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9편]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

[시편 79:1-13]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 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이 시편 79편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때의 사람인 아삽의 시라고 부제에는 되어 있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을 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지어졌습니다. 아마도 아삽의 후손들이 노래한 것을 아삽의 이름으로 기록해 놓은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이방인의 때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79:1-3) 


 이스라엘은 그동안 여러 차례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지만 예루살렘을 빼앗긴 적은 없었는데 느부갓네살 왕에게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등과 같은 구절을 보면 이 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방 세력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그 때가 바로 이방의 때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이 이방의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야만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해석


[다니엘 2:31-45]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세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네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만할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다니엘서를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꿈에 우상을 본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니엘은 왕에게 그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금관을 쓴 그 우상의 머리 부분은 느부갓네살 왕을 말하고 가슴과 팔은 메대 파사 즉 페르샤를 말하고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를 말하고, 종아리와 발은 로마를 말합니다. 그 가운데 로마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현재 유럽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 바로 로마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날아오는 돌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방의 때가 끝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 79:4-5)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70년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돌아오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방의 시대가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말씀에 예루살렘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암담한 마음의 상태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렘 25:11-12)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나중에 페르시아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일어나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고토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이 시를 읊고 있는 사람은 그 당시에 언제 이스라엘이 회복이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방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시대가 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야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고토로 돌아왔지만 그 후로도 이방 나라의 지배 아래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메대 바사에 이어 헬라가 또 이스라엘을 지배했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는 헬라의 세력이 4갈래로 나뉘어졌는데 그 중 수리아(현재 시리아) 왕조가 이스라엘 민족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 수리아 왕은 이집트를 치러 가는 도중에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그 때에 마카비라는 유대인 형제들이 있었는데 수리아를 물리치고 일시적이나마 승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또 로마가 일어나서 세계를 제패하자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방의 때는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고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야만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일차적인 목표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구원입니다. 그 때가 오면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는 천년 왕국이 이루어집니다. 천년 왕국 때 가장 영광스러운 지역이 바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우상숭배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시 79:6)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살아가는 선민이 되었지만 이방 사람들이 신과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징계를 받아 멸망을 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욕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는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백성을 잘 다스리면 번창을 하고 악한 왕이 일어나서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이방 나라의 침략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신약시대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시대에도 교회가 에베소 교회 시대에서 시작하여 서머나. 버가모 교회시대를 거쳐 두아디라 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완전히 타락하여 우상 숭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태양신 숭배사상을 기독교에 들여와 크리스마스라는 절기가 생겨났고 마리아를 경배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여신을 숭배하던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기념하여 우상까지 만들어 놓고 경배했습니다. 터키에 가면 버가모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서 로마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천주교는 태양신 숭배사상에 기독교가 혼합이 되어 만들어졌고 그 다음에 여신 숭배사상이 들어와 마리아 경배로 변질되어 간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가면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과 기도의 효력


[시편 79:7-8]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백성들에게 진노를 쏟아달라는 간곡한 기도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야만 응답이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당장에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 어떤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지만 즉시 응답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시대의 이 시편의 기도들도 신약시대에 와서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야 이루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도 예수님 당시에서 시작하여 계속해서 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기도가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고 낙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주 오랜 뒤에야 나타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언젠가는 꼭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들처럼 식언을 하거나 무엇을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간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있지만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우리 생각으로는 굉장히 지체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 보실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 응답을 주실 때를 미리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이 당장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언젠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시편의 기도도 그 당시의 시점에만 맞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먼 훗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 와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던져주는 것입니다.





열조의 죄악과 하나님의 징계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 79:8)


 성경에 보면 아비의 죄악을 후손에게 삼사대까지 미치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는 기도가 어떤 기간 동안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재차 멸망당하고 이스라엘은 온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2차대전 당시 나치스당에게 대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그 밖에도 2천 년간 온 세계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무서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죄의 결과입니다. 그 조상들의 죄가 그토록 오랫동안 가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직까지는 대부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 조상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데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로 영접하소서"(시 79:8)


 이 시편 기자는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는 간곡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들의 시대에 지은 죄로 말미암아 참혹하게 멸망을 당했는데 이 시인은 지금이라도 자기들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그러나 이 시편 기자의 기도는 단순히 자기 마음의 평안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평안만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시고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용서를 안하시고 다 심판해 버리신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멸망해 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편 저자는 주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세상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벌 주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영광의 기준을 거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형제나 자매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흉을 보고 야단을 치고 벌을 주어야 속이 시원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말하는 것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참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용서해 주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고 허물을 용서하는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누구든지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남을 용서해주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성령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신 백성


[출애굽기 3:13-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던 하나님의 이름을 모세가 여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났고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신약시대는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이름이 맡겨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백성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교회 당시에 수리아 안디옥 사람들이 최초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나타내야 할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지고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서 그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능력을 행하고 마음들이 하나가 되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었는데 그 이름을 둔 민족이 완전히 멸망을 당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면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일컬음을 받는 백성인데 주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저 이방 사람들에게 우리가 멸망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면 주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행복이나 평안보다는 주님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영광스럽게 나타내느냐를 늘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자칫 주님께 욕을 돌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히브리서 6:1-8]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에 "성령에 참예했다", "한번 비췸을 얻었다",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말들은 다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타락한 자라는 말을 보통 상식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타락한 사람이 주색잡기 따위에 빠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신앙생활의 열매가 없는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육신에 빠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사 흘리신 피로 인해 구원을 받았지만 주님을 본받아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을 경험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생활을 하지 않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기 쉽습니다. 육신이 살아서 움직이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 보실 때는 타락한 생활입니다. 밭이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도 잘못하여 주님께 욕을 돌리고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잘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고 가리워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마음속에 굉장히 아프게 생각하고 괴로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도 너무 뻔뻔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단번에 다 용서되었다는 생각에 죄를 짓기에 담대한 마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성령의 마음


우리는 부득이 어떤 잘못이나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라도 그 죄와 씨름을 하면서 주님 앞에 간절히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다 용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다시 한 번 주님 앞에서 그 문제가 풀려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주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그때부터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번 구원받았으니까 되었지 하면서 오히려 구원받기 전보다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그냥 죄를 보통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다. 성령이 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시겠습니까. 만일 우리 마음에 성령이 계신다면 우리가 죄를 보통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은 죄를 철저히 미워하십니다. 만일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죄를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이 성령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성령이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 죄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나고 그 죄와 씨름하면서 성경 말씀에서 다시 한번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 해가는 올바른 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예루살렘이 멸망의 지경에 이른 것을 고민하면서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지는 기도의 응답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시 79:1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이방의 손아귀에 들어가 고통을 당하고 이방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하여 이방에게 욕을 당하지 않도록 이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의 종들의 피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라는 이 기도는 예수님이 오셔야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피 흘린 대가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세상에 대환란이 있을 때에 비로소 다 갚아집니다.





조용히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라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시 79:11-12)


 여기서 칠 배라는 것은 완전수를 나타냅니다. '칠 배나 갚으소서' 라는 말은 완전히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입니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계 18:1-2, 10)


 지금부터 2,600여년 전에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는데 이제 이 세상 마지막 때가 되면 바벨론도 멸망하게 됩니다. 그때 가서 죄의 대가를 완전히 받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 세상, 바벨론에 붙잡혀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주님이 당장에 무엇을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습니다.


 주님은 현재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면 분명히 언젠가는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우리 눈앞에 당장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 당장 어디에 있는지 모르더라도 조용히 참고 견디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자세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