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9편] 진정한 소망과 믿음의 기도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하나님은 거룩한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 주께서 라합을 살륙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 이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 주는 저희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 이다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내 손이 저와 함께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근고케 못하리로다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니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쪅으로 저희 죄악을 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 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 하셨도다(셀라)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노하사 물리쳐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 하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주께서 저의 대적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저희 모든 원수로 기쁘게 하셨으며 저의 칼날을 둔하게 하사 저로 전장에 서지 못하게 하셨으며 저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 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그 소년의 날을 단축케 하시고 저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언제까지나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마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마(셀라)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주는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풍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89:1-52)


 이 시편 89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해서 기도하는 내용으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1절과 2절은 89편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시 89:1-2)


 신약시대로 말하면 인자는 은혜이고 성실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한번 한 말을 식언하는 분이 아니 시고 또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세운 언약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시 89:3-4)


 다윗을 세워서 그를 통해 영원한 언약을 주신 것을 시편 기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를 읊고 있는 때는 이미 다윗 왕의 때는 지났고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인데 다윗에게 약속한 이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 이 다윗에게 "네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케 하고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지금 이 시를 읊고 있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는 다윗 계통의 왕의 지위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성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언약에 근거한 기도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그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허무맹랑한 기도가 되고 맙니다. 요한일서 5장 14절의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은 아무렇게나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생각나는 대로 그냥 아무렇게나 할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렘 33:19-21)


 여기서 주야의 약정이라는 것은 낮과 밤이 이루어지는 자연법칙을 말합니다. 낮과 밤은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이 주야의 약정이 변한다면 이 자연계에는 큰 변동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기 전에는 그런 일이 절대로 안 생깁니다. 낮과 밤이 이루어지는 이 자연법칙은 주님 오신 후에 비로소 변동이 생깁니다.  이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이 자연법칙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자손 중에서 왕위를 이을 자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자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 중에서 왕위를 이을 자가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고 왕권이 없어져 버렸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야김부터 시작해서 왕권이 없어져버렸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하나님의 약속이 파해진 것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렘 33:22)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알을 측량할 수 없는 것처럼 다윗의 자손과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 서 그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자기들 앞에서 나라로 인정치 아니하도다"(렘 3:23-24)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고 나라로 인정치 아니하셨다고 실망스러운 어조로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의 약정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 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진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렘 33:25-26)


 시편 89편의 마지막 부분에도 보면 하나님이 이제는 우리를 버리셨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은 예수님입니다. 다윗의 자손 중에서 영원히 왕위에 앉을 자가 온다는 것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가리켜 약속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혈통은 다윗의 육신적인 혈통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고 다윗의 계통의 족보가 흘러갑니다. 요셉은 다윗의 혈통입니다. 실제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데 결국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왕권이 성립이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시편 기자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기사와 성실하심을 찬양함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시 89:5)


 이 구절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기사와 성실하심을 찬양한다는 내용입니다.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계 5:7-9)


 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계시를 받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있는 이십사 장로와 네 영물들이 노래하는 광경이 나옵니다. 11 절부터는 천사들의 노래가 나옵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1-13)



영광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찬양함


 하늘 위와 땅에 있는 온 천지 만물들도 찬송을 부릅니다. 다윗의 위에 앉아서 영원히 왕노릇할 자가 나타난다는 말씀대로 실지로 예수님이 왕으로 오실 때에 이 천지 만물이 찬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자 누구리이까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시 89:6-7)


 궁창에서 하나님과 비교할 자는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를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완전한 승리의 왕으로 임하시니까 궁창에서도 이제는 대적 하는 자가 없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셨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 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회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네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5-12)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성취될 때에 온 천하 만물이 찬양을 하고 공중 권세 잡은 자도 쫓겨나게 됩니 다. 시편의 저자는 바로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와서 이 모든 일을 성취할 것을 기억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함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 주께서 라합을 살륙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홀으셨나이다"(시 89:8-10)


 시편 기자는 또한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모든 믿음의 조상들과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널 때에 하나님이 권능을 베풀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넘실거리는 바다 속으로 건너게 하셨던 일을 말하고 "주께서 라합을 살육당한 자와 같이 파쇄하시고"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널 때에 애굽 군인들이 따라가다가 다 멸망한 것을 말합니다. 라합은 애굽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항상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일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가장 큰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것도 기적이었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죄악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을 당할 때 우리를 구원해주신 기점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지금은 우리를 버린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실성이 없고 믿음직하지 않고 은혜가 메말라버린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와 성실하심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와 성실하심에 근거하여 내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 절대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과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시 89:11-12)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다볼산과 헤르몬산은 이스라엘 땅 전체를 대표하는 산입니다. 헤르몬산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있는 산으로 이스라엘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다볼산은 예수님이 올라가서 변화하신 산이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산입니다. 하나님은 높고 낮은 것을 다 창조하시고 또 이스라엘 경계를 정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기자는 찬양하고 있 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른 다면 기도의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능치 못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을 의심한다면 기도라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두 가지-공의와 인자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89:13-14)


 이 구절은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속성은 의와 인자함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갈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하나님은 의와 인자함이라는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성품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뿐이고 의로움이 없으시면 그 은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 은혜는 의로움을 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의로움의 완성이고 우리가 볼 때는 은혜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죄를 향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나야 됩니 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내렸고 그 대신 죄인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죄인이지만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강하고 놀라운 모든 능력의 근거는 그 의로우심에 있습니다. 

 이 기자가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데 그 하나님의 성품에는 흔들리지 않는 능력과 의와 인자함이 계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인자도 없고 의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을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믿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려고 결심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변합니다. 어떤 때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잠시 동안 일어나는 것 같지만 자 에게 불리할 때는 그런 것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는 능력이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좌가 뭡니까? 하나님의 보좌는 의와 공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 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 하나님의 의의 보좌에서 흘러내리는 은혜와 진리가 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복음의 빛이 비췬 사람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시 89:15)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이 누구일까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실 벌벌 떠는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읽어보면 주님이 우편에 있는 양들과 좌편에 있는 염소들을 판단하시는데 그때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영혼들은 벌벌 떨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의롭다 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다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그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송사합니다. 그때 그 여자는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제는 죽었구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 즐거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있거든 돌로 치라" 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 여자의 마음 속에 희망이 생겨나지 않았겠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여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즐거운 소리입니다. 이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하였습니다. 즐거운 소리는 바로 복음입니다. 이 즐거운 소리를 그냥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처럼 듣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5-7)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는 주님의 얼굴빛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빛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의 얼굴 빛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즐거운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우리 마음속의 캄캄한 어둠이 지나가버리고 이 암흑의 세상이 빛을 받아 환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 4:6)


 주님의 빛이 비췬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과 은총으로 살아감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 주는 저회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시 89:16-17)


 빛을 받은 이후에는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미약한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받아 강건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의롭고 인자한 성품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의와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승리의 왕 예수님의 그림자-다윗


"우리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내 손이 저와 함께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저를 곤고케 못하리로다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시 89:18-24)


 우리 왕은 예수님의 그림자인 다윗 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 때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사시대를 거쳐서 사울왕 때까지는 가나안의 칠족속을 다 정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진짜 왕다운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진짜 왕, 완전한 승리의 왕으로 임했습니다. 이 다 윗은 바로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기름부음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직은 현실적으로 이 세상의 왕은 아니 십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면 만왕의 왕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네가 유대 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에 나는 왕이 아니다, 내가 만일 왕이었다면 내 종이 나를 이렇게 잡히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럼 네가 왕이 아니냐고 하자 주님은 내가 왕이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처음에 물을 때는 왕이 아니라고 해놓고 서는 두번째 물었을 때는 왜 왕이라고 대답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육신적인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사탄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데 진리를 전해서 사탄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시고 또 그 마음을 다스리려 주시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하게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진리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가 진리를 알 까닭이 없습니다. 진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사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사실을 말합니다. 다윗이 칠족속을 완전히 정복하고 완전한 왕이 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이 세상에 나타내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마귀를 이기시고 영광의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그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받아들였을 때 우리 영혼이 마 귀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아직은 아니지만 우리 영혼이 마귀로부터 해방을 받았고 우리는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왕이신 주님께 순종만 하면 완전히 승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왕을 모시고도 그 왕께 순종을 안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왕이신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지만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그 승리가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승리하는 것 입니다. 우리 육신과 영의 싸움에서 주님께 순종하면 육신이 죽고 이 영의 사람이 승리해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승리의 생활인데 우 리가 자꾸 육신의 소리를 듣다 보니까 자꾸 패배가 연속이 되는 것 입니다.



승리의 생활을 위한 기름부음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시 89:19-20)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경험은 없지만 기름부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름부음받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있는 것은 승리의 생활을 위해서 입니다.


"내 손이 저와 함께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시 89:2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셨지만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하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음부터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곤고케 못하리로다"(시 89:22)


 이것은 다윗의 경우입니다만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이름과 권세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시 89:23-24)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다른 사람은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해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권세여" 하면서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데 그 이름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주님이 이름이 증거되는 곳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등 성령으로 이적이 일어나고 말씀이 전파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계를 세우신 하나님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니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5-26)

 이스라엘 나라는 서쪽으로는 지중해 , 남쪽으로는 홍해 동쪽에는 사해라는 바다가 있습니다. 이 바다들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른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라고 하였는데 이 강들은 요단강과 유브라데스강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바다와 강들로 경계를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세우실 때도 이 세상과 경계를 세우셨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바다에서 바다까지 즉 사해에서 지중해 사이가 하나님의 선민의 경계인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북쪽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인 홍해까지가 이스라엘의 경계입니다. 이러한 경계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되어질 일입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천년왕국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시 89:27-28)


주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천년왕국 때에 왕들이 많은데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충실하게 살면 나중에 왕이 됩니다. 그 많은 왕들 중에 주님은 으뜸이 되십니다.


"만군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오리라"(계 21:24)


 여기서 땅의 왕들은 이 세상 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동안 왕노릇할 왕들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들도 그 가운데 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렇게나 막 살면 그때 가서 왕노릇할 수 없게 됩니다. 천년 동안 왕노릇하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 89:29)


 그 후손은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라고 했는데 하늘의 날이 뭡니까? 하늘의 날은 끝이 없습니다. 하늘의 날은 지구 중심의 날이 아닙니다. 계시록 21장을 읽어보면 하늘에는 해나 달이 비침이 없고 밤도 없습니다. 하늘에는 영원히 하루 뿐입니다. 밤이 되어야 쉬기도 할텐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소리입니다.

 하늘에는 영원한 새 것 뿐이고 옛것이 없습니다. 낡아지지 않고 피곤치 않고 고단치 않습니다. 어두움이라는 것은 암흑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거기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는 영원히 밤이 없는 하루가 계속됩니다. 그것이 하늘의 날입니다.



이스라엘의 징계와 회복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시 89:30-34)


 이스라엘 민족이 이 시를 읊고 있는 때는 바벨론 포로 때인데 이 말이 사실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A. D. 70년입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을 당하고 그 후 이천년이 거의 다 지나가도록 이스라엘 민족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 이 채찍으로 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회복이 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의 대부분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모르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하나님의 빛을 확실히 증거하시는 주님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갈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 하셨도다"(시 89:35-37)


 예수님이 오시면 이렇게 됩니다. 달이 무엇을 증거합니까? 달 자체는 빛이 없지만 그 뒤에 해의 빛을 반사하니까 해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달이 햇빛을 반사시키는 것처럼 아무리 캄캄한 어두운 세상이라도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거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고 하신 것 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빛을 증거하셨고 교회는 하나님의 증인이 됩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 핍박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노하사 물리쳐 버리셨으며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시 89:38-41)


 이것은 이천 년 동안의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언급한 내용입니다.


"주께서 저희 대적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저희 모든 원수로 기쁘게 하셨으며 저희 칼날을 둔하게 하사 저로 전장에 서지 못하게 하셨으며 저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 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그 소년의 날을 단촉케 하시고 저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셀라)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2-47)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계로 흩어져 학살과 추방을 당하는 정말 비참한 세월 동안 하나님이 완전히 버리신 것 같은 지경에 처했을 때 인생이 완전히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시 89:48)


 완전한 절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소서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시 89:49)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의와 인자를 다 얘기 해놓고는 주의 인자하심 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과 믿음의 기도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사 89:50-52)


 그렇지만 이 기자는 말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결국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7-19) 


 이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진정한신앙이 뭡니까? 내게 모든 것이 풍족하고 주변의 모든 환경이 좋을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지만 정작 내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감사치 아니하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어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자기는 하나님 만으로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 기자도 온 세상이 캄캄하고 하나님이 완전히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캄캄하고 고통스러 운 환경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항상 내게 무엇인가를 주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선물만 보는 것이지 하나님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직 하나님 자체를 즐기는 것을 잘 모르는사람이 많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땐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갈게 하였나니 내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갈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1-3)


 젖뗀 아이와 젖을 떼지 아니 한 아이의 차이가 뭘까요. 젖을 먹는 아이는 어머니보다 젖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젖뗀 아이는 어머니 품을 젖보다 더 좋아합니다. 환경이 좋고 만사가 잘 진행될 때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으면 그것은 아직 젖먹이 상태에 불과합니다. 입에다 뭘 물려주고 좋은 것을 안 주면 울고부는 어린애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아무리 어렵고 캄캄한 상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요 젖을 뗀 자의 상태 입니다. 우리도 이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