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0:1-17]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죽어가는 환경 속에서 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모세 자신도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느보산에서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는데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왜 여호수아와 갈렙 말고는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와 갈렙 말고 광야에서 다 죽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인데 육신이 무너지지 아니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은 지금 우리로서는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광야 생활입니다.
그래서 광야 생활 속에서 육신이 무너지는 일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죽는다고 해서 영원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엉뚱한 주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꺾어질 때에 우리 마음속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안식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전체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또 교회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다음에 참으로 교회가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내가 내가' 하는데 8장에는 '내가'라는 말이 없어지고 '우리'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교회를 말합니다. 8장에는 '우리'의 세계로 들어가서 교회를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거쳐서 요단강을 건너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발견이 되면 개인이 애쓸 필요가 없고 교회 안에서 영혼이 쉬는 생활속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육신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의 의미를 안 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나왔지만,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두 번이나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화가 나서 두 번 쳤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어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니까 율법을 가진 사람은 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지요. 모세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지게 되는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읊었다는 것을 알면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고백-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주님
[시편 90: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 항상 첫 부분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간증이 나옵니다. 모세는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며 안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율법을 받은 사람이고 이스라엘 민족을 일일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지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광야에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거처는 본래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마귀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바로 왕 밑에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거처가 되었다고 모세는 첫머리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아주 합당한 얘기입니다. 과거에는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마귀의 그늘 밑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는 거기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그들의 거처가 되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현재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의 거처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마귀는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임금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로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로 말미암아 다스림을 받고 마귀의 집안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영역으로 옮겨져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현재 우리에게도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시편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시작이 있습니다. 우주 만물도 시작이 있고 마귀도 시작이 있습니다. 천사가 타락한 것이 마귀니까 이 세상의 모든 우상과 이방 신도 시작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원에 대해서 상상을 못 합니다. 끝도 없는 것이 영원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인간의 두뇌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셨는가 우리의 머리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하는 질문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그 하나님도 창조된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술어로 하나님을 제일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어떤 집은 누군가가 그것을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지은 그 사람도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제1 원인인 하나님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누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출애굽기 3:13-14]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사랑의 짝인 교회를 완성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하나님은 영원한 자존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짝을 만들어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창조해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교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지금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하나님의 사랑의 짝인 신부 즉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은 교회가 완성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밤하늘의 저 무수한 별들과 해와 달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삼라 만상들은 다 하나님이 교회를 탄생시켜 가는 한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근본 목표인 이 교회와는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엄청난 계획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슬픔과 시련을 겪으면서 비참하고 시시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 영원 한 하나님의 계획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다"고 하나님 안에 우리들이 살게 되었다는 신앙 간증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베드로전서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만일 육신의 영광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풀이나 풀의 꽃과 같은 것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육신은 눈 깜박할 사이에 풀과 같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누리는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습니다. 피었다가 10일이 채 못되어 그냥 시들어 버리는 꽃처럼 인간의 영광과 행복이라는 것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마음이 연결되어 영생이 이루어졌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 말씀 속에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영원한 생명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 영생의 말씀에 연결되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진리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큰 은혜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버리면 그 안에 거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집이 지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집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집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한 줌의 흙뭉치에 불과한 인생과 생명과
[시편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이요 아주 짧은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운명입니다.
[창세기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 육신은 한 줌의 흙뭉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그 흙뭉치를 가꾸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인생은 흙뭉치니까 필연적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 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는데 이 흙으로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면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도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명과를 내놓으신 것입니다. 아담이 만일 생명과를 먹었으면 영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을 수가 없었고 흙으로 돌아가도록 운명이 지워졌습니다.
그 생명과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로 969세였습니다. 앞으로 백년 후쯤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이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라고 이미 운명지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허무한 인생
[시편 90:4-6]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이런 인생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은 살맛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자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삶에 희망이 없으니까 죽어버리면 만사를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1년 동안 자살하는 숫자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인생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조금 잘 산다고 해보았자 마찬가지입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인간은 사라지고 꺾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계수되지 않는 세월
[시편 90:7-9]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다가 다 광야에서 죽고 만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다 죽게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우리들처럼 거듭난 사람들은 물론 아닙니다. 그때는 아직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지는 않은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그림자적인 역사입니다. 광야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이만 명이 죽기도 하고 또 다른 일로 인해서 다 죽고 맙니다. 가나안 땅에까지 못 들어가고 중간에 다 죽고 마는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냐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죄를 전혀 안 지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종종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죄를 심상하게 여기지 말고 철저하게 그 죄를 해결하고 살아야 됩니다. 믿음으로 죄를 해결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을 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서 다 사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죄짓는 그 순간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 기억되지 않는 허무한 삶이 되어버립니다. 시간적으로 하나님 앞에 잊혀져버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물론 죄를 안 지으려고 아등바등하지만 어떤 때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마음속에 다시 깊이 죄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 죄를 위해서 회개도 하고 자백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면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여 그 죄를 심상히 여깁니다. '죄 좀 지으면 어떠냐, 다 용서받았는데'라고 생각하며 죄를 짓고 사는 그 기간은 하나님의 노하심 속에 있습니다. 지옥 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하나님 앞에 아무런 계산이 되지 않는 허무한 세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져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전부 멸망됨
[민수기 16:12-33]
모세가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보내었더니 그들이 가로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모세가 심히 노하여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는 그들의 예물을 돌아보지 마옵소서 나는 그들의 한 나귀도 취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의 한 사람도 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이에 고라에게 이르되 너와 너의 온 무리는 아론과 함께 내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되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 오십이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찌니라
그들이 각기 향로를 취하여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모세와 아론으로 더불어 회막문에 서니라
고라가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그 두 사람을 대적하려 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회중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 회중에게서 떠나라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회중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에서 떠나라 하라
모세가 일어나 다단과 아비람에게로 가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좇았더라
모세가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그들의 물건은 아무 것도 만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죄중에서 너희도 멸망할까 두려워 하노라 하매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을 떠나고 다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문에 선지라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일을 행케 하신 것이요 나의 임의로 함이 아닌줄을 이 일로 인하여 알리라
곧 이 사람들의 죽음이 모든 사람과 일반이요 그들의 당하는 벌이 모든 사람의 당하는 벌과 일반이면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이 아니어니와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땅이 입을 벌려 고라의 무리 250명을 삼킨 이 일 말고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 속에서 죽은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전부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육신의 생활은 전부 죄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전부 죄입니다. 아주 선한 것처럼 생각되는 일일지라도 육신에 속한 것은 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에 사람 속에서 선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이 아니고 인간의 선입니다. 사람의 육신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죄입니다. 하나님 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죄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망해야 됩니다. 구원받은 우리 깊은 영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이와 함께 육신을 따라 살고 육신의 것을 좋아하는 악도 우리 육신 속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이 죽는 만큼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도 모르는 죄, 혼자만 알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얼굴 빛 가운데 그 죄가 드러납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다 씻어주셨고 용서해 주셨지만 그 죄가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 가는 죄는 용서되어 있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처리가 되어야 됩니다.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죄를 짓고도 뻔뻔하면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 죄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신앙생활 속에서 어떤 죄라도 주님 앞에 다 내놓고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일서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긴 죄에 대한 자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죄를 처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거짓말 해놓고도 뻔뻔스럽고 남에게 해를 끼쳐놓고도 모른 척하고 살면, 물론 그것 때문에 지옥 가는 일은 없겠지만, 현재의 신앙생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나중에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그 후에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사는 죄
[누가복음 19:12-27]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게으르고 악한 종은 주님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은다고 하면서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그 말은 굉장히 큰 악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을 받았는데 뭔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 주님이 두렵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악한 종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악한 종은 주님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도 주님 안에서 해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의 주님이시고 은혜로운 주님이신데 그 주님을 믿지 않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어둡습니다. 신앙생활이 고통스럽게만 여겨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면 죄에 늘 매여서 살아서는 안되고 죄를 깨닫고 그 죄를 깊이 뉘우쳐야 됩니다.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누구에게 갚아야 할 일이 있으면 갚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도 모른 척 하는 뻔뻔스러운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습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반드시 갚을 것은 갚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죄 문제를 정리하고 살면 언제나 용서하시는 주님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도 죄를 지어놓고도 모른 척하면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수고와 슬픔 뿐인 우리 인생
[시편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 딴에는 행복하게 오래 산 것 같아도 그 날짜를 계산해 보면 별것이 없습니다. 유명한 문학가 괴테는 "나는 일평생 동안 4주간의 참 행복도 누려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상 우리의 인생은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슬퍼하거나 걱정하거나 하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행복은 순간적인 것뿐이고 그다음에는 슬픔과 고통이 연속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지요.
주님의 의와 심판
[시편 90: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이사야 26:8-10]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찌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죄에서 돌이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참으로 무서운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라는 표현대로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알면 그들이 구원의 길을 찾을 텐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주님이 심판하실 때에야 의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하나님이신지 그때 가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배워야 되는데 그것을 못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 은혜를 더 느끼고 더 깊이 받으려고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알고 배워야 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짓게 되는 죄를 모르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우리 날을 계수할 줄 아는 지혜
[시편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 날 계수함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날들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 계산되지 않는 날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계산되지 않는 죽은 자가 무슨 날이 있습니까. 과거의 우리는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날이 아니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지었다든지 내 마음대로 살았다든지 하는 날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계산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참으로 믿음으로 사는 시간,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인도받으며 사는 시간만이 계수됩니다.
우리 날을 계수한다는 말은 우리 일평생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날이 되도록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날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 앞에 캄캄하게 지난 날, 아무 의미 없이 지난 날을 다 빼버리면 내 날이 며칠이나 될까요? 여기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라고 했는데 우리 날을 계수할 줄 아는 생활이 참된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
[욥기 28:1-11]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끝까지 궁구하여 음예와 유암 중의 광석을 구하되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구멍을 깊이 뚫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려 내리니 멀리 사람과 격절되고 흔들흔들 하느니라
지면은 식물을 내나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
그 돌 가운데에는 남보석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위엄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리며
돌 가운데로 도랑을 파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취었던 것을 밝은데로 내느니라
이것은 광산 얘기입니다. 금과 은과 보석 이 땅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을 캐려고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간다는 얘기입니다. 비단 광산뿐만 아니고 사람이 이 세상에 일평생 사는 것은 실상은 보물을 캐려고 사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겠는가를 추구하며 평생을 노력합니다.
땅속에 깊이 묻혀 있는 보물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캐내는 그것이 인생이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욥기 28:12-28]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 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제일 큰 지혜는 주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가서 그 사실을 참으로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이 참 지혜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면 하나님 앞에 가치있고 계산이 되는 시간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날과 시간은 가치가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시간
[시편 90: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죄를 짓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참여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죄를 짓는 순간에도 물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는 않지만 그 순간은 하나님이 떠나 있는 순간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거나 멀리 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돌이키지 않는 그 시간은 믿음으로 사는 시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있으면
[시편 90: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왜 '아침에' 입니까? 캄캄함이 지나가고 빛이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있으면 그것이 아침입니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우리가 구원받은 의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인으로서 의인이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인의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빛을 얻거나 의를 얻는 것은 다 믿음의 문제지 행위를 앞세우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의를 회복하고 그의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의인이지만 의인의 길을 걷지 않고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거짓말을 잘하고 남을 속이면 사람들은 저런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냐고 무시해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없어져 버립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찾아가서 사과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자세요,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인데 그 후의 생활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면서 살아가야 진정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구원받은 사람은 뭐가 다르구나, 저렇게 정직하고 사랑이 있구나' 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평판을 받는 것이 의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물론 구원 안 받은 사람도 그럴듯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절하게 남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고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그 마음을 나타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캄캄하고 답답하던 마음이 믿음을 도로 찾으면 밝아지고 아침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면서 마음이 밝아지고 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화를 당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시편 90:15]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이 시편 기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간 때에 되어진 일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는 무슨 뜻일까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잡혀가 이스라엘 땅이 완전히 황무지가 되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지 못하고 항상 죄를 짓고 살면서 주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메뚜기떼들이 와서 좀먹어버린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면 메뚜기떼가 먹은 횟수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할 때 괴롭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벌레들에게 먹히는 생활입니다.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한숨짓고 원망하는 그것이 전부 벌레에게 먹히는 생활입니다. 벌레가 우리는 갉아먹는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참으로 고마우신 분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지만 우리 마음만 돌아서면 주님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사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주님의 행사
[시편 90:16]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우리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 품에 계시던 주님이 오셔서 주님의 행사를 하신 데 근거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 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 복음을 전하신 것이 주님의 행사입니다.
그 행사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행사가 나타납니다. 나 혼자 사는 생활은 죄짓는 생활이요 아무런 의미 없는 생활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면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행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고 귀한 생활입니까?
내 멋대로 사는 생활은 죄의 생활이고 우리가 주님께 순종해서 사는 생활은 주님의 행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새로운 생활입니까? 거기에는 물론 고통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행사를 이 세상에 증거하는 삶
[시편 90: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가 나 혼자 한 일 같으면 죄 밖에 안되지만 내 안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날 때는 영광스럽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귀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생명도 귀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을 향해서 주님의 행사를 나타내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저 아무렇게나 사는 생활을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죽어가는 환경 속에서 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모세 자신도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느보산에서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는데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왜 여호수아와 갈렙 말고는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와 갈렙 말고 광야에서 다 죽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인데 육신이 무너지지 아니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은 지금 우리로서는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광야 생활입니다.
그래서 광야 생활 속에서 육신이 무너지는 일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죽는다고 해서 영원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엉뚱한 주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꺾어질 때에 우리 마음속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안식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전체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의 그림자이기도 하고 또 교회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다음에 참으로 교회가 무엇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는 '내가 내가' 하는데 8장에는 '내가'라는 말이 없어지고 '우리'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교회를 말합니다. 8장에는 '우리'의 세계로 들어가서 교회를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거쳐서 요단강을 건너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발견이 되면 개인이 애쓸 필요가 없고 교회 안에서 영혼이 쉬는 생활속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육신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의 의미를 안 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나왔지만,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두 번이나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화가 나서 두 번 쳤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어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니까 율법을 가진 사람은 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뜻이지요. 모세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지게 되는 운명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읊었다는 것을 알면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세의 신앙고백-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주님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 항상 첫 부분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간증이 나옵니다. 모세는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며 안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율법을 받은 사람이고 이스라엘 민족을 일일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지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광야에서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거처는 본래 애굽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마귀의 그림자였습니다. 그 바로 왕 밑에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거처가 되었다고 모세는 첫머리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아주 합당한 얘기입니다. 과거에는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마귀의 그늘 밑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는 거기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그들의 거처가 되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현재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의 거처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임금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로 이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로 말미암아 다스림을 받고 마귀의 집안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영역으로 옮겨져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현재 우리에게도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시작이 있습니다. 우주 만물도 시작이 있고 마귀도 시작이 있습니다. 천사가 타락한 것이 마귀니까 이 세상의 모든 우상과 이방 신도 시작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이 세상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원에 대해서 상상을 못 합니다. 끝도 없는 것이 영원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계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인간의 두뇌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셨는가 우리의 머리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하는 질문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그 하나님도 창조된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술어로 하나님을 제일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어떤 집은 누군가가 그것을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지은 그 사람도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제1 원인인 하나님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누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짝인 교회를 완성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하나님은 영원한 자존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짝을 만들어 영원한 사랑의 세계를 창조해야 되겠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교회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지금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하나님의 사랑의 짝인 신부 즉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은 교회가 완성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밤하늘의 저 무수한 별들과 해와 달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삼라 만상들은 다 하나님이 교회를 탄생시켜 가는 한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근본 목표인 이 교회와는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엄청난 계획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슬픔과 시련을 겪으면서 비참하고 시시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그 영원 한 하나님의 계획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다"고 하나님 안에 우리들이 살게 되었다는 신앙 간증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우리가 만일 육신의 영광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풀이나 풀의 꽃과 같은 것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 육신은 눈 깜박할 사이에 풀과 같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이 누리는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습니다. 피었다가 10일이 채 못되어 그냥 시들어 버리는 꽃처럼 인간의 영광과 행복이라는 것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마음이 연결되어 영생이 이루어졌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 말씀 속에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영원한 생명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이 영생의 말씀에 연결되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진리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큰 은혜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버리면 그 안에 거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집이 지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집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집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한 줌의 흙뭉치에 불과한 인생과 생명과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이요 아주 짧은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운명입니다.
우리 육신은 한 줌의 흙뭉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그 흙뭉치를 가꾸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인생은 흙뭉치니까 필연적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 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는데 이 흙으로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면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라도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명과를 내놓으신 것입니다. 아담이 만일 생명과를 먹었으면 영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을 수가 없었고 흙으로 돌아가도록 운명이 지워졌습니다.
그 생명과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생명과를 먹으면 영생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로 969세였습니다. 앞으로 백년 후쯤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이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라고 이미 운명지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허무한 인생
이런 인생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은 살맛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자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삶에 희망이 없으니까 죽어버리면 만사를 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1년 동안 자살하는 숫자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인생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조금 잘 산다고 해보았자 마찬가지입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인간은 사라지고 꺾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계수되지 않는 세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다가 다 광야에서 죽고 만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다 죽게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우리들처럼 거듭난 사람들은 물론 아닙니다. 그때는 아직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지는 않은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그림자적인 역사입니다. 광야에서 어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이만 명이 죽기도 하고 또 다른 일로 인해서 다 죽고 맙니다. 가나안 땅에까지 못 들어가고 중간에 다 죽고 마는 그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냐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죄를 전혀 안 지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을 받아도 종종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죄를 심상하게 여기지 말고 철저하게 그 죄를 해결하고 살아야 됩니다. 믿음으로 죄를 해결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을 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서 다 사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가 죄짓는 그 순간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 기억되지 않는 허무한 삶이 되어버립니다. 시간적으로 하나님 앞에 잊혀져버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물론 죄를 안 지으려고 아등바등하지만 어떤 때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마음속에 다시 깊이 죄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그 죄를 위해서 회개도 하고 자백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으면 죄를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여 그 죄를 심상히 여깁니다. '죄 좀 지으면 어떠냐, 다 용서받았는데'라고 생각하며 죄를 짓고 사는 그 기간은 하나님의 노하심 속에 있습니다. 지옥 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하나님 앞에 아무런 계산이 되지 않는 허무한 세월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져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전부 멸망됨
땅이 입을 벌려 고라의 무리 250명을 삼킨 이 일 말고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 속에서 죽은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전부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육신의 생활은 전부 죄입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전부 죄입니다. 아주 선한 것처럼 생각되는 일일지라도 육신에 속한 것은 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에 사람 속에서 선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이 아니고 인간의 선입니다. 사람의 육신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죄입니다. 하나님 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다 죄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망해야 됩니다. 구원받은 우리 깊은 영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이와 함께 육신을 따라 살고 육신의 것을 좋아하는 악도 우리 육신 속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이 죽는 만큼 믿음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도 모르는 죄, 혼자만 알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얼굴 빛 가운데 그 죄가 드러납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다 씻어주셨고 용서해 주셨지만 그 죄가 주님의 얼굴빛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 가는 죄는 용서되어 있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는 하나님 앞에서 처리가 되어야 됩니다. 그것을 처리하지 않고 죄를 짓고도 뻔뻔하면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 죄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신앙생활 속에서 어떤 죄라도 주님 앞에 다 내놓고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일서에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긴 죄에 대한 자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죄를 처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거짓말 해놓고도 뻔뻔스럽고 남에게 해를 끼쳐놓고도 모른 척하고 살면, 물론 그것 때문에 지옥 가는 일은 없겠지만, 현재의 신앙생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나중에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그 후에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사는 죄
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게으르고 악한 종은 주님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은다고 하면서 주님을 비방했습니다. 그 말은 굉장히 큰 악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구원을 받았는데 뭔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 주님이 두렵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악한 종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악한 종은 주님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지은 죄도 주님 안에서 해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의 주님이시고 은혜로운 주님이신데 그 주님을 믿지 않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어둡습니다. 신앙생활이 고통스럽게만 여겨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면 죄에 늘 매여서 살아서는 안되고 죄를 깨닫고 그 죄를 깊이 뉘우쳐야 됩니다.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누구에게 갚아야 할 일이 있으면 갚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도 모른 척 하는 뻔뻔스러운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습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반드시 갚을 것은 갚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죄 문제를 정리하고 살면 언제나 용서하시는 주님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입니다. 그런데 도 죄를 지어놓고도 모른 척하면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수고와 슬픔 뿐인 우리 인생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기 딴에는 행복하게 오래 산 것 같아도 그 날짜를 계산해 보면 별것이 없습니다. 유명한 문학가 괴테는 "나는 일평생 동안 4주간의 참 행복도 누려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상 우리의 인생은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슬퍼하거나 걱정하거나 하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행복은 순간적인 것뿐이고 그다음에는 슬픔과 고통이 연속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지요.
주님의 의와 심판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죄에서 돌이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참으로 무서운 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라는 표현대로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고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알면 그들이 구원의 길을 찾을 텐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주님이 심판하실 때에야 의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우신 하나님이신지 그때 가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배워야 되는데 그것을 못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 은혜를 더 느끼고 더 깊이 받으려고 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알고 배워야 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짓게 되는 죄를 모르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우리 날을 계수할 줄 아는 지혜
우리 날 계수함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날들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 계산되지 않는 날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계산되지 않는 죽은 자가 무슨 날이 있습니까. 과거의 우리는 죽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날이 아니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지었다든지 내 마음대로 살았다든지 하는 날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계산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참으로 믿음으로 사는 시간,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인도받으며 사는 시간만이 계수됩니다.
우리 날을 계수한다는 말은 우리 일평생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날이 되도록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날이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 앞에 캄캄하게 지난 날, 아무 의미 없이 지난 날을 다 빼버리면 내 날이 며칠이나 될까요? 여기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라고 했는데 우리 날을 계수할 줄 아는 생활이 참된 신앙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
이것은 광산 얘기입니다. 금과 은과 보석 이 땅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을 캐려고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간다는 얘기입니다. 비단 광산뿐만 아니고 사람이 이 세상에 일평생 사는 것은 실상은 보물을 캐려고 사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겠는가를 추구하며 평생을 노력합니다.
땅속에 깊이 묻혀 있는 보물을 깊이 파고 들어가서 캐내는 그것이 인생이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제일 큰 지혜는 주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제일 귀한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가서 그 사실을 참으로 알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이 참 지혜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지혜로운 자의 삶을 살면 하나님 앞에 가치있고 계산이 되는 시간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날과 시간은 가치가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시간
우리가 죄를 짓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참여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죄를 짓는 순간에도 물론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는 않지만 그 순간은 하나님이 떠나 있는 순간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거나 멀리 가신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돌이키지 않는 그 시간은 믿음으로 사는 시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있으면
왜 '아침에' 입니까? 캄캄함이 지나가고 빛이 왔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있으면 그것이 아침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의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의인으로서 의인이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인의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빛을 얻거나 의를 얻는 것은 다 믿음의 문제지 행위를 앞세우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믿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의를 회복하고 그의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의인이지만 의인의 길을 걷지 않고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거짓말을 잘하고 남을 속이면 사람들은 저런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냐고 무시해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없어져 버립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찾아가서 사과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자세요,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인데 그 후의 생활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면서 살아가야 진정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구원받은 사람은 뭐가 다르구나, 저렇게 정직하고 사랑이 있구나' 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평판을 받는 것이 의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물론 구원 안 받은 사람도 그럴듯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절하게 남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고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그 마음을 나타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캄캄하고 답답하던 마음이 믿음을 도로 찾으면 밝아지고 아침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면서 마음이 밝아지고 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화를 당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
이 시편 기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간 때에 되어진 일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는 무슨 뜻일까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잡혀가 이스라엘 땅이 완전히 황무지가 되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살지 못하고 항상 죄를 짓고 살면서 주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메뚜기떼들이 와서 좀먹어버린 것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면 메뚜기떼가 먹은 횟수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움과 시련을 당할 때 괴롭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벌레들에게 먹히는 생활입니다.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한숨짓고 원망하는 그것이 전부 벌레에게 먹히는 생활입니다. 벌레가 우리는 갉아먹는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참으로 고마우신 분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이지만 우리 마음만 돌아서면 주님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사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주님의 행사
우리 믿음의 생활은 하나님 품에 계시던 주님이 오셔서 주님의 행사를 하신 데 근거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 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 복음을 전하신 것이 주님의 행사입니다.
그 행사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행사가 나타납니다. 나 혼자 사는 생활은 죄짓는 생활이요 아무런 의미 없는 생활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믿고 순종하면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행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고 귀한 생활입니까?
내 멋대로 사는 생활은 죄의 생활이고 우리가 주님께 순종해서 사는 생활은 주님의 행사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새로운 생활입니까? 거기에는 물론 고통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행사를 이 세상에 증거하는 삶
우리 손의 행사가 나 혼자 한 일 같으면 죄 밖에 안되지만 내 안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날 때는 영광스럽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귀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생명도 귀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을 향해서 주님의 행사를 나타내고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저 아무렇게나 사는 생활을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