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4편] 아름다운 주의 장막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동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12)


 이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 ,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주의 성막-예루살렘 성전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시 84:1)


 구약시대에 주의 장막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성전은 상징적이고 그림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그저 외형적인 예루살렘 성전만을사모하는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열왕기상 8장을 읽으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이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에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과 응답이 나타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사상과 신앙의 중심이 성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근본 목적


 그렇지만 주의 장막이 아주 사랑스럽 다고 말한 것이 요즘 기독교인들이 아주 호화찬한 예배당을 짓고 그 예배당을 사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5-46)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민족을 인도해내사 그들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 리 라고 하셨습니 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채찍을 맞고 바로 왕의 종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민족으로 하나님의 집과 장막을 삼아서 그들 가운데 계시려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거하실 수 있는 거처를 만드시기 위해서 그들을 구출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아담과 이브를 지으시고 이 모든 세상을 그들에게 다스리고 지배하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그들을 속여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탄이 왕 노릇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피조물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과 접촉을 하시고 그 인간들 속에 하나님 자신의 사랑, 거룩함, 진리 등의 속성을 나타내시려는 것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근본 목적 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는 오히려 사탄과 접촉을 하면서 사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계획을 하나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예수님 안에 계시거든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거하실 수 있는 곳을 마련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처소는 이스라엘 민족이고 신약시대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 속에 임하사 거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넘어가버린 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세상으로 복구시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거룩함을 완전히 실행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목적입니다.

 우선은 이스라엘 민족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에 나타내시려 하는 뜻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이것을 약속하셨고 그 다음에 모세 시대에 와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내신 것입 니다.



율법의 목적


모세는 시내산에 갔을 때에 거기에서 율법을 받았는데 그 율법의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이중성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읽어보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통해서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렇게 되지 않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셔서 그것을 돌비에 새겨 성전 지성소 안의 법궤에 안치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하나의 증거로서 성전이 지어졌고 그 성전 안의 법궤는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산 밑에서부터 그 법궤를 계속 메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여호수아 당시에 요단강을 건널 때에 법궤를 멘 제사장이 걸어들어가자 물이 흐르던 것이 중지가 되기 시작했고 강 중간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섰을 때 물이 완전히 중지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다 건너갔습니다. 법궤는 하나님 자체를 상징합니다.

 나중에 법궤가 오랫동안 실로라는 곳에 있다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옮겨갔고 그 다음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안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로부터 항상 법궤가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고 은혜 시대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기록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집-교회


이것은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집이 교회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하나님의 집이란 말은 시편 84편의 "하나님의 장막"과 같은 뜻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회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17)


 여기서 '너희' 라는 말은 복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고린도 교회 자체 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고린도에 있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집합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모르느냐"는 바울의 말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교회의 존재 의미가 무엇입니까? 물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죄 가운데서 멸망받아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 근본 목적은 사탄이 왕 노릇하고 있는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이 오셔서 계실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고 신약 시대에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굉장히 중요하게 보십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고 현재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모르면 아무렇게나 사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별수없이 죄도 짓고 뻔뻔스럽게 회개도 안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는 매우 사정이 복잡했습니다. 싸움과 다툼이 있는 복잡한 교회였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너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을 왜 모르냐"고 날카롭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다.'라는 확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랑스럽다"는 말은 이처럼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겉으로는 흠모할 것이 없었던 주님의, 내면적인 아름다움


물론 물리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아름답고 웅장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갈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갈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화가들이 그린 그림처럼 주님은 그렇게 핸섬하고 멋있는 분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못생겼고 천대를 받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외형적인 모습입니다. 가난했고 홈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안에는 신성이 계셨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아름다움입니다. 성전 지성소 내부의 금은 주님의 영광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의 내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접하면 접할수록 그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발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잘 모르기 때문에 장로교다 감리교다 무슨 교다 하면서 제각기 교파 자랑을 합니다. 교인 쟁탈전을 벌이면서 진정한 교회의 뜻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 모습과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


교회는 예수님의 인격체이고 생명체입니다. 이 예수님의 생명체를 참으로 느끼고 알 수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참된 인격과 신성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욕심이나 사심이 십자가에 처리되는 만큼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부조리가 없고 완전한 사람만 모인 곳은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지만 아직 죄를 짓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조리하고 잘못된 점이 계속 드러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내면입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고 많은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지만 그 예수님 안에 지극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모든 아름다운 것이 나타나는 것처럼 교회도 외형은 볼품이 없지만 그 안에 예수님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것이 예수님의 육신 안에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나 외부적으로는 그것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육신적인 요소가 처리되어가는 만큼 교회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생명도 아끼지 않고 교회를 위해서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할 때 발람이 라는 사람이 발락의 사주를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지만 입만 열기만 하면 저주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축복이 나왔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아름다운 것이 없고 잘못 투성이였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름답게 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는 성전이 굉장히 아름답고 사랑스럽 다는 말입니 다. 우리들도 현재 겉으로만 나타나 있는 교회의 모습과 잘못만을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 부리고 온갖 부조리를 저지르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그 내면이 아름답고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한 다윗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다윗은 하나님 앞에 한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다윗은 체면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법궤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다리가 드러나자 미갈이 그것을 보고 왕의 체면이 뭐냐고 나무랬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뛰놀고 춤을 춘 것이 수치스럽게 보일지라도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미갈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성으로 모신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미갈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척도는 교회의 진가를 아느냐 모르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를 외부적으로만 보면 별볼일이 없어요. 설교하는 사람도 그렇고 구성 원들을 보아도 그렇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외부적인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성령이 계시는 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느끼고 참으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흔들림이 없습니다. 자기 개인의 생활보다는 교회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언젠가 영국의 윈저 궁전에 한 번 가보았는데 참 굉장해요. 그것뿐만 아니고 이스탄불에 가면 옛날 황제들이 살던 궁정이 있는데 대단합니다. 서울의 덕수궁이나 경복궁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서양 영화를 보면 웅장한 궁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곳은 독재자들이 살던 곳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궁정은 구약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을, 신약시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예수님의 신부인 교회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갈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 21:9-11)


 계시록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이 어마어마한 성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신부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신부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실상은 하나님의 궁정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바라고 계획하셨던 것이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아름다운 궁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궁정은 바로 인격체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갈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갈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성곽은 벽 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중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11-27)


 이 세상에 어떤 왕궁이 이 런 왕궁이 있을까요? 하나님 의 왕궁의 아름다움이 최대한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궁도 그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런 왕국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오는 보석이나 금 같은 것들은 어떤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전부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의 신부가 영원한 천국이거든요.

 우리가 현실에서 어떤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성전의 보석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이 성은 주님을 믿고 그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완성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처소


현재는 우리가 아직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없지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으로 성령과 연결되어 있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겉으로 보면 온전하지 못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있는 그 성령의 역사 속에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처소가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괴로움과 핍박을 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연마되어가고 다듬어져 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그림자적인 역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사람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실제로 성령이 오셔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생명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우리의 육신적인 속성을 교회 안에서 배제해야 됩니다. 외모로 사람이나 어떤 일들을 판단하는 것을 배제하고 정말 아름다운 성령의 역사 속에서 깎이고 낮아져서 주님의 거룩한 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궁정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이 시는 신약시대가 없었으면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신약시대가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만약 물질적인 그런 성전만이라면 나중에 그것이 바벨론에 의해서 다 파괴되어 버렸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후에도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와서 새로 건축한 성전을 멸망시켜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상징적으로 그림자적인 뜻이 있는 것 뿐이지 그 물리적인 성전 자체에 하나님이 계신다든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를 사모하는 마음


우리는 이러한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궁전은 주님의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저한테 저 멀리 외국에서 편지가 오곤 합니다. 구원을 받긴 받았는데 어떻게 해서 외국에 나가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정말 모임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임에서 떨어져 먼 곳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이곳에 함께 모여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은혜스러운 일인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이처럼 교회가 고마운 곳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는 못 할지라도 영적으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좀더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멀리 있는 사람들은 정말 뭔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아무런 의논 상대도 없어 옆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도 마치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답니다. 그들이 얼마나 교회를 사모하는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본래 죄인이었던 우리들에게 주어진 큰 은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시 84:3)


 마태복음 13장의 새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되어 있는데 값어치로 따지자면 별것없는 그 참새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그리고 그 안에 제단이 있는데 이 참새와 제비도 보금자리를 거기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참새와 제비는 아무 가치 없는 존재였던 우리 자신들을 말합니다. 우리같이 보잘것없는 존재들도 하나님의 궁전 안에 주소를 두고 그 안에서 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궁정은 어마어마하고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지만 우리 같은 죄인들도 구원을 받아서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넓고 큰 은혜입니다.

 원래 우리가 감히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까? 욕심 부리고 욕하고 싸우고 틈만 나면 죄가 속에서 튀어 나오는 가치 없고 보잘 것없는 우리들이 감히 하나님의 궁정 안, 하나님의 제단에서 보금자리를 얻고 집을 얻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기업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거기에 합당하게 다듬어져가야만 하기 때문에 시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련밖에 모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너무 답답하고 싫게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해 가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회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시 84:4)


 참으로 성령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 그 집 안에서 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거듭 난 생명 안에는 영광스러운 기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여기서 시온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본래는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졌던 한 절벽을 시온이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전 지은 곳 전체가 시온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시온이라는 의미가 확대되어 나중에는 예루살렘이 시온이 되었고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시온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시온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명사입니다.

 여기에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다는 것은 비록 시온을 멀리 떠나 있지만 그 마음만은 항상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을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내가 시온에 갈꼬' 하면서 늘 시온을 바라보는 사람이 시온으로 통해 있는 사람입니다.



천로역정-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길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로 통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궁극적으로 천국에 간다는 마음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천국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에는 샛길이 너무도 많습니다.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을 읽어보면 크리스챤이 길을 잘못 들어 아주 고생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번연이 옥중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밀하게 비유적인 글로 지어놓은 천로역정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아주 잘 묘사해 놓은 이 책을 여러분도 다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주인공인 크리스챤이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과정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에게 시온은 저 예루살렘이 아니고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의 마음을 붙들어 예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도록 한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진정한 예배가 있고 신앙생활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바로 성 령으로 말미 암아 살아갈 수 있는 시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길을 중심으로 거기에 연결될 때에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면 개인적으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눈물 골짜기-통곡의 벽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 84:6)


 예루살렘에 가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던 곳이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그곳이 눈물 골짜기입니다. 지금은 성전 안에 회교사원이 있 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천 년 동안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가끔 예루살렘에 들리는데 그때 슬피 통곡하며 성전 벽에 눈물을 흘리고 갑니다. 기도문을 돌 사이에 끼어넣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합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통곡의 벽이고 눈물 골짜기같이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다윗도 성전을 떠나갔을 때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곳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성전을 향해서 다시 돌아가는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지금은 도로에 아스팔트가 나 있지만 그때는 팔백 미터의 높은 산 위에 있는 성전까지 가려면 험한 길을 거쳐야 했습니다. 도둑 떼가 많은 여리고 골짜기도 거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일년에 몇 번씩 그 예루살렘까지 가자면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합니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고 멀리에서 여러 날 걸어와서 그 산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에 갔을 때에 보니까 사람들이 통곡의 벽 옆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 왼쪽편에 굴이 있었습니다. 거기를 들어 갔더니 참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지은 터 바로 밑에 사람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거기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어요.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라는 말씀처럼 물리적으로도 물이 많이 나오고 눈물도 많이 쏟아지는 곳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 맛볼 수 있는 성령의 생수


그런데 영적으로 눈물 골짜기는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하는 생활입니다. 고난과 시련과 핍박을 거쳐야만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생활은 절대로 평안한 생활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정말 어려움을 당하고 눈물을 흘려본 사람만이 시원한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 84:6)


 샘의 곳은 성령의 은혜를 맛보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간 모든 사람이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 끝에 성령의 위로로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시온을 향한 대로가 있는 사람은 시련과 핍박을 당하곤 하지만 그 다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전 즉 교회는 기도하는 집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시 84:7-8)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회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회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45-46)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그 기도하는 집을 향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고 나서 낙성식을 할 때 주 여호와의 집이 있는 이곳을 향해서 멀리에서 적군과 더불어 싸울 때나 병에 걸렸거나 이런저런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때 기도하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들어 주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땅에서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루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평범한 말씀 같지만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이고 우리가 합심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 다. 개인적 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합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하는 집은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었던 이 시편 저자는 성전을 사모하면서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시 84:9)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기름 부으신 자가 있을 때에 기도하는 집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계수될 가치 있는 삶


"주의 궁전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교회 안에서 참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는 한 날이 장차 하나님 앞에 가면 영원한 가치가 있는 날이 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0-12)


 죽은 사람에게는 날이 없습니 다. 괜히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념하여 죽은 지 몇 년이다 하는데 그것은 산 사람이 하는 소리 이고 죽은 사람 자체는 실지로는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신앙생활과 믿음이 죽어버렸으면 날이 없는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날을 계수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는 말처럼 다른 곳의 날은 의미없는 날이고 계수할 수 없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칠십 세에 구원을 받고 1년 살다가 죽었으면 1년만의 계수가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날수는 계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참으로 계산이 될 수 있는 날은 주님의 궁정인 교회 안에 있는 날뿐입니다. 그 안에서 하루를 살지라도 하나님 앞에 계수되는 날 영원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적으로 하루를 산다는 것은 보통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를 살아도 가치 있는 하루이면 그 하루가 주님 앞에 계수가 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어떤 때에는 기분이 나빠서 그냥 지나는 날도 있고 어떤 때는 죄를 지으면서 하루가 지나가는 때도 있습니다. 얼마나 아까운 날들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돈 벌기 위해서 초관리까지 한다고 합니다. 분초를 다투면서 시간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일초라도 허무하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손실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일초를 다투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들도 그 초관리를 신앙생활에 도입해서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갔으면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루를 지내는것이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간을 귀히 사용해야겠다는 마음이 절실해질 것입니다.



문지기의 생활-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


한편 하나님 문지기는 성령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놓고 양들을 이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목자이시고 문지기는 성령이신데 우리가 그 성령을 따라 인도함을 받는 것이 문지기의 생활입니다.



복음의 빛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생활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하나님은 해라고 하였는데 해는 모든 생명체와 에너지의 근원입 니다. 하늘에 있는 태양은 땅에 있는 초목들에게 빛을 주어 그것이 과실도 맺고 꽃도 피게 하여 동물과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게 합니다. 태양빛이 우리에게도 물리적인 생명의 에너지원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은혜를 골고루 나누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궁전에서 그 일을 펼쳐 가십니다. 그러니 교회가 맡은 사명이 얼마나 큽니까. 교회를 통해서 복음의 빛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2)


 우리가 이 시편을 공부하면서 그냥 읽고 듣고만 지나갈 것이 아니고 시간을 내어 복습을 하고 새김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