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5편]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을 찬양하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 95:1-11)


 시편 95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에 읊은 시인 것 같습니다. 평온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송하고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편 95편은 히브리서 3장, 4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갈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갈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회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히 3:7-15)


 구약과 신약은 항상 연결이 되고 또 구약은 다분히 신약의 그림자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생활을 했을 때는 축복을 받고 믿음에서 떠나 우상 숭배를 했을 때에는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도 역시 우상 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양상이 조금도 틀림없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양상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 흐르고 믿음이 없을 때에는 항상 육신이 앞서고 육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반석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시 95:1)


 여기에 '구원'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을 체험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은 육신적인 구원입니다. 그들의 육신적인 구원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육신적인 구원은 적군과 싸워서 이기는 것을 말하거나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육신이 어려운 지경에 있다가 놓임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 시대에 있어서 영혼 구원의 그림자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그 때는 영혼이 구원을 받는 그런 체험은 없는 시대였습니다. 영혼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사 부활하시고 또 성령이 오셔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반석' 이시라고 하였는데 현재 우리들에게도 구원의 반석이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고 말 씀하신 후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절)고 하셨습니다.

 반석이 바로 예수님인데 신앙생활은 예수님 위에다가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영혼의 보좌이시고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 다. 반석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고 큰 홍수가 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을 믿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으면 우리 영혼의 상태뿐만 아니라 믿음의 생활도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거나 시험을 받거나 곤경에 처할 때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분명히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부딪히고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환경에 부딪혔을 때에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확실히 가질 때에 주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어 주셔서 모든 역경을 이기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석이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걱정과 염려로 마음이 흔들리고 곁길로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있는가?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시 95:2-3)


 우리가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을 받으 면 하나님 을 의지하는 마음이 흔들리기 쉽습니 다. 현실적으로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에 어느 정도 제한을 가하시지만 당장에 그 공격에서 즉각적으로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은 하나님이 직접으로 주시는 것은 아니고 전부 다 사탄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욥기에서 이미 배운 바 있습니다. 



사탄과 그리스도인의 훈련


 욥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자였지만 사탄은 그 욥을 참소하였고 하나님은 "네가 시험해보라"고 사탄에게 허락을 하셨습니다. 욥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실 욥의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에서도 욥의 인내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배후에 하나님의 목적이 따로 있고 사탄의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는 데 있고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켜서 인내력을 기르고 신앙적인 인격을 연마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 욥처럼 인내하고 견뎌가면 사탄의 목적은 좌절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에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5-6)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늘에나 땅에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섬기지만 이 세상에는 마귀의 떼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의 육신의 환경은 그 많은 신, 많은 주라고 하는 사탄과 관계가 있고 항상 사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아무리 사탄이 있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은 사탄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높은 위치에 계십니다. 결국 사탄의 모든 계획은 다 파괴되고 심판이 되어 완전히 지옥에 들어가게 되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느 기간 동안은 사탄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돕게 되는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말고 사탄을 당장 없애버리시면 될텐데 왜 사탄을 계속 남겨두셔서 우리를 괴롭히게 하시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사탄에 의해서 돌아가시고 결국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시는 모든 뜻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면 사탄도 인류 역사의 과정 속에 필요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극적으로 구출하는 큰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역사도 사탄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이 더 분명하게 되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도 나타날 수 있도록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탄이 아무리 힘이 세고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넉넉히 건지시는 하나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든 뭐가 일어나든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우리들 주변에 이 악한 신의 역사가 아무리 강하게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넉넉히 건지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여기에 보면 분명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주님은 환난을 당하셔서 완전히 승리하신 분입니다. 주님의 그 승리는 우리에게도 승리가 됩니다. 환난을 당해서 시달리는데 무슨 승리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목숨을 잃어도 승리입니다. 순교는 패배가 아닙니다. 순교자는 완전한 승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육신적이고 현실적인 승리가 아니고 영적인 승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승리가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현재 받은 영혼의 구원에 영적 승리가 포함되어 있고 모든 하늘의 축복이 다 포함이 되어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이 너무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하에서 나타나는 고난과 시련의 과정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시 95:4-5)


 여기에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뜻입니다. 또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곳이로다"라는 말은 히말라야산같이 높은 산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도 지으신 분입니다.

 예레미야서 10장에 보면 "이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세력은 망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이 세상은 사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상태에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나 소유권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사탄의 말을 듣고 이 세상의 통치권을 넘겨주어서 지금 사탄이 이 세상을 일시적으로 다스리고 있지만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쫓겨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세상 임금이 사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결국은 사탄의 활동이나 뜻을 역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탄에 의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시련이 오는 것이나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것도 결국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모임이 가고 있는 일 가운데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그런 점이 있습니다. 사람의 실수나 잘못이 분명히 사탄의 장난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이 허용하신 사탄의 장난입니다. 그래서 그 일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인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단련받고 훈련받아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있으면 우리는 교만하고 자긍하기 쉽습니다. 욥은 완전하고 정직하고 흠이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이 고난을 받게 하셨습니다. 욥이 아무리 사람으로서 온전하다고 해도 그것은 욥의 종교적인 활동 속에서 그렇게 된 것이고 나중에 자기가 무너져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나는 죄를 지은 일이 없다, 나는 의롭다 하는 그것이 꺾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을 때에 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시련이나 교회적으로 당하는 시련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당하는 시련이든지 교회적으로 당하는 시련이든지간에 우리 자신이 낮아져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서 모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낮은 곳에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는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룦율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낱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6-7)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은 겸손한 자세가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형체로 우리 앞에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 앞에 백 번이고 무릎을 꿇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고 또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지만 그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전폭적으로 믿고 순종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3-9)


 예수님은 양의 목자이시고 우리들은 예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양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될텐데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습니까? 계시를 받는다든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우리는 단체적인 신앙생활은 해도 개별적인 신앙생활은 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교제 교제하고 교회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다보니까 단체적으로 행동하는 문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는데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나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희박한 것 같습니다. 주님이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신다는 말은 우리 개인의 마음 속에 주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아지는 것이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음성을 듣고 우리가 주님을 알아가야 되는것 입니다.

 그런데 소경이 방울소리를 따라가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 가는 방향으로만 무조건 몰려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


타인의 음성을 따르는 자들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임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상당히 많은데 다른 음성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다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소리를 잘 듣고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음성들이 있습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헌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잠 1:20-25)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고 광장에서 소리지른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 길거리, 광장에는 오만 가지 소리가 많이 들립니다. 기독교 안에도 이상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 주변에는 큰소리치는 소리들이 많지만 참으로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주님의 양입니까? 참으로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강퍅케 말고 하나님 의 음성을 계속 듣고 따르라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갈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시 95:7-8)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을 할 때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원망했고 또 고기를 못먹으니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을 장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고 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군대가 홍해 속에 다 빠져 죽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확실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조그마한 어려움이 닥치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험하였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현재 우리들도 그 이스라엘 민족과 거의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은혜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조금 지나고 나면 구원의 기쁨이나 감사가 희미해지고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그만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구원을 좀 늦게 받았으면 좋았겠다고까지 말합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 상태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영혼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음성을 계속적으로 듣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백성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 95:9-10) 


 하나님이 뭘 주시는가 안주시는가 보자는 것이 하나님을 탐지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하여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인하여 하나님이 근심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성령도 우리를 위해서 마찬가지로 근심을 하십니다.



안식의 땅 가나안의 의미

 - 교회는 영혼의 참된 안식처인 동시에 훈련장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하나님을 도전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 95:11)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히 3:7-11)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던 때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 중에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모세는 한 번 불순종했기 때문에 가나안에 못들어갔습니다. 반석을 향해서 지팡이를 들어 가르치라고 했는데 화가 나서 내리쳤기 때문 입니다. 물론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니까 가나안에는 못들어가는 운명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신약시대로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형성될 것을 예표하고 역사적으로는 천년왕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에 관한 것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천년 왕국에 들어가면 전쟁이 없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항상 주님의 말씀에 충실히 순종해가면 틀림없이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크게 강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충실하게 정직하게 살려고 굳게 결심을 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은 시련과 고통을 통과하는 일이 있고 난 연후에 비로소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고통이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교회가 안식처라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교회는 안식은커녕 우리에게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짊어지우는 곳이 라는 인상을 받기 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당하거나 시련을 겪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은 우리 육신을 꺾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교회 안에서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삶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교회가 없이 혼자서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보다도 말씀이 공급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혼자서 이루어갈 수 없습니다. 교제가 없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전이니까 성전 안에 법궤가 있습니다. 그 법궤가 말씀입니다. 말씀임과 동시에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말씀이 공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혼자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몸 전체가 활동해 가지고 머리의 뜻을 이룹니다. 가령 손가락이 혼자서 머리의 뜻을 이룰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이나 팔이 잘려져 버렸다면 머리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나 혼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굳은 결심이 있으면 심각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나중에 비로소 그러한 노력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거기에서 해방을 받고 풀려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주님의 몸인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혼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몸이 움직이는 데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처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알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육신이 안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은 더 바빠지고 더 부지런해지게 됩니다. 내가 억지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없이 교회 안에서 더 바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이루어집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혼자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하고 괴롭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음성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고 주님께 순종하면 교회 안에 동참하여 쉼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참된 안식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히 4:2-3)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구원 얻는 복음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과 관련된 복음도 포함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됩니다. 빌립보서 1장 5절에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신앙생활도 복음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하면 그 말씀은 날아가버리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기자는 이미 충만한 은혜 속에서 마음이 편안히 쉬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모든 신 위에 뛰어난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있으면 정말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