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1편]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흄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 인이 네 곁에서,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 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 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 91:1-16)


 이 시편 91편은 누구의 시라는 말이 없지만, 앞에 있는 시편 90편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서 연속적인 모세의 시라고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다. 이 시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지성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시편은 항상 서두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 즉 하나님의 은밀한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곳에 들어갈 수 없고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씩 들어갈 수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습니다.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단이 있는데 그곳은 양을 잡아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속죄가 제단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9장 12절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 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 암아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오한 사실입니다. 구약시대에 건물로 지은 그 성전은 신약 시대에서는 교회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고 교회는 그 몸입니다. 주님이 머리시다는 말씀은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말씀이 계시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 법궤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면 즉시 죽습니다.

 지성소는 모든 것이 다 금으로 꾸며져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빛은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금의 광채로 말미암아 내부가 환하게 빛나는 곳입니다. 그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는데 그 앞에 있는 성소의 일곱 등대에는 불이 켜져 있어 환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구원을 받았지 만 그 은밀한 곳에 거하지 않는 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마다 절기를 당하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성전 뜰이나 밖에서 양이나 소를 사고 팔며 돈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바깥쪽은 사람들로 붐비고 매우 떠들썩했습니다. 그러나 지성소 안은 완전히 조용합니다. 대제사장만이 은밀한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교회 속의 은밀한 곳-믿음 안의 참 평안


 지금 우리들은 교회를 형성해서 살고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다 모여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은밀한 곳이 어떤 곳일까요?

 사도행전 16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옥이 떠나가도록 찬송을 불렀습니 다. 그 바울이 말하자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그 마음이 완전히 믿음 안에서 주님께 바쳐진 그 상태,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그 마음에 참 평안이 찾아오고 조금도 요동치 않고 즐거움 안에서 살 수 있는 상태가 은밀한 곳에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생활 주변과 환경이 시끄럽고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시험이 닥쳤을 때 만일 참 믿음이 있다면 그러한 외부적인 조건과 환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물질 때문에 괴로워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명예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그 마음속에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물질과 명예 따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러한 욕심이 있는 마음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문제와 걱정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변 환경이 어떻든지간에 거기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평온한 가운데 오직 주님께로만 향할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설령 쇠사슬에 묶여 있는 어려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 상황이 마음을 흔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주님께 가 있고 주님께 바쳐져 있는 상태가 바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있는 마음입니다.



은밀한 곳에 거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먹어보아야 겠다고 결심해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신앙생활 속에서 싸우고 훈련받으면서 우리 마음이 낮아지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차츰차츰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참으로 바쳐질 때 주님이 내게 가장 중요하고 물질이나 지위나 명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정말 이 세상의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속에는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련과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늘 붙들어 주시는 주님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시 91:2)


 신앙생활의 연단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고 또 요새가 되십니다. 요새는 군인들이 전쟁하기 위해서 꾸며놓은 진지가 있는 곳입니다. 이 말씀은 가령 당장에 먹을 것이 없는 어떤 극한 환경에 부딪혀도 조금도 그러한 문제들이 우리를 흔들어놓을 수 없도록 하나님 이 우리 를 붙들어 주시고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이 오묘하고 깊은 사실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아무 일 없고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만 조그마한 어려움이 찾아오면 마음이 흔들려 버립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에 제일 잘 흔들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괜찮은데 화가 나면 다른 생각할 여지가 없이 화나는 대로 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폭발하고 맙니다.



우리 육신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라는 말씀이 있지만 우리 성격 속에는 오래 참는 것도 없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여전히 아담의 후손으로 서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를 타고난 사람인데 구원을 받아도 우리 육신에는 아름다운 성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험이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닥쳐오면 걱정하고 괴로워 하고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나는 구원을 받았는데 도 왜 작은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가'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도저히 그런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믿을 것이 못되고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고 더욱 주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점점 믿음으 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사안일하게 가만히 있으면 속에서 화가 나는 것도 없고 욕심도 없고 걱정도 없는 것 같지만 일단 문제가 생겨나면 마음속에서 그 모든 것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이렇게 욕심도 많고 세상을 사랑하는 내 육신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주님은 그 믿은 사람에게 방패가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어 주십니다.

 믿음은 아무 때나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라도 우리 마음이 주님을 떠나버리면 여전히 걱정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마귀의 함정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주님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 91:3)


 이 세상은 새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놓은 것 같은 세상입니다. 여 기서 사냥꾼은 마귀입니다. 우리는 새의 입장에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새는 보통 마귀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의 운명인데 이 세상은 어디에나 마귀가 쳐놓은 그 물이 있습니다. 그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마치 거미가 날아다니는 파리나 모기를 잡아 먹으려고 그물쳐 놓고 기다리는 것처럼 이 세상은 사냥꾼 마귀가 우리를 잡으려고 그물을 쳐 놓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그 사냥꾼의 을무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마귀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지혜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무릇 새가 그물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잠 1:14-18)


 여기서 악한 동무는 마귀에게 속해 있는 동무들을 말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친구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악한 친구는 믿음을 파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감언이설로 꼬여댑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기 위한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러나 "새가 그물치는 것을 보면 헛 것이겠거늘" 이라고 한 말씀대로 참으로 우리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함정, 즉 그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마음에 지혜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보면 이것이 바로 나를 옭아매려는 그물이라는 것을 알고 지혜롭게 피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접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 마음을 걸어넘어뜨리는 일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으면 거기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령한 지혜입니다.



신앙의 전염병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고 하였는데 이 염병은 전염병입니다. 우리 모임의 상황도 그런 염병이 퍼질 가능성이 많습니 다. 모임 생활은 불편하고 우리 육신적으로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타서 말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염병입니다. 우리 마음을 살짝 건드리면서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염병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난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마음이 어두컴 컴하고 강팍해져 있습 니다. 신앙생활이 활발하지 않고 얼굴이 어둡고 모임에도 들락날락 참여할까 말까 하고 마음에 불평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염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상처입니다. 한때 즐겁고 힘있고 열심히 일하던 모든 것이 다 식어 없어져버리고 모임에 찾아와도 뒷전에서 기웃기웃하다가 그냥 가버리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믿음이 있어서 신앙을 지켜갈 수 있는 사람은 그런 문제에 걸리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가 닥쳐오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런 것이 마음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의 방패가 되어주시는 주님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시 91:4)


 공중의 솔개가 날아다니다가 휙 내려와서 발로 병아리를 채 가지고 올라가듯이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채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암탉이 깃으로 병아리를 덮듯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유 의지가 있어서 믿음으로 스스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틀림없이 주님이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틀림없이 그 날개 아래 보호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강제로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 다. 성 령은 절대로 사람을 강제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갑자기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향해서 가고 있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바울은 모태로부터 택함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그를 회개시켜가지고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강제로 회개시키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가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회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해도 성령은 그냥 우리를 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성령을 소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을 강제로 보호하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보호라는 것은 영혼의 상태 , 믿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이 보호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우선은 현재의 외부적인 환경이나 여건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지만 실상은 그보다는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보호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육신의 걱정거리가 생기고 물질 문제로 손해보는 것 따위는 큰 일로 부각이 되지만 내 영혼이 보호되고 믿음의 생활이 보호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신과 영의 세계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그런 귀한 문제를 너무 시시하게 생각하고 그냥 흘러 떠내려 보 내고 맙니다. 내 영혼에 손상이 생겨나도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육신적으로 손해본다고 하면 벌벌 떨고 굉장할텐데 세상에서 우리 육신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우리 영혼의 상태가 잘 보존되면 얼마나 복받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다 순교했고 그 다음에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순교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화형을 당했고 어떤 사람은 톱으로 켜서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의 그 영혼의 상태는 안전지대에 보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믿음 하면 꼭 육신의 축복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육신적인 축복은 사실 진정한 축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믿음이 무너지지 않고 믿음을 지켜갈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귀한 일이 겠습니까?



영적 싸움과 하나님의 전신갑주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회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0-17)


 이 말씀에 나타나는 무장은 마귀로부터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지 육신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과 영적 생활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군병들아? 나?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 하는 찬송들을 부르는데 그러한 찬송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무엇을 지켜야 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구원을 받았으면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그 영혼이 넘어지거나 지옥을 가는 일은 없을텐데 왜 그 영혼을 보존해야 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에게는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중 보존해야 할 것은 영의 생각입니다. 영적 생활이 보존되고 영의 생각이 자라가야 되는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관심사가 주로 육신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 있는 영의 상태는 허약하고 성장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생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육신이 안락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까 하는 생각만 하면 그 속에 있는 영의 생각이 지켜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신앙생활하기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이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안에서 배척해버리는 육신의 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말씀이 마음에 심어지지 않고 듣는 그 순간 뿐이고 일시적인 감동은 받지만 그 다음에는 다 없어져버립니다.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와 돌짝 밭에 떨어진 씨처럼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부요해지고 평안해지는데 대한 관심 이상으로 어떻게 하면 영적 생활에 부요해질까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핍박과 고난을 이기고 내 영혼이 넘어지지 않고 보존이 될까 관심을 깊이 가지는 사람은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관심을 전혀 안가지니까 믿음 자체가 생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안생기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 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5)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 뭡니까? 지금 우리는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때가 말세가 아니고 우리는 벌써 말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세의 세상은 굉장히 환란이 심합니다. 대환란은 물론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부터 시작합니다만 그 전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극도로 악으로 달려가 각종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끗하게 믿음을 유지해 가는 것이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완전히 악으로 달려가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난다든지 지구 환경이 심하게 파괴되는 일들이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 날부터 본격적인 대환란에 들어가겠지요. 그런데 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 뭘까요? 극한상황에서 우리는 영혼은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생활이 현실적으로 구원이 되어야 됩니다. 구원은 세상의 죄 속에 우리가 빠져들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온통 죄악된 일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언제 우리가 거기에 빠져 넘어갈지 모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능력이 우리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려고 하면 우리가 영적인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마귀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91:5-6)


 낮이고 밤이고 간에 마귀는 우리를 노려보고 화살을 쏩니다.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이라고 했는데 이미 말한 대로 이 염병은 불평 불만을 퍼뜨려 우리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을 남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생각을 주변 사람에게 또 전염시킵니다. 그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혹시 어떤 불만이나 불평이 있더라도 혼자서 소화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것이 전염병을 전하는 것입니다. 꾹 참고 기다리면 해결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입을 함부로 벌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의 장난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무슨 소리가 들려오든지 어떤 일이 있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천 인이 네 곁에서,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시 91:7)


 여기서 말하는 재앙은 지진이나 흉년 따위의 외부적인 재앙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공격하여 병들게 만드는 내부적인 재앙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믿음을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의 사자가 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스스로 잘 모릅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고 신이 나서 무슨 얘기를 하는데 사실은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확실히 있는 사람은 옆에서 사람들이 쓰러지더라도 자기는 믿음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



올바른 교훈과 가르침을 듣지 않는 어리석은 자의 심판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시 91:8)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모든 악에 거의 빠지게 되었었노라 하게 될까 하노라"(잠 5:7-14)


 올바른 교훈과 가르침을 듣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악에 빠져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참된 가르침과 교훈을 들려주시는 선생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진정한 선생님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평소에 이 선생님의 목소리를 항상 듣고 마음이 준비된 사람은 복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한탄을 하게 됩니다. 왜 내가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한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모인 모여 있는 곳은 바로 심판의 자리입니다.

 성경 말씀은 사실은 우리 마음에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자꾸 육신을 찌르고 깎아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육신적으로 읽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금방 잠이 옵니다. 재미나는 얘기책이나 만화책 같은 것을 읽으면 육신에 쾌감을 주지만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니까 듣기 싫어합니다. 또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면역이 생겨가지고 아예 성경 얘기는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듣지도 않습니다.

 '상식적인 소리, 맨날듣는소리인데 뭐' 하는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되어 있으면 큰일입니다. 병든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맨날 듣지만 그 소리가 마음에 하나도 기억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기록이 된 사람은 '아, 그렇구나' 하고 다음에 또 듣고 싶지만 이 말씀을 듣는 데 면역이 생기면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쯤 되면 큰일입니다. 그것이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참된 거처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시 91:9-10)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주님이 나의 거처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면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내 마음이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쉬고 주님이 내 마음속에 그 무엇보다도 귀한 존재가 되었을 때 주님이 나의 거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잠을 자는 데 제일 편한 곳이 자기 집입니다. 그 다음이 호텔입니다. 남의 집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눈치볼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지날 수 있는 곳이 제일 편하고 좋은 곳입니다. 자기 집은 자유롭고 아무런 거침이 없습니다. 만일 주님이 내 집 같으면 그 마음이 주님 안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모하는 그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말씀을 교묘히 이용하는 마귀를 성경 말씀으로 이기신 주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


 예수님은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때 마귀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아담을 넘어뜨렸는데 그 다음에 예수님만 넘어뜨려버리면 이 온 세상이 완전히 그의 차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그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무기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0-1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능력이 많으신데 왜 천사가 와서 수종들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늘에는 그 루시퍼라는 마귀 천사가 있었지만 그 밖에도 가브리엘, 미가엘, 라파엘이라는 천사들도 있었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81 1:14)


 이 말씀처럼 수종드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해당되고 지금 우리들에게도 해당이 되며 또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고 인도하신 사실에 해당이 됩니다. 그것은 역시 예수님께도해당이 되고 또 오늘날 우리에게도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이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했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너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5-6) 


 마귀가 성경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비방할 때도 성경을 사용합니다. 잘못된 말을 하면서도 성경을 사용하는 그것은 마귀가 이미 오래 전에 사용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도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들추며 이렇게나 저렇게 하면 그에 기죽어 맥을 못추는 경향이 있는데 마귀도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면 누가 성경을 가지고 나오더라도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악으로 좇아 그 성경을 사용하느냐? 의롭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성경을 아는데 그 성경을 거꾸로 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하였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 4:7)


 성경을 거꾸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을 떠난 사람들이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우리도 100% 성경을 바로 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어떤 때에는 성경을 잘못 전하는 때가 있습니다. 잘못 전한 것을 바로 시정을 더러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획적으로 성경을 왜곡합니다. 이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을 까부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다 신령하게 본다든지 거기에 눌린다든지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마귀는 예수님보고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발을 부딪히지 않게 한다는 뜻으로 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만 실상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과 예수님과 우리에게 다 해당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시험하는 돌-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 21:42-46)


 예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 이스라엘 민족이 버린 돌이십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발에 걸려 깨어지고 이 돌이 사람 위 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게 되는데 예수님 이 재림하시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놓여진 머릿돌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과 넘어지지 않는 사람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신 말씀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죄 때문에 지옥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 모태에 태어나서 죄를 하나도 안 지었더라도 지옥에 갑니다. 구원을 못받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못받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고 지옥에 갑니다. 죄는 지옥에 가서 벌 받는 조건에 불과합니다.

 화낸 사람은 화낸 만큼 벌을 받고 도둑질 한 사람은 도둑질한 만큼, 남을 욕한 사람은 그만큼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가 돌에 걸려 넘어지는 자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 보면 시금석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시험하는 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돌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턱 내놓았는데 이 돌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다 지옥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하게도 우리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귀를 발등상 되게 하시는 주님의 발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시 9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회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계 1:13-15)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오셨을 때에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발꿈치가 사탄에게 물릴 수 있는 발꿈치였습니다. 사탄이 그 발꿈치를 물어서 상하게 된 발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마귀를 밟아 발등상 되게 하시는 발입니다. 발을 올려놓는 것이 발등상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의 역사는 마귀가 예수님께 발등상이 되고 있 는 과정입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 을 발로 누르리로다" 라는 말씀은 사탄에게 완전히 승리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틀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회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회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2-19)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됩니 다. 예수님은 완전히 사자와 뱀 즉 사탄을 발로 밟으십니다. 사자와 뱀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발로 누르신다는 것은 완전한 심판을 말합니다.



넘어뜨릴 수 없는 사랑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


 이것 역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지만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스라엘 민족은 어디 까지나 그림자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이 한번 받아봅시다.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여러분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는 축복을 사랑합니까? 하나님 자체를 사랑합니까?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은혜를 주십시오. 축복해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큽니다.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달게 받겠는데 주님 자신을 선물로 받고 싶은 마음이 적은게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절대적으 로 주님의 승리가 됩니다.

 우리 마음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시험과 환난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넘어지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의 생활은 한결같았고 예수님 다음으로 생활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아는 자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고 하였는데 이름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


 사도행전의 기사를 읽어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면 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도 그 앉은뱅이처럼 주님의 이름을 알게 되면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약속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하시도다"(시 91:15-16) 


 이 장수는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시편 91편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영적 생활이 언제나 보호되고 그 마음이 정말 기름진 삶을 살 수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현실적인 문제에만 너무 치중하지 말고 우리 영적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에게 닥치는 온갖 사탄의 시험과 공격에서 보호받으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