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저희가 지꺼리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자긍하나이다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정치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마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를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서서 죄악 행하는 자를 칠꼬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저희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시며 저희의 악을 인하여 저희를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리로다"(시 94:1-23)
이 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 지어진 것 같습니다. 93편에서부터 이 94편까지 이 세상 마지막 때에 환난 속에서 되어질 일에 대해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환난 때 이스라엘 민족이 당할 일들에 대한 예언
이스라엘 민족은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첫째 짐승이고 마지막 넷째 짐승이 로마입니다. 로마는 넷째 짐승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는데 그 넷째 짐승의 활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 다. 성경은 적그리스도를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느브갓네살에서 시작해서 예수님 재림 직전까지의 전 시대에 걸쳐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세력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짐승에 의해서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 들어갔는데 그러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 속에 미래에 대한 예언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에는 이 세상 마지막 시대에 유럽 합중국이 형성되어 거기에서 앞으로 한 통치자가 적그리스도로 출현하고 짐승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마지막으로 심히 괴롭히는 일이 있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6-27)
여기에 '그' 라고 하는 존재는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 이라고 했는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읍과 성소를 훼파한다는 내용입니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고 한 왕의 백성은 로마의 세력인데 현재 유럽에서 태동되고 있는 세력이 바로 로마의 후예로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94편은 바벨론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끌려가서 크게 어려움을 당하는 시대에 지어진 것이지만 그 당시의 일에 비추어 이스라엘 민족이 미래에 당할 일들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이레는 7년을 의미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이스라엘 민족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3년 반에 가서 완전히 태도를 바꿔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게 됩니다. 이 시편 94편은 그러한 일을 당할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주소서"(시 94:1-2)
'보수'라는 말은 원수를 갚는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떠날 때에 밤에는 불기둥이 일어났습니다. 캄캄할 때에 그 불기둥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환한 빛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애굽 사람에게는 너무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라고 했는데 그런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두움을 밝혀주는 빛이 되지만 반대로 원수에게는 환난과 멸망을 당하는 어두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2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 이 직 접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17-20)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무언가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면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직접 원수 갚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원수는 하나님만 갚으실 수 있지 사람은 원수를 정당히 갚을 수 없습니다. 원수를 판결해야 되는데 그 판결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정당하고 온전한 판결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원수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되어 있고 죄를 짓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정확하게 판단해서 원수를 조금도 법에 어긋나지 않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원수를 갚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없고 부정이 없이 모든 사리를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자에게 원수를 갚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남을 정확하게 재판해서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분한 마음이 생기고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수지는 족족 갚기로 한다면 이 세상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이 세상 끝에 가서 하나님의 큰 심판이 임하실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나서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한 마음이 있을 때에는 직접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 장에도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신앙이 성장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믿음이 자라서 성령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때에 가서야 비로소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저희가 지꺼리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자긍하나이다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시 94:3-7)
이 시가 지어진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시드기야 왕 같은 사람은 눈을 뽑히기도 하고 종노릇도 하는 비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시점에서는 이 시편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또 적그리스도에게 당할 환난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천육백 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당한 그 환난은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일의 그림자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
지금 이 세계 정세를 보면 유대인과 PLO 두 양대 세력이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같이 살면서도 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유대인은 PLO를 점차로 추방을 하고 있는데 온 세계가 이스라엘을 미워합니다. 왜 그들을 추방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들로서는 이유가 있죠. 폭동을 일으키고 자꾸만 어지럽게 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색출해가지고 추방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이 잘못한다는 여론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응해져 가는 것을 이런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여론이 아무리 들끓고 어려워도 이스라엘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미국 같은 강대국가가 이스라엘을 권해서 추방했던 사람을 다시 들어오게 하려고 해도 끄덕도 안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가령 유고 사태를 다루는 강대국의 태도가 이스라엘을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고 사태는 한쪽은 세르비아라는 민족이 또 한쪽의 회교권에 있는 인종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민족 통일을 하겠다고 하여 전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같은 강대국이 적극 가담하여 그것을 바로 잡아주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는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유엔에서 소리쳐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랍 진영의 불평은 왜 저 이스라엘 나라를 가만 두느냐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유고의 세르비아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을 더 미워하지만 이스라엘 문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서 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미움을 받고 있는 상태가 극한 상황에 들어가면 이스라엘에게 적그리스도가 거짓 평화를 제안해서 7년간의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짓 평화입니다.
그러다가 3년 반에 가서 적그리스도가 돌아서서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을 짓고 그 안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금지시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은 바벨 론 포로로 끌려 갔을 때와 비슷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악인 "적그리스도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저희가 지꺼리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자긍하나이다"(시 94:3-4)
여기서 악인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역사 이래로 그만큼 말 잘하는 입을 가진 자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저회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시 94:5)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니까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의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남편이신데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렸으니까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된 것입니다.
"말하기틀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시 94:7)
그러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헛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시 94:8-11)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무신론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선민이라고 생각하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랍비 계통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마음이 심히 낙심하고 곤고하여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끊어져 버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이 메시야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 예수님을 자기들의 메시야로 믿지 않고 지금까지도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자기들을 구원해 준다는 소망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하면 사천 년이 되었는데 사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아직도 메시야가 올 것이다 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신론자들 말고는 메시야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자기들의 국가적인 운명을 구원해 주실 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극한 환난이 닥쳤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우리가 부르짖어도 소용없다' 고 하는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의 단계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렇게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실망하고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신앙생활 속에서 믿어야 할 여러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도 그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하나님이 항상 자기들 가운데 어떤 계획과 목적을 두고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넘어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주변의 바알신이나 아스다롯 같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이방인의 세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에 사사나 어떤 왕을 일으켜 원수들을 무찌르게 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또 몇 십 년 지나면 또 슬슬 믿음이 사라지고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이 이방 군대를 일으 켜 이스라엘을 치는 일이 반복되는 역사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믿음의 초점이 없는 사람 이 많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현재 어떤 믿음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데 그것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굉장히 막연합니다.
현재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저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 믿음입니다. 저의 믿음은 현재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못견디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임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죽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분명히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셔서 모임이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오고 있는 것을 보아왔고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믿음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신자입니다. 이 모임의 생활이 어렵고 힘들다 보니 믿음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그러한 상태이니까 자기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와서 속닥속닥하면 아 그런가보다 하고 의문이 가다가 거기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고 뭐 맞구나 하고 푹 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요.
저는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계셔서 이끌어 오신다는 것을 막연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확실한 것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저는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이 모임이 잘못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선한 왕이 일어나 잘 인도해 가다가 그 왕이 죽어버리고 나면 또 이방 사람의 신을 섬기곤 했는데 현실적으로는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셔서 역사하신다는 데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서 다른 데를 향해서 가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우둔한 마음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8-9)
이스라엘 민족은 곤고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신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없어져 버립니 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니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봐야 소용도 없다는 상태에 들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 우준한 자들아 눈을 지으신 분이 못본단 말이냐, 귀를 지으신 분이 못듣는단 말이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막 쉽게 실망하고 낙담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구해야 될지도 잘 모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이상하게 되어버립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각각 다르고 원하는 것이 각각 다른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주어버리면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될지 바로 알지 못한다고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낱낱이 다 응답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도를 해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으니까 뭐 기도 까짓것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그래도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린애는 부모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떼를 씁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떼만 쓰죠. 떼쓴다고 해서 부모가 다 해주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젖먹는 어린애가 미리 뭐 우리 아빠랑 우리 엄마는 얘기 해보아야 소용 없으니까 그만두자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구할 바를 알든지 모르든지 구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니까 성령이 하나 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소원은 각기 다르지만 모든 것을 종합을 해서 성령이 대변하시고 계십니다.
기도의 응답-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핍박을 받고 어떤 때는 욕을 먹고 어떤 때는 억울함을 당하는데 그 모든 것 속에 여러분을 한번 집어 넣어 보세요. 모든 것이라는 말 속에 뭐가 들어갑니까? 어떤 때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합니다. 또 어떤 때는 인간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때는 몸에 병이 듭니다. 또 어떤 때는 누구하고의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 생활 전체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합쳐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어떤 일을 당하든지 누구에게 핍박을 받든지 그 모든 것이 실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에 큰 폭풍이 불어와 어떤 때 배가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 폭풍과 파도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균형을 잡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들입니다. 그것이 있어서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모릅니다.
우리 앞에 지나가는 모든 과정은 사실 선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도 없어서는 안될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조금만 일을 당해도 그만 믿음이 사라지고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 시편 기자는 귀를 지으신 하나님이 못듣겠느냐 눈을 지으신 분이 못보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 앞에 지나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보고 듣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는 말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교훈하시는 하나님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시 94:9-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훈하시려는 뜻이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성경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을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어린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쫓아내는 방법이 징계하는 채찍입니다. 이 말씀은 현실적으로 어린 아이를 교육하는 데도 해당이 됩니다. 제가 성장했던 시대는 부모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자식들 중심입니다. 부모가 노예 비슷하게 자식을 떠받들고 사는 시대입니다. 자녀가 출세해서 복을 갖다 준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녀를 잘 길러 출세하고 돈도 많이 벌게 해서 행복해지고 싶은 물질문명의 결과입니다.
과거에는 부모를 자식들이 하늘같이 떠받들었는데 그런 시대에서 차츰차츰 옮겨가서 이제는 자녀가 완전히 높임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을 기르면서 매도 한 대 안 때리고 기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길러 키워놓으니까 자녀가 은연중에 자기가 최고인 줄로만 압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지요. 미국은 아이들이 빨리 18살 되기를 기다립니다. 18살만 되면 집을 나갑니다. 집을 나가서 따로 사는 것이 소원이예요. 친구들끼리 멋대로 어울릴 수 있으니까요. 미국의 대학은 전부 다 기숙사가 있습니다. 기숙사에 들어가 돈이 필요할 때만 부모에게 와서 손을 벌립니다. 18살부터 부모하고 완전히 갈라져 버립니다. 그것은 가치관이 우리나라와 달라서 그렇습니다. 나중에 크면 자기밖에 모르고 부모는 곁에 있으면 아주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핵가족 제도가 생겼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옛날 습관을 떨쳐버리고 현대감각에 너무 달려가면 안됩니다. 성경에서는 매를 때려서 키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매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손을 댈 때 감정적으로 화풀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어떤 일을 당하면 집에 와서 마누라나 자식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한 때는 때릴 수 있지만 뭘 조금만 잘못해도 화풀이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때리는 것은 자녀의 마음을 삐뚤어지게 합니다.
유익한 하나님의 징계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매로 때리듯이 교회를 날카롭게 책망하십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하고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그 책망 속에 깊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 책망하는 말 속에 깊은 사랑이 있으니까 매를 때리더라도 감정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 이런 고통 저런 시련이 채찍인데 그 징계하는 채찍을 우리가 정말 잘 받는다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그때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징계를 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도 교훈하시지만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도 하나님의 큰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징계는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과 우리에게 사랑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속마음과 체질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시 94:11-15)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들린 사람을 네 사람의 친구가 메고 왔을 때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말은 하지 않고 속으로 저가 누군데 죄를 사하는가 했는데 예수님이 그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런 일들이 성경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흙뭉치라는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2-16)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아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존재로 나타나려고 하면 할수록 가치가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로 자긍하면 하나님의 참된 가치가 내 것이 안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나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의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해 쓰러졌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쓰러진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 환난에서 벗어나는 복된 자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시 94:12)
징벌을 당하고 교훈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그랬죠.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3)
언제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이 악인을 위해서 구덩이를 파실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이 환난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은 악인이 환난당할 그 때에 환난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롯의 처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천사의 손에 이끌려 나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성경만 읽는다고 해서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는 천사의 손으로 이끄셨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물질에서 자유를 얻고 세상에 붙어 있던 마음이 돌아서도록 하십니다.
그런 얘기를 수없이 해도 우이독경입니다. 귀에는 들리지만 마음에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시 94:14-15)
판단이 의로 돌아간다 하는 말은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 의심하다가 나중에 가서 '아,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행사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의 인자와 위안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를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서서 죄악 행하는 자를 칠꼬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6-19)
주의 인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합니다. "내 속에 생각이 많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제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 107:6)
우리가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하면 마음 속에 생각이 번거롭고 이렇게 해야 될까 저렇게 해야 될까 복잡한 것을 말합니다. 어려움과 시련과 고난을 당하여 마음이 복잡하고 시달림을 받는 것이 생각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의 위안이 그 영혼을 즐겁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교제할 수 없는 악한 재판장-적그리스도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약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시 94:20)
여기 악한 재판장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밖으로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어요. 이 세상은 하나님 말고, 다른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구원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에는 기독교가 판을 치고 있지만 한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없습니다. 끼리끼리 교제하는 것 말고 참으로 주님과의 사이에 교제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주님의 생명이 와야만 성령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기독교의 이 름을 가지고 나오지만 주님과 교제할 수 없는 재판장이 세계 지배자인 적그리스도입니다.
"저희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시 94:21)
아담 이후로 인류 역사 속에서 사탄은 늘 의인을 치려고 했습니다. 첫째 의인은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아벨이었고 가인은 죄인이었습니다.
그 사탄은 참 의인이신 예수님을 쳤습니다. 그리고 죽 내려오면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이 스라엘 민족을 괴롭힙니다. 그때 이 스라엘은 적그리스도에게 속은 줄 알고 회개하는데 그것이 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 4천 명이 인을 받는 역사입니다.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대부분이 목베임을 당하고 순교하게 됩니다.
산성과 반석이 되시는 주님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시 94:22)
하나님이 신성이시요 반석이시라는 것은 영혼을 지켜준다는 약속이지 육신을 지켜 준다는 보장은 아닙니 다.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시며 저희의 악을 인하여 저희를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리로다"(시 94:23)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모든 일을 다 결말짓고 하나님의 백성은 너무 영광스럽고 놀라운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편 94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 끝에 가서 마지막 짐승 밑에서 당할 고통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에 정말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 지어진 것 같습니다. 93편에서부터 이 94편까지 이 세상 마지막 때에 환난 속에서 되어질 일에 대해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환난 때 이스라엘 민족이 당할 일들에 대한 예언
이스라엘 민족은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첫째 짐승이고 마지막 넷째 짐승이 로마입니다. 로마는 넷째 짐승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는데 그 넷째 짐승의 활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 다. 성경은 적그리스도를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느브갓네살에서 시작해서 예수님 재림 직전까지의 전 시대에 걸쳐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세력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짐승에 의해서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지경에 들어갔는데 그러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 속에 미래에 대한 예언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에는 이 세상 마지막 시대에 유럽 합중국이 형성되어 거기에서 앞으로 한 통치자가 적그리스도로 출현하고 짐승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마지막으로 심히 괴롭히는 일이 있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6-27)
여기에 '그' 라고 하는 존재는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 이라고 했는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읍과 성소를 훼파한다는 내용입니다.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고 한 왕의 백성은 로마의 세력인데 현재 유럽에서 태동되고 있는 세력이 바로 로마의 후예로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94편은 바벨론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끌려가서 크게 어려움을 당하는 시대에 지어진 것이지만 그 당시의 일에 비추어 이스라엘 민족이 미래에 당할 일들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이레는 7년을 의미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이스라엘 민족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하고서는 3년 반에 가서 완전히 태도를 바꿔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게 됩니다. 이 시편 94편은 그러한 일을 당할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를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보수'라는 말은 원수를 갚는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떠날 때에 밤에는 불기둥이 일어났습니다. 캄캄할 때에 그 불기둥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환한 빛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애굽 사람에게는 너무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라고 했는데 그런 하나님의 빛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두움을 밝혀주는 빛이 되지만 반대로 원수에게는 환난과 멸망을 당하는 어두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2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 이 직 접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17-20)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무언가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시면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를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직접 원수 갚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원수는 하나님만 갚으실 수 있지 사람은 원수를 정당히 갚을 수 없습니다. 원수를 판결해야 되는데 그 판결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정당하고 온전한 판결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원수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되어 있고 죄를 짓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정확하게 판단해서 원수를 조금도 법에 어긋나지 않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원수를 갚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없고 부정이 없이 모든 사리를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자에게 원수를 갚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남을 정확하게 재판해서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분한 마음이 생기고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수지는 족족 갚기로 한다면 이 세상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이 세상 끝에 가서 하나님의 큰 심판이 임하실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나서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한 마음이 있을 때에는 직접 원수 갚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 장에도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신앙이 성장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믿음이 자라서 성령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때에 가서야 비로소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가 지어진 그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시드기야 왕 같은 사람은 눈을 뽑히기도 하고 종노릇도 하는 비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 시점에서는 이 시편의 내용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또 적그리스도에게 당할 환난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천육백 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당한 그 환난은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일의 그림자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
지금 이 세계 정세를 보면 유대인과 PLO 두 양대 세력이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같이 살면서도 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유대인은 PLO를 점차로 추방을 하고 있는데 온 세계가 이스라엘을 미워합니다. 왜 그들을 추방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들로서는 이유가 있죠. 폭동을 일으키고 자꾸만 어지럽게 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색출해가지고 추방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이 잘못한다는 여론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이 응해져 가는 것을 이런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여론이 아무리 들끓고 어려워도 이스라엘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미국 같은 강대국가가 이스라엘을 권해서 추방했던 사람을 다시 들어오게 하려고 해도 끄덕도 안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가령 유고 사태를 다루는 강대국의 태도가 이스라엘을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고 사태는 한쪽은 세르비아라는 민족이 또 한쪽의 회교권에 있는 인종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민족 통일을 하겠다고 하여 전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같은 강대국이 적극 가담하여 그것을 바로 잡아주려고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는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유엔에서 소리쳐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랍 진영의 불평은 왜 저 이스라엘 나라를 가만 두느냐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유고의 세르비아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을 더 미워하지만 이스라엘 문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서 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미움을 받고 있는 상태가 극한 상황에 들어가면 이스라엘에게 적그리스도가 거짓 평화를 제안해서 7년간의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거짓 평화입니다.
그러다가 3년 반에 가서 적그리스도가 돌아서서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전을 짓고 그 안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금지시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은 바벨 론 포로로 끌려 갔을 때와 비슷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악인 "적그리스도
여기서 악인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역사 이래로 그만큼 말 잘하는 입을 가진 자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니까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의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남편이신데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렸으니까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된 것입니다.
그러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헛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무신론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선민이라고 생각하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랍비 계통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마음이 심히 낙심하고 곤고하여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너무 심하기 때문에 그러한 지경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끊어져 버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 이 메시야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 예수님을 자기들의 메시야로 믿지 않고 지금까지도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자기들을 구원해 준다는 소망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하면 사천 년이 되었는데 사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아직도 메시야가 올 것이다 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신론자들 말고는 메시야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자기들의 국가적인 운명을 구원해 주실 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극한 환난이 닥쳤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우리가 부르짖어도 소용없다' 고 하는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의 단계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렇게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실망하고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신앙생활 속에서 믿어야 할 여러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 땅으로 가기 전에도 그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하나님이 항상 자기들 가운데 어떤 계획과 목적을 두고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넘어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주변의 바알신이나 아스다롯 같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이방인의 세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에 사사나 어떤 왕을 일으켜 원수들을 무찌르게 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또 몇 십 년 지나면 또 슬슬 믿음이 사라지고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이 이방 군대를 일으 켜 이스라엘을 치는 일이 반복되는 역사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믿음의 초점이 없는 사람 이 많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현재 어떤 믿음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데 그것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굉장히 막연합니다.
현재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저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것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 믿음입니다. 저의 믿음은 현재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못견디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임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죽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분명히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셔서 모임이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오고 있는 것을 보아왔고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믿음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신자입니다. 이 모임의 생활이 어렵고 힘들다 보니 믿음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그러한 상태이니까 자기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와서 속닥속닥하면 아 그런가보다 하고 의문이 가다가 거기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고 뭐 맞구나 하고 푹 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요.
저는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하시고 성령이 계셔서 이끌어 오신다는 것을 막연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확실한 것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저는 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이 모임이 잘못될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선한 왕이 일어나 잘 인도해 가다가 그 왕이 죽어버리고 나면 또 이방 사람의 신을 섬기곤 했는데 현실적으로는 우리 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셔서 역사하신다는 데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서 다른 데를 향해서 가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우둔한 마음
이스라엘 민족은 곤고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신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없어져 버립니 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니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봐야 소용도 없다는 상태에 들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서 "이 우준한 자들아 눈을 지으신 분이 못본단 말이냐, 귀를 지으신 분이 못듣는단 말이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막 쉽게 실망하고 낙담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올바른 기도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구해야 될지도 잘 모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이상하게 되어버립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각각 다르고 원하는 것이 각각 다른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주어버리면 아주 이상하게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될지 바로 알지 못한다고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낱낱이 다 응답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도를 해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으니까 뭐 기도 까짓것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그래도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린애는 부모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떼를 씁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떼만 쓰죠. 떼쓴다고 해서 부모가 다 해주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젖먹는 어린애가 미리 뭐 우리 아빠랑 우리 엄마는 얘기 해보아야 소용 없으니까 그만두자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구할 바를 알든지 모르든지 구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니까 성령이 하나 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소원은 각기 다르지만 모든 것을 종합을 해서 성령이 대변하시고 계십니다.
기도의 응답-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이 협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핍박을 받고 어떤 때는 욕을 먹고 어떤 때는 억울함을 당하는데 그 모든 것 속에 여러분을 한번 집어 넣어 보세요. 모든 것이라는 말 속에 뭐가 들어갑니까? 어떤 때는 사업을 하다가 실패합니다. 또 어떤 때는 인간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때는 몸에 병이 듭니다. 또 어떤 때는 누구하고의 사이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라는 말 속에는 우리 생활 전체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합쳐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어떤 일을 당하든지 누구에게 핍박을 받든지 그 모든 것이 실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에 큰 폭풍이 불어와 어떤 때 배가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 폭풍과 파도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균형을 잡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들입니다. 그것이 있어서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 인간들이 이 지구상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모릅니다.
우리 앞에 지나가는 모든 과정은 사실 선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도 없어서는 안될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조금만 일을 당해도 그만 믿음이 사라지고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 시편 기자는 귀를 지으신 하나님이 못듣겠느냐 눈을 지으신 분이 못보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 앞에 지나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보고 듣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 는 말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교훈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훈하시려는 뜻이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성경을 읽으면서 교훈을 받을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은 그밖에도 여러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어린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있다고 했는데 그것을 쫓아내는 방법이 징계하는 채찍입니다. 이 말씀은 현실적으로 어린 아이를 교육하는 데도 해당이 됩니다. 제가 성장했던 시대는 부모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자식들 중심입니다. 부모가 노예 비슷하게 자식을 떠받들고 사는 시대입니다. 자녀가 출세해서 복을 갖다 준다는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녀를 잘 길러 출세하고 돈도 많이 벌게 해서 행복해지고 싶은 물질문명의 결과입니다.
과거에는 부모를 자식들이 하늘같이 떠받들었는데 그런 시대에서 차츰차츰 옮겨가서 이제는 자녀가 완전히 높임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을 기르면서 매도 한 대 안 때리고 기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길러 키워놓으니까 자녀가 은연중에 자기가 최고인 줄로만 압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지요. 미국은 아이들이 빨리 18살 되기를 기다립니다. 18살만 되면 집을 나갑니다. 집을 나가서 따로 사는 것이 소원이예요. 친구들끼리 멋대로 어울릴 수 있으니까요. 미국의 대학은 전부 다 기숙사가 있습니다. 기숙사에 들어가 돈이 필요할 때만 부모에게 와서 손을 벌립니다. 18살부터 부모하고 완전히 갈라져 버립니다. 그것은 가치관이 우리나라와 달라서 그렇습니다. 나중에 크면 자기밖에 모르고 부모는 곁에 있으면 아주 귀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핵가족 제도가 생겼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옛날 습관을 떨쳐버리고 현대감각에 너무 달려가면 안됩니다. 성경에서는 매를 때려서 키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매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손을 댈 때 감정적으로 화풀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어떤 일을 당하면 집에 와서 마누라나 자식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한 때는 때릴 수 있지만 뭘 조금만 잘못해도 화풀이를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때리는 것은 자녀의 마음을 삐뚤어지게 합니다.
유익한 하나님의 징계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매로 때리듯이 교회를 날카롭게 책망하십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하고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그 책망 속에 깊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 책망하는 말 속에 깊은 사랑이 있으니까 매를 때리더라도 감정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 이런 고통 저런 시련이 채찍인데 그 징계하는 채찍을 우리가 정말 잘 받는다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그때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징계를 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도 교훈하시지만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도 하나님의 큰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징계는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과 우리에게 사랑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속마음과 체질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중풍들린 사람을 네 사람의 친구가 메고 왔을 때 네가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말은 하지 않고 속으로 저가 누군데 죄를 사하는가 했는데 예수님이 그 속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런 일들이 성경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흙뭉치라는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아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존재로 나타나려고 하면 할수록 가치가 없어집니다. 하나님 앞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로 자긍하면 하나님의 참된 가치가 내 것이 안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나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의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해 쓰러졌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쓰러진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 환난에서 벗어나는 복된 자
징벌을 당하고 교훈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그랬죠.
언제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이 악인을 위해서 구덩이를 파실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이 환난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은 악인이 환난당할 그 때에 환난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롯의 처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천사의 손에 이끌려 나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냥 성경만 읽는다고 해서 세상을 등지고 세상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는 천사의 손으로 이끄셨지만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물질에서 자유를 얻고 세상에 붙어 있던 마음이 돌아서도록 하십니다.
그런 얘기를 수없이 해도 우이독경입니다. 귀에는 들리지만 마음에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판단이 의로 돌아간다 하는 말은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 의심하다가 나중에 가서 '아,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행사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의 인자와 위안
주의 인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합니다. "내 속에 생각이 많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하면 마음 속에 생각이 번거롭고 이렇게 해야 될까 저렇게 해야 될까 복잡한 것을 말합니다. 어려움과 시련과 고난을 당하여 마음이 복잡하고 시달림을 받는 것이 생각이 많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의 위안이 그 영혼을 즐겁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교제할 수 없는 악한 재판장-적그리스도
여기 악한 재판장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현재 이 세상은 밖으로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어요. 이 세상은 하나님 말고, 다른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구원받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에는 기독교가 판을 치고 있지만 한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가 없습니다. 끼리끼리 교제하는 것 말고 참으로 주님과의 사이에 교제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주님의 생명이 와야만 성령으로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기독교의 이 름을 가지고 나오지만 주님과 교제할 수 없는 재판장이 세계 지배자인 적그리스도입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 역사 속에서 사탄은 늘 의인을 치려고 했습니다. 첫째 의인은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아벨이었고 가인은 죄인이었습니다.
그 사탄은 참 의인이신 예수님을 쳤습니다. 그리고 죽 내려오면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이 스라엘 민족을 괴롭힙니다. 그때 이 스라엘은 적그리스도에게 속은 줄 알고 회개하는데 그것이 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 4천 명이 인을 받는 역사입니다.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대부분이 목베임을 당하고 순교하게 됩니다.
산성과 반석이 되시는 주님
하나님이 신성이시요 반석이시라는 것은 영혼을 지켜준다는 약속이지 육신을 지켜 준다는 보장은 아닙니 다.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모든 일을 다 결말짓고 하나님의 백성은 너무 영광스럽고 놀라운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편 94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 끝에 가서 마지막 짐승 밑에서 당할 고통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에 정말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