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6편] 선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기도

[시편 86:1-17]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강포한 자의 무리가 내 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이 시는 다윗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 올린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망을 쳤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많이 겪었는데 그런 극한 상황에서 올린 기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기도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


이 시편 86편의 내용에는 기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이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가 타락하면서부터 기도가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는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교회에 나가면 무조건 기도를 따라서 하는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제일 먼저 기도부터 배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면 그에 앞서는 수속이 필요한데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국민이 되려면 굉장히 절차가 복잡합니다. 우선 미국에 가서 5-6년간의 연한이 지나야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까다로운 절차들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은 한국에 오래 살아도 영주권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한국은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나라의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절차가 필요하듯이 기도도 역시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져야만 기도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문제는 제쳐두고 예배당에 나가는 첫날부터 기도부터 배우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의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깨닫고 구원을 받으면 자연적으로 먼저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먼저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가 있으면 그 죄를 해결해야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야고보서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야 들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그냥 불상 앞에 가서 염불하는 식으로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 세운 불상은 목탁을 치면서 아무리 열심히 염불을 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불상과 기도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 앞에서 염불을 하면 마치 듣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종교 심리에 불과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


[시편 86:1-2]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여기 보면 이 시편 저자가 "나는 경건하오니" 라는 표현을 했는데 얼핏 보면 자기를 자랑하는 것 같은 말을 했습니다. '경건하다' 는 말의 뜻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사람이 점잖고 말의 실수도 잘 하지 않고 예의 바르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신앙심이 깊다는 뜻입니다. 경건하다는 말의 근본 뜻은 믿음이 깊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 아래서 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기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를 살펴보았는데 그 관계에서 다윗은 경건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돈독했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 따위를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형성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먼저 설정이 되어야 그에 근거해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도 자칫 함부로 기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는 항상 내가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또 과연 믿음으로 기도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괴롭고 뭔가가 가로막힌 것이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내맡길 수 있는 상태에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니까 믿음이 없이 하는 기도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기도가 되어 버립니다.





기도의 대상(선하신 하나님)


[시편 86:3-6]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그러면 이 시편 기자인 다윗은 무엇에 근거해서 기도를 했을까요?


 심령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육신의 무엇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고 영혼을 기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5절에 "선하시고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라고 했는데 사유한다는 말은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부처 앞에서 목탁을 치면서 염불하는 사람이나 썩은 고목나무 앞에 가서 비는 사람이나 대학합격을 위해서 마당에 물을 떠 놓고 달을 쳐다보고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의 대상은 냉정하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신이 항상 그 마음에 아롱거릴 것입니다. 비인격적이고 잘못하면 벌만 주고 용서라는 것이 없는 존재가 기도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주는 선하사'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선하다' 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선에 근거해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기록된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는 악의가 조금도 없이 풍성한 선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지으사 사람에게 식물로 주셨고 또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풀을 식물로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 속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에 기초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선이 없는 세상입니다. 선의 반대인 사탄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악의 씨를 뿌렸고 선을 완전히 망가뜨려버리고만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 선하신 뜻을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 오해하는 마음은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진 사탄의 씨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형편이 어려워지고 뭔가가 잘 안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기도 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육신 속에 심어져 있는 죄의 씨요 악입니다. 악은 언제나 선을 도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령 버틀란트 러셀 같은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님이 아주 불의하고 불공평한 존재로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죄가 이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지어진 원래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현재와 같은 비참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사탄으로부터 죄의 씨가 심겨진 내 책임이고 그다음이 사탄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가득 차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옥중에서도 천지가 떠나가도록 찬송을 부른 바울과 실라가 나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선이 가득 찼습니다. 그들의 손과 발이 쇠사슬에 묶여 감방 깊은 속에 갇혀 자유가 없는 상태였지만 감사가 흘러 넘쳤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이 그 마음에 가득 찼을 때 그런 환경 속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옥이 떠나가도록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런 사실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이 내 마음을 지배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환희와 즐거움이 넘치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아주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선의 기초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선은 이 세상의 도덕적인 선과는 다릅니다. 이 도덕적인 선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요 인간의 의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이 시편 기자는 기도할 때에 그 기도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드렸습니다. 그 대상은 불의한 것이 티끌만큼도 없는 완전히 선한 분이셨습니다

.


[누가복음 18:18-19]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 부자 관원은 예수님을 훌륭한 사람 정도로 알고 그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고 한 말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틀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일 하나님으로 믿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했으면 그 말은 맞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선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악한 신이고 사람에게 벌을 줄지언정 복을 주지 않는 그런 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용서하기를 즐기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그 하나님의 선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아갈 때 내가 비록 잘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사유하고 용서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시편 86:5]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비록 자녀들이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동물의 세계라는 TV 프로를 보면 곰이나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들도 자기 새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제비나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기르기 위해서 먹이를 물어다가 입에 집어 넣어줍니다. 어머니들이 어린아이를 키울 때에 먹을 것을 씹어 입으로 내어가지고 먹여주는 것처럼 새끼들을 먹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저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어주신 마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일찍부터 어머니를 여의어서인지 그런 것을 보면 감회가 남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만 보면 어머니의 사랑 같은 사랑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요즈음에 보면 별로 무게가 없습니다. 금방 죽고 못 살다가도 금방 싸우고 갈라섭니다. 어머니는 아무리 자식이 잘못하고 어떤 나쁜 길을 가도 한결같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나 짐승이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과 미물들의 어질고 착한 마음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그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는 어린 아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고 이십 년 삼십 년이 넘어도 아직 어린애입니다. 좌우를 분간할 수 없는 어린애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때론 실수도 하고 잘못할 때도 많지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가 풍성한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


[시편 86:7-8]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 단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21:1-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이 너를 지키시고 함께하시리라고 했는데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 말고는 우리를 지킬 능력이 있는 분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우리 마음을 토로하고 우리의 사정을 그 앞에 아뢸 수 있는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주와 같은 신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중적인 마음으로 기도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섬길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마음도 있고 재물 섬기는 마음도 있으면 두 가지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고 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굉장히 독재자이십니다. 민주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자유의식이 있어 하나님의 독재도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젊은이들은 하나님을 믿기가 과거보다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왕권 시대에는 제일 권위자인 왕을 섬기고 절대복종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도 쉬웠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민주주의 시대로 하나님의 권위마저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민주주의가 없는데 지금 이 시대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앞장서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완전한 독재를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것이 없으시고 완전히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완전하고 선하신 분의 뜻을 저버리고 죄에 물든 대중의 뜻과 민주주의가 좋다 하여 절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가버리면 멀리 죄의 길로 가게 됩니다. 이 세상은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면서도 죄의 길로 갑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행되면서부터 각종 범죄가 훨씬 불어나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세계입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압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잘못된 것입니다만 죄를 가진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강하게 다스리지 않고 풀어버리면 죄가 범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처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다가 나중에 왕의 제도를 택한 이후로 더욱 타락의 길로 가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이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무질서한 세상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이것이 이루어져서 세상의 죄가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소말리아의 사람들도 흉년이 들어서 굶어 죽는 것이 아니고 민족 간에 자중지란이 생겨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유고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도 보면 통일은 되었지만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지금은 완전히 폭력이 범람하는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도 대책없이 통일될까 봐 걱정입니다. 통일되면 독일이 지금 불행한 것처럼 우리도 그럴까 걱정됩니다. 사람들은 무얼 모르기 때문에 통일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통일 통일 하지만 통일이 되면 어머어마한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는데 그것은 생각도 안 합니다. 물론 언젠가 통일이 되기는 되어야겠지요. 





기도는 믿음의 표현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대상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완전한 독재자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지껄이고 아무렇게나 기도해도 들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해야 합니다.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 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6:32-33]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왜 필요할까요. 그래도 기도가 필요한 것은 기도는 우리 믿음의 발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믿는 마음을 개진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쓸 것을 아시는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하나님을 향해서 진정으로 믿는 마음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표현이 기도입니다. 우리 마음의 표현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님 안에서 통일이 되는 때


[시편 86:9]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리이다


 이 말씀대로 과연 열방이 온 세계가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그 이름에 영화를 돌릴까요. 이 말씀이 과연 실행이 되겠습니까?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들은 이 세상이 끝날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 때는 다른 신의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 말고 누구도 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에베소서 1:9-10]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예수님 안에서 통일이 될 때가 옵니다. 우리는 이 진짜 통일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이 통일되어 버리면 주님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악의 세력이 소멸되고 통일을 방해하는 것은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는 그 시대가 우리에게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통일될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완전한 통일이 올 때 정말 환희에 찬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자연법칙과 영의 법칙


[시편 86:10-12]

대저 주는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세상의 정확한 물리적인 법칙과 과학의 진리도 사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그 말씀이 진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연법칙도 진리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진리인데 하나님은 그 법칙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운행하십니다. 지금도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그런 가운데 생명이 유지됩니다. 해가 떴다가 졌다가 하는 이 모든 것도 전부 이 진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풀잎이나 나무 뿌리 속에도 전부 진리가 있어서 그것들 속에 사람의 몸에 유익하거나 생명의 요소가 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 식품을 만들거나 약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진리를 담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적인 자연법칙 외에도 또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모르고 실의에 빠져 헤메다가 어느 날 성경 말씀에서 이 영적인 진리를 하나 깨달으면 마음에 질서가 잡히면서 감사하고 생기발랄한 마음이 이루어집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주어 무질서하고 답답하던 마음을 새롭게 해줍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케 하소서


그 진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리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는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온 세상에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서 얼마나 많이 헤맵니까? 불상 앞에 가서 목탁 치며 중얼중얼하는데 거기에 무슨 진리가 있습니까? 철학 속에 무슨 진리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두뇌를 움직여가고 인간의 운명을 개척해 가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철학도 인간에게 답을 못 주었습니다. 답을 못 주는 그것이 무슨 진리입니까? 이 세상에 확실히 답을 주는 진리가 하나님 말씀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그 진리가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여 주의 도로써 나를 가르쳐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은 입만 여시면 진리를 발표하셨습니다. 큰 폭풍과 파도도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조용해졌습니다. 자연계도 이 진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신앙생활하는 것은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깨끗해질 수 없고 서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도로써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 진리에 행하오리니 내가 진리로서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그 이름을 높이 불러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삶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얼핏 자기 재주나 능력으로 요령껏 육신을 위해서 살면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육신을 위해서 온갖 것을 준비하며 즐거움을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 세상의 영이 아닌 다른 영, 즉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기울어 내 힘대로만 살면 자꾸자꾸 마음이 불안해지고 고통이 옵니다. 육신이 힘을 크게 발휘하면 내 속에 있는 생명이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절제된 생활


그래서 신앙생활은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입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고 먹는 것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도 하고 싶은 대로 마구 다 해버리면 나중에 가서 그 말은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씁쓸해하게 됩니다. 오락도 너무 절제 없이 만끽하면 나중에 씁쓸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절제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절제된 생활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절제라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말도 때에 맞게 적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남의 말 하기 좋아해서 한바탕 해버리고 나면 크게 후회하는 일을 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매사에 너무 움츠릴 필요는 없습니다. 실수를 해도 나중에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 역시 진리입니다.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고 뉘우치면서 조금씩 조금씩 무엇인가를 쌓아가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귀로만 이 진리를 배워서는 안 되고 우리의 모든 기거동작 속에 "주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듣고 행하는 속에서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표징


[시편 86:13-17]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가 일어나 나를 치고 강포한 자의 무리가 내 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은총의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저희가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심이니이다


 그렇게 되면 유감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내가 믿고 산다는 것을 이 세상에 증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은총의 표징을 하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데만 목적이 있다고 하면 구원받은 그날 그 시간으로 죽어버리면 오히려 행복할 것입니다. 더 살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구원받고 당장에 죽어버리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우리가 구원받고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셨다는 표증을 이 세상에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 표증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어떤 자매는 구원받은 즉시로 항상 괴롭히던 병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좋은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측면에서 그런 것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의 표증(예수님의 부활)


[사도행전 3:14-16]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빌라도와 합작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났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표징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예수님이 구주이시라는 것,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 예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것, 이 모든 것의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시던 모든 일의 최후의 표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하시던 모든 말씀과 모든 일이 완전히 사실이라는 것이 부활로써 입증이 되고 드러났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표징도 역시 살아있는 신앙생활, 즉 부활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는데 부활의 삶, 새 생명의 삶이 없으면 표증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이마에 맨날 내 천 자만 그려 가지고 아이고 죽겠다며 살아보십시오. 누가 구원받으려고 하겠습니까.



[로마서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는 많은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쳐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얼마나 강력하고 멋있는 증거입니까. 요즘은 초대 교회 시대와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믿음을 지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표징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운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에 닥친 어려움만 보고 너무 근시안적으로 살면 안 됩니다. 실망스럽고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가는 것이 생명의 힘이요 은혜의 표징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기도가 있음을 감사드리며 은혜의 표징을 간직하고 힘차게 살아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