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7편] 극한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주관하시는 주님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악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 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가하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 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회리바람 중에 주의 우뢰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 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무리 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 77:1-20)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이 시는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두둔은 아삽, 헤만과 더불어 다윗이 성전에서 찬양으로 봉사케 한 레위인이었습니다. 여두둔은 특히 노래를 잘 불렀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39편은 여두 둔이 노래하도록 지은 것이고 시편 62. 77편은 '여두둔의 법칙' 에 맞추어 지은 것입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야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대상 25:1-3)


 이 시편 77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갈 때 지어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돌아보지 않고 잊어버리신 것 같은 상황에서 울부짖는 내용입니다.



환난 날에 부르짖는 기도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틀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가 마음속에 간구하는 것을 아시지만 특별히 여기서 음성으로 부르짖는다는 것은 매우 급박한 상태에서 울부짖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틀 거절하였도다"(시 77:2)


 시편 50편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환난 날에 부르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전을 향한 솔로몬의 기도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곳 하늘에서 저회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저희는 주께서 철 풀무 같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주의 산업이 됨이니이다 원컨대 주는 눈을 들어 종의 간구함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간구함을 보시고 무릇 주께 부르짖는 대로 들으시옵소서 주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주의 종 모세로 말씀하심갈이 주께서 세상 만민 가운데서 저회를 구별하여 주의 산업을 삼으셨나이다"(왕상 8:46-53)


 이 말씀은 성전을 짓고 낙성식을 할 때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 중의 한 대목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적국에 사로잡혀가서 거기에서 회개하고 뉘우치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사로잡혀간 적국의 땅에서 성전을 향하여 전심으로 기도하면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봐 달라는 내용입니다.



우상 숭배의 결과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


옛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하나님을 떠나서 이방 신을 섬기는죄가 가장 큰 죄였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우리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화내거나 도둑질하거나 거짓말하는 따위는 현저한 죄인 줄 알지만 마음이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것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죄이기 때문에 별로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달음박질해 가는 상태가 바로 우상 숭배의 큰 죄인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룬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회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 4:4-5)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큰 죄인데도 이 죄를 분별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사건화된 죄만 큰죄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였는데 가나 안에 본래 살던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 신이나 아스다롯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의 결과로 북쪽 이스라엘 나라는 B.C. 722 년에 멸망을 당하고 남쪽 유다도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하는 죄로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이스라엘 민족을 잡아가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다윗 왕 이후로는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항상 그렇습니다. 우상 숭배의 결과로 이방 사람에게 잡혀가 몇 년 혹은 몇 십년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B.C.586년에는 남쪽 유다도 멸망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은 현재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만에 돌아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우상 숭배-세상을 사랑하는 것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저지르는 어떤 죄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상 숭배의 죄를 훨씬 더 크게 보십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의 상태가 바로 바벨론으로 잡혀간 상태인 것입니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 에게 주라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계 18:1-8)


 이 바벨론은 장차 무너질 세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얼마 안 있으면 곧 무너질 세상인데 악착같이 마음을 거기 다 두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 마음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신앙적인 갈등이 일어나고 장차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이름을 두신 성전을 향한 기도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세상으로 향할 때 즉시 '아, 이것이 잘못되었구나. 내가 너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만 좇아 가다가 보니까 내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졌구나.' 하고 뉘우쳐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살았습니다.' 하는 기도가 바로 '온 마음 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백성과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백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서 돌이켜 주님을 향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이름을 두신 성전 즉 교회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이 성전을 향해서 먼 곳에서도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용서해주십시오"하고 간구했습니다. 



물질에 사로잡힌 마음의 상태


늘 우리 육신을 가지고 갈아가는 현재 생활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성전을 떠나기 쉽습니다.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에는 주일마다 나오면서도 마음은 교회를 떠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교회를 떠나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고 교회가 하는 일도 마음에 들지 않게 됩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모임에 열심히 나오다가 돈을 조금 벌어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모임을 등지는 사람들이 더러더러 있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돈이 조금 생기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강해지고 악착같이 그 돈을 지키고 싶은 마음 때문에 모임으로부터 마음이 점점 멀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참으로 믿음이 있고 신실한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요. 사탄은 조금만 기회가 생기면 돈을 가지고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물론 그밖에도 이성 문제나 술, 쾌락, 명예욕 등등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많겠지만 훨씬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돈입니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이마나 손에 표를 하는 것도 돈과 관계가 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통치하게 될 때에도 돈 때문에 이마나 손에 표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 가지고 이 세계를 완전히 잡아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돈이 힘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지요.

 우리가 성경대로 생각하면 현재 이 세상은 얼마 있지 않으면 무너지고 말 세상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것을 알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되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자꾸만 달음박질해 갑니다. 바울의 편지 가운데 "먹고 마실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이 있지만 먹고 마실 것이 있어도 만족함이 없고 그 이상의 어떤 만족을 자꾸만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물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완전히 지배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꾸만 시들어 간다면 그것이 바로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는 성전은 싫어지고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한발자국만 들여놓으면 참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정말 금시라도 행복을 가져다줄 것같이 손짓하는 세상이 현재 이 세상입니다.



결코 환난을 피할 수 없는 불신자들


"내가 부를지라도 너회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회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회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 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 만나지 못하리니"(잠 1:24-28)


 사람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지 않다가 환난 날에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때는 일체 듣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못받은 사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배척하고 살던 불신자들이 나중에 환난 때에 가서 아무리 부르짖고 소리쳐도 주님이 안 들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환난은 이 세상 끝의 환난을 말합니다.



환난 날에도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


그러나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하는 이 말씀은 선민에게 하는 말씀으로 현재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비록 우리 마음이 세상으로 기울어져서 믿음을 상실하고 세상을 사랑했었다 하더라도 환난 때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 잘못하여 환난을 당하는 일이 있지만 그때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주님의 축복을 다시 받을 수 있는 약속이 항상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환난을 만나면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항상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시 77:2)


 여기서 밤은 시간적인 뜻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밤에 성경을 읽는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일이 중요하기는 합니다. 이러한 말씀 때문에 현실교회에서는 새벽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구원받은 사람들 도 너무 바빠서인지 여기저기서 늦도록 모이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아침 먹을 때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는 생활이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조용히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 별로 없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주님과 은밀히 대화하는 시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데도 요즘 사람들은 환경이 그렇게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없이 그저 전체적으로 모여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자고 하면 따라서 기도하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성경 읽는 시간 외에 개인적으로 주님과 만나는 시간도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면 훨씬 더 성경 말씀이 마음에 잘 들어옵니다. 또 이미 들은 말씀을 되새김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루에 단 30분만이라도 그런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밤은 꼭 시간적인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도 어떤 때는 참으로 암담하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그 어두운 밤에 "손을 들고" 라고 했는데 "이 손을 들고" 라는 말은 기도를 뜻합니다. 그 당시에는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그 흉내를 내어 축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마음이 캄캄할 때가 있는데 사실 그 때가 주님을 제일 사모하는 때입니다. 마음이 캄캄하고 답답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덤덤하게 지납니다. 우리 마음이 어두우면 괴롭고 답답하지만,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그런 때가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짙은 어둠 속에 찾아오는 주님의 축복의 빛


구원받았지만 항상 변화없이 덤덤하게만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맛보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암담하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참으로 주님을 찾고 주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경제적인 문제로 어떤 때는 가족과 사별하여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운 때가 있지만 그 때에 실망하면 안됩니다. 그때가 제일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을 가장 마음에서 찾는 때입니다. 하나의 새로운 빛은 어두움 속에 찾아옵니다. 어두움이 없는데 빛이 올 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어두워서 견딜 수 없는 그때가 가장 빛을 요구하는 때입니다. 신앙생활 속에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때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때를 당해 그만 좌절한다거나 적당하게 자기 방법대로 처리해버리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또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굉장히 어두운 시절, 캄캄한 밤이 있었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간증합니다.



올바른 기도의 제목-주님이 계신 곳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됨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시 77:3)


 이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 신세를 한탄 하거나 주위 환경을 탓하고 아니면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마음이 캄캄하고 괴로울 때에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주위의 환경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환경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에 주님이 안 계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주님이 계시는 그곳에 가면 병자들이 치유함을 받습니다. 주님 이 바다에 가면 풍랑이 잔잔해집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모든 문제가 정리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정말 주님이 계시면 주변 환경이 전혀 변하지 않더라도 모든 문제가 정리됩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과 어려움도 만일 하나님만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시고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기도의 제목을 올바로 택했습니다.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거나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역시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주시는 빛을 받으면 우리의 환경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시 77:4)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이 구절에 너무도 간절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면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어떤 자매는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막 원망했었는데 어느 날 말씀 속에서 문제가 풀려지면서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미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리라"(롬 1:17)


 신앙 생활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스스로 애쓰고 고민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막연한 것입니다. 확실히 구원해주신 것은 믿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늘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막연한 생각 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이 확실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환경이 어떻든 간에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시 77:5-6)


 이 시인은 과거를 회상합니다. 과거에는 밤중에도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지금 현재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시 77:7-9)


 이 시인은 거의 절망 상태에까지 들어가 이제는 하나님이 완전히 자기를 버렸고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 속에서 그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이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같이 여겨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처음에는 대부분이 원수들에게 핍박과 조롱을 당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 같은 상태에서 있지만 나중에 그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이 더욱 굳건해지는 간증이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주님을 찾으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이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시 77:10-11)


 이 시인은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눈을 떠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연약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기 부정입니다. 현재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말하자면 자기가 주님과 함께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버린 것을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믿음의 근거를 하나님이 옛날에 구원해주신 거기에다가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 앞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옛적 기사는 하나님께서 옛날에 구원해 주신 이적과 기사와 능력 과 은혜를 말합니다. 그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이제 하나님을 다시 찾게 되고 깊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시 77:12)


 지금 당장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지금 처해 있는 그러한 현실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주님의 능력과 이적을 행하신 데에서부터 다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갈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그럴 때 우리는 마치 처음 구원받았을 때처럼 이 천지 만물을 창조 하신 분이 누군가 한번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 위대하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신 일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처음부터 다시 찾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셀라)"(시 77:14-15)


 이 시인은 옛날로 돌아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일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옛날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일은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기록을 통해서 더듬어 보면서 애굽에서 백성을 구출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역사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희리 바람 중에 주의 우레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불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 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6-19)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널 때에 물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물러갔다는 말입니다. 그 물이 현재 우리 시대에는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이 물입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 우리를 공연히 끌어내 여기에서 다 죽게 한다고 원망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회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회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회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출 14:13-16)


 이스라엘 민족이 아우성을 치자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 하였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그런 넘실거리는 바다 물이 없었으면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앞에는 파도치는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따라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해 가는 가운데 아무리 큰 장애물이 놓여 있더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능력-바다 속으로 나 있는길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9)


 이 시인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길이 바다 속으로 나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분명히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던 것을 알았습니다. 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물러선 거기에 가나안을 향해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이 시인은 거기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고 은혜가 끊어진 것 같은 캄캄한 속에서도 옛날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기적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들이 받은 구원에다가 한번 비춰봅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그것으로 끝이 났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것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세계 뿐이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홍해 가운데로 난 길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깊은 죄악과 죽음의 세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생명이 지금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큰 기사와 큰 능력을 우리는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환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다시 거기에서 찾아야 됩니다. 혹 우리가 죄를짓고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정말 깊이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고 안 계시는 것 같지만 주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이 시인은 결코 자신을 버리시지 않는 주님을 발견하고 모든 문제가 풀렸습니다.


"주의 백성을 무리 양갈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시 77:19-20)


 비록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아무리 무서운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이 시인은 이제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이 시를 통해서 현실적으로 마주치는 여러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