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주는 영화로우시 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 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차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은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시 76:1-12)
이 시편 76편도 75편과 같은 환경 속에서 읊어진 시입니다.
시편 76편이 씌여진 역사적 배경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 왕은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굉장히 강하여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물론이고 유다 지방도 여러 지역을 이미 점령하고 이제 예루살렘만 차지하면 남쪽 유대 나라도 완전히 망하게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산헤립은 아주 오만한 태도로 히스기야에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러한 상황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 왕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대로 하룻밤 사이에 십팔 만이라는 앗수르의 대군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전쟁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치사 멸망시켜버린 일이 이사야3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여호와 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 네가 네 종으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한계 되는 높은 곳에 들어가며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밟아 말리리라 하였도다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을 헐어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 거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같이, 푸른 나물같이, 지붕의 풀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갈았었느니라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네가 나를 거스려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가라사대 그 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에 도망한고로 그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사 37:21-38)
시련과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시 76:1)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은 신약시대에 교회가 걸어가는 길 속에 나타날 일들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신약 성경의 많은 말씀들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온 후 사십 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하고서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거나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는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들에게 왜 그러한 일들이 있어야 했을까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받은 사람의 세계에 함께 계셔서 이 세상 사람보다 월등하게 잘 살고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와는 정반대로 항상 어려운 일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기까지의 과정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회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갈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신 8:1-10)
안하게 살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와는 정반대로 항상 어려운 일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기까지의 과정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회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갈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신 8:1-10)
지금 읽은 이 말씀의 후반부에는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풍성한 양식이 있어 배불리 먹고 잘 살 수 있는 땅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조해 볼 때 구약 성경에 나타 난 물리적인 측면은 신약 성경에는 마음의 상태,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실지로 물리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입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그 앞에 어떤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40년간 했는데 그 기간 동안에 원수에게 공격을 받기도 하고 음식이 없어 주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회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 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제 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갈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회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회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 을 너회에게 주는 것이니 너회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갈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갈았더라 모세가 가 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회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출 16:13-32)
만나라는 것이 물론 달고 맛이 있기는 하지만 그 한가지만 항상 먹으니 실증이 났던 것 같습니다. 40년 가까이 만나만 먹으니까 실증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식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낮추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낮추어 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낮추어지지 않은 것은 자기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순종하는지 안하는지 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 구원을 받기는 받았습니다만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자기들 방법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통한 시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시련 속에서 순간순간 구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정녕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받았지만 현재 우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아직은 하나님 을 온전히는 모르는 상태 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려면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여 육신의 생각대로 하나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생각을 낮추시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뜻을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이 낮아질수록 주님을 더 닮아갈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회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회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회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회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게 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2-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알아가는 일을 통해서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오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성품에 우리들이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을 바로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안다, 진정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방법이 바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흡족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때에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구세주이신 것을 알았습니다만 그 지식은 극히 초보적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있는 말씀같이 맛을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아가는 만큼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성품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을 부리며 육신의 영광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주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치 않는 자신의 육신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성품 때문에 항상 주님과 떨어져 사는 생활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과 괴로움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아무리 만족을 시켜 주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그러한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 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차츰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러 가지 약속과 은사들이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약속과 은혜는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찾고 원하는 만족과는 비교도 안되는 풍성한 축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의 참뜻입니다. 마음속에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낮추시려고 40년 동안 그들을 모진 광야의 길을 걷게 하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들을 단련하셨는데 이 길을 지금 우리들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말씀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움
우리들 중에는 일찍이 교회 가운데서 그런 경험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사 40일간 금식을 하시고 굉장히 주리셨지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양식을 삼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현재 신앙생활 속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말씀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졌고 이 성경 속에 있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서 구체화되어 사실로 나타나야만 우리가 말씀을 음미하게 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은 절대로 알아지지 않습니다. 무사태평한 사람은 이 말씀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 다. 이 말씀은 반드시 큰 시련이나 고통이나 괴로움을 통해서 알아 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알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어떤 말씀이 와서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때에 우리가 그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의 양식보다, 육신적으로 누리는 행복보다도 엄청나게 귀하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는 보통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주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
히스기야 왕은 당대에 하나님께 굉장히 충실한 왕이었지만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산헤립이 하나님을 욕하고 그를 능멸하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굉장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답을 기다렸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모든 우상을 제하고 살아가는 충실한 왕에게 왜 그런 어려움이 닥쳤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하심을 깊이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대군들로부터 구원을 받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와 산헤립을 친히 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다고 찬송한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존재 속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시 76:2-3)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그 안에는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인 성전을 점령하겠다고 큰 소리치는 산헤립은 사실 히스기야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너회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 나의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거하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사 37:10-12)
그 결과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날 밤에 산헤립의 군대 18만명이 누가 화살 하나도 쏘지 않았는데 몽땅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7-9)
우리들은 자신을 돌아보면 아무 쓸모없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질그릇같이 힘이 없고 연약한 것을 사용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힘이 없는 연약한 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질그릇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그 높은 지위와 능력을 우러러 보면서 그 지위와 능력으로 무엇을 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요소는 무너지고 낮아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믿음이 있었던 사람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 훌륭한 지위나 능력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존 번연 같은 이는 구원받기 전에 술주정뱅이였고 학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성질이 사납고 항상 술에 취해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일찍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번연에게 성경을 권해서 번연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번연은 구원받은 후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디엘 무디 같은 이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신앙의 위인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나 독일의 진젠도르프처럼 학식이 높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인간적인 능력과지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힘을 의존하는 데 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는 주님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시 76:4)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을 약탈하고 그 땅을 빼았습니다. 갈렙은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거주한 여부스 족속을 쳐부수고 시온산을 점령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의 칠 족속들은 마귀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전리품으로서 이스라엘을 건설했습니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시 76:5)
여기서 마음이 강하다는 것은 완악하다는 뜻입니다. 산혜립은 하나님을 향해서 욕을 하고 하나님을 무시할 만큼 마음이 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만하고 큰소리치던 강한 자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만 멸망해 버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힘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도우셔서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 왕처럼 지금 우리들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이 세상에서는 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들이지만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시 76:6)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대로 그 강대한 산헤립의 군대는 다 멸망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주님의 심판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노하신다는 생각을 가지면 주님이 무서워 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혹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어도 그 죄를 대언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분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마지막 때가 이르러 주님의 노가 한번 나타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나게 됩니다. 그 무서운 진노를 사람이 견딜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공의와 사랑의 표현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시 76:8-9)
주님은 모든 사물을 정확히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사람의 판단은 주님의 판단과는 달라서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판단하시니까 그 앞에서 숨겨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밀하고 소립자보다 더 작은 것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양면에 날이 선 칼입니다. 한쪽은 구원의 판단이고 한쪽은 심판의 판단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받아들여 구원을 받은 이들은 구원의 판단이, 주님을 거부한 이 세상은 무서운 심판의 판단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게 증거하셨느니라"(히 2:3-4)
우리가 받은 복음 속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한쪽은 구원이고 한쪽은 심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상에서 볼 때는 심판을 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주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지옥을 가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아주 무서운 형벌이 됩니다.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논리에 맞지 않는다 하여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경험할 때 우러나는 찬송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찬송은 구원을 경험했을 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왕인 산헤립의 노여움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위대하신 손길을 경험하고 찬송이 우러난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은 사실 마귀의 노여움이고 사람들의 노여움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는데 우리가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는 일이 전혀 없이 무사태평하게만 지내면 마음에서 진정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찬송은 내 영혼이 구원 받을 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당하는 어려운 시련 속에서 구출이 되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런 찬송을 우러나오게 하기 위해서 사람의 노와 마귀의 노가 있는 것입니다. 산혜립의 노가 없었으면 예루살렘에 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찬송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때 우리에게 찬송할 일이 생겨나기 위해서 이런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이 말씀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노를 품었습니다. 그 노가 극치에 달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사람들의 노가 없었더면 오늘날 우리에게 찬송이 있었겠습니까. 이 죄악 세상에 무슨 찬송이 있겠습니까. 하찮은 인간 세상, 이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봤자 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요즈음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하지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는 일들이 매스콤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는 의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면 암담하거든요.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음 속에 희망이 없으니 어찌 즐거움인들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방법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속에 찬송과 소망이 있습니다. 옛날 예수님을 죽인 사람의 노가 지금 우리에게는 찬송으로 바꿔졌습니다. 사람들이 화내는 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늘 새로운 찬송이 샘솟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직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장차 올 영원한 세상에서는 끝없이 마음속에서 찬송이 솟아나겠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어려움을 당하면 낙담하고 찬송이 사라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찬송이 회복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이러한 과정이 반복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에게 사람의 노나 어려움이 전혀 닥치지 않고 그저 아무 어려운 일 없이 지나가면 우리 마음이 그냥 세상으로 끌려가서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이 부패해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찾아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은 마음이 넓어져 왠만한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됩니다. 가령 누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마음과 눈앞엣 것만 보지 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시련과 고통에 비례하여 우리의 마음이 단련되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주시는 방법인 줄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대환난 기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노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그런데 그 남은 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노를 한계 안에서만 허락하시지 정도를 넘어서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은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틀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사단과 적그리스도의 노는 7년 대란 기간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을 갚으라
"너회는 여호와 너회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시 76:11-1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서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서원이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에는 반드시 시련과 어려움의 시험이 뒤따릅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나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여 비로소 우리가 서원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일이 있어야만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 앞 에서 서원도 쉽게 하고 또 그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물질 문제에 관한 서원도 일단 했으면 꼭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하니까 체면 치레로 따라 해놓고서는 그 서원을 소홀히 여기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서원하는 일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앙생활에 지장이 되 는 것입니다. 만일 서원한 일이 있으면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이행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든 면에서 철저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온통 뒤숭숭하고 소란스럽지만 우리들은 확실한 주님의 말씀 안에서 모 든 문제를 훈련을 통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경험해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시편 76편도 75편과 같은 환경 속에서 읊어진 시입니다.
시편 76편이 씌여진 역사적 배경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 때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 왕은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굉장히 강하여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물론이고 유다 지방도 여러 지역을 이미 점령하고 이제 예루살렘만 차지하면 남쪽 유대 나라도 완전히 망하게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산헤립은 아주 오만한 태도로 히스기야에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러한 상황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 왕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말씀대로 하룻밤 사이에 십팔 만이라는 앗수르의 대군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전쟁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치사 멸망시켜버린 일이 이사야3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여호와 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 네가 네 종으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한계 되는 높은 곳에 들어가며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밟아 말리리라 하였도다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을 헐어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그러므로 그 거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같이, 푸른 나물같이, 지붕의 풀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갈았었느니라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나를 거스려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네가 나를 거스려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가라사대 그 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 이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자기 신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할 때에 그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에 도망한고로 그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사 37:21-38)
시련과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시 76:1)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은 신약시대에 교회가 걸어가는 길 속에 나타날 일들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신약 성경의 많은 말씀들을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온 후 사십 년 동안이나 광야생활을 하고서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거나 먹을 것이 없어 주리고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는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들에게 왜 그러한 일들이 있어야 했을까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구원받은 사람의 세계에 함께 계셔서 이 세상 사람보다 월등하게 잘 살고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와는 정반대로 항상 어려운 일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기까지의 과정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회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갈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신 8:1-10)
안하게 살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와는 정반대로 항상 어려운 일에 시달리고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기까지의 과정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회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갈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신 8:1-10)
지금 읽은 이 말씀의 후반부에는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풍성한 양식이 있어 배불리 먹고 잘 살 수 있는 땅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대조해 볼 때 구약 성경에 나타 난 물리적인 측면은 신약 성경에는 마음의 상태,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실지로 물리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입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땅을 얻으려면 그 앞에 어떤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40년간 했는데 그 기간 동안에 원수에게 공격을 받기도 하고 음식이 없어 주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회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 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제 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갈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회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회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 을 너회에게 주는 것이니 너회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갈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갈았더라 모세가 가 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회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출 16:13-32)
만나라는 것이 물론 달고 맛이 있기는 하지만 그 한가지만 항상 먹으니 실증이 났던 것 같습니다. 40년 가까이 만나만 먹으니까 실증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식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낮추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낮추어 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낮추어지지 않은 것은 자기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순종하는지 안하는지 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닮아가는 삶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 구원을 받기는 받았습니다만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몰랐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자기들 방법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통한 시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시련 속에서 순간순간 구원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정녕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받았지만 현재 우리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아직은 하나님 을 온전히는 모르는 상태 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우리를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려면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여 육신의 생각대로 하나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생각을 낮추시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뜻을 지니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자신이 낮아질수록 주님을 더 닮아갈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회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회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회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회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게 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2-8)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알아가는 일을 통해서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오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성품에 우리들이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주님을 바로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안다, 진정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방법이 바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흡족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때에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구세주이신 것을 알았습니다만 그 지식은 극히 초보적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있는 말씀같이 맛을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알아가는 만큼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성품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을 부리며 육신의 영광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은 주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치 않는 자신의 육신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성품 때문에 항상 주님과 떨어져 사는 생활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과 괴로움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아무리 만족을 시켜 주어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그러한 생각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 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차츰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러 가지 약속과 은사들이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약속과 은혜는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찾고 원하는 만족과는 비교도 안되는 풍성한 축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일의 참뜻입니다. 마음속에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낮추시려고 40년 동안 그들을 모진 광야의 길을 걷게 하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들을 단련하셨는데 이 길을 지금 우리들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말씀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움
우리들 중에는 일찍이 교회 가운데서 그런 경험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사 40일간 금식을 하시고 굉장히 주리셨지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마귀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양식을 삼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현재 신앙생활 속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말씀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다 주어졌고 이 성경 속에 있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활에서 구체화되어 사실로 나타나야만 우리가 말씀을 음미하게 되고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은 절대로 알아지지 않습니다. 무사태평한 사람은 이 말씀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 다. 이 말씀은 반드시 큰 시련이나 고통이나 괴로움을 통해서 알아 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알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어떤 말씀이 와서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때에 우리가 그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의 양식보다, 육신적으로 누리는 행복보다도 엄청나게 귀하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는 보통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주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
히스기야 왕은 당대에 하나님께 굉장히 충실한 왕이었지만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산헤립이 하나님을 욕하고 그를 능멸하는 말을 했을 때 그는 굉장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답을 기다렸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모든 우상을 제하고 살아가는 충실한 왕에게 왜 그런 어려움이 닥쳤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전능하심을 깊이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대군들로부터 구원을 받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와 산헤립을 친히 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다고 찬송한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존재 속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능력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그 안에는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인 성전을 점령하겠다고 큰 소리치는 산헤립은 사실 히스기야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너회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너의 의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건짐을 얻겠느냐 나의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거하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사 37:10-12)
그 결과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날 밤에 산헤립의 군대 18만명이 누가 화살 하나도 쏘지 않았는데 몽땅 죽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7-9)
우리들은 자신을 돌아보면 아무 쓸모없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질그릇같이 힘이 없고 연약한 것을 사용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힘이 없는 연약한 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질그릇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능력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통해서 일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그 높은 지위와 능력을 우러러 보면서 그 지위와 능력으로 무엇을 한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요소는 무너지고 낮아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믿음이 있었던 사람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 훌륭한 지위나 능력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존 번연 같은 이는 구원받기 전에 술주정뱅이였고 학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성질이 사납고 항상 술에 취해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일찍이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에 번연에게 성경을 권해서 번연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번연은 구원받은 후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디엘 무디 같은 이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그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물론 신앙의 위인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나 독일의 진젠도르프처럼 학식이 높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인간적인 능력과지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힘을 의존하는 데 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는 주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을 약탈하고 그 땅을 빼았습니다. 갈렙은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거주한 여부스 족속을 쳐부수고 시온산을 점령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의 칠 족속들은 마귀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전리품으로서 이스라엘을 건설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강하다는 것은 완악하다는 뜻입니다. 산혜립은 하나님을 향해서 욕을 하고 하나님을 무시할 만큼 마음이 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만하고 큰소리치던 강한 자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만 멸망해 버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힘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도우셔서 싸우지 않고도 승리한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 왕처럼 지금 우리들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이 세상에서는 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들이지만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대로 그 강대한 산헤립의 군대는 다 멸망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주님의 심판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노하신다는 생각을 가지면 주님이 무서워 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혹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지어도 그 죄를 대언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분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마지막 때가 이르러 주님의 노가 한번 나타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나게 됩니다. 그 무서운 진노를 사람이 견딜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공의와 사랑의 표현
주님은 모든 사물을 정확히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사람의 판단은 주님의 판단과는 달라서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판단하시니까 그 앞에서 숨겨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밀하고 소립자보다 더 작은 것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은 양면에 날이 선 칼입니다. 한쪽은 구원의 판단이고 한쪽은 심판의 판단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받아들여 구원을 받은 이들은 구원의 판단이, 주님을 거부한 이 세상은 무서운 심판의 판단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게 증거하셨느니라"(히 2:3-4)
우리가 받은 복음 속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한쪽은 구원이고 한쪽은 심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상에서 볼 때는 심판을 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지옥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주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지옥을 가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아주 무서운 형벌이 됩니다.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논리에 맞지 않는다 하여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경험할 때 우러나는 찬송
찬송은 구원을 경험했을 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왕인 산헤립의 노여움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위대하신 손길을 경험하고 찬송이 우러난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은 사실 마귀의 노여움이고 사람들의 노여움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는데 우리가 이러한 시험을 통과하는 일이 전혀 없이 무사태평하게만 지내면 마음에서 진정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송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찬송은 내 영혼이 구원 받을 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당하는 어려운 시련 속에서 구출이 되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그런 찬송을 우러나오게 하기 위해서 사람의 노와 마귀의 노가 있는 것입니다. 산혜립의 노가 없었으면 예루살렘에 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찬송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때 우리에게 찬송할 일이 생겨나기 위해서 이런 일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이 말씀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노를 품었습니다. 그 노가 극치에 달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사람들의 노가 없었더면 오늘날 우리에게 찬송이 있었겠습니까. 이 죄악 세상에 무슨 찬송이 있겠습니까. 하찮은 인간 세상, 이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봤자 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요즈음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하지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는 일들이 매스콤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는 의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면 암담하거든요. 이 세상에서 희망이 없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음 속에 희망이 없으니 어찌 즐거움인들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방법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속에 찬송과 소망이 있습니다. 옛날 예수님을 죽인 사람의 노가 지금 우리에게는 찬송으로 바꿔졌습니다. 사람들이 화내는 것을 통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늘 새로운 찬송이 샘솟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직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장차 올 영원한 세상에서는 끝없이 마음속에서 찬송이 솟아나겠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어려움을 당하면 낙담하고 찬송이 사라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찬송이 회복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이러한 과정이 반복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에게 사람의 노나 어려움이 전혀 닥치지 않고 그저 아무 어려운 일 없이 지나가면 우리 마음이 그냥 세상으로 끌려가서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이 부패해 버리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찾아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은 마음이 넓어져 왠만한 일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됩니다. 가령 누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시련을 이길 수 있는 마음과 눈앞엣 것만 보지 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시련과 고통에 비례하여 우리의 마음이 단련되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주시는 방법인 줄을 모르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대환난 기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노
그런데 그 남은 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노를 한계 안에서만 허락하시지 정도를 넘어서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은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틀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사단과 적그리스도의 노는 7년 대란 기간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을 갚으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서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서원이나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에는 반드시 시련과 어려움의 시험이 뒤따릅니다. 여러 가지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나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여 비로소 우리가 서원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일이 있어야만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 앞 에서 서원도 쉽게 하고 또 그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물질 문제에 관한 서원도 일단 했으면 꼭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하니까 체면 치레로 따라 해놓고서는 그 서원을 소홀히 여기는 일들이 종종 있는데 서원하는 일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앙생활에 지장이 되 는 것입니다. 만일 서원한 일이 있으면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이행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든 면에서 철저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온통 뒤숭숭하고 소란스럽지만 우리들은 확실한 주님의 말씀 안에서 모 든 문제를 훈련을 통해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경험해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