는 나라는 에돔 족속으로 에서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적군인 암몬과 모압과 에돔도 전부 아브라함의 계통들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계통이고 세일 산에 거하는 에돔 족속도 역시 아브라함의 계통인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통들이 북쪽에 있는 다메섹, 아말렉과 연합하여 여호사밧 왕을 공격했습니다. 다메섹과 아말렉도 역시 에돔 족속에서 갈라져 나간 미디안 족속입니다.
그들은 굉장히 숫자가 많았고 유다는 숫자가 적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러한 위기에 처했을 때에 모든 백성에게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5-9)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낙성식을 할 때에 하나님께 "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이 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는 내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 그 기도가 나오는데 여호사밧은 솔로몬의 기도를 상기하면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대로 우리가 부르짖으니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처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군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6-39)
그런데 모압과 암몬은 옛날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그 나라를 통과하려고 할 때에 먹을 것을 달라고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셔서 그냥 비켜서 지나갔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유다를 진멸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 20:11-13)
유다가 이렇듯 위기에 처했을 때 야하시엘이라는 한 선지자가 나타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너희가 전쟁하지 않아도 승리한다."는 예언을 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 20:20-21)
여호사밧의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를 의뢰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선지자를 믿고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승리가 굳혀졌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가대를 세워 악기를 울리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적군들이 서로 싸우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략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기쁨 가운데서 돌아가는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83편은 기도의 내용이 더욱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시:83:1)
여기에 보면 극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침묵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다. 마치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는데도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고 계속 주무시기만 하시는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너무도 답답하여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가령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아브라함에게 어떤 신앙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때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한 단계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떠나보내고 세상에서 분리되는 만큼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가고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이삭을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에 그 믿음이 절정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선지자나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나고 그로 말미암아 인도를 받아 가면서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있었습니다. 여호사밧 왕 당시에도 연합군이 유다를 완전히 포위를 하여 공격하려고 하는 지경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에도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어떤 원리가 있습니다. 시험과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지도 않고 그 뜻을 헤아리지도 못하는 고통스러운 기간을 거쳐서 나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오는 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미리 방비를 하셔서 연합군들이 접근을 못하게 만들어버리시면 좋을텐데 왜 그렇게 해주시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포위당하도록 묵묵히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포기되는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모든 백성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고 자신의 어떤 힘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저 많은 원수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능력과 힘이 완전히 포기되었을 때 나타나십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힘인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남아 있을 때는 믿음이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이 떨어졌을 때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자기 힘이 남아 있으면 그 힘을 의지합니다. 돈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돈이 있을 때까지는 주님을 의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 머리가 잘 돌아간다든지 어떤 수완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걸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칫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고 만사가 잘 되고 있을 때 자기의 믿음이 좋아서 그런 줄 알고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정말 어려움을 당하면 그때에 비로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음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하는 이 말씀은 굉장히 심각한 지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간구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하나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이 캄캄하고 답답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렇듯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시 83:2-4)
여기에 보면 "주의 숨긴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이 숨겨 놓았으면 든든하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원수가 그를 찾을 수도 없을텐데 왜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육신적인 뜻으로만 읽으면 그 내용을 착각하기 쉽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에 보면 몸과 영혼이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는 자는 사탄인데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못 죽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숨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 구절을 우리의 육신적인 몸이 숨겨졌다고 생각을 하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 환경, 즉 육신적인 환경이 나빠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문을 품는 경향이 많은데 그것은 육신적인 면에만 치중을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여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 육신이 다시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았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도 우리의 육신이 실제로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육신은 아직 살아 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옛 생명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함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에서 감추어진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구원받은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숨겨진 자' 라는 말은 우리의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주님의 일꾼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 육신은 노출되어 있고 그 육신 안에 있는 영혼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얼굴도 보고 우리 이름도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을 모릅니다. 호적상으로 고향이 어디고 주소는 어디고 하는 겉모습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만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생명의 비밀은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날 우리들이 거듭난 그 날부터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여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시 83:3)
모압이나 압몬이나 에돔 나라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나타난 사건처럼 그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직접 나타내시는 계기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화살도 한번 쏘지 않고 칼도 한번 대지 않고 완전히 승리해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말미암아 이방의 모든 무리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운 지경에 빠지도록 그냥 두셨던 것은 그러한 위기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 민족이 하나님이 숨겨놓은 자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나타난 유대 민족, 겉으로 나타난 여호사밧 왕만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고서 여호사밧 왕과 그 백성을 치려고 연합전선을 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늘에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감추어졌다"는 말씀대로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육신적으로 핍박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숨겨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숨겨져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아무리 우리 몸을 죽여도 우리 안에 숨겨진 이 생명은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시 83:4)
암몬과 모압과 에돔 연합군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켜 다시는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조차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이름은 옛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할 때에 생겨났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힘을 겨뤄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은 굉장히 중요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이삭과 야곱을 거쳐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하면서 하나의 민족이 형성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야곱의 생애를 보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실지로 사용한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열두 형제가 완전히 형성되고 나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데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라는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이름이 아니고 그 민족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매우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지금은 교회가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주님의 이름이 있고 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처럼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될 때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천사와 씨름을 하여 새로운 이름을 받은 것은 이렇듯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고 진정한 교회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여럿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는 역사가 있는 교회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압이나 암몬, 에돔 등의 나라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공격해온 이유가 이스라엘로 다시는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고 그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적으로는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는 곳, 실지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신앙생활의 원리가 실제로 적용되어가는 교회에 늘 고난과 핍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9)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신 곳이 성전인데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가 바로 성전입니다. 이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의 목표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는 곳이니까 사탄의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교회를 멸망시켜 버리려고 하고 교회가 제대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사탄은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버리려고 꾸준히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무리 외부적으로 공격해도 교회가 없어지지 않으니까 방법을 바꿔서 교회 속으로 들어가서 교회를 내부적으로 부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는 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난 후 전쟁에 이긴 것을 보고 기독교를 공인하고 신하들과 군인들에게 강제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핍박받던 교회가 자유가 오면서 외적으로는 크게 번창하기 시작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썩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버가모 시대 교회이고 그 다음에 천주교 전성시대인 중세 암흑 시대, 두아디라 시대가 됩니다.
교회는 이처럼 항상 사탄의 공격을 받는 표적입니다. 우리는 개인이 핍박받는 것보다는 교회가 핍박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물론 개인도 교회의 일원으로서 성령이 일하시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지만 사탄의 가장 큰 표적은 교회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고 나서 핍박을 면하려면 교회를 떠나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핍박받는 것이 아니고 이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탄이 교회를 없애려고 해도 중세 암흑 시대 속에서도 진정한 복음의 역사는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져왔습니다.
천주교에 다니면서 영세를 받았더라도 구원받으면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재침례파인데 그러한 진정한 복음주의 운동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시대는 겉으로는 거의 교회가 없어진 것 같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실은 네가 부요하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겁이 날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세계 정부가 생겨나면 그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에서 성경에 기록된 세상 끝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세계가 점점 더 긴밀하게 하나가 되어가고 강력한 세계 정부가 들어서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이러한 시대의 표적들을 지적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까 우리를 주목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때에 우리에게 더 큰 핍박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때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 설령 순교한다고 할지라도 참으로 복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통 마음을 가지고는 순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시 83:5-8)
이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도 주님이 핍박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죽 나오는 민족들의 이름을 보면 전부 아브라함의 계통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으로 말미암아 모압과 암몬이 생겨났고 그 다음에 야곱의 형 에돔으로 말미암아 에돔 족속이 생겨났고 아브라함의 서자로 이스마엘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아말렉은 에돔 계통인데 그 역시 야곱의 형의 계통입니다. 그러나 블레셋과 두로와 그발은 아브라함과 관계없는 이방 족속들입니다. 앗수르는 아브라함의 후처의 계통입니다. 그러니까 롯 자손인 모압과 암몬이 주동이 되어 그밖의 유대 나라의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가 연합해서 여호사밧 왕을 치려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계통이 일어나 세상 세력을 동원해서 여호사밧 왕과 유대나라를 치려고 한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재 우리들에게도 나타납니다. 모임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에게서 나간 사람들이 구원 안 받은 사람들과 합작해서 우리를 공격한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모임에 같이 있다가 분쟁을 일으키고 나간 것은 육신의 일입니다.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임을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계통이 세상과 합작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것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육신이 있는데 그 육신이 세상으로 기울어지면서 세상과 합작하여 속에 있는 새 생명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이 세상을 좋아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합니다. 육신이 이처럼 세상과 짝하고 세상을 향해서 가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근심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느니라"고 하였는데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이 있는데 우리 육신은 항상 세상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히 4:4-5)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시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하십니다. 참 사랑은 질투가 있고 시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부부가 그 한쪽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친하게 지내며 어떤 관계를 가져도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사랑을 아주 포기한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있으면 질투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으로 가면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이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 하십니다. 우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세상과 짝을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새 생명을 말살시키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계통의 사람들이 세상과 합작을 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영적인 투쟁을 의미합니다.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저희 귀인으로 오렙과 스엡 갈게 하시며 저희 모든 방백으로 세바와 살문나와 갈게 하소서"(시 83:9-11)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워 이긴 사건이 나옵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삿 4:7-9)
여기서 시스라라는 사람은 모세의 처남인 호밥의 자손 겐 사람 집에 가서 잠자고 있을 때 말뚝에 박혀 죽습니다.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 숙곳 방백들이 가로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기드온이 가로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거기서 브누엘에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일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좇아 거기 있더라 적군이 안연히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편 장막에 거한 자의 길로 올라가서 적군을 치니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추격하여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군대를 파하니라"(삿 8:4-12)
그 다음 내용을 계속 읽어보면 살문나가 완전히 죽임을 받은 사건이 나옵니다. 이 기드온의 군사 삼백 명이 미디안 군사 수십 만 명을 죽이고 두 왕 세바와 살문나도 죽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런 사실을 예를 들어서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저희로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초개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화염같이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저희를 두렵게 하소서"(시 83:12-15)
"적들이 하나님의 목장을 자기들의 소유로 삼는다" 하였는데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가 목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다는 말씀이 나오고 또 요한복음 10장에는 내가 참 목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아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교회는 목장이요 주님은 양무리를 치는 목자이신 것입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 있는 양무리를 해쳐서 어떻게든 목자로부터서 빼앗으려고 온갖 음모를 꾸밉니다. 결국은 여호사밧의 기도는 그대로 응답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은 찬송만 부르고 전쟁은 하지 않았는데도 적군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전부 멸망해 버리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여호와여 수치로 저회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저희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6)
결국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의 이름이 온 세계 위에 뛰어나게 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렇게 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여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 2:1-3) 라는 기사처럼 온 세상이 허사를 경영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세상 일들을 보면 완전히 헛된 일에 바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정신을 빼앗기고 거기에 몰두하면 정말 큰 손해를 볼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큰 목적은 이 세상을 예수님의 이름 아래 무릎을 꿇리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 머지 않아서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한 말씀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는 육신과 성령의 내면적인 싸움이 있고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공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는 교회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공격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주 악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아주 더러운 모양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만 우리 안에 감추어진 비밀은 세상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장래에 주님이 영광스럽게 온 세상에 나타나실 때는 우리도 그 이름과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를 원수시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정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고 탄식할 때가 옵니다. 정말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비록 현실 속에서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참으로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로서 주님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온전히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믿음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시편 83편은 여호사밧 왕 때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지어졌습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혹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고하여 가로되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 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사람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 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 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대하 20:1-20)
시편 82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아합 왕의 권유로 함께 전쟁을 하러 나갔다가 선지자에게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이었지만 우상숭배를 했던 악한 아합 왕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여호사밧은 적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적군의 주축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과 모압이었는데 그들은 본래 롯의 후예들이었습니다. 롯은 자기의 두 딸들과 관계를 가져 자식을 낳았는데 하나는 모압이고 하나는 암몬이었습니다. 현재 요르단의 수도가 암만인데 이 암만은 암몬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세일이라는 나라는 에돔 족속으로 에서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적군인 암몬과 모압과 에돔도 전부 아브라함의 계통들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계통이고 세일 산에 거하는 에돔 족속도 역시 아브라함의 계통인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통들이 북쪽에 있는 다메섹, 아말렉과 연합하여 여호사밧 왕을 공격했습니다. 다메섹과 아말렉도 역시 에돔 족속에서 갈라져 나간 미디안 족속입니다.
그들은 굉장히 숫자가 많았고 유다는 숫자가 적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이러한 위기에 처했을 때에 모든 백성에게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5-9)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낙성식을 할 때에 하나님께 "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이 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는 내용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 그 기도가 나오는데 여호사밧은 솔로몬의 기도를 상기하면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대로 우리가 부르짖으니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처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군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왕상 8:36-39)
그런데 모압과 암몬은 옛날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그 나라를 통과하려고 할 때에 먹을 것을 달라고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시키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않으셔서 그냥 비켜서 지나갔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유다를 진멸하려고 했습니다.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대하 20:11-13)
유다가 이렇듯 위기에 처했을 때 야하시엘이라는 한 선지자가 나타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너희가 전쟁하지 않아도 승리한다."는 예언을 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대하 20:20-21)
여호사밧의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를 의뢰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선지자를 믿고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승리가 굳혀졌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가대를 세워 악기를 울리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적군들이 서로 싸우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노략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기쁨 가운데서 돌아가는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83편은 기도의 내용이 더욱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극한 어려움을 당할 때에 침묵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다. 마치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는데도 예수님은 뱃고물을 베고 계속 주무시기만 하시는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너무도 답답하여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가령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특별히 아브라함에게 어떤 신앙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때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한 단계 높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떠나보내고 세상에서 분리되는 만큼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가고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이삭을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에 그 믿음이 절정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선지자나 지도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나고 그로 말미암아 인도를 받아 가면서 사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있었습니다. 여호사밧 왕 당시에도 연합군이 유다를 완전히 포위를 하여 공격하려고 하는 지경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에도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어떤 원리가 있습니다. 시험과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지도 않고 그 뜻을 헤아리지도 못하는 고통스러운 기간을 거쳐서 나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오는 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미리 방비를 하셔서 연합군들이 접근을 못하게 만들어버리시면 좋을텐데 왜 그렇게 해주시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완전히 포위당하도록 묵묵히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포기되는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모든 백성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고 자신의 어떤 힘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저 많은 원수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능력과 힘이 완전히 포기되었을 때 나타나십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런 힘인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남아 있을 때는 믿음이 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이 떨어졌을 때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자기 힘이 남아 있으면 그 힘을 의지합니다. 돈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돈이 있을 때까지는 주님을 의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 머리가 잘 돌아간다든지 어떤 수완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걸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칫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고 만사가 잘 되고 있을 때 자기의 믿음이 좋아서 그런 줄 알고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정말 어려움을 당하면 그때에 비로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음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하는 이 말씀은 굉장히 심각한 지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간구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하나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이 캄캄하고 답답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렇듯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주의 숨긴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이 숨겨 놓았으면 든든하고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원수가 그를 찾을 수도 없을텐데 왜 이렇게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육신적인 뜻으로만 읽으면 그 내용을 착각하기 쉽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에 보면 몸과 영혼이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는 자는 사탄인데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못 죽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숨겨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편 구절을 우리의 육신적인 몸이 숨겨졌다고 생각을 하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인 환경, 즉 육신적인 환경이 나빠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의문을 품는 경향이 많은데 그것은 육신적인 면에만 치중을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여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 육신이 다시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았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죽었고"라는 말도 우리의 육신이 실제로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육신은 아직 살아 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옛 생명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함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에서 감추어진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구원받은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숨겨진 자' 라는 말은 우리의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주님의 일꾼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 육신은 노출되어 있고 그 육신 안에 있는 영혼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얼굴도 보고 우리 이름도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을 모릅니다. 호적상으로 고향이 어디고 주소는 어디고 하는 겉모습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만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생명의 비밀은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날 우리들이 거듭난 그 날부터는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모압이나 압몬이나 에돔 나라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나타난 사건처럼 그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직접 나타내시는 계기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화살도 한번 쏘지 않고 칼도 한번 대지 않고 완전히 승리해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말미암아 이방의 모든 무리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운 지경에 빠지도록 그냥 두셨던 것은 그러한 위기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 민족이 하나님이 숨겨놓은 자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나타난 유대 민족, 겉으로 나타난 여호사밧 왕만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고서 여호사밧 왕과 그 백성을 치려고 연합전선을 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늘에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감추어졌다"는 말씀대로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육신적으로 핍박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숨겨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숨겨져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아무리 우리 몸을 죽여도 우리 안에 숨겨진 이 생명은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암몬과 모압과 에돔 연합군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켜 다시는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조차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이름은 옛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할 때에 생겨났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힘을 겨뤄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 이름은 굉장히 중요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이삭과 야곱을 거쳐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변하면서 하나의 민족이 형성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야곱의 생애를 보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실지로 사용한 것은 훨씬 후의 일입니다. 열두 형제가 완전히 형성되고 나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데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라는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이름이 아니고 그 민족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매우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지금은 교회가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주님의 이름이 있고 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처럼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될 때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천사와 씨름을 하여 새로운 이름을 받은 것은 이렇듯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거기에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고 진정한 교회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여럿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이름이 주어지는 역사가 있는 교회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압이나 암몬, 에돔 등의 나라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공격해온 이유가 이스라엘로 다시는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고 그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적으로는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는 곳, 실지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 받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신앙생활의 원리가 실제로 적용되어가는 교회에 늘 고난과 핍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9)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신 곳이 성전인데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가 바로 성전입니다. 이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의 목표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는 곳이니까 사탄의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교회를 멸망시켜 버리려고 하고 교회가 제대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사탄은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버리려고 꾸준히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무리 외부적으로 공격해도 교회가 없어지지 않으니까 방법을 바꿔서 교회 속으로 들어가서 교회를 내부적으로 부패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는 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난 후 전쟁에 이긴 것을 보고 기독교를 공인하고 신하들과 군인들에게 강제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여태까지 핍박받던 교회가 자유가 오면서 외적으로는 크게 번창하기 시작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완전히 썩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버가모 시대 교회이고 그 다음에 천주교 전성시대인 중세 암흑 시대, 두아디라 시대가 됩니다.
교회는 이처럼 항상 사탄의 공격을 받는 표적입니다. 우리는 개인이 핍박받는 것보다는 교회가 핍박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물론 개인도 교회의 일원으로서 성령이 일하시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지만 사탄의 가장 큰 표적은 교회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고 나서 핍박을 면하려면 교회를 떠나면 됩니다.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핍박받는 것이 아니고 이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탄이 교회를 없애려고 해도 중세 암흑 시대 속에서도 진정한 복음의 역사는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져왔습니다.
천주교에 다니면서 영세를 받았더라도 구원받으면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재침례파인데 그러한 진정한 복음주의 운동이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시대는 겉으로는 거의 교회가 없어진 것 같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실은 네가 부요하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겁이 날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세계 정부가 생겨나면 그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에서 성경에 기록된 세상 끝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세계가 점점 더 긴밀하게 하나가 되어가고 강력한 세계 정부가 들어서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이러한 시대의 표적들을 지적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까 우리를 주목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때에 우리에게 더 큰 핍박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때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 설령 순교한다고 할지라도 참으로 복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통 마음을 가지고는 순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도 주님이 핍박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죽 나오는 민족들의 이름을 보면 전부 아브라함의 계통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으로 말미암아 모압과 암몬이 생겨났고 그 다음에 야곱의 형 에돔으로 말미암아 에돔 족속이 생겨났고 아브라함의 서자로 이스마엘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아말렉은 에돔 계통인데 그 역시 야곱의 형의 계통입니다. 그러나 블레셋과 두로와 그발은 아브라함과 관계없는 이방 족속들입니다. 앗수르는 아브라함의 후처의 계통입니다. 그러니까 롯 자손인 모압과 암몬이 주동이 되어 그밖의 유대 나라의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가 연합해서 여호사밧 왕을 치려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계통이 일어나 세상 세력을 동원해서 여호사밧 왕과 유대나라를 치려고 한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재 우리들에게도 나타납니다. 모임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에게서 나간 사람들이 구원 안 받은 사람들과 합작해서 우리를 공격한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모임에 같이 있다가 분쟁을 일으키고 나간 것은 육신의 일입니다.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임을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계통이 세상과 합작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것과 같은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육신이 있는데 그 육신이 세상으로 기울어지면서 세상과 합작하여 속에 있는 새 생명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은 이 세상을 좋아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합니다. 육신이 이처럼 세상과 짝하고 세상을 향해서 가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근심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느니라"고 하였는데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이 있는데 우리 육신은 항상 세상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히 4:4-5)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시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하십니다. 참 사랑은 질투가 있고 시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부부가 그 한쪽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친하게 지내며 어떤 관계를 가져도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사랑을 아주 포기한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있으면 질투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으로 가면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이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 하십니다. 우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세상과 짝을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새 생명을 말살시키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계통의 사람들이 세상과 합작을 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영적인 투쟁을 의미합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워 이긴 사건이 나옵니다.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삿 4:7-9)
여기서 시스라라는 사람은 모세의 처남인 호밥의 자손 겐 사람 집에 가서 잠자고 있을 때 말뚝에 박혀 죽습니다.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 숙곳 방백들이 가로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기드온이 가로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거기서 브누엘에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일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좇아 거기 있더라 적군이 안연히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편 장막에 거한 자의 길로 올라가서 적군을 치니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추격하여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군대를 파하니라"(삿 8:4-12)
그 다음 내용을 계속 읽어보면 살문나가 완전히 죽임을 받은 사건이 나옵니다. 이 기드온의 군사 삼백 명이 미디안 군사 수십 만 명을 죽이고 두 왕 세바와 살문나도 죽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런 사실을 예를 들어서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적들이 하나님의 목장을 자기들의 소유로 삼는다" 하였는데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교회가 목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다는 말씀이 나오고 또 요한복음 10장에는 내가 참 목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아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교회는 목장이요 주님은 양무리를 치는 목자이신 것입니다. 사탄은 교회 안에 있는 양무리를 해쳐서 어떻게든 목자로부터서 빼앗으려고 온갖 음모를 꾸밉니다. 결국은 여호사밧의 기도는 그대로 응답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은 찬송만 부르고 전쟁은 하지 않았는데도 적군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전부 멸망해 버리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의 이름이 온 세계 위에 뛰어나게 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렇게 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여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 2:1-3) 라는 기사처럼 온 세상이 허사를 경영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세상 일들을 보면 완전히 헛된 일에 바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정신을 빼앗기고 거기에 몰두하면 정말 큰 손해를 볼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큰 목적은 이 세상을 예수님의 이름 아래 무릎을 꿇리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 머지 않아서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한 말씀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는 육신과 성령의 내면적인 싸움이 있고 외부적으로는 세상의 공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는 교회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공격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아주 악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아주 더러운 모양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만 우리 안에 감추어진 비밀은 세상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장래에 주님이 영광스럽게 온 세상에 나타나실 때는 우리도 그 이름과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를 원수시하고 공격했던 사람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정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하고 탄식할 때가 옵니다. 정말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비록 현실 속에서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참으로 영광스러운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로서 주님 안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온전히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믿음을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