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2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는 삶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저희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시 82:1-8)


 이 시편 82편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사건이 기록된 역대하 19장을 읽겠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 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거하더니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 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유다 온 나라 견고한 성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회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거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저희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의와 성심으로 이 일을 행하라 무릇 어느 성읍에 거한 너희 형제가 혹 피를 흘림이나 혹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를 인하여 너회에게 와서 송사하거든 저희를 경계하여 여호와께 죄를 얻지 않게 하여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 너회가 이렇게 행하면 죄가 없으리라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에는 대제사장 아마랴가 너회를 다스리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 지파의 어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다스리고 레위 사람들은 너회 앞에 관리가 되리라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하실지로다 하니라"(대하 19:1-11)



여호사밧 왕의 회개와 혁신


 남쪽 유다의 왕인 여호사밧이 북쪽 이스라엘 아합 왕의 권유로 함께 전쟁을 하러 나갔는데 아합 왕은 죽고 여호사밧만이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가 나타나서 여호사밧을 책망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인 아합은 우상숭배를 하는 아주 악한 왕이었고 여호사밧 왕은 본래는 아주 선하고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을 도와서 함께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여호사밧 왕은 회개를 하고 돌이켜서 매우 혁신적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 대목은 이스라엘의 재판을 하는 관원들에게 당부하는 이야기 입니다.

 여호사밧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재판관에게는 하나님을 위해서 공정한 재판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대하 19:6)


 하나님은 공의롭고 불의가 없으신데 사람들은 뇌물을 받고 불의한 재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사랑을 가로막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재판입니다.

 여호사밧은 예루살렘에도 재판관을 세우되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충의와 성심으로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재판을 요청할 때에 자초지종을 잘 살펴서 공정하게 해야지 그렇지 않고 잘못하면 하나님께로부터 크게 징계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이 기록된 것은 그 전에는 재판장들이 재판을 잘못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실제로 혁신을 일으켜 나라의 기강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바로 세워지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편 82편은 이러한 일을 근거로 해서 지어진 아삽의 시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속의 재판의 의미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시 82:1-2)


 우리는 이 재판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재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회는 옛날에는 이스라엘 민족이고 오늘날은 교회입니다. 제가 침례를 받고 현실교회를 떠날 때에 재판국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일종의 종교 재판인데 교단에 어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면 노회에서 만든 재판국에서 재판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각 교회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모임은 그런 재판을 여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재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도 재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재판의 다른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규범이므로 이 규범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재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회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회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회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1-4)


 가령, 여기에 보면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릇된 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계 안에는 세상적으로 돈이 많다든지 지위가 높다든지 아니면 지식이 많다고 해서 어떤 사람을 내세워 하나님의 일에 앞장서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에 차별을 두어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을 멸시한다든지 하면 그것이 바로 잘못된 재판인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롬 14:13-15)


 또 초대교회에 제사 음식 문제나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그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이 확고하게 서지 않아 혼돈이 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러한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재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내 마음에 안 맞으면 나쁘게 생각하고 내 마음에 맞으면 좋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판단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권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는 것도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자기가 가로채는 일종의 도둑질입니다. 참된 설교는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증거하고 진리를 증거하는 것인데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영광과 칭찬을 받기 위해서나 어떤 이권을 위해서 사용하기 쉽습니다. 신약시대의 재판은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행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된 것입니다.


"너회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시 82:2)


 악인의 낯을 본다는 말은 악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고 그 권세에 굴복하거나 뇌물을 받고 재판을 그릇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일을 언제까지 하려느냐고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의무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시 82:3)


 성경에 보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말씀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에도 보면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 재산 있는 사람들은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고 사도들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나누어 주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그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일곱 집사를 택해서 그 일을 전무토록 하였습니다.

 그 때에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불평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현재 우리들도 만일 의지할 데 없는 믿음의 식구들이 있다면 서로 돌아보아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그런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가지고 있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경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여기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 보면 무조건 과부라고 해서 다 도와주는 것은 아니고 60세 이상이면서 평생을 주님의 일을 위해서 몸바쳐 일한 사람을 교회가 돌보아야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딤전 59-10).



고아와 과부-영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 중에도 물론 고아나 과부가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이방 사람들을 고아나 과부로 지칭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이사야 54장에도 보면 이방 사람을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즉 남편이 없는 과부로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영적으로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고 사랑을 못받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 한 자가 복이 있다,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름같이 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였는데 그러한 말씀들이 전부 과부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그 돈을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지위나 명예나 학문, 오락 따위를 사랑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과부가 아닙니다. 설령 돈이 많이 있더라도 세상에서 그 마음이 너무너무 허전하고 돈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과부입니다. 그 마음이 고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목사가 된 이후에도 참으로 외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제 설교를 들으려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앞에 앉아 있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오순절 당시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쏟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없이 모든 것을 다 내놓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쏟아지는데 재판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이권이나 권위를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판단이나 재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고아나 과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을 보더라도 그 모든 것에 마음이 가지 않고 참으로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고아와 과부에게 쏟아지지만 죄를 향해서는 그것을 책망하고 단죄하는 예리한 수술 칼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나타나 그 사람들이 죄로부터 돌이킬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의 고아나 과부들에게 전해주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교회의 권면과 재판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회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전 6:1-6)


 그런데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데 그 문제를 세상 재판대로 가지고 가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도 판단할 위치에 있는 교회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완전히 세상으로 기울어져서 교회의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15-17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개인적으로 가서 권면하고 만일 안 들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으로 확증케 하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교회에서 그 사람을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살피는 위치에 있는데도 어떤 사람은 막무가내입니다.

 아무리 권해도 말을 듣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에 깊이 빠져 있거나 세상에 깊이 빠져 있으면 아무리 교회가 권면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세상에 빠져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린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어떤 구속력이 있는 법을 시행하는 곳은 아닙니다. 아무런 구속력이 없어요. 그래도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구속력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당장 구속력이 없지만 나중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고 눈에 당장 안 보이는 것이니까 현실적으로 말을 잘 듣지 않는 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교회에서 악한 자들을 내어 쫓으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참담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 5:9-13)


 세상 사람이 이런저런 죄를 짓는 것을 보고 그들을 멀리하고 단절하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하지 않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음행은 우리가 잘 아는 말이고 탐람한다는 말은 물질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상습적으로 사기를 친다든지 아니면 물질적인 어떤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후욕한다는 말은 남에게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든지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임 안에도 술에 취해 사고가 나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임에서 경계를 해야 합니다. 토색하는 것은 물질문제와 관련된 것인데 이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내쫓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너무 불성실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진정으로 회개하면 다시 받아주고 같은 형제로 대할 수 있지만 죄를 뉘우치지 않고 뻔뻔하면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권위의식이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면 안됩니다. 내어쫓을 경우라도 지극히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 자매를 도우라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시 82:4)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잘 돌보아야 됩니다. 여기에 보면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해치고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정당방위로 어떤 법적인 싸움을 싸운다든지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 빰도 돌려대라고 하셨고 또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 는데 우리가 어떤 법적인 투쟁을 한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형제나 자매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는 악인의 손에서 건지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정당한 방위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나 자매라는 사람들이 위급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데도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가만히 있어야지 하는 생각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게으른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


"저회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시 82:5)


 여기에 보면 저희는 무지무각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악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억울한 일을 당한, 가난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고아나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지무각하다는 말은 세상에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흑암 중에 왕래한다는 말은 의지 할 데가 전혀 없고 앞길이 캄캄한 상태를 말합니다.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린다는 말은 이 세상이 질서가 없는 세상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튼튼한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세상이 유동적이고 무질서하여 도저히 마음을 어디에 붙여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광란의 세계로 느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는 세상적인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처세가 능란한 사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 인생살이에 꾀가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기가 참 힘듭니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순진 한 사람, 꾀가 없는 사람,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 믿음이 자랍니다. 구원을 받아도꾀가 많고 마음이 순진하지 않고 머리를 너무 잘 굴리는 사람은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에서 무지무각하다는 말은 바로 순진하고 꾀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이 세상에서는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고 흑암이 있습니다.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린다 하였는데 돈 많은 사람은 돈이 반석이 되어 흔들림이 없이 자신있게 살아가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지식이 기초가 되어 문제없이 살아가는데 그런 장점이 없는 사람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런 사람들에게 내려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구원받은 그리스도인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 82:6)


 요한복음 10장 35절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하셨거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시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사실 다 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였는데 그 말씀을 우리가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실감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신이시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우리들도 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죄인 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인데 그것은 아주 분명하고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고 처음에는 좋아했지만 조금 지나면 그런 마음이 자꾸만 사라집니다. 신은 온데간데 없어져버리고 다시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내가 언제 구원을 받았나 할 정도로 의식 속에서 구원이 가물가물합니다. 나도 구원을 받았다 하는 그것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슬금슬금 다시 이 세상 사람으로 돌아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 82:6)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인데 왜 보통 사람같이 살다가 죽어야 합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신이 있고 실지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들림받기 전이고 육신이 변한 것은 아니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어떤 표가 겉으로는 안 나타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그 까짓게 무슨 구원이냐고 무시합니다. "뭐, 구원이야 십원을 받지" 하고 조롱하면 아주 억울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신이 된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에 휩싸여 그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슬금슬금 보통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춤추니까 같이 춤추고 세상 사람들 놀음하니까 같이 놀음하고 싸우니까 같이 싸웁니다. 세상 사람들이 짓는 죄를 같이 짓고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통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참 신자라면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자도 없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고 신 이 된 사람들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이 육신 속에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아주 강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또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그만 죽 서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구원받은 이후에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은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자꾸 어려움이 닥쳐오고 빨리 주님이 오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것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한번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신이 되었는데도 보통 사람으로 살면서 죽어가지는 않는지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위하여


"너희는 범인갈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갈이 엎더지리로다"(시 82:7)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명예나 권위나 부귀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호령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백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성령으로 거듭났으니 하나님의 아들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범인같이 이 세상의 부귀 영화로 만족하는 방백의 하나같이 살다가 허무하게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회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이니"(롬 8:12-13)


 육신대로 사는 것은 죽음입니다. 신앙이 죽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신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삶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우리 마음에 이러한 각오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심판과 그리스도인의 심판대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 이니이다"(시 82:8)


  이제 주님이 오시면 이 세상에서 그 동안 판단이 잘못되었던 모든 일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도전했던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고집스럽 게 잘못한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우리가 들림받은 이후 7년 간 이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동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이 있어야만 완전히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은 채로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구원을 받았으니 깨끗해져야 되는데 그 심판에서 우리가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다 드러날 그 때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육신의 생각을 죽여가다보면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참으로 놀라운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