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지리이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심을 내 귀로 들었도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 92:1-15)
'안식일의 찬송시'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 리듬을 이어가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이 별도로 없습니다만 이 안식일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과 상당히 마찰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일반 교회에서는 주일을 안식일 개념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해방 직후에 장로교회에 조선 신학교(현재 한국신학대학)가 있었는데 그 학교 교수들 가운데 이 안식일 문제를 현재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논리로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만 학생들 가운데 반발이 일어나서 너무 신신학의 방향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여 큰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학생 50여 명이 그 학교를 떠나 새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새로 세워진 학교가 장로회 신학교로 현재는 총회신학교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상당히 정통이고 보수주의라고 하는 계통의 학교입니다.
한국신학대학의 계통에서는 김재준 교수가 유명한데 상당히 실력자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요. 함경도 분으로 함경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그분을 지지했는데 그 후계자가 강원형 목사입니다. 그분 역시 그 계통에서 유명하고 상당히 활약을 많이 한 분입니다. 그러다가 그 학교에 분쟁이 생겨 새로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 학교에서 유명한 분이 박형용 박사인데 한국 보수주의 계통의 거목입니다. 그분은 평양출신입니다. 주로 평양 쪽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서 박형용 박사의 노선을 따라 운동을 전개했는데 안식일을 아주 철저하게 지키는 계통입니다.
그리고 부산에 가면 고려신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에서는 박윤선 박사가 유명합니다. 그분이 교수로 있을 때 주일날 미국의 선교사를 전송하기 위해서 비행장에 차를 타고 갔다왔다고 해서 교단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안식일을 범했다고 상당히 시끌시끌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계에서는 소위 정통주의라든지 보수주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신봉하고 율법주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정통이고 보수라는 것입니다. 저도 구원을 받기 전에는 역시 그런 보수주의적인 것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난 후에 비로소 안식일주의나 율법주의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만일 그러한 보수주의자들이 우리를 보면 신신학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항상 함께 모여 성경 공부도 하고 교제도 나누지만 주일을 안식일로는 지키지 않습니다. 또 안식일 교회처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일과 안식일이 분명히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안식과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무덤 속에 계셨는데 그 때가 안식입니다. 그 렇다고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편히 안식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동안은 가장 깊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십계명 가운데 제 4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엿새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레만에 쉬신 그 날이 안식일이니까 그 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율법이 왜 있을까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 말씀을 보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 계명은 무슨 죄를 깨닫게 합니까?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면 안식일 계명도 죄를 깨닫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안식일 계명은 사람이 안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을 못하는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을 못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사람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식일 지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면 다른 계명을 다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 가운데 아홉 가지 계명을 완전히 지켜야 안식의 계명도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 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1-3)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더 창조할 것이 없으니까 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 너무 일을 많이 하셔서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닙니다. 일이 없으니까 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계명은 사람이 자기 육신적인 힘으로 십계명과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다 실천을 하고 난 다음에는 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안식일을 완전히 다 지키고 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는 결코 안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에도 일하신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유독 안식일에 병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고치시고 절름발이도 고치시고 소경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안식일에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안식입니까? 병 낫는 것이 안식입니가? 안식일날 병 낫는 것 이 안식이잖습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치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일을 하신 것이 안식을 범한 것이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안식일날 왜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 5:5-16)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안식일인데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그 자체가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엿새 동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창조하시고 사람까지 창조하셨는데 그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가 끝났기 때문에 쉬셨는데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사람을 꾀어 범죄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영혼이 죽고 육신도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다시 시작하시게 된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레만에 쉬셨다는 것만 알지 하나님이 다시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18-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안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사명을 받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그 일이 바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일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것이 죽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아버지가 하시는데 그 일을 아들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을 안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날 예수님은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안식일 날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것, 병든 자를 고치는 것 등등이 안식을 주는 일입니다.
진정한 안식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 때부터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편 92편을 안식일의 찬송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찬송이라는 것이 구약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데 대한 찬송시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신약적인 의미를 가지고 찬송시를 지었을까요?
이 시편이 씌어진 것은 분명 구약시대입니다. 이 찬송시를 누가 읊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이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성경을 알게 되면 참으로 우리가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에게 안식 일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 38년된 병자는 안식이 없는 상태로 앓으면서 수많은 안식일을 보냈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그가 안식을 잘 지킨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안식 일이나 보통 날이나 항상 병들어 고통하는 그 상태 속에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나 육신적으로나 참된 안식이 없는데 날짜만 지키는 것이 안식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율법은 잘 지키는 것이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 생활로 착각하고 오랜 세월 동안 헛수고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시편 92편을 죽 읽어가면 진정한 안식이 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찬송하는 시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1-3)
이 시인은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풍성한 은혜와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 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 은 하나님의 약속인 자연법칙을 통해서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며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며 모든 일이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인은 그러하신 하나님을 위해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잠기어서 안식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유대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감사할 것이 없어요.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그 자체가 무거운 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시는 미래를 예언하는 의미가 다분히 있습니다. 이 시를 읊은 사람은 진정한 안식이 뭔지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다윗을 비롯한 참 신앙인들은 마음에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렸는데 그것은 신약의 미래 즉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형식적인 종교만으로서는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안식이 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하고 무서운 율법입니다. 안식일에는 오리 이상 가서는 안됩니다. 꼼짝도 못하는 그런 것이 안식일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에 가면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갔을 때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서도 관습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산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금요일 날 해지는 때부터 토요일 날 해지는 때까지가 안식일입니다. 안식 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요일이 공휴일인 우리 한국에 와서 살거나 서구문명 속에서 산다면 틀림없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굳이 그러한 불편을 견디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안식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19 장에 보면 예수님이 구속의 일을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이 언제 오느냐 하면 할 일이 없어야 오는 것입니다. 할 일을 두고는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안식에 들어갈 때 우리 일을 참으로 쉬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
그래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어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할 일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의 안식
예수님 안에 안식이 있고 그 다음에 또 교회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교회가 안식의 자리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데 예수님의 몸 안에서 우리가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7장은 굉장히 고통하는 장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8-24)
자기가 선하게 살고 싶고 거룩하게 살고 싶고 하나님이 뜻대로 살고 싶은데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하나님 뜻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가서보면 '내가' 라는 말이 한마디도 안나오고 "너희"로 바뀌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못합니다. 그러 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서 이루어질까요?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 리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의 뜻을 이루는 곳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몸이니까 그 안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 개인이 아닌 '너희' 곧 '우리'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몸인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교회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개인 중에서도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특별히 사명을 받은 사람을 통해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통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하나님 뜻을 이루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 개인 개인에게 따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알아버리면 자기 혼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해놓은 교회 안에 참여하여 조용히 봉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참여하여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쉬는 것입니다. 교회가 안식의 처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우리 몸이 눈과 귀와, 손 발 등등이 전부 합쳐서 협력할 때에 일이 되어가듯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각자 자신의 분량대로 협력하여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혼자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주님의 몸 안에서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알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지만 아직도 잘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거기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혼자서 애쓰고 고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안식이 있는 것이나 주님 안에 안식이 있는 것이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92편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의 행사 가운데 살아가는 삶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시 92:4-5)
안식은 나의 행사가 아니고 주의 행사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생활과 진정한 신앙생활의 차이가 뭡니까? 사람의 종교심을 자극하여 무엇을 열심히 해라,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면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할지라도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일도 안하고 두 손 다 놓고 그냥 쉬기만 하면 될까요?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성령이 하시는 그 일 속에 내 자신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의 행사"란 말이 세번이나 나오는데 우리 신앙생활은 주님의 행사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내 행사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셨고 성령을 보내사 모든 것을 하시지 내가 내 죄값을 스스로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주님이 율법의 요구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님이 행사를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할 것 없이 모든 종교는 사람에게 무엇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다음에 주님이 오셔서 죄인이 해야 할 일을 대신 다 하셨고 모든 것을 다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하신 일 안에 살면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전부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지 아무도 거든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거들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귀의 조종을 받아서 예수님 팔아먹은 것뿐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가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 은혜롭게 하시는 일, 구원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세상이 심판을 받습니다. 한편은 은혜의 일을 하셔서 사람을 구원하 시고 그 다음에 은혜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지 않는 세계를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그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마귀를 멸망시키고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영원한 세계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거기에 우리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굉장히 위대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계십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그래서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지고 주님의 모사가 되어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열 두 제자는 왜 택하셨고 사도 바울은 왜 택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바로 성령으로 살아가는 생애였습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행동하는 전부가 성령의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비서실장이 있어 그가 생각한 바를 제안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논이나 도움이 절대로 필요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함께할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고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뭘 드려가지고 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라"
그러니까 완전히 일방적으로 모든 일이 하나님 편에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지금 우리 교회가 가는 길도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정하신 뜻대로 되어 가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습니다. 교회가 가는 길은 사람이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했든 말았든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앞장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웃사가 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법궤가 어떤 때 이방인들에게 빼앗겼는데 가는 데마다 이방신의 우상의 모가지가 부러져버리고 가는 데마다 병을 일으키더니 결국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 오게 됩니다. 그것이 전부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는 완전히 하나님의 일이지 절대로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걱정하고 염려해서 하나님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교회가 잘될 것 같고 열심히 안하면 교회가 안될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기준을 두 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순종을 하면 나중에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배를 타신 후에 주무셨습니다. 분명 배를 타고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배는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이 없이 바다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나니까 제자들은 빠져죽을까 걱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절대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므로 어떤 일을 당하든 어떤 사람이 무슨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이 무슨 실패를 해도 교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그 사람 개인이 나중에 거기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고 또 개인이 충실했으면 상을 받을 것이지만 교회가 가는 그 자체는 아무도 좌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주님의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실히 알면 교회 안에서 마음이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걱정한다고 해서 교회가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시 92:6)
우준하고 무지하고 악하고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이 타락한 후로부터 노아의 홍수 시대, 바벨탑 쌓는 시대를 거쳐서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꾸며지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출을 받은 후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라가 이루어지고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 왕의 왕정시대, 분열왕국 시대를 거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그 때부터 이스라엘의 시대가 지나고 이방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첫째는 바벨론, 둘째는 페르시아, 세째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그 다음에 로마가 등장합니다. 그 로마의 세력이 지금 와서 다시 부활하여 유럽 공동시장과 하나 의 유럽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유럽에서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그 후에 세상이 적그리스도 밑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환란이 일어나서 세상이 심판받고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이 오고 그 다음에 영원한 세계가 옵니다. 이 모든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하나님의 일 아닙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분부분 생각하면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 세상의 역사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신 일도 마귀를 멸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셔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가 어떤 때는 핍박을 받고 없어지려고 하다가 또 일어나서 새롭게 되고 없어지려고 하다가 또 일어나서 새롭게 되면서 그 줄기가 죽 내려와 지금 우리 시대에까지 이르러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 시대에 나름대로 교회의 역사를 또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 깨닫는 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깨닫는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을 거기에 의탁을 하고 하나님 일 속에다가 자신을 맡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내 삶이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으로 이 세상 살다가는 데 핵심적인 사실입니다.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말씀으로 나타나니까. 그 말씀을 깨달아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런데 악인은 이걸 모릅니다. 무지한 자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모르고 자기 일밖에 모릅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돈벌이 하고 자식들 키우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기가 죽으면 자식이 공부 잘 해서 성공하여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영생의 개념입니다. 자기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그저 잘 살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일을 모르고 자기 일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그 인생이 얼마나 무지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가 하는 일 전부가 하나님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악인들과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해 놓은 이 안식의 세계에서 편안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모르고 마귀의 지배 아래서 제 뜻대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지 않고 죄를 짓고 살도록 하는 마귀의 속임수에 걸려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영웅이 된 것 같고 무슨 성공을 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주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의 일 속에다가 던져놓고 살면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허무한 인생들의 죄악된 모습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 92:7)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현재는 다 흥왕한 것 같고 풀같이 잘 자라 파릇파릇한 것 같지만 결국은 머지 않아 다 멸망을 당하게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큰 심판을 당할 자기의 운명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 허무한 인생들의 죄악된 모습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마귀를 멸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의 승리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지리이다"(시 92:8-9)
예수님은 마귀를 멸망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마귀와 싸우라고 했으면 우리는 절대 못 싸웁니다. 우리는 마귀한테 항상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마귀한테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 육신 속에 들어 앉아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앉아서 죄 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믿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으신 주님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지리이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시 92:9-10)
지금 우리 나라는 들소가 없기 때문에 들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KBS에서 나오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를 보니 들소 뿔이 굉장히 길었습니다. 들소는 그 뿔이 얼마나 힘이 센지 모릅니다. 굉장히 긴 그 뿔로 들이받으며 싸움을 하고 자기를 방어합니다.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시며" 라고 했는데 그 뿔은 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당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셔서 그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는데 그것이 기름부음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해서 나셨지만 그것이 기름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침례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기 전에는 예수님이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아무것도 안하셨습니다 . 복음 전하는 일도 안하시고 이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나자마자 즉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한테 시험 받으시는 것이 바로 기름부음 받은 것을 시험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완전히 이기셨고 거기서부터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온갖 병자를 고치시고 복음을 전하신 그것이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아 이루어지는 교회
교회도 기름부음이 있을 때부터 진정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우선 이 역사 속에서 단 하나 뿐인 교회가 있습니다. 오순절로부터 시작해서 들림 받을 때까지의 모든 구원받은 신자가 다 거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역사상 단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교회가 있습니다. 역사상 단 하나뿐인 교회 안에 속해 있지만 시대시대마다 성령의 어떤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나타나는 교회도 하나의 교회 안에 속해 있지만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디엘 무디, 영국의 죠지 뮬러, 찰스 피니 같은 이들은 어느날 구원받은 다음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사로잡는 강력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주변에 성령의 활발한 역사와 복음 전도의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두 속해 있는 단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 속에서 실제로 시대시대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해 강력하게 역사하는 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회에 속해 있지 않는 곳에서도 성경만 정확하게 전해지면 드문드문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임도 분명히 성령의 기름부음과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었고 많은 일들이 이루어져 왔던 것입니다.
주님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하는 허다한 무리들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심을 내 귀로 들었도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시 92:11-12)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이하였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이 종려나무는 야자수입니다. 이 나무는 계시록에도 나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이 계시록 7장 내용은 이스라엘의 14만 4천인이 인침을 받은 다음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기 위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이 성경을 조금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란 중에 이스라엘 민족 중 십사만 사천 인이 구원을 받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도해 온 세상 사람들이 많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한번 나타나는 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라고 했는데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라는 말은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허다한 무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번성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서울 부근에는 없습니다만 남쪽에 가면 가지가 많이 뻗어나간 소나무 비슷한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백향목인데 키가 아주 큰 것은 한 3〜40미터쯤 되고 가지가 굉장히 많이 뻗어나갑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과 자기 궁궐을 지을 때에 이 백향목을 베어다가 제목을 삼았습니다. 이 백향목은 견고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열매 맺는 성도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시 92:13-14)
이 백향목과 종려나무가 하나님의 궁정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백향목은 매우 견고하고 향내가 나는 나무로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안에 심어진 사람들은 마치 백향목과 종려나무같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들의 위치가 그 나무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늙어도 결심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렙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늙는 것도 문제지만 신앙이 늙어버리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한참 젊을 때는 굉장히 힘이 있고 하더니만 얼마 지나고 나면 기력이 쇠해져버리고 신앙적으로 늙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아무 힘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참으로 큰일입니다. 끝까지 변함없이 열심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텐데 말입니다.
감정적으로 설치는 것 말고 정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고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이 아쉽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가도 그 신앙이 변치 않는 것이 늙어서 결실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혜 속에 항상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생활이 연륜이 오래되었는데도 힘이 떨어지고 변질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 큰일입니다. 한때는 나도 열심히 했는데 하고 과거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과거에 열심히 했던 것만 생각하고 현재 어떻게 사느냐는 별로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이 도중에 변질되어버리고 힘이 없어져버리면 말로가 좋지 않습니 다. 우리는 어떤 핍박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꾸준히 참 믿음을 지켜가면 참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
"여호와여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시 92:15)
하나님의 정직을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내야 됩니다. 한때 입으로 주님을 증거한 사람이라도 그 다음에 변질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정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켜가고 진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님 안에서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있습니다. 주님과 그 몸된 교회가 우리의 안식처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교회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감사하며 주님께늘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의 찬송시' 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 리듬을 이어가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
신약 시대에는 안식일이 별도로 없습니다만 이 안식일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과 상당히 마찰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일반 교회에서는 주일을 안식일 개념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해방 직후에 장로교회에 조선 신학교(현재 한국신학대학)가 있었는데 그 학교 교수들 가운데 이 안식일 문제를 현재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논리로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만 학생들 가운데 반발이 일어나서 너무 신신학의 방향으로 흐른다고 비판하여 큰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학생 50여 명이 그 학교를 떠나 새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새로 세워진 학교가 장로회 신학교로 현재는 총회신학교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상당히 정통이고 보수주의라고 하는 계통의 학교입니다.
한국신학대학의 계통에서는 김재준 교수가 유명한데 상당히 실력자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요. 함경도 분으로 함경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그분을 지지했는데 그 후계자가 강원형 목사입니다. 그분 역시 그 계통에서 유명하고 상당히 활약을 많이 한 분입니다. 그러다가 그 학교에 분쟁이 생겨 새로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 학교에서 유명한 분이 박형용 박사인데 한국 보수주의 계통의 거목입니다. 그분은 평양출신입니다. 주로 평양 쪽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서 박형용 박사의 노선을 따라 운동을 전개했는데 안식일을 아주 철저하게 지키는 계통입니다.
그리고 부산에 가면 고려신학교가 있는데 그 학교에서는 박윤선 박사가 유명합니다. 그분이 교수로 있을 때 주일날 미국의 선교사를 전송하기 위해서 비행장에 차를 타고 갔다왔다고 해서 교단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안식일을 범했다고 상당히 시끌시끌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계에서는 소위 정통주의라든지 보수주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을 신봉하고 율법주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정통이고 보수라는 것입니다. 저도 구원을 받기 전에는 역시 그런 보수주의적인 것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난 후에 비로소 안식일주의나 율법주의가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만일 그러한 보수주의자들이 우리를 보면 신신학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항상 함께 모여 성경 공부도 하고 교제도 나누지만 주일을 안식일로는 지키지 않습니다. 또 안식일 교회처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일과 안식일이 분명히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안식과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무덤 속에 계셨는데 그 때가 안식입니다. 그 렇다고 예수님이 무덤 속에서 편히 안식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동안은 가장 깊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십계명 가운데 제 4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엿새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레만에 쉬신 그 날이 안식일이니까 그 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율법이 왜 있을까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 말씀을 보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 계명은 무슨 죄를 깨닫게 합니까?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면 안식일 계명도 죄를 깨닫게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안식일 계명은 사람이 안식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을 못하는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을 못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사람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지킬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식일 지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면 다른 계명을 다 지켜야 합니다. 십계명 가운데 아홉 가지 계명을 완전히 지켜야 안식의 계명도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 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1-3)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더 창조할 것이 없으니까 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 너무 일을 많이 하셔서 피곤해서 쉬신 것은 아닙니다. 일이 없으니까 쉬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계명은 사람이 자기 육신적인 힘으로 십계명과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다 실천을 하고 난 다음에는 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안식일을 완전히 다 지키고 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는 결코 안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에도 일하신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유독 안식일에 병을 많이 고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고치시고 절름발이도 고치시고 소경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안식일에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안식입니까? 병 낫는 것이 안식입니가? 안식일날 병 낫는 것 이 안식이잖습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치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일을 하신 것이 안식을 범한 것이라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안식일날 왜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요 5:5-16)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안식일인데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그 자체가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엿새 동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창조하시고 사람까지 창조하셨는데 그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가 끝났기 때문에 쉬셨는데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사람을 꾀어 범죄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영혼이 죽고 육신도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다시 시작하시게 된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레만에 쉬셨다는 것만 알지 하나님이 다시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18-2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안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사명을 받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그 일이 바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일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것이 죽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아버지가 하시는데 그 일을 아들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을 안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날 예수님은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안식일 날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것, 병든 자를 고치는 것 등등이 안식을 주는 일입니다.
진정한 안식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 때부터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시편 92편을 안식일의 찬송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찬송이라는 것이 구약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데 대한 찬송시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신약적인 의미를 가지고 찬송시를 지었을까요?
이 시편이 씌어진 것은 분명 구약시대입니다. 이 찬송시를 누가 읊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이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성경을 알게 되면 참으로 우리가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에게 안식 일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 38년된 병자는 안식이 없는 상태로 앓으면서 수많은 안식일을 보냈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그가 안식을 잘 지킨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게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안식 일이나 보통 날이나 항상 병들어 고통하는 그 상태 속에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나 육신적으로나 참된 안식이 없는데 날짜만 지키는 것이 안식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율법은 잘 지키는 것이 소위 하나님을 잘 믿는 생활로 착각하고 오랜 세월 동안 헛수고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시편 92편을 죽 읽어가면 진정한 안식이 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찬송하는 시
이 시인은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풍성한 은혜와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 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 은 하나님의 약속인 자연법칙을 통해서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며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며 모든 일이 어김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인은 그러하신 하나님을 위해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잠기어서 안식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유대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감사할 것이 없어요.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그 자체가 무거운 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시는 미래를 예언하는 의미가 다분히 있습니다. 이 시를 읊은 사람은 진정한 안식이 뭔지 이미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다윗을 비롯한 참 신앙인들은 마음에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렸는데 그것은 신약의 미래 즉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형식적인 종교만으로서는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안식이 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피곤하고 무서운 율법입니다. 안식일에는 오리 이상 가서는 안됩니다. 꼼짝도 못하는 그런 것이 안식일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에 가면 철저히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갔을 때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서도 관습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산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금요일 날 해지는 때부터 토요일 날 해지는 때까지가 안식일입니다. 안식 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요일이 공휴일인 우리 한국에 와서 살거나 서구문명 속에서 산다면 틀림없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굳이 그러한 불편을 견디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안식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19 장에 보면 예수님이 구속의 일을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이 언제 오느냐 하면 할 일이 없어야 오는 것입니다. 할 일을 두고는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안식에 들어갈 때 우리 일을 참으로 쉬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10)
그래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어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할 일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면 그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의 안식
예수님 안에 안식이 있고 그 다음에 또 교회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교회가 안식의 자리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인데 예수님의 몸 안에서 우리가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7장은 굉장히 고통하는 장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8-24)
자기가 선하게 살고 싶고 거룩하게 살고 싶고 하나님이 뜻대로 살고 싶은데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하나님 뜻대로 못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가서보면 '내가' 라는 말이 한마디도 안나오고 "너희"로 바뀌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못합니다. 그러 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서 이루어질까요?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 리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교회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의 뜻을 이루는 곳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몸이니까 그 안에 참여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 개인이 아닌 '너희' 곧 '우리'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몸인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교회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개인 중에서도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특별히 사명을 받은 사람을 통해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통 개인에게 개별적으로 하나님 뜻을 이루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지 개인 개인에게 따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알아버리면 자기 혼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해놓은 교회 안에 참여하여 조용히 봉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참여하여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쉬는 것입니다. 교회가 안식의 처소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우리 몸이 눈과 귀와, 손 발 등등이 전부 합쳐서 협력할 때에 일이 되어가듯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각자 자신의 분량대로 협력하여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혼자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주님의 몸 안에서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알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지만 아직도 잘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거기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혼자서 애쓰고 고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안식이 있는 것이나 주님 안에 안식이 있는 것이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92편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주의 행사 가운데 살아가는 삶
안식은 나의 행사가 아니고 주의 행사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생활과 진정한 신앙생활의 차이가 뭡니까? 사람의 종교심을 자극하여 무엇을 열심히 해라,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가르치면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할지라도 사람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종교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일도 안하고 두 손 다 놓고 그냥 쉬기만 하면 될까요?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성령이 하시는 그 일 속에 내 자신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의 행사"란 말이 세번이나 나오는데 우리 신앙생활은 주님의 행사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내 행사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부활하셨고 성령을 보내사 모든 것을 하시지 내가 내 죄값을 스스로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주님이 율법의 요구와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주님이 행사를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할 것 없이 모든 종교는 사람에게 무엇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다음에 주님이 오셔서 죄인이 해야 할 일을 대신 다 하셨고 모든 것을 다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이 하신 일 안에 살면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전부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지 아무도 거든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거들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귀의 조종을 받아서 예수님 팔아먹은 것뿐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가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 은혜롭게 하시는 일, 구원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세상이 심판을 받습니다. 한편은 은혜의 일을 하셔서 사람을 구원하 시고 그 다음에 은혜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지 않는 세계를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그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마귀를 멸망시키고 이 죄악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영원한 세계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거기에 우리 인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굉장히 위대한 일이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계십니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요 그래서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지고 주님의 모사가 되어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열 두 제자는 왜 택하셨고 사도 바울은 왜 택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바로 성령으로 살아가는 생애였습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행동하는 전부가 성령의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비서실장이 있어 그가 생각한 바를 제안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논이나 도움이 절대로 필요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함께할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고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뭘 드려가지고 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라"
그러니까 완전히 일방적으로 모든 일이 하나님 편에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지금 우리 교회가 가는 길도 하나님의 계획이고 예정하신 뜻대로 되어 가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습니다. 교회가 가는 길은 사람이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했든 말았든 하나님이 예정하신 뜻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앞장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웃사가 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법궤가 어떤 때 이방인들에게 빼앗겼는데 가는 데마다 이방신의 우상의 모가지가 부러져버리고 가는 데마다 병을 일으키더니 결국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 오게 됩니다. 그것이 전부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는 완전히 하나님의 일이지 절대로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걱정하고 염려해서 하나님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교회가 잘될 것 같고 열심히 안하면 교회가 안될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기준을 두 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순종을 하면 나중에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배를 타신 후에 주무셨습니다. 분명 배를 타고 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배는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이 없이 바다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나니까 제자들은 빠져죽을까 걱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절대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므로 어떤 일을 당하든 어떤 사람이 무슨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이 무슨 실패를 해도 교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그 사람 개인이 나중에 거기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고 또 개인이 충실했으면 상을 받을 것이지만 교회가 가는 그 자체는 아무도 좌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주님의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실을 확실히 알면 교회 안에서 마음이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걱정한다고 해서 교회가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
우준하고 무지하고 악하고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이 타락한 후로부터 노아의 홍수 시대, 바벨탑 쌓는 시대를 거쳐서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선택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꾸며지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출을 받은 후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나라가 이루어지고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 왕의 왕정시대, 분열왕국 시대를 거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그 때부터 이스라엘의 시대가 지나고 이방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첫째는 바벨론, 둘째는 페르시아, 세째는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그 다음에 로마가 등장합니다. 그 로마의 세력이 지금 와서 다시 부활하여 유럽 공동시장과 하나 의 유럽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유럽에서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그 후에 세상이 적그리스도 밑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환란이 일어나서 세상이 심판받고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이 오고 그 다음에 영원한 세계가 옵니다. 이 모든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하나님의 일 아닙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분부분 생각하면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 세상의 역사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신 일도 마귀를 멸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셔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 교회가 어떤 때는 핍박을 받고 없어지려고 하다가 또 일어나서 새롭게 되고 없어지려고 하다가 또 일어나서 새롭게 되면서 그 줄기가 죽 내려와 지금 우리 시대에까지 이르러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 시대에 나름대로 교회의 역사를 또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믿는 것, 깨닫는 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깨닫는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을 거기에 의탁을 하고 하나님 일 속에다가 자신을 맡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내 삶이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으로 이 세상 살다가는 데 핵심적인 사실입니다.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말씀으로 나타나니까. 그 말씀을 깨달아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런데 악인은 이걸 모릅니다. 무지한 자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모르고 자기 일밖에 모릅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돈벌이 하고 자식들 키우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갑니다. 자기가 죽으면 자식이 공부 잘 해서 성공하여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영생의 개념입니다. 자기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그저 잘 살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일을 모르고 자기 일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그 인생이 얼마나 무지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가 하는 일 전부가 하나님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악인들과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해 놓은 이 안식의 세계에서 편안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모르고 마귀의 지배 아래서 제 뜻대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지 않고 죄를 짓고 살도록 하는 마귀의 속임수에 걸려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영웅이 된 것 같고 무슨 성공을 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주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하나님의 일 속에다가 던져놓고 살면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허무한 인생들의 죄악된 모습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현재는 다 흥왕한 것 같고 풀같이 잘 자라 파릇파릇한 것 같지만 결국은 머지 않아 다 멸망을 당하게 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큰 심판을 당할 자기의 운명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 허무한 인생들의 죄악된 모습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마귀를 멸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의 승리
예수님은 마귀를 멸망시키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마귀와 싸우라고 했으면 우리는 절대 못 싸웁니다. 우리는 마귀한테 항상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마귀한테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 육신 속에 들어 앉아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앉아서 죄 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믿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으신 주님
지금 우리 나라는 들소가 없기 때문에 들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KBS에서 나오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를 보니 들소 뿔이 굉장히 길었습니다. 들소는 그 뿔이 얼마나 힘이 센지 모릅니다. 굉장히 긴 그 뿔로 들이받으며 싸움을 하고 자기를 방어합니다.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시며" 라고 했는데 그 뿔은 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당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으셔서 그 기름부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는데 그것이 기름부음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해서 나셨지만 그것이 기름부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침례받고 올라오실 때에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시기 전에는 예수님이 아무것도 안 하셨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아무것도 안하셨습니다 . 복음 전하는 일도 안하시고 이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나자마자 즉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한테 시험 받으시는 것이 바로 기름부음 받은 것을 시험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완전히 이기셨고 거기서부터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온갖 병자를 고치시고 복음을 전하신 그것이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아 이루어지는 교회
교회도 기름부음이 있을 때부터 진정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우선 이 역사 속에서 단 하나 뿐인 교회가 있습니다. 오순절로부터 시작해서 들림 받을 때까지의 모든 구원받은 신자가 다 거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 교회는 역사상 단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교회가 있습니다. 역사상 단 하나뿐인 교회 안에 속해 있지만 시대시대마다 성령의 어떤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나타나는 교회도 하나의 교회 안에 속해 있지만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디엘 무디, 영국의 죠지 뮬러, 찰스 피니 같은 이들은 어느날 구원받은 다음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을 사로잡는 강력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주변에 성령의 활발한 역사와 복음 전도의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두 속해 있는 단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 속에서 실제로 시대시대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해 강력하게 역사하는 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회에 속해 있지 않는 곳에서도 성경만 정확하게 전해지면 드문드문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역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임도 분명히 성령의 기름부음과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었고 많은 일들이 이루어져 왔던 것입니다.
주님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하는 허다한 무리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이하였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이 종려나무는 야자수입니다. 이 나무는 계시록에도 나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계 7:9-12)
이 계시록 7장 내용은 이스라엘의 14만 4천인이 인침을 받은 다음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기 위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이 성경을 조금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란 중에 이스라엘 민족 중 십사만 사천 인이 구원을 받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도해 온 세상 사람들이 많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한번 나타나는 광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라고 했는데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라는 말은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허다한 무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번성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서울 부근에는 없습니다만 남쪽에 가면 가지가 많이 뻗어나간 소나무 비슷한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백향목인데 키가 아주 큰 것은 한 3〜40미터쯤 되고 가지가 굉장히 많이 뻗어나갑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과 자기 궁궐을 지을 때에 이 백향목을 베어다가 제목을 삼았습니다. 이 백향목은 견고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열매 맺는 성도들
이 백향목과 종려나무가 하나님의 궁정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백향목은 매우 견고하고 향내가 나는 나무로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안에 심어진 사람들은 마치 백향목과 종려나무같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들의 위치가 그 나무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늙어도 결심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렙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늙는 것도 문제지만 신앙이 늙어버리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한참 젊을 때는 굉장히 힘이 있고 하더니만 얼마 지나고 나면 기력이 쇠해져버리고 신앙적으로 늙어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아무 힘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참으로 큰일입니다. 끝까지 변함없이 열심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텐데 말입니다.
감정적으로 설치는 것 말고 정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고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이 아쉽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가도 그 신앙이 변치 않는 것이 늙어서 결실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은혜 속에 항상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생활이 연륜이 오래되었는데도 힘이 떨어지고 변질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참 큰일입니다. 한때는 나도 열심히 했는데 하고 과거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과거에 열심히 했던 것만 생각하고 현재 어떻게 사느냐는 별로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이 도중에 변질되어버리고 힘이 없어져버리면 말로가 좋지 않습니 다. 우리는 어떤 핍박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꾸준히 참 믿음을 지켜가면 참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
하나님의 정직을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내야 됩니다. 한때 입으로 주님을 증거한 사람이라도 그 다음에 변질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정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켜가고 진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님 안에서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있습니다. 주님과 그 몸된 교회가 우리의 안식처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교회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감사하며 주님께늘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