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8편] 진정한 기도의 표본- 고라 자손 헤만의 기도

[시편 88:1-18]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사망자 중에 던지운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수 있으리이까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고라 자손 헤만의 기도


'고라 자손의 찬송시 곧 에스라 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 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 이 기도가 올려졌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극한병으로 기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역대상 2:4-6]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로 말미암아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세라의 아들은 시므리와 에단과 헤만과 갈골과 다라니 모두 다섯 사람이요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베레스의 아들은 헤스론과 하물이요 세라의 아들은 다섯 사람인데 그 중 한 사람이 헤만입니다. 유다 자손 가운데 세라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는 헤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성구사전이나 성경사전을 참조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성경 안에 있는 영적인 깊은 뜻은 나오지 않지만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나 주변 환경에 대해서 알 수 있어 성경을 공부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성경만 읽어도 되겠지만 성경을 상식적으로도 정확하게 아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참고도서를 갖추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 본문의 깊은 뜻도 그 역사적 배경이나 환경을 알면 자연히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빛을 비추어 주는 시편


 시편은 1편부터 150편까지 내용이 시리즈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처럼 이야기가 계속적으로 연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편의 내용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빛을 비추어 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교회에 대한 깊은 뜻을 나타내는 말씀도 많습니다.


 시편 133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편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또 전에 공부한 바 있는 시편 84편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는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구약의 역사적인 배경 아래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에 기록된 오래된 말씀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읽으면 종종 그 속에서 말씀의 깊은 뜻을 알고 답답한 마음이 새롭게 되는 영적인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드리는 기도


이 시편 88편은 저자가 극한 상황 속에서 고뇌하며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88:1-5]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사망자 중에 던지운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이 1절부터 5절까지는 시편 기자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서 거의 살 소망이 없어진 것 같은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지만 아무리 해도 회복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이제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는 심령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중요성


[시편 88:1-2]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누가 기도에 대해서 쓴 글을 보았는데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임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도가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명 없는 형식적인 기도를 비판하는 것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는 기도가 별로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없이는 신앙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이상한 생활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꼭 무릎을 꿇고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기도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러한 형식적인 기도를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기도- 심령이 깨어 있는 상태


성경에 보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는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강조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1:34-36]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큰 환난의 시대가 올 것을 전제로 하고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 기도해도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의 의미를 모르고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깨어 있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심령이 깨어있는 상태가 진정한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운 질병으로 인해 거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영혼의 상태도 아주 곤고한 지경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기자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그의 마음이 오직 구원의 하나님께로만 향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도가 필요하고 또 기도에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출렁이는 바다의 물결 같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5-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 저자가 극한 상황 속에서 왜 이러한 기도를 했으며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극한 어려움을 당하면 다급해서 그냥 아무렇게나 하나님 앞에 무엇을 달라고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가지고 구원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기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 주야로 부르짖었다는 것은 철야기도를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극한 환경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시라는 간절한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께로 늘 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곤고한 환경-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계기


[시편 88:3-4]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이 기도하는 시인이 굉장히 어려운 환경 속에 처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구원받고 나서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정말 이렇게 곤고한 가운데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이렇게 무시무시한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는 분도 있겠지만 그처럼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는 환경이 찾아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떤 빛을 볼 수 있고 주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무사안일하고 만사태평한 때에는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깊은 고민이 있거나 병이 들거나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비로소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전후 좌우를 둘러보아도 사람에게서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이 시편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상태가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생활이 태평스럽고 별로 어려움이 없이 항상 편안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환경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 같으면 완전히 좌절에 빠져 자살할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그러한 환경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간절히 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이처럼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 처할 때에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의지하는 마음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88: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이 시편 기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송장같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구원을 받기는 받았지만 너무 어려운 문제 때문에 그만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로 곤고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왜 그 지경에까지 빠지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천지사방이 완전히 캄캄하고 희망이 전혀 안 보이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가 정작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때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굉장히 짓궂으신 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은 편안한 가운데서 믿음이 전진하도록 되어 있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난을 거치는 과정을 거쳐서 믿음이 성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육신이 꺾여지는 십자가의 길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을 할 때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하는 가운데 너무도 혹독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왜 곧장 평탄하고 빠른 길로 그들을 인도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지 않고 그토록 어려운 과정을 겪도록 하셨을까요?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 우리 시대에도 양상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도 겪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해 가는 가운데 어려움에 부닥치면 어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까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우리 육신이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은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꺾어지고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지금 이 세상은 사탄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사탄의 것이고 우리 육신도 사탄에게 속한 것을 알지만 그래도 육신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이 없이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덤에 누워 있는 죽은 자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 죽는 경험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힘을 꺾는 여러 가지 훈련 과정


[시편 88:5-6]

사망자 중에 던지운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


 6절에서는 갑자기 '나' 라는 말이 '저희' 라는 말로 바뀝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마치 버려진 것과 같은 존재인 '나' 자신을 '저희'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종종 이런 일을 당합니다. 극한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졌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들의 생활 속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외부적으로 아주 심각한 도전과 공격에 직면하게 되고 어떤 때에는 끝없이 솟아나는 육신의 욕심에서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뿌리 깊은 육신의 욕망이 우리 안에는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욕망은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실망과 낙담이 되고 심하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욕심 때문에 절망에 빠지는 내적인 투쟁도 있고 주위 환경에서도 오는 여러 가지 외적인, 정말 견디기 어려운 사정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식구들에게도 말 못할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듣기조차 민망하고 정말 답답한 사정 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부부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고 생각이 달라 충돌과 갈등이 생기고 그만 힘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걸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의 세계라는 것이 매사가 다 형통한 것이 아니고 자꾸자꾸 어려움이 찾아오는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차마 말 못할 사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이 아마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우리 육신의 힘을 꺾는 계기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망치로 육신을 깨뜨리는 훈련입니다. 그 훈련을 이를 악물고 받아 넘겨야 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현재 어떤 환경 속에 있다 하더라도 아주 정직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나님께 드러내놓고 주님께 그 문제를 의뢰하며 자기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부활을 기다리는 자


이 시편에 기록된 "무덤 속에 누워 있다"라는 말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럽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처럼 되어 있는 무덤 속에다가 시체를 보관해둡니다. 부모의 시체가 있는 그곳에 또 자식의 시체도 보관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것을 묘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각각 따로 무덤을 만듭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아름답게 꾸며 놓은 묘지 공원이 있었습니다. 집들을 꾸며놓고 탑들도 세워놓았는데 죽은 사람을 그 속에다 집어 넣고 뚜껑을 닫습니다. 시체가 썩어서 내려앉으면 나중에 또 다른 시체를 넣는데 그 무덤이 외부적으로 보면 그럴 수 없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유럽이나 중동지역의 사람들은 무덤을 그렇게 아름답게 꾸며놓습니다.


 성경에 보면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속에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겉은 아름답게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무덤에 누운 자 같다는 것은 이제 이 세상에서 소망이 다 끊어져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무덤에 누운 자 같은 사람의 유일한 기도는 부활의 소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그러한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


[시편 88:6-7]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기자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죄의 결과요 불충실한 결과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우연히 아니고 육신의 소욕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자기는 완전히 무덤 속에 있는 자 같은 사람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판단하사 철저하게 처리해주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원망을 하지만 이 시편 기자는 그러한 일들이 자기의 육신적인 힘을 처리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극한 환경 속에 있을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로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자는 극한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경험하는 자


[시편 88:8]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여기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겪으신 것과 같은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는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쳤고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다. 베드로도 역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53:3-4]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말할 수 없는 수모와 곤욕과 온갖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모든 사람,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는 완전히 버림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평소에 늘 함께 다니던 열두 제자마저도 다 도망가 버렸고 여인 몇 사람만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최후 모습을 지켜봤을 뿐입니다. 예수님께 떡을 얻어 먹던 그 수많은 군중들,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가버렸습니다. 너무도 싫어 버린 바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돌로 쳐죽였지만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에 좌우에 강도가 두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도 그들처럼 아주 극악무도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임도 역시 그와 비슷한 일들을 당했습니다.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일을 가져다 붙여 거짓되게 선전하여 세상 사람들이 외면을 하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더럽고 가증한 자로 여겨져 오갈 데 없이 갇히게 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릅니다. 가령,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을 그렇게 취급합니다. 환자는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스스로 소리를 치면서 사람들이 자기 옆에 가까이 못 오게 합니다. 완전히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그런 상태가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문둥병자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마귀의 운명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이러한 심각한 지경에 처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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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래서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을 앞두고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같은 땀을 흘리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피 같은 땀을 홀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완전히 쏟아부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광경만을 음미할 수 있을 뿐이고 예수님의 마음속 깊이는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정말 온 세상이 날 버리고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은 쓸쓸하고 외로운 상황 속에서 주님 앞에서 우리도 우리 마음을 물 쏟듯이 붓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험은 주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는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이 시편 기자처럼 주님 앞에 완전히 자신을 맡기고 모든 사정을 아뢸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흑암 중에서 주님의 빛을 우러름


[시편 88:9]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다고 했는데 아마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눈이 많이 쇠했다는 말은 캄캄하고 빛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눈이 캄캄하고 안 보일 정도로 쇠해지는 어려움을 당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눈물이 줄줄 흐를 정도는 경험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 눈물이 뚝뚝뚝 떨어져 잘 안 보일 정도로 울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찌어다


 여기에서 흑암 중에 행한다는 말은 빛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가끔가끔 우리 앞이 캄캄하여 반딧불만큼의 빛도 없는 그런 흑암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께 더욱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두 손을 들었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빛이 없고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극한 환경 속에서도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이 시편 기자의 모습이 얼마나 간절하고 갸륵합니까.

 




산 자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


[시편 88:10]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성경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하나님을 간증하면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아브라함은 끝났지만 그 다음에는 이삭의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십니다.


 이삭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한 사건은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그림자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삭은 이삭대로 하나님의 안위와 평강을 증거했습니다.



 이삭이 죽은 후에는 다시 야곱으로 넘어가서 그 생애에서 하나님이 또 역사하셨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삭과는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야곱은 성격이 간사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많이 동원했습니다. 그러한 야곱이 한편은 자기의 간사한 것이 무너져 가면서 또 한편은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을 통해 이루어져 가는 생애였습니다. 그 나름대로 야곱도 하나님을 간증하고 나타내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삶의 의미도 역시 그들의 신앙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사를 세상에 선포함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기사를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집니다.


[시편 88: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는 주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또 주님의 변치 않는 성실하심을 이 세상에 선포하고 살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


[시편 88: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수 있으리이까


 주님의 의와 성실하심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일은 죽은 자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 일을 하는 것이지 죽어버리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죽은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산다면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16:3]

너는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오정 때에 밤 같이 그늘을 짓고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이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성실과 의를 나타내고 주님의 기사와 영광을 나타내는 그 일을 땅에 있는 성도가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고 나면 그걸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 이 땅 위에 두 발을 꽉 디디고 살아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주님의 기사를 보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기사요 주님의 찬송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간 우리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스스로 무덤 속에 있는 자처럼 되기 쉽습니다. 아무런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매 순간순간을 중요하게 여기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이 세월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무위도식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 하루를 허송하는 것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좀더 확실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죽은 자처럼 살지 말고, 무덤 속에 있는 자처럼 살지 말고 주님 안에서 산 자답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성실함을 세상에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시편 기자의 간구가 바로 그러한 기도입니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에게 깨어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정신차려서 일어서라는 말씀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을 때 성령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깨우십니다. 깨어 기도하란 말이 바로 그러한 말씀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우리를 대표하여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무덤 속에 있지 말게 해주십시오. 깨어나서 정직하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소원이 바로 우리의 기도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된 자의 기도


[시편 88:13-18]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이제 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그 기도가 상달이 됩니다. 주님이 얼굴을 숨기시고 외면하신 것 같은 상태에서 빛이 비취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순간 온 세상이 캄캄해지고 빛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은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버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버려짐을 당할 것을 주님이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잠시 버려지시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당하신 그 괴로움을 이 시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느낀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 속에 우리 마음이 몰입이 되어 이 귀한 말씀이 깨달아지고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