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5편] 진정한 회개와 영적 부흥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셀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시 85:1-13)


 이 시편 85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에서 일차적으로 돌아왔을 때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해방령을 내려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고토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어보면 3절까지는 "해주셨나이다, 돌이키셨나이다, 돌아오게 하셨음이니이다"라는 과거 시제로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회복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4절부터는 "분노를 그치소서" 라든지 '삼으리로다' 라는 미래형으로 완전한 회복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다시 돌아오는 이스라엘 민족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셀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시 85:1-3)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은 특히 우상숭배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죄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죄들 때문에 포로로 잡혀간 것은 아니고 특별히 그들이 이방 신을 섬기고 우상 숭배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생활 70년만에 바벨론 왕 다음에 일어난 페르샤(파사)왕 고레스에 의해서 해방령이 내려지자 이스라엘 민족이 그때부터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징계하신 후에 그들의 죄를 은혜로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이 머물러 있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과 구원을 위한 간구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시 85:4-7)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고토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완전히 예루살렘을 복구하는 것은 아주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보니 사마리아 지역에는 적들이 버티고 있고 그 밖에도 여러 원수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아왔지만 성전이 회복되어야만 참된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아직은 구원의 역사가 완성된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현재의 이스라엘도 보면 1948년에 독립을 하고 UN에 가입했지만 그 후에도 계속 전쟁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 전쟁의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단시일 내에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신문과 팜플렛을 보니까 이란이 미국에서 돈 찍어내는 기계와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위조지폐를 마구 찍어내서 그 돈으로 러시아와 중국과 북한에서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들을 차지하고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시리아와 레바논에게 많은 돈과 무기를 대주어 거룩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서 앞으로 전쟁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에 흩어진 것은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죄 때문입니다. 그걸 보면 구약 시대에 우상숭배하는 죄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죄가 일맥상통하는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천 년 동안 그들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온 세계에 흩어졌다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다시 돌아왔고 또 돌아오고 있는 상태이지만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믿지 않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번 더 큰 심판으로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처럼 갑자기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다가 페르시아에 의해서 해방을 받아서 다시 돌아왔지만 그들은 온전히 성전을 다시 건설하지 못했습니다. 학개나 하박국을 읽어보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도 육신적으로 편안하게 사는 데만 치중하여 성전을 짓다가 중도에 그만 두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주변에 있는 사마리아의 혼혈족들의 방해도 있었지만 그들의 열심이 식어지고 신앙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 85편의 앞부분에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돌이키셨나이다"라는 과거형으로 말하면서 그 뒤에 또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하시는가를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상식이나 생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 말씀을 따라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시 85:8)


 이스라엘 민족은 칠십 년 동안 고국을 떠나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었습니다. 그때에도 물론 다니엘이나 에스겔 같은 몇몇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가운데서 칠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 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율법책을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하였고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취하여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하였는지라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제 팔일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느 8:1-18)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는 율법책을 몰랐고 읽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못 듣는 가운데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고토로 돌아와서 율법책을 발견하여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고 에스라는 대제사장 겸 학사가 되었는데 이제 에스라가 모든 사람 앞에 나무단을 세워놓고 좌우에 유명한 사람과 같이 서서 율법책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그들이 그 율법책을 읽고 해석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그 율법책에 씌여진 하나님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너무도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면서 통곡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영적 부흥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느 8:8-9)


 그때 에스라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백성에게 오늘은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그리고 이제 잔치를 열어 즐거워하고 음식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주면서 함께 먹고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천년왕국의 그림자 - 초막절


이 사건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형성되고 기쁨이 넘친 것과 비슷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교회가 형성되고 성도들이 서로 물질을 나누어주고 교제를 가지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일이 물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만 이러한 새로운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동안 그들이 율법책을 읽지 못해 율법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다시 그 율법책의 말씀을 읽고 해석해 주었을 때 그들이 살아온 과거를 율법에 비추어 보면서 크게 뉘우치며 회개하고 통곡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초막절에 들어가는 성일로 결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13절 이하에는 초막절 지키는 행사를 하게 됩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나와 광야 생활한 것을 기념해서 들판에 나가 나무가지를 꺾고 초막을 만들어서 일주일 간 거기서 지내는 절기가 초막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 이후로 그렇게 큰 초막절을 지킨 적이 없을 만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초막절을 지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이기도 하지만 장래에 이스라엘 민족이 초막절을 지킬 것에 대한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진짜 초막절을 지키는 때가 바로 천년왕국 때입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유월절, 무교절, 초곡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의 일곱 절기가 나오는데 그중 초막절은 마지막 일곱째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 성령이 오셔서 유월절이 시작되고 인류 역사의 마지막 때에 다시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면 초막절을 지키게 됩니다. 천년왕국은 바로 초막절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로 온 세계에 흩어질 것에 대한 예표이고 그 다음에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다시 초막절을 지키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8)


 그들은 정말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새롭게 부흥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보면 종교개혁도 그렇고 언제나 이 기독교가 곁길로 가다가 새로워지는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재발견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기적으로 볼 때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현재 이 시대의 대부분의 교파들은 성경을 손에 들고 읽지만 성경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장로교회 목사 생활을 했지만 이 성경 말씀이 참으로 성령 안에서 발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성령 안에서 발견이 되었을 때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나 칼빈이나 츠빙글리 같은 이들이 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죤 번연이 참으로 독창적이고 놀라운 운동을 전개한 것도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 운동은 성경 말씀이 새롭게 알아지면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이스라엘로 돌아왔지만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모르고 있다가 에스라 제사장에 의해서 그 율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말씀이 재발견된 것입니다. 모세 때에 들은 그 율법이 재발견이 된 것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그 율법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재발견이 되었을 때 그들은 정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절기 즉, 하나님의 성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초막절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민이라고 자처하면서 자부심을 가지지만 아직도 성경 말씀이 참으로 발견이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성경 말씀이 참으로 발견이 되는 날이 옵니다. 대환난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령의 역사가 다시 한번 있습니다.



아직은 다 성취되지 않고 남아 있는 요엘의 예언 - 이른 비와 늦은 비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14-24)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니까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이상한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 중에 말하기를 이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비방하자 베드로가 일어서서 이 일은 요엘서 2장에 있는 말씀이 응한 것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증거를 한 것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갈을 것이라"(욜 2:23)


 여기에 보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갈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28-32) 


 여기에 "여호와의 이름"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져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방언도 하고 이적이 일어났다고 했지만 이 베드로의 설명은 완전한 것은 못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라는 말씀은 오순절 때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순절에 달빛이 핏빛같이 되고 해가 어두워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 아직은 다 성취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일부분이 오순절 당시에 성령이 내리심으로 응해졌고 그 다음 부분은 대환난 때에 자연계에 큰 변동이 생길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이중, 삼중적으로 예언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응하는 것이 아니고 다음에 또 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말했는데 이른 비는 가을 비입니다. 이스라엘의 농사 짓는 것은 우리와는 반대입니다. 이른 비는 가을 비고 늦은 비는 여름 비입니다. 여름 비는 추수 때의 비고 가을 비는 곡식 뿌릴 때의 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른 비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의 단비를 이 세상에 뿌리셨는데 그 다음에 늦은 비는 이스라엘 민족이 7년 대환난을 통과할 때 성령이 다시 한번 역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록 7장을 읽어보면 14만 4천이 인을 받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한번 성령이 내리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고 과연 이천 년 전에 오셨던 예수가 자기들의 메시아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서 12장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통곡을 하게 되는 때가 오고 샘물이 솟아나서 그들을 깨끗게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현재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에서 돌아와서 나라가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계획을 잘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7년 대환난에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멸망해야 되는데 중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일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역사는 이 세상 끝에 가서 되어질 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이 땅에 베풀어지는 은혜와 진리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시 85:9-11)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내용입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은 은혜를 말합니다. 긍휼과 진리가 한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같이 만나고 한곳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우리 인간들이 보는 가운데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와 진리가 같이 만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은혜도 없고 진리도 없습니다. 사람 자체는 진리나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진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를 그 몸에 담아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이 세상은 은혜와 진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 안에서만 은혜가 나타나고 진정한 진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죄가 들어와서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들이 전부 다 사탄의 조종을 받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탄에게는 은혜나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참인데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이 세상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현재 이 세상은 복잡한 경제 문제나 정치 군사적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며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실지로 다 거짓입니다. 본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는 은혜와 진리가 있지만 인간들은 그 은혜와 진리에 연결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진리이신 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삭막한 세상, 은혜가 없는 세상, 사랑이 없는 세상, 자비가 없는 세상에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오셔서 사람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들은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도 은혜와 진리가 만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은혜와 진리가 있는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졌고 거기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가끔 선행을 베풀어 남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원한 은혜와 진리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긍흘과 진리가 갈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의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세움을 받은 것이라"(롬 3:22) 하나님이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은 인간들의 죄성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화평이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천국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 안에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접촉하고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너무너무 큰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진리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시 85:11)


 성경에 진리라는 말 아래는 항상 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솟아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진리입니다. 이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죄를 심판하는 진리, 마귀를 멸망시키는 진리, 죄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진리 ,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진리를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진리가 하늘에만 있다면 사람과 영원히 연결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이룩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확실한 목적을 두시고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탄이 인간을 유혹하고 이 세상이 죄악 세상이 될 것을 이미 다 아셨지만 한편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사 진리를 솟아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쩌다 우리가 이 귀한 진리에 접할 수 있었는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종종 인도에서 힌두교와 회교가 싸우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것도 전부 다 진리를 찾는다는 명분하에서 저질러지는 일입니다. 그 사람들은 종교 생활을 철저하게 하는데 굉장히 사납고 잔인합니다. 회교도 구약의 사상대로 철저히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다는 원리대로 살고 있습니다. 회교는 한 손에는 코란경을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전도했습니다. 회교국에 가면 죄는 용서가 안됩니다. 가차없이 당장에 죽여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을 보십시오. 얼마나 가혹한 전쟁이었습니까. 성지를 탈환하려면 회교를 쳐부셔야 한다고 갔다가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것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실지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부 사탄에게 넘어가고 완전히 죄악에 지배당했습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진리를 바로 아는 사람은 참으로 드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았을 때에 진리와 은혜가 우리 마음에 깃들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신앙생활해 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육신은 아직도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다분히 육신은 죄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죄성 때문에 이 세상과 타협을 하고 진리를 역행하는 삶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성경을 읽고 진리의 본체이신 주님을 알아가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의미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닥다리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니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45-51)


 아마도 이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야곱의 기사를 읽고 있다가 빌립의 전도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습니까?"하는 생각은 유대인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시지 나사렛에서 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다나엘은 성경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자기가 마음에 생각한 그대로를 얘기했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자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야곱이 형 에서의 칼을 피해서 멀리 하란으로 도망을 갈 때에 벧엘 들판에서 잠을 잤는데 꿈에 사닥다리가 나타나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베개했던 돌에다가 기름을 붓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이 그런 꿈을 꾸었지만 그 실상은 예수님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 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하늘과 이 땅을 이어주사 성령이 오시도록 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이 죄악 세상은 절대로 연결될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이룩하셨습니다. "의인은 하늘에서 하감하셨도다"하였는데 하나님의 세계인 하늘과 인간의 세계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연결이 되어 땅에서는 진리가 이루어졌고 위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입니다.

 참 하나님만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죄악 세상과 아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늘이 연결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는 그 길밖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에 그 캄캄하던 마음 속에도 은혜가 깃들이고 은혜와 진리가 마음 속에서 같이 만나는 놀라운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단비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시 85:12)


 여기에서 좋은 것이 뭘까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라엘에 응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 2:21-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물리적으로 이스라엘 땅이 메마르고 황무한 땅이지만 때가 오면 옥토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실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천년 동안 사막이었던 이스라엘 땅이 완전히 옥토로 변하여 열매가 맺고 곡식이 풍성한 땅으로 변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물리적인 것 이면에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황무지 같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라고 했는데 우리 이방사람은 마음이 사막과 같았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진리도 없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응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의 단비입니다. 성령의 단비가 내려서 성령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참으로 이 진리를 알기 전에는 우리 마음이 삭막하고 사막 같았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정말 한심스럽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마음.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닫고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에 우리 마음이 윤택해지고 즐거움과 소망이 생기고 나아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입니다만 영적으로 지금 우리들에게도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는데 이는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 성경에 보면 마실 물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단비를 받아서 열매를 맺게 되는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라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시 85:13)


 이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녀가신 후로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못 보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 발자취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모든 의와 진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앞서서 우리를 인도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악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칼 막스 같은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 무신론과 공산주의의 길로 나아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종교도 악인의 발자취입니다. 의가 인도해 주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확실한 말씀에 섰으니 잠시라도 이 거룩한 길에서 벗어나 곁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고난과 영광의 길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1-24)


 주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잠시 동안의 이 고난은 장차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의의 길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죄가 가득찬 세상인데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싫어하면 의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죄에 풍덩 빠져서 살면 육신적으로는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주님이 주시는 영광과 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발자취를 남기시고 가셨습니다. 의의 길은 주님이 본을 보이신 고난의 발자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주님의 발자취를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니까 잠시 잠깐 고난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단련하시기 위한 의의 길이니 열심을 내어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